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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존재하지 않는 걸 훔치기 위해서는 먼저 훔칠 물건이 존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에서 그 존재를 구현화시키는 게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상최고의 도둑기술이자 절대지경의 기술, 만상지투의 근본원리다.
단 - 이것은 무상(無常)의 존재를 훔칠 경우. 이렇게 대놓고 훔칠 대상이 존재하며 무엇보다도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경우는 신투지존이 따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방금 전까지는 어떻게 해야할지 그저 암담하기만 했으나, 내게는 조금 전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 마음속에서 구현화시키는 게 중요한 거라면...'
저 '크기'를 작게 인식한다면 훔칠 수 있는 게 아닌가?
[크기] 때문에 [훔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크기]를 훔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혼의 크기를 작게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든 사도의 팔으로 흡수시킬 수 있으리라.
이런 식의 응용법은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지라 나는 이 또한 도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다만 방금 전에 보았던 신투지존의 무상지투의 응용법을 보자 깨달음을 얻었던 바가 있었다.
만상지투란 결국 유상과 무상의 경계를 없애는 능력 -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인 것이다! 어떤 식으로 무엇을 [훔칠]지만 마음먹는다면 그 응용법은 무궁무진했다.
스으으
나는 머릿속으로 과거 신투지존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 무예에도 생명이 있고 마음이 있어. 나 정도 되는 최고의 도둑에게는 그 소리가 들려오고, 마음이 읽히거든...]
[ 유상(有常)의 사물을 훔치는 건 쉬워. 왜냐하면 그건 존재하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 사물에 얽힌 의지가 도둑질을 힘들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 의지와 마음이 흐르는 걸 읽어서 빈틈을 찾을 수밖에 없어. 그 것이 내가 생각하는 궁극의 도경(盜境)이며, 존재하지 않는 걸 훔치는 수법이다.]
나는 이혼대법을 써서 백을 끌어당기기 전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렇게 거대한 [옛 지배자]의 영혼을 섣불리 끌어당기려 했다가는, 그 시도만으로도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가는 이 찰나가 끝나서 기회가 사라지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 들리는가?'
신투지존은 만상지투가 최정점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흐름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나는 만상지투를 쓰면서 어렴풋이 그 흐름을 느끼고는 했다. 다만 신투지존의 경지는 마치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들려오는 듯 한지라, 나는 거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천부적인 재능의 차이도 있을테지만 신투지존만의 영역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원래라면 이 찰나에 신투지존의 영역에 도달하는 건 무리다. 아무리 내 신투능력이 그의 턱밑까지 와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도둑의 능력으로서는 한 수 뒤쳐진다. 그 부족함을 메우려면 엄청난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 흠... 전제가 잘못된 게 아닐까?'
나는 문득 내가 '집중'이라는 행위를 하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중을 왜 하는가?
그것은 분산된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힘을 집중시키는 행위이다. 즉 이 또한 넓은 의미로 보면 의념(意念)의 작용이며 기초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의념을 손에 넣어 만물의 기와 통해있기에 인위적인 집중이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신투지존은 만상지투를 시전할 때 나와는 달리 집중 따윈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모든 행위에서 최적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건 집중이다. 집중을 하지 않고서도 목표의 결과를 좋게 끌어내는 건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머릿속에서 상념이 뒤엉켰다.
집중은 왜 해가 된다고 생각한 거지?
나는 찰나지간에 내가 무엇에 위화감을 느꼈는지를 알아차렸다.
' ...그래!! 한계가 생기기 때문이야!'
신투지존은 자신에게 [모든 것]의 소리를 듣는 재능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은 어느 한 방향으로 밀집해서 집중하는 게 아니란 소리였다. 하나에 집중을 하게 되면 나머지 모든 것에 소홀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의 재능은 집중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재능이었다.
무상(無常)을 훔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시전자의 정신도 유상(有常)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 것! 이 세상과 통할 수 있도록 자기자신의 의념을 계속해서 열어두는 데 그 핵심이 존재했던 것이다!
' 무상지투는 신투지존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전시켜서 절대지경으로 승화시킨 것! 당연히 무상지투의 전수자는... 그 재능을 훔쳐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신투지존의 '타고난 재능'을 훔치는 것에서 무상지투의 대성(大成)이 시작된다!
제자가 스승의 재능을 훔치지 않으면 전수가 끝나지 않는 것이다!
