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8====================
진공가향(眞空家鄕)
그 외침과 함께 바람의 정령은 급격히 몸뚱이를 키우더니 난데없이 오 장 이상의 거인처럼 변했다. 그리고 정령이 마치 날아오르려는 듯 도약했으나 마치 땅에 묶인 듯 다시 떨어졌다. 바람의 정령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근처에서 다른 정령이 말했다.
[ 마도사의 능력이 지나치게 강하구나... 이 법진(法陣)은 위대한 자들의 계약을 중첩시켜놓아서 결코 단시간에 해제할 수 없다.]
화르륵
입을 연 것은 화염의 정령이었다. 아마 지수화풍 중에서 화(火)를 상징하는 정령일 듯 했으며, 화염의 정령이 빙의한 아유타 공주 또한 인간의 형상을 잃은 상태였다. 자연력을 형상화한 듯한 실체에서 일어나는 불꽃이 신비롭게 타올랐다.
문득 바람의 정령의 시선이 내쪽으로 향했다.
[ 저 자는 뭐지? 마도사의 하수인인가?]
[ 붙잡자.]
후우웅!!
두 정령이 내 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리 빠르지 않았으며 나는 그 공격을 여유롭게 피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들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인과조작?!
틀림없다. 단순한 속도로는 못피할 리가 없다. 그러나 마치 [잡혔다는] 전제하에 모든 게 이루어진 것 같았고, 이런 권능은 내가 알기로 신적인 존재들이 구사한다는 인과조작능력 뿐이었다. 사도의 팔을 사용했으면 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설마 인과조작이 이뤄질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나를 붙잡은 화염의 정령의 손에서 불길이 일어났지만 나는 불타지 않았으며 그저 따뜻한 느낌만 들고 있었다. 화염의 정령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 마도사의 수하여. 태초의 정령인 우리들을 감히 인간의 몸에 가둔 이유가 무엇이냐? 똑바로 고하거라.]
" ... 저는 마도사의 수하가 아닙니다! 뭔가 잘못 아신 것 같군요."
[ 그럼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뭐냐? 알고있는 걸 모두 말해라.]
" 알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이 속박을 놓아주십시오."
나는 일단 침착하게 대꾸했다. 눈 앞의 존재들이 강대한 존재인 건 알겠지만 다짜고짜 죽이려 들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성향이 완벽한 악(惡)에 치우친 자들이 아니었다. 일단 대화가 통한다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나았다.
스르륵
정령들의 속박이 풀려서 내가 땅에 내려앉자 근처에서 다른 두 정령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들은 지(地)와 수(水)의 정령인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4명의 제자들이 모두 정령들이 강림할 [그릇]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 달마... 대체 뭘 원하는 거냐!'
나 또한 이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럴 때 당황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위대한 정령들이시여. 먼저 그대들이 태초의 정령이라 한다면 어떤 존재인 겁니까? 불려온 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지금 상황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존엄을 묻는가? 무의미하군...]
바람의 정령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본디 필멸자에게는 우리와 대화가 통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너는 우리의 의사를 다 알아듣는 것 같고, 기억을 뒤집어읽는 것도 되지 않는구나. 너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 ... 저는 인간입니다. 다만 현재 달마의 사도입니다."
[ 상황설명을 먼저 하라. 그게 먼저다.]
" 네."
나는 할 수 없이 4인의 정령에게 달마가 추구하는 진공가향,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해서 정령을 소환했으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두 말해 주었다. 그러자 이야기를 모두 들은 수(水)의 정령이 말했다.
[ 그렇군... [아버지]의 꿈을 깨우려는 것인가.]
" 꿈이요?"
난데없이 뭔 꿈이란 말인가?
세계가 멸망하려는데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온 듯 했다.
[ ......]
수의 정령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으나 옆에 있던 다른 정령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 인간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고?]
[ 터무니없는 일이군. 지배자들조차 그 분께 비교하면 미약한 벌레에 불과한지라 감히 손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영역을 일개 필멸자 따위가...]
[ 허나 전지전능하신 그 분의 뜻을 우리가 측정하려는 것 자체가 불경일지도.]
[ 설마 전지자께서... 흠.]
그들은 뭔가 서로 대화를 나누려 하다가 문득 멈칫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 멈춰라!]
쿠콰콰쾅
다음 순간,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거대한 암흑의 기운이 정령들의 기운에 부딪혀 상쇄되었다. 수의 정령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 속셈을 알겠구나. [옛 지배자]들이 우주의 멸망을 막으려 이 의식을 방해할 터, 우리에게 대신 막으라는 말인가?]
