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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949화 (94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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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등장한 흉신은 네 정령들이 만든 결계를 한동안 들여다보는 듯 했다. 그러더니 한쪽 팔을 내뻗어서 결계에 접촉했고, 반응이 즉시 일어났다.

파지지직

무언가가 튀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흉신의 인영이 일렁였다. 흉신은 잠시 자신의 손을 뒤로 물리다가 다시금 팔을 내뻗었고, 또다시 파직거리면서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정령들 중 수(水)의 정령이 말하는 게 들렸다.

[ 으음...!! 성좌의 권능이 지독히도 강하군... 설마 일개 지배자의 힘이 이 수준일줄이야. 흉신의 혈통이 혼돈의 직계라는 소문이 진실이었구나.]

동감하듯 화(火)의 정령이 말했다.

[ 듣던 이상이다. 이대로라면 힘들겠구나.]

나는 수의 정령이 차지한 방위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 힘들다고요? 흉신이 홀로 결계를 뚫을 수 있단 말입니까!"

[ 그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흉신이라도 홀로 우리 넷을 이겨낼 순 없다... 우리는 우주의 근원소를 다루는 존재이므로.]

" 그러면..."

[ 허나 저 자와 버금가는 마력을 지닌 신좌(神座)의 [옛 지배자]들이 곧이어 여럿 합류할 것이다. 그들의 합공을 받으면 장담할 수가 없다. 흉신 하나의 힘조차 예상외로 강하구나.]

그의 대답에서는 평상시 일개 [옛 지배자]를 얕보고 있었으나 흉신의 힘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반적인 경우 고대신 정령의 힘이 보통 지배자를 압도하는 모양이었으나 흉신은 지배자 중에서도 별격인 모양이었다.

신좌!

나는 그 말을 듣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 신좌에서 태어난 존재들... 영혼과 육체가 모두 불멸(不滅)인... 우주에서 몇 되지 않는 최상위의 마신(魔神).'

흉신 또한 신좌출신이었으며 그런 존재들이 우주적으로 희귀하긴 했으나 분명히 존재했다. 삼황오제와 동급, 혹은 그 이상가는 초절한 권능을 지닌 - 악몽 그 자체나 다름없는 마신(魔神)들! 그리고 그런 강대한 초마신들이 곧이어 우주의 멸망, 진공가향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해 공격할 게 분명했다.

눈 앞의 고대신 정령들도 강력한 존재지만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전 우주의 지배자들이 함께 공격하면 막을 수 없다는 게 지금 증명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정령들에게 외쳤다.

" 달마의 의식이 끝날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최대한 버틴다면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 ... 이 세계의 시간으로는 두 시진이라 할 수 있겠군. 다만 만일에 외신(外神)격이 끼어든다면 장담할 수 없다.]

" 외신이라고요?! 외신이 끼어든단 말입니까!"

[ 그저 만일의 경우다.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들은 [아버지]의 곁에서 늘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외신이 끼어들 경우를 걱정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외신을 이길 수 없기에 무의미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이런 제기랄... 이렇게 승산 없는 싸움이었을 줄은...'

나는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게 박살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아차렸다. 또한 달마의 계획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최대한 고대신 정령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크게 외쳤다.

" 제가 돕겠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그 말에 정령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쳤다.

" 돕고 싶습니다!!"

그러자 지(地)의 정령이 반응을 보였다.

[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광인(狂人)이여... 그대에게는 기이한 힘이 잠재되어 있군. 그 힘의 주인을 불러낸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 기이한 힘?"

[ 그대의 의지에 감응해서 나타날 것이다.]

어떤 힘을 말하는 거지?

나는 혹시나 해서 마력의 팔을 강화시켜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긴 고대신 정령쯤 되는 존재들이 고작해야 사도급 마력에 반응할 리가 없으리라.

' 기이한 힘이 뭐지? 나한테 그런 게 있었나?'

설마 절대지경의 무공을 말하는 걸까?

나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였다.

" 후배. 정말로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눈 앞의 일에 몰두하는군. 이제는 신선하기까지 해."

" 신투지존!!"

