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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진공가향!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백련교주 독고운천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 백웅이여. 너는 우리 백련교에서 신앙하는 무생노모(無生老母)가 허구의 존재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존재는 실존하고 있다. 달마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무생노모의 힘을 빌려 진공가향을 실현하고, 모든 중생이 구원받는 길이었다. 나는 그저 그분의 뜻을 실행하려 할 뿐.]
[ 백웅. 우리가 진공가향을 실현시키는 데 성공하면 모든 게 구원받는다. 그 때가 되면 원영신이나 천령단이 지니고 있던 최악의 대가도 무마되지. 왜냐하면 그 때는 모든 세계가 일순(一巡)하기에 [옛 지배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백련교주는 집요하게 법문을 모아서 완성시키는 것만을 원했었다. 그러면서 달마가 선택했던 진공가향의 길을 자신도 추구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었다. 그 말이 실상은 어떤 뜻인지 애매했었지만 이제서야 백련교의 진짜 목적이 명확해진 것이다.
진공가향 - 그것은 이 세계의 완전한 소멸과 무(無).
무생노모라고 불리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서 이 세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옛 지배자]고 뭐고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말 그대로 모든 게 사라져 버릴테니까. 신, 우주, 영혼 등등 모든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소멸할 것이리라.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진공가향의 목적을 듣는 순간 미쳤냐고 반문할 것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을 멸망시킨다니?
그러나 나는 도저히 백련교의 이상(理想)이라 할 수 있는 진공가향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
무려 서른 번에 가까운 전생(轉生)... 그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쉴새없이 이면세계의 비밀을 캐왔다. 또한 세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어둠과 절망의 정체를 직시해야만 했다. 그래서 신조차도 뛰어넘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잔뜩 쌓았음에도 아직까지 세상을 어떻게 구해야할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다.
당연한 말이다. 내가 전생을 쌓고 또 쌓아서 설령 삼황오제급 힘을 지닌다 하더라도, 과연 그 힘으로 [결말]을 낼 수 있겠는가? 세상은 넓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널려 있으니 고작해야 종말의 유예나 혹은 인간종족의 짧은 번영을 도모할 수 있을 뿐이리라.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세상에서 영웅으로 불리며 추앙받을 수 있을만한 업적이겠지만...
내게는 아니다.
' 그건... 승리가 아니야. 타협일 뿐이다.'
어차피 종말은 유예시킬 뿐 막을 수 없다. 현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안빈낙도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들이 죽고 나서 영혼이 [옛 지배자]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방법이 아직 없다. 차라리 측천무후처럼 인간의 영혼을 빼돌려서 다른 차원으로 승천시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역량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가소로운 방법으로는 결국 [옛 지배자]를 물리쳤다 할 수 없으며 나 또한 비참해질 뿐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일 뿐이다!
그러므로 전생자인 나는 최소한 종말을 유예시키는 걸 넘어서서 [옛 지배자]들이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못하는 완전한 구원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나 달마는 발상을 역전시켰다.
구원받을 수 없다면, 구원받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것.
살든 죽든 모든 것이 고통 뿐이라면 모든 것이 소멸하여 진정한 열반(涅槃)에 드는 것을 최종의 구원, 진공가향이라고 단정지은 것이다.
나는 달마에게 말했다.
" 좀 더 자세한 계획을 말해 줘. 이 세상을 어떻게 멸망시키겠다는 말인지."
[ 그대도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을 터... 진정한 의미에서 삼라만상 대천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뿐. 불경한 일언(一言)으로 모든 것이 소멸하는 정토(淨土)를 만들어내실 수 있는 존재는 하나 뿐이다.]
" ......"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게 애매하다는 거라고. 당신 말대로라면 그건 [아버지]에게 공양(供養)을 바쳐서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말인 건가?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 ......]
달마가 침묵하자 나는 언성을 높였다.
" 우주를 멸망시키는 대가로 대체 뭘 바칠 수 있단 말이냐고! 그 어떤 대가를 바치려 해도 그건 결국 이 세상의 일부. [아버지]라는 존재가 세계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존재라면 자신의 피조물이 자신의 살을 떼어준다고 해도 아무런 대가가 될 수 없잖아."
[ 오오... 아주 날카롭군...]
달마가 침음성을 흘렸다.
[ 마치 마도의 달인과 같은 그 식견... 감탄했다.]
사실 방금 달마에게 제기했던 의문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제갈사의 의견이었다. 제갈사는 백련교주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진공가향의 실체를 어느 정도 감잡은 듯, 내게 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버지]란 세계.
