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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곧장 황산에서 동굴까지 갔다.
타닷
그리고 동굴 근처의 산세를 보자, 원래 기억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위치는 이 정도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으나 정작 산세나 능선같은 게 완전히 달랐다. 그도 그럴것이 일천 년 전이라고 생각하면 그 동안 지형이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굴이 있었던 부근은 얼추 짐작이 갔다. 죽기살기로 수련하던 장소인데 아무리 세월이 지난들 잊을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매 전생마다 들렀으니 위화감이 들어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굴 언저리에 도달했을 때였다.
" ......"
있다.
동굴이 있다.
내 기억과 같은 위치에 동굴이 있기에 나는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없었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있다고?
' 그게 더 이상한데...'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겨우 이 정도로 무서워하면 뭐가 되겠는가? 나는 추적거리며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천천히 바위에 손을 뻗어서 조그마한 절벽을 올랐다.
동굴에 발을 올렸을 때 나는 내부풍경도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빛 하나 보이지 않는 동굴, 그 안으로 사람이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들어가게끔 되어 있다. 나는 머리에 종유석이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환한 구슬이 빛을 뿜고 있는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구슬 아래에 구리로 된 상자가 모습을 드러낸 걸 확인하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같은 장소다.
설마 저 상자 안에... 천암비서가 있단 말인가?
" ... 그럴리가..."
나는 지금 천암비서를 갖고있지 않다. 몸이 뒤바뀌면서 신투지존의 품안에 있는 셈이다. 다만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천암비서가 단순히 소유만으로 뭔가 바뀌지는 않으며, 영문모를 법칙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저 상자에 천암비서가 있고, 내가 그걸 가지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그리고 몇 걸음 옮기자 아니나 다를까 함정이 튀어나왔다.
쐐액!
함정에서 튀어나온 투척암기를 내가 붙잡아서 던져버리자 이제 더 이상의 위험은 없었다. 함정조차도 원래 세계에 있던 것과 같다. 나는 구리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서서히 구리상자를 열었다.
끼긱...
" ......!!"
나는 그 순간 경악해서 외쳤다.
" 어, 없다!"
천암비서가 없다!
여기까지 다 동일한데 정작 중요한 천암비서만 없다니?!
묘한 안도감도 느껴졌지만 어쨌든 놀랄 일이었다. 여기서 천암비서를 얻어버렸다면 어쩌면 더 큰 이득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없다고 해서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혼란과 함께 생각의 폭풍이 흘러지나갔다.
' 천암비서가 없다, 그 말은, 누군가가 가져갔다는 건가? 하지만 가져갔다기엔 저 함정이 발동하지 않았어. 함정이 발동했다는 건... 가져간 자가 함정을 설치한 건가? 아니, 애초에 함정을 왜 설치했지? 천암비서를 누가 왜 가져갔지...?'
하지만 머리가 나빠서인지 지금 당장은 뭔가 괜찮은 결론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뒤를 돌았다.
" 제길... 모르겠어!"
천암비서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더 고민해봤자라는 걸 알아채고는 다음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비등으로 한 번 위치를 저장했으니 다음에 오고싶으면 바로 올 수 있으리라. 내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신강의 백련교단이었다.
파앗
나는 백련교단에 도착하자마자 달마에게 부탁해서 금전과 육포, 지도, 옷가지 등을 얻었다. 딱히 없어도 문제는 없었지만 절세내공이 사라진 이상 맨몸으로 여행하다보면 체력에 한계가 오므로 지원을 얻어서 나쁠 게 없었다.
타다닷
나는 신강에서 출발해서 아스타나로 향했다. 아스타나는 아라사 령이었으므로 굉장히 북쪽에 있었다. 물론 이 시대에 아라사 제국은 존재하지 않으나 여전히 북쪽 눈 파란 민족의 세력권인 장소였다.
그리고 나는 신강이 중원 바깥쪽의 새외라고는 해도 아스타나까지 가려면 최소 천리길인데다가 초원도 지나야 했다. 나는 부지런히 뛰면서 이따금 쉬기도 했고, 쉬는 동안에 내공을 연마했다. 그다지 큰 효과는 없겠지만 어쨌든 내공수련을 안하는 것보단 나았다. 쉴새없이 북서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약 스무 날 정도를 여행했을까? 나는 마침내 물어물어서 예전 아스타나의 사원이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근처에는 마을이 꽤 많이 있었으며 그럭저럭 살기좋은 곳인 듯 했다.
' 사원의 풍경은 그대로군.'