휘리릭

홀연히 제단 주변에서 신투지존의 신형이 나타났다. 아까부터 이 안에 있긴 했지만 어느 순간 눈에 안 보였고 이제야 은신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투지존은 서(書) 주변에 서 있었는데 히죽 웃으면서 서를 향해서 손을 뻗으며 말했다.

" 지금 내가 이 서(書)를 훔치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냐? 고작 2할이라서 미완성이긴 하지만 지금 상태만으로도 세계 최강의 마도서인 건 확실하거든."

" ... 내가 그렇게 하게 둘 것 같나?"

우웅

나는 즉시 칠흑의 선검을 불러내서 장비하며 그에게 살기를 곧추세웠다. 같은 절대지경의 고수라면 나 또한 신투지존과 싸울 만 했다. 그러자 신투지존이 실실 웃으면서 서를 향해 뻗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 농담이야. 후배랑 보물을 두고 다투는 것도 나름대로 재밌겠지만 나는 이런 건 안 훔칠거라구."

" 무슨 속셈이지?"

" 속셈이 어딨겠나. 최고의 대도(大盜)는 자신이 노리는 것만을 훔치는 법. 괜히 가치있어보인다 해서 이것저것 손대는 건 좀도둑이지."

" ......"

아무래도 저 말은 진심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거리에서는 내가 신투지존을 벨 수 있을 지언정 그가 서에 손을 대서 탈취하는 걸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설령 서의 지근거리에 있다 해도 가능할지 의문이다. 나로써도 만상지투에는 만상지투로 맞훔치기가 최선인데 그조차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신투지존의 도둑능력은 엄청났기에 그가 훔치는 걸 막을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이다.

신투지존이 제단의 층계참에 걸터앉아서 입을 열었다.

" 백웅... 달마가 나처럼 의심스러운 자를 끝까지 측근에 남겨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뭐?"

" 너 또한 생각해봤겠지만, 네가 달마였다면 아마 이 순간이 오기 전에 나를 공격해서 소멸시키려 했을 것이다. 달마랑 그런 얘기 했었지?"

"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있었다.

" 상식적으로 세계최고의 대도적을 배후에 두고 인생을 건 의식을 치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공격해 죽여야 한다는 너를 계속 만류했던 것. 달마가 왜 그렇게 부담스러운 짓을 했다고 생각하냐?"

" ... 모르겠군. 당신은 알고 있나?"

"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야."

신투지존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달마가 원하는 건 진공가향이고, 내가 원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우리 둘이 원하는 최고의 목적은 서로 달랐고 부딪히지도 않아. 그렇다면 당연히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지 않겠냐?"

" 으음..."

" 그러니 달마는 끝까지 나를 뒤에 남겨둔 거다. 난 마지막 순간까지 달마를 도울 테니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신투지존에게 말했다.

"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대체 뭔데?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뭐냐!"

" 반대로 묻지. 네 입장에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게 무엇이냐?"

" ......"

"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라구. 어차피 우리가 이 상황에 뭘 할 수 있나? 신들의 싸움이 된 이상 우리는 느긋하게 말할 시간 정도는 가져보자, 후배."

나는 신투지존의 말도 맞다고 생각했다. 사대정령이 내게 기이한 힘을 끌어내라고 하지만 어차피 그게 뭔지 잘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투지존의 목적을 끝까지 듣는 것도 좋을 것 같았기에 그의 말에 대꾸했다.

"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건..."

나는 말을 하려다가 입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 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게 뭐지? 난데없이 철학적인 영역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나는 신투지존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일단 생각나는 걸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 ... 동료다."

그래. 내게는 동료가 전부다.

동료들과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대답에 신투지존은 깬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 으으으. 닭살돋네. 너 돌았냐?"

" ......"

신투지존이 자신의 뒷목을 붙잡았다.

" 와... 세상에 자기 입으로 저런 말 하는 놈은 처음 봤네. 후배야 너 미쳤지?"

" 제기랄!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건데! 니가 물어봤잖아 개새끼야!!"

" 클클클."

내가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신투지존은 낄낄거리다가 말했다.

" 여러가지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후배놈이 와 버렸구만."

" 됐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게 뭔데?"

" 물어볼 필요도 없지."

신투지존의 눈이 순간 새까맣게 안광을 흘렸다.

" 나 자신(我)이다."