그러므로 필멸자든 불멸자든 그 존재에게 공양을 하거나 뭔가를 바치는 건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어떤 귀한 것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차피 이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설령 [옛 지배자]의 신체(神體)를 바친다고 해도 아무런 대가가 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어찌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공양을 하거나 가호를 받기 어려운 궁극의 신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사는 진공가향을 신선하다고 좋아하면서도 우리 일행이 추구할 도리가 아니라고 까대곤 했었다. 그런 제갈사의 투덜거림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달마에게 반문을 할 수가 있었다.
확실히 이건 짚고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과연 [세계]에 귀속되어 있는 존재가 [세계] 그 자체에 무엇을 바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벗어나려 하더라도 우리는 필멸자이며 존재인 이상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달마가 잠시 후 내 말에 대답했다.
[ 백웅 그대의 말대로다... [아버지]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것도 공양의 대상이 될 수 없지... 설령 [우주]의 경계로 구분지어서 [안쪽]과 [바깥]을 나누더라도 마찬가지다... 다중우주(多衆宇宙)조차도 어차피 그의 일부... 또한 안쪽과 바깥을 넘나드는 게 가능한 이상, 그런 꼼수는 통하지 않아...]
달마의 말은 [외우주]에서 다른 다중우주의 물건을 훔쳐온다 하더라도 어차피 [아버지]에 귀속된다고 함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같은 필멸자에게 있어서는 말도 안될 정도로 머나먼 굴레가 바로 [바깥]이지만, 그렇게나 위대한 존재에게 있어서는 결국 하위차원에 불과하다.
" 그러면 어떻게?"
[ 백웅이여... 시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존재는... 그 위상(位相)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운명에 따라 변화하게끔 되어 있는가?]
난데없이 철학적인 질문이라니!
나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제갈사에게서 배운 이론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 물질계의 관점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어. 하지만 그 이상에서는 관념의 왜곡이 이루어져."
그렇다.
원래 시간의 단면이 연속되는 것을 시간의 정체라고 정의한다면 아무리 변화무쌍한 우주의 변화라고 할지라도 처음부터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건 아주 기본적인 이론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며, 실상은 인과(因果)란 신조차도 읽어내기 힘들 정도로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들었다. 왜냐하면 의지(意志)와 관념이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인과를 왜곡시키며, 그런 [힘]이 분명히 우주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렇다... 신들이 인과율을 읽는 능력을 갖추려는 이유... 그리고 공양의식때 인과율을 공양받는 걸 귀하게 치는 이유는 그것때문이지... 인과율이란 어찌보면 관념의 덩어리... 세계를 구동시키는 근간 그 자체...]
잠시 침묵하던 달마가 말했다.
[ 그렇다면... 그 우주적 관념의 근간이 되는 가장 거대한 법칙... 거대한 기둥(柱)...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 모든 것의 [문]... 그건 태초에 누가 만들어내었는가? 그 인위적인 법칙 또한 [아버지]가 만들어낸 것인가...? 그럴 리는 없지...]
" ......?"
[ 나는 그 이유를 읽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거지...]
어...
......
모르겠다. 그 이유가 뭔데...?
" 뭔 소리야..."
[ 후후후...]
달마는 뭔가 즐거운지 껄껄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달마의 제자 중 유약해보이는 문사가 놀란 듯 했다.
" 스승님께서 웃다니...!!"
달마가 저렇게 웃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인 듯 했다. 잠시 후 달마가 말했다.
[ 백웅이여. 안심하고 우리에게 합류하라... 나는 뜻을 이룰 것이며, 그대 또한 뜻을 이루리라.]
" ... 이유는 말 안해주는 건가."
[ 의식이 끝나고나면 말해주지...]
" 약속한 거다."
[ 물론이다...]
스윽
달마가 손을 뻗었고, 나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본래라면 마도사와 손을 잡는 일은 저주를 받을 수 있으므로 피하게 마련이지만, 어차피 달마와 나의 힘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는 의미가 없었다.
우웅!
' 이건...!!'
나는 이 순간 달마와 동맹을 맺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달마가 갑자기 내 손에 뭔가 낙인을 새기더니 그 낙인을 통해서 엄청난 마력을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그 마력은 단숨에 내 몸속을 가득 채우며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달마가 말했다.
[ 가계약의 개념으로 그대에게 마력을 선지불했다... 그대가 동의한다면 그대는 나의 사도(師徒)가 될 수 있다.]
" 사도?"
[ 그대에게 맨몸으로 의식을 지키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 걸맞는 힘을 주겠다.]
" 으음."
달마는 꽤나 진심으로 보였다. 사실 이 시점에서 달마가 꽤 손해를 본 셈이었으며 내가 배신하는 순간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뒤통수를 때릴지말지 고심하다가 그렇게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일단 달마의 계획에 어울려 주자.'