역사의 부침과 관계없이 그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사원을 보자 나는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그리고 내가 사원 내부로 들어가서 외쳤다.
" 선지자, 거래다!!"
정적.
한참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동방정교회의 사제복을 입은 웬 장년사내가 내 쪽으로 와서 이국의 언어로 뭔가를 이야기했다.
" #*%&&*@&%*..."
음...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겠다...
내가 못 알아듣는 기색이자, 장년사내는 한숨을 쉬더니 기이한 이족의 유물같은 걸 꺼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귀 옆에 꽂았는데 그러자 장년사내의 말이 내게 통역되어서 들려 왔다.
" 이방인이여. 이 신성한 고대의 사원에서 나가시오."
" 엉?! 그건 통역기... 넌 선지자랑 무슨 관계냐."
" 이 물건을 아는 걸 보면 어둠의 지식을 알고 있는 현자인가보군... 사정설명을 해 주시오."
나는 동방정교회 사제에게 선지자의 생김새와 능력 등을 이야기하면서 혹시 그들을 본 적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제는 미미하게 몸을 떨더니 말했다.
" 나는 그 종족의 하수인이오. 그리고 당신이 설명하는 존재는 굉장히 높고 고귀한 분인 것 같은데... 혹시 당신도 인간이 아니라 이계의 종족이오?"
" 아니오. 다만 그 종족과 접촉해서 만나봐야 하는데 방법이 없겠소?"
" 불가하오. 그 존재들은 이 지구에 살지 않소. 아주 머나먼 세계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그들을 만날 기회조차 없소."
" 살지 않는다고?"
" 그렇소. 나같은 하수인에게 지혜를 내려서 지상을 정탐하는데 이용할 뿐이오."
어라, 뭐지...
분명히 축융족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구에 와서 살고있었던 거 아닌가? 그런데 어째 사제가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선지자와 그 일족은 지구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축융족이나 아스타나의 선지자가 꽤 지구에 붙박혀서 살던 걸 생각하면 많이 다른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흐음...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고 때로 정신공유로 이 곳을 살피는 존재가 있을 것이오. 아마 지금도 내 말을 듣고 있겠지. 그에게 제안하노니, 일족의 왕인 마도왕 선지자를 나 백웅이 만나고 싶다고 전하시오."
" 어이없는 소리... 그 존재들은 말 그대로 우주적 존재들인데 우리 말을 듣는척이나 하겠소? 썩 나가시..."
동방정교회 사제가 소리치려 하는 순간이었다.
꾸드드득
꾸드득
그의 눈알이 갑자기 홱 뒤집어지더니 동공이 시허옇게 변했다. 그리고 완전히 정신이 제압당한 상태에서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 우리의 왕을 찾는 인간이여... 왕께서 그대의 존재를 흥미롭게 여기신다... 우리의 초대에 응한다면 왕을 알현할 기회를 주겠다...]
" 좋아! 가지 뭐!"
[ 좋다...]
파앗!!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지상에서 갑자기 이동해서 별세계 같은 장소에 와 있었다. 전혀 처음 보는 신비한 이계의 건축물과 부유선 따위가 가득했고 민들레씨앗 같은게 하늘에 나풀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또한 태양이 다섯 개나 떠 있었고 무지개빛의 무언가가 쉴새없이 하늘을 수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눈 앞을 보자, 그 곳에는 거대한 어전이 있었고 옥좌에 익숙한 이족이 앉아 있었다.
[ 네가 나를... 보고자 했는가...?]
나는 그를 보자마자 반가워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 어이 선지자!! 반가워!!"
[ ......]
" 생긴 건 그대로네!"
웅성웅성
내가 보인 행동에 주변에 있던 다른 이족들이 정신염파를 내뿜으며 웅성였다. 그러자 선지자가 말했다.
[ 마치 나를 또다시 본 듯한 행동... 그리고 우리 일족의 염파에 노출되었음에도 아무런 뇌파의 변동이 없고... 마력에 혼란도 겪지 않는다... 신비한 인간이군...]
" 혹시 예전에 만났던 기억 나?"
[ 아니... 전혀... 우리는 초면이다... 그대가 구면이라 주장한다면... 흐음...]
선지자가 이윽고 웃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 그래... 나는 너와같은 존재를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지... 흐흐... [문]을 넘어서 온 것인가...? 바깥에서 온 자여...]
" ......"
[ 바깥에서 통행이 허가된 존재는 극히 한정되어 있지... 그렇다면... 넌 아마도 삶을 거듭하는 자...]