" ......"
[ 너희의 얄팍한 계획에는 어울려주지 않겠다. 우주가 멸망한다 해도 지금은 아닐 터. 순리가 아닌 것에 우리 고대신이 힘을 빌려줄 이유는 없노라.]
" 그렇다면."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 그렇다면 이대로 여기서 소멸하실 생각입니까?!"
[ ......]
" [옛 지배자]들은 진공가향에 소멸당하지 않으려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고대신이건 아니건 상관치 않고 모두 없애버리려 하겠지요. 그리고 달마는 당신들이 벗어날 수 없도록 인간의 몸에 가둬버렸습니다! 결국 우리를 도와야하는 게 아닙니까!"
화염의 정령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인간이여. 그대는 멍청한가?]
" 네?"
[ 이 의식이 끝나면 어차피 세상은 멸망한다. 조금 일찍 사라지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아닌가? 이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그대는 광인(狂人)일지도 모르겠구나. [옛 지배자]들에게 소멸당하는 건 좀 기분 나쁘지만 어차피 우리는 우주의 섭리의 일부이니 언젠가 부활하겠지.]
헉...!!
그렇구나!
나는 이 상황이 교섭의 여지가 없는 미친 상황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 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돼?!'
다른 상황에서는 강대한 상위존재들에게 손익을 들이대면서 어떻게든 교섭할 수 있었고, 나는 그 경험과 자신감으로 정령들과의 대화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계획이 성공할 경우 세상이 멸망한다는 기괴한 조건이 달려 있었기에 타 존재들의 협력을 얻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세계의 멸망, 즉 자기자신의 소멸을 진심으로 바라는 놈이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세계의 멸망을 추구하는 백련교 쪽이 절대악인 것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 왜 인간이 이렇게까지 세계의 멸망을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우리가 알 바 아니지.]
" 위대하신 고대신들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인간을 비롯한 필멸자들은 수만, 아니 수억 년 이상 사악한 신들의 노리개가 되어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누가 노예가 되어 처참하게 존속하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게 멸망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 이유 정도는 알고 있으며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우주가 멸망해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나는 뜻밖의 말에 멍해졌다.
" ...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요?"
[ 그대들 필멸자들에게 고통이 왜 존재하는거라 생각하는가? 육신과 정신의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화염의 정령이 말을 이었다.
[ 그것이 바로 우주의 의지다. 그대들은 고통과 자극을 통해서 삶을 이어나가려는 본능을 이어나가게끔 되어 있지. 그리고 삶은 우주의 일부이며 흐름, 전지전능하신 위대한 존재의 의지이다. 설마 너희 자신의 삶이 자유의지라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너희의 모든 운명, 인과율... 우주의 의사가 그 삶의 고통을 명하기 때문이며 순응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 ......"
[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대들은 숭고하노라. 우리 고대신들은 그대들이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삶이라는 의지를 이어가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동정심은 발휘하지 않으며, 그대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우주가 멸망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게 우주의 섭리이므로.]
" 필멸자가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을 그저 방관한단 말씀이십니까?"
[ 우리 고대신들은 사악한 지배자들이 도가 지나친 짓을 할 경우에는 제재하기도 하지. 그러나 우리는 [옛 지배자]의 징벌자가 아니며 계도할 역할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다른 모습일 뿐.]
설마...
이런 관점도 있을 줄이야.
' 이게 바로 고대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의 관점인가...?'
제갈사는 말했었다. 우주에는 [옛 지배자]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진 고대신이라는 존재들이 있으며, 그들은 종종 필멸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고. 또한 [옛 지배자]와 달리 극악한 성향도 아니며 중용에 가깝다고 했다.
하지만 제갈사는 그런 고대신들이 인류를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 기색이었고, 나는 제갈사의 생각을 줄곧 이상하게 여겼다. 말하자면 고대신은 선(善)한 신격일 텐데 잘만하면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 이들은 중용(中庸)... 무관심에 가깝다. 중용은 선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제갈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옛 지배자]는 인간을 제멋대로 갖고놀 수 있는 벌레이자 장난감이라고 본다면, 고대신은 그런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쳐다볼 뿐 무관심으로 일관하다시피 하는 것이다. 고대신의 구원이라고 해봤자 변덕스러운 동정과 찰나의 애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존재들에게 인류를 구원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였다.
[ 으으으... 이... 이건...]
갑자기 바람의 정령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그러더니 다른 정령들도 부들거리며 움츠러드는 기색이었다. 그들 중 지(地)의 정령이 외쳤다.