우우웅
나는 그 순간 천지인(天地人)의 단전이 일직선으로 쭉 꿰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집중을 초월한 영역에서 의념(意念)을 발휘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환골탈태로 강화되어있던 몸이 정신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웅!!
공명(共鳴)한다. 상단전이 먼저 떨리면서 천(天)의 혜(慧)를 떨쳐냈고, 중단전이 웅혼한 기세를 내뿜으며 지(地)의 육진(六盡)을 틔웠으며, 하단전이 내려앉으며 인(人)의 정혈(精血)을 감싸안았다. 내 눈에서는 정광(精光)이 회색빛을 흘렸고 유형화된 기가 마치 태양처럼 바다 위에 떠올랐다.
이것이 환골탈태한 몸의 위력.
완성에 이른 조화력(造化力)이 내공의 고하나 유무에 관계없이 무(武)에 최적화된 몸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단순한 내공의 출력만이라면 원래 몸이 훨씬 강하겠지만, 몸의 기혈과 심맥 등의 운용이 한 치의 낭비도 없이 효율적이라는 점에서는 환골탈태한 몸이 압도적으로 나았다. 이 몸으로 원래 몸과 같은 내공을 쌓는다면 환골탈태 쪽이 압도무비하게 강력한 힘을 뿜어낼 수 있으리라.
스윽
몸의 조화가 극치에 이르는 순간 내 의념이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웅혼한 기력과 맞물리게 되었다. 나는 그 순간 손을 천천히 뻗었으며 상단전으로 만상의 기(氣)가 빨려들어 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 듣는다...'
파앙!
내가 신투지존의 재능을 상상하며 합장(合掌)했다.
두 손바닥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거대한 의념(意念)이 꿈틀거리며 천해(天海)와 아(我)를 잇는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내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휘이이잉!!
청량한 바람이 불어닥쳐서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한 듯 했다. 그리고 나는 내 귀 뿐만이 아니라 전신의 모공, 육신의 미세한 곳까지 [세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겪는 이 기이한 상태에서 중얼거렸다.
" 이런 거였군..."
만계(萬界)의 소리를 듣는 재능.
' 신투지존... 생각보다 훨씬 겸손한 사람이었나.'
이 재능은 무(武)의 세계에서 가히 최강이라 할 수 있다.
이 순간 내 눈에 비치는 광경을 보면 신투지존의 재능은 전성기에 진소청을 능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서 결(缺)과 결(結)이 소용돌이 치며 음양(陰陽)을 이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인위적으로 신투지존의 재능을 흉내낸 상태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만상지투를 시전했다.
신의 영혼을 훔쳐낸다.
그러나 그것은 신역(神域)에 도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내가 만상지투로 할 수 있는 일은 - 그 [크기]를 훔쳐서 작게 만드는 것!
파앗!
' 쳇... 한 번만에는 안 되나?'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나 아직 거대하다.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나는 한쪽 손으로 이혼대법을 시전하며 신혼(神魂)의 백(魄)을 끌어당겼다. 혼은 혼 그 자체로 당길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에, 혼을 둘러싼 백(魄)을 서로 감응시킴으로써 백을 움직여 혼을 당기는 게 바로 이혼대법의 근본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신의 혼에서 백을 뽑아당기면서 사도의 팔이 뿌직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걸 알 수 있었다.
빠지직!
빠직!!
' 크으으윽.'
너무 아프다!
이 마력의 팔 또한 사도의 권능이라서 물리적으로는 결코 소멸되지 않을텐데도 그저 영력에 눌려서 꽈배기처럼 당겨져서 비틀리고 있었다. 제대로 당긴 게 아니라 그저 백의 실을 만들어서 여기저기에 붙여두기만 했는데도 이 지경이었다.
' 더 작게!!'
나는 기력이 더 소모되기 전에 다른 손으로 만상지투로 훔치기를 시전했다.
파앗!
또 다시 [크기]를 훔치자, 이번에는 아까의 3할 이하로 확 줄어들었다. 한 번 크기를 줄여버리니 다음 번 시도는 훨씬 더 수월해진 것이다. 나는 비틀리던 팔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는 걸 알 수 있었으나 아직까지 훔쳐내기에는 너무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도 산맥을 여러 개 겹친 듯한 크기였다.
' 헉... 헉...'
나는 전신에 땀이 비오듯이 흐르면서 근골이 부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신의 질량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잠시동안 버텼음에도 너무 큰 압박감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를 악물고는 만상지투를 시전했다.