바, 바로 알아맞춰버리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으나 전생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대가 알아맞춰버리는 건 어쩔 수 없으나 적어도 내 입으로는 인정해선 안 된다. 그래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선지자에게 말했다.
" 내가 알고싶은 건 두 가지야. 그 두 가지를 가르쳐줄 수 있겠나?"
[ 우리 일족이 모르는 건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귀중한 지혜를 공짜로 섣불리 넘겨줄 수는 없는 일... 정보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 어떤 대가를 바라는데?"
[ 우선 질문을 해 봐라... 그 질문을 듣고나서 정보에 어울리는 대가를 생각해 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 첫째. 이 세계에 망량선사와 흉신 이라는 존재가 있는지를 알고 싶어. 있다면 어떻게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지도."
[ ... 둘째는...?]
" 둘째. 달마대사가 이 세계에 우리세계의 사대신기를 소환했는데 그게 가짜인 것 같아.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그의 특이점이 이미 소환된 것인지를 알고 싶다."
[ 흐음...]
선지자는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옆에 있던 세 명의 알록달록한 괴인들과 염파로 대화를 나누는 듯 했다. 그는 이윽고 말했다.
[ 그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대신에 대가를 받아야겠다.]
" 어떤 대가."
[ 그대가 모든 과업을 끝내고 되돌아갈 때... 주시자께 말씀드려라... 그대가 내게 질문을 하여 정보를 얻었다는 사실을...]
" ... 그게 끝이야?"
[ 그래... 간단하지.]
겨우 그걸로 대가가 되는 건가?
나는 내심 보물이 하나도 없는 상태라서 조마조마했는데 생각보다 간단한 조건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다! 정보를 말해 줘."
[ 흐음... 먼저... 망량선사와 흉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려면... 그대의 기억부터 열람해야 할 듯 싶은데... 정보공유에 동의하라.]
" 동의한다."
[ 그럼 기억을 탐색해 보겠다...]
이윽고 선지자의 촉수가 내 머리에 닿이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기억이 복사되고 읽혀지는 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내 기억을 읽은 선지자가 잠시 후 말했다.
[ 망량선사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흉신이라 하는 존재는 이 세계에 분명히 존재하며, 지구의 심해(深海)에서 성좌가 되돌아오는 날까지 잠들어 있다... 흉신과 접촉하는 방법은 즉시 알려 주마.]
스스슥
머릿속에 흉신을 부르는 소환의식과 주문 따위의 지식이 들어왔다. 나는 그 지식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 망량선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 그래... 그대의 기억대로라면 전 우주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지만... 그런 존재는 본적도 들은적도 없다... 참 나로서도 기이한 일이군...]
망량선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약간 암울함을 느꼈다. 그나마 그 고양이가 있어서 최후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는데 여기는 그런 게 없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털고는 선지자에게 말했다.
" 그럼 두 번째!"
[ 달마대사가 소환했다는 사대신기... 그건 나로서도 진위여부가 불분명한 존재다... 하지만 불분명하기 때문에 도리어 확실해지는 게 있지...]
" 뭔 소리여?"
[ 달마대사의 특이점은 이미 소환되어 있다. 그리고 그건 너, 백웅이 아니다.]
" 그럼 누군데? 신투지존인가?"
[ 꼭 인물이라는 법은 없지...]
" ......?"
[ 특이점이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혹자는 운명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흐름으로 구현화될 수도 있지... 달마대사 또한 그걸 알기 때문에 섣불리 너와 적대하며 단정짓지 않은 것이다.]
" 결국 모른다는 소리잖아."
[ ... 한 가지만 조언해주지...]
선지자가 눈을 번득였다.
[ 위대한 우주의 행마(行馬)여... 그대가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과연 어떤 미래를 보고싶은가에 따라 달라지리라...]
파앗!!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아스타나의 사원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나는 방금 있었던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수십억 광년 너머의 별세계로 소환되었다가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기절해 있는 동방정교회 사제를 편하게 눕혀주고는 사원을 걸어나왔다.
' 선택이라고?'
선지자 놈은 대체 뭘 알고 있는 걸까.
아무튼 달마가 시킨 임무는 다 했으므로 나는 바로 비등을 써서 백련교 본단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달마에게 보고하자, 달마는 신중하게 이야기를 듣다가 말했다.
[ 아주 잘 했다... 백웅...]
" 이제 난 뭘 하면 될까?"
이어진 달마의 말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 무공을 내게 가르쳐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