아직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인간을 구하려는 열정만큼은 진짜다. 이 세계에서 죽게되더라도 현재 내 아군이 되줄 수 있는 건 달마뿐이었기에 나는 달마와의 동맹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놈이 아직까지 내게 비밀을 숨긴 게 많아서 껄끄러웠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 동의하겠다."
[ 좋다. 그대는 지금부터 나의 사도다...]
화르륵!!
그러자 달마가 불어넣은 마력이 내 몸속에서 용솟음쳤다. 단숨에 끓어오르는 마력이 내 존재를 도야시키려 했으나 그 순간 문제가 생겼다.
쿠르륵...
" ......?!"
성좌(星座)의 힘과 음신지력이 뒤엉킨다!
나는 3가지의 상이한 능력이 내 몸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움직이자 내장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나는 고통을 억지로 눌러참았으나 마치 돼지가죽으로 만든 공 속에서 바늘이 몇 개나 삐죽거리며 튀어나오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끄으으윽..."
목이 마르고 손발이 따끔거린다. 내가 부들부들 떨고있자 달마가 말했다.
[ 어쩔 수 없군... 도와주겠다.]
그 순간 달마가 넣은 마력은 내 잃어버린 한쪽 팔으로 이동해서 시꺼먼 찰흙처럼 변해서 뭉글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림자가 덮어쓰는 듯한 환영이 비치면서 갑자기 없던 팔이 다시 생겨나 버렸다.
슈슉
그와 동시에 내 전신을 찌르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새로 생겨난 팔을 빙글빙글 돌려봤는데 자연스러웠다.
" 어떻게 된 거지?"
[ 그대가 원래갖고있던 힘 또한 신의 힘... 서로 다른 신력끼리 부딪혀서 와해될 뻔 한 것 같군... 어쩔 수 없이 그대의 팔을 구현화시키면서 한쪽에 몰아넣었다.]
" ... 원래 그런 현상이 생기는건가?"
[ 나로서는 대답해줄 수 없다... 그대는 [바깥]의 인간... 바깥에 어떤 권능이 존재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으니.]
거대한 마력을 쌓을 경우 음신지력, 성좌 등과 충돌현상이 있다는 건가.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 제길... 그렇다면 다른종류의 힘을 무작정 쌓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되는건가?'
다같이 수준을 올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충돌현상이 일어난다면 마력을 축적시키는 건 고려해봐야한다. 분명히 이런 경우에는 다른 힘을 포기하거나, 그게 아니면 조화롭게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새 팔을 얻자마자 달마에게 말했다.
" 좋아. 그럼 사도가 되었으니 할 말이 있는데."
[ 무엇인가.]
나는 다음 이야기는 육성으로 하지 않고 몰래 달마에게 머릿속으로 전달했다.
[ 여기 모여있는 네 제자들 중에서 신투지존이라고 우리세계에서 건너온 놈이 있을 거야. 그 놈을 색출해내려면 다소 거친 방법을 써야 한다. 죽어도 괜찮은가?]
내 제안에 달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깡마른 인상에 눈매가 부리부리한 사내에게 말했다.
[ 황우. 백웅에게로 가라.]
" 네?! 스승님! 저 놈이 저를 죽이려 하면..."
황우가 더럭 겁을 먹은 기색이었으나 이윽고 포기한 듯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황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이혼대법(移魂大法)!
스스스스
일단은 이혼대법을 써서 상대방의 기억과 생각을 확실히 심문하는 것으로 신투지존의 정체를 밝혀내 봐야겠다.
우우우우 -
이혼대법이 완전히 통하자 황우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나는 황우의 백을 가진 채로 그에게 물었다.
" 너는 신투지존인가?"
" 아니오..."
" 혹시 신투지존에 대해서 듣거나 마주친 적이 있나? 혹은 누군가에게 몰래 명령을 받고 있는가?"
" 아니오..."
황우는 아닌 것 같군.
나는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다 검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달마는 내 이혼대법이 어떤 술법인지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일단 용인하기로 한 듯 했다.
스스스스 -
" 아니오..."
" 아니오..."
" 아니오..."
내가 다섯 명의 제자를 다 검사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 ......"
전부 다 이혼대법을 쓰고 심문했는데도 신투지존인지 질문하자 부정해버렸다.
심지어 연결고리조차 모두 부정했다.
이혼대법으로 심문한다면 한 톨의 거짓조차 말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상식적으로는 이 중에 범인인 신투지존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것이리라.
[ 이제 다 끝났나?]
달마가 물었으나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이 안에 신투지존은 있는데도 이혼대법으로 검사해도 나오지 않는다니...
' 아!'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생각난 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신투지존은 분명 여기에 있다."
[ 어떻게 하려는 거지?]
" 마지막 수단을 써 보겠다."
이젠 그 방법밖에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