[ 이럴수가...!! 전지자(全知者)께서... 우리에게 업(業)을 부여하셨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 정말로 우리가 세계의 멸망을 도와야 한다는 것인가?]
[ 전 우주의 속성을 관장하는 우리가 이런 미친 짓을...]
그들은 한참동안 혼란스러워했으나 이윽고 평정을 되찾았다.
[ 어쩔 수 없구나!]
[ 그게 신의 뜻이라면...]
정령들은 제각기 네 방위로 가더니 침묵하며 결계의 사주(四柱)를 유지했다.
파앗
제일 먼저 지(地)의 정령이 힘을 발휘했다. 그는 저 멀리에서 날아오는 [옛 지배자]의 공격을 가볍게 한 손으로 걷어내더니 말했다.
[ 우주의 물질이여. [지배자]의 명령을 거부할지어다!]
파스스슷
그 언령이 끝나는 순간 하늘의 성좌가 불타는 현상이 사라졌다. [옛 지배자]의 마력에 감응한 별이 불타서 마력을 뿜어내는 게 멈춰버린 것이다. 그것은 지의 정령이 전 우주의 물질에 지배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쏟아지던 유성우들 또한 중력의 법칙을 거부하고 우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수(水)의 정령이 손을 뻗었다.
[ 우주의 흐름이여. [지배자]의 주술과 마법의 흐름을 금(禁)하노라!]
쩌정!!
일순간 세상이 얼어붙는 듯 했다. 수의 정령이 전 우주에 흐르는 흐름을 정지시키고는 [옛 지배자]들이 마법을 못 쓰게끔 강제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은 화(火)의 정령이었다.
[ 우주의 열(熱)이여. [지배자]가 이 세상에 뻗은 간섭의 영역을 태워버릴 지어다!!]
빠지직!!
끼에에엑
언령이 터져나오는 순간 허공에 새겨져있던 [옛 지배자]들의 환영 중 몇몇이 불타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물질을 초월한 신열(神熱)이 약한 [옛 지배자]를 불태워버리고 마력에 침식된 영역을 없애버린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풍(風)의 정령이 두 손을 모으며 외쳤다.
[ 우주의 바람이여. 이 세계에 미치는 사악한 인과율을 흘려보낼지어다!]
쏴아앗
마지막 언령과 함께 갑작스레 하늘이 맑아졌다. 새까만 우주로 뒤덮여 있던 세계가 청명하게 변한 듯 했다.
나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 가... 강하다...!!'
정령이라고 하길래 얼마나 강할까 싶었지만 저들은 [고대신]. 그 중에서도 전 우주의 지수화풍을 다루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상위급 [옛 지배자]의 힘을 지니고 있었고 넷이 힘을 합치니 수백 마리나 되는 [옛 지배자]들의 간섭을 일시에 물리치는 게 가능한 것이다! 설마 말로만 듣던 고대신의 권능이 이렇게 강력할지는 몰랐기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치지직!!
그 때 두 번째 조각이 서(書)에 번개치는 소리와 함께 달라붙었다. 그것은 서의 2할이 완성되었다는 뜻이었고, 그와 동시에 달마가 알 수 없는 기음을 흘렸다.
[ 오오오오오....]
달마는 양팔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고 어깨까지 혼돈에 먹힌 상태였다. 얼굴 또한 뭉글거리는 혼돈에 짓물려 녹고 있어서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텐데도 달마는 전혀 포기할 기색이 없어보였다.
' 달마! 자기자신을 제물로 바치겠단 말인가?!'
내가 그의 각오에 내심 경악하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구...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형상이 구체적인 형태를 잡으며 현실으로 쑥 튀어나오는 광경을 보자, 마치 악몽이 걸어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정령들 또한 그 불청객의 등장에 다소 놀라워하는 기색이었다.
[ 저만한 존재가 직접 심연의 벽을 뚫고 나설 줄이야...]
[ 정녕 이 의식이 세계를 멸망시킬 가능성이 높겠구나...]
스으으으
마치 두족류를 연상시키는 듯한 두상 - 그리고 등 뒤에 달려있는 거대한 두 쌍의 날개가 홰를 치며 한차례 세계를 진동시켰다. 머나먼 우주에 나타난 듯 싶었으나 마치 눈 앞에 있는 듯한 거대한 형체가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악몽 속에서 초현한 용(龍)이 서서히 발톱이 달린 손으로 이 쪽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흉신(凶神)이 직접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