그 말에 도리어 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 하... 겨우 자아실현을 하러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신투지존."

" 뭐 그런 셈이겠지."

나는 신투지존이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 웃기지 마! 당신은 여동빈에게 헌원검을 찾으러 여기까지 오겠다고 했었어. 지금도 어떻게든 헌원검을 찾으려고 기회를 보고 있는 거 아니냐고."

내가 아까부터 신투지존에게 살기를 보내면서 견제를 강화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어떻게든 내 경계를 누그러뜨려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흐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 뭐가."

신투지존은 턱을 괸 채 옆에 있던 서(書)를 쳐다보았다. 서는 이제 막 3번째 조각이 번갯불과 함께 맞춰지는 중이었다.

치지직!!

" 달마가 만들고 있는 저 세계멸망의 서(書)는 세상에 알려진 헌원검의 위력보다 수십 배는 강하겠지. 헌원검이라고 해봐야 기껏해봐야 삼황오제 황제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권능이 아닌가? 그러나 저 서(書)가 완성될 경우 세상은 완벽하게 멸망할 지경이니, 헌원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지."

" ......"

" 하지만 나는 서 따위는 필요없어."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나 자신을 찾는다는 건 정말 중요해. 네가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신투지존이 말했다.

" 내가 진공가향에 동의한 이유는, 이 지경이 되어야만 [나]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원검을 추구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 세상에서 가장 얻기 힘들 것 같은 존재를 무리해서 추구하다 보면 그 사악한 음모의 결과에 본질이 있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이제 그 기회가 눈 앞에 다가왔다."

스으으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신투지존과 눈을 마주치자 흠칫했다.

어마어마한 혼돈.

' 뭐, 뭐야 저건!!'

[옛 지배자]와 직접 눈을 마주친 기분이다!

말 그대로 끓어오르는 듯한 무한정의 혼돈이 그의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저건 도저히 인간의 눈이라고 볼 수 없었으며, 기묘한 것은 그 정도의 혼돈이 느껴지는데도 신투지존은 인간의 본질을 전혀 잃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신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 설마... 당신, 인간이 아니었나?"

" 나는 인간이 맞아. 우주에 흔하디 흔한 신의 혈족조차 아니지. 그렇지만 이 경우는 인간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겠지, 후배."

" 무슨 소리야."

" 크크큭."

신투지존이 광소를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몸 전체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칠흑같은 혼돈이 그의 전신을 뒤덮더니 마치 그림자처럼 변화했고, 이내 [여동빈]의 기억에 있던 과거 신투지존의 모습이 되었다.

" ......?"

뭐야 저건.

' 말도 안 돼. 아무리 가면을 바꿔쓰는 천면공자라고 해도...'

저런 게 가능한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혼란을 느꼈다. 왜냐하면 천면공자로 가면을 바꿔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 것 같긴 한데 느껴지는 힘의 기질이 완벽하게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변신술이 완벽해도 그 한계가 있는 법인데 신투지존은 가면을 바꾸는 과정조차 거의 생략해버린 듯 했다. 저것은 자신의 본질을 보존하려는 법칙을 아예 무시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되면 나, '백웅'의 원래 몸은 대체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신투지존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자, 그럼 달마의 의뢰를 시작해 볼까?"

타닷!

다음 순간 신투지존은 갑자기 사대방위에 있던 정령 중 화의 정령을 향해 쇄도했다. 화의 정령은 신투지존이 달려들자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으나 이내 신투지존의 눈에서 흐르는 혼돈을 보자 경악했다.

[ 아, 아니 넌 설마...]

슈와악!!

신투지존의 몸이 시꺼먼 연기처럼 녹아내리더니 이윽고 화의 정령의 동체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화의 정령의 얼굴에 칠흑의 가면이 강제로 씌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화의 정령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 크하아아아아아아!!! 또 다시... 네놈이 세상을 농락하느냐!! 설마 이런 곳까지...]

슈우욱

신투지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화의 정령의 얼굴에 시꺼먼 가면이 하나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가면은 이윽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 ......"

잠시 후 화의 정령의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명백히 신투지존이 그의 몸을 차지한 것이었다.

[ 이제 내 정체를 알겠나? 후배....]

" ... 알겠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은... 처음부터 가면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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