' 이게 마지막이다!'
최후의 의념!!
체력으로나 기력으로나 이제 한계다!
그와 동시에 내 정수리에서 빛의 기둥이 쩡 하며 깨어졌고, 나는 마지막 만상지투를 시전하며 마력의 팔으로 신의 영혼을 빨아들였다.
쿠구구구구!!
쿠구구!!
팔을 통해서 엄청난 속도로 혼이 빨아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귓가로 달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느껴졌다.
[ 오오... 이럴 수가... 정말로... 해내다니... 믿기지 않는다...!!]
" ......"
[ 이젠 내게 맡겨라...]
슈우욱!
슈욱!!
달마가 본격적으로 마력을 쓰기 시작했는지 마력의 팔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내 몸뚱이의 스무 배 이상 크기로 부풀어오른 팔은 계속해서 커졌는데,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 이, 이거 왜 커져?"
[ 나는 딱히 한 게 없다... 아마 그대가 뭔가 한 것이겠지...]
그 순간, 나는 [크기]를 훔쳤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 ... 그렇군.'
영혼의 크기를 훔쳐낸 만큼 작아진 크기의 배율이 그대로 내게 달라붙은 것인가? 특별히 지정을 하지 않자 혼을 빨아들이고 있는 주체인 마력의 팔의 크기를 증폭시킨 모양이었다. 마력의 팔은 내 몸뚱이라곤 할 수 없었으므로 이렇게까지 커져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으나 나는 약간 오한이 들었다.
' 으... 평범한 팔으로 [크기]를 훔쳐내면 내가 거인이 되어버리겠군.'
물리적인 육체가 그렇게 커져버리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런 특수한 경우 외에는 쓸 만한 무상지투의 응용법이 아닌 것이다.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쉬이익....
마지막 영혼의 조각이 빨려들어갈 때였다. 신의 영혼에서 무언가가 뽑아져서 튀어나오더니 허공에 환한 빛을 냈다.
쩌엉
[ 나는 강제로 합쳐진 태양신의 반쪽, 그의 양신(陽身) 케찰코아틀! 나를 해방시켜준 자가 그대인가?]
" ... 엉?"
[ 그대에 후의에 감사하노니, 장차 이 은혜를 보답해 주리라.]
찬란한 오광(五光)을 내뿜던 빛의 새가 잠시 날개를 퍼덕이더니 내 가슴팍으로 쐐기처럼 파고들었다.
" 큭!"
나는 약간의 통증을 느끼며 비틀거리며 가슴팍을 보았으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외상은 없었고 아무래도 영적인 존재가 내게 빙의한 듯 싶었고, 아무래도 달마대사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 같았다.
" ......"
나는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가 끝나있었다. 방금 전까지 신적인 존재들이 격돌하던 전장은 격렬한 해일이 막 잦아들고 있었고, 저만치 먼 수평선에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수면 속으로 잠기는 적양(赤陽)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선검을 소환해서 그 날에 태양을 비춰보려고 했다.
치잉
시꺼먼 선검의 날에 태양이 비치자 마음이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팔이 저리면서 아파왔다.
' 역시 착각이 아냐...'
아까 선검을 쓰며 싸우던 중에 무쌍패를 시전할 때마다 팔이 아파오는 기분이 들었고, 그건 일종의 거부반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시꺼먼 색으로 변해버린 선검은 내가 원래 사용하던 선검과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었고, 양(陽)에 속하는 힘에 접촉할 때마다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싸우면서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앞으로는 위험부담이 더 가중될 것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팔짱을 낀 채 노을을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 알 게 뭐냐."
지금은 그딴 거에 더 이상 신경 쓸 이유가 없다.
한 두 번 죽어보는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뭔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큰 고비를 넘긴 이상,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그 무엇이든 간에 베어넘기고 말리라!
낙일섬(落日殲)!
촤악
그 순간 내 의념이 일어나며 천지간을 잇는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빛의 기둥은 점점 얇아져서 마치 한 줄기 실선처럼 변했고, 다음 순간 의지가 검이 되어서 수평선 너머에 있던 적양(赤陽)을 절반으로 쪼갰다.
쪼개진 태양은 잠시동안 붙지 않고 미끌어져서 떨어졌다.
의념(意念)이 세계를 쪼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일섬으로 한 가지를 확신하고는 훗하고 웃었다.
이제 나는 절대지경(絶對之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