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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가짜라니.
나는 달마의 말에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 역시라니 무슨 뜻이지?"
[ ......]
달마가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 백웅이여. 오늘은 본교에서 쉬어라. 내일 이야기하지.]
슈르륵!!
달마는 말이 끝나자마자 안개처럼 변해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역시 형상은 인간처럼 하고 있었지만 그 본질은 마력의 극한에 도달한 존재인 것이다. 달마가 사라지자 뒤쪽의 제자들 중에서 혜가라고 하던 외팔의 괴인이 걸어나와서 말했다.
" 귀인이여. 저를 따라오십시오. 묵을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사실 그런 건 필요없다. 이미 내공이 극치를 몇 번이고 넘었기 때문에 아무리 심각한 고갈을 겪어도 길어야 한 시진이면 모조리 회복된다. 칠 주야 내내 대륙을 횡단하며 달리기를 했던 적도 있었다. 이미 수면이나 휴식같은게 그리 필요하지 않은 몸이었으나 나는 혜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혜가를 따라가자 허름한 모옥이 하나 나타났다. 우리 세계의 백련교 교단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누추한 장소였다. 근처에 용변을 보는 장소가 있는지 퀴퀴한 냄새도 났다. 혜가는 한 손으로 합장하듯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 그럼 편히 쉬십시오..."
" 잠깐. 혜가!"
나는 혜가에게 말했다.
" 당신이 달마의 제자라면 달마가 뭘 원하는지도 알고 있나?"
내 질문에 혜가는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물론입니다..."
" 그가 이 세계, 대우주를 멸망시킬 법문(法文)을 제작하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냐고."
" 법문이란 이야기는 처음 듣지만... 목적은 알고 있습니다."
" 다른 제자들도 다 알고 있는가?"
" 네."
" 그런데도 그를 따르고 있단 말인가?"
혜가는 내 말에 은은한 미소를 짓는 듯 했다.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할 정도의 편한 미소였기에 그의 마음공부가 범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깊은 눈동자로 내 말에 대답했다.
"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번뇌이며 절망... 한 올의 희망과 구원조차 없다면... 결국 인간이 선택하게 되는 것은 물질적 쾌락을 추구하며 현실에 매몰되거나, 혹은 모든 걸 포기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 뿐... 허나 스승인 달마께서는 우리에게 제 3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 ......"
" 모든 것이 진정으로 멸하여 진공가향(眞空家鄕)을 이룬다면... 지복(至福)의 세계가 도래할 것입니다."
" ... 그렇다는 보장은 없어."
나는 회의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세계에서 달마는 실패해 버렸다. 이 세계의 달마와 우리 세계의 달마가 같은 존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되었든 달마는 법문을 제작하긴 했으나 그 법문이 완성되어 구현화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만신(萬神)이 끼어들어서 그에게 56억 7천만년치의 어마어마한 저주를 쏟아부었기에 달마는 소멸하고 법문이 산산조각나서 세계에 흩어져버렸기 때문이다.
혜가가 말했다.
" 그대의 눈을 보면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자의 상(像)이 느껴집니다. 허나 그 상 너머에는 알 수 없는 혼돈이 깃들어 있으니... 스승께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 달마는 왜 굳이 하루 동안 묵으라 한 거지? 이런 이야기는 바로 끝내도 될 텐데."
" 스승의 뜻은 감히 제가 추측할 수 없습니다."
" ......"
" 원하신다면 우리 백련교를 둘러보셔도 됩니다. 그 또한 스승의 뜻일 터..."
" ... 혹시 신투지존이란 자를 알고 있나? 그 명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내 질문에 혜가는 고개를 저었다.
" 없군요..."
혜가는 그 말을 끝으로 물러났다. 나는 음침하고 남루한 모옥에 앉아서 생각했다.
' 어떻게 하지?'
달마가 지금 당장 나를 안 죽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대신기가 가짜인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지만 아직은 확실히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루의 시간과 유예를 내게 준 것에도 뭔가 이유가 있을 듯 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거다.
' 신투지존은 분명 여기에 있다.'
무지개뱀은 나를 신투지존이 있는 장소로 보내준다고 했다. 그리고 때마침 내가 백련교에 도착했으니, 이 곳에 신투지존이 있는 건 틀림없다. 그렇다면 달마 혹은 그의 제자 5명 중에 신투지존이 있을 것이다.
달마가 신투지존일 리는 없다.
신투지존이 환생의 술수로 환생중이라고 하더라도 그 힘은 나와 비교가 가능할 정도이다. 달마의 힘이 이미 [옛 지배자]의 수위에 도달해 있으므로, 그는 신투지존이 아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달마의 제자 5명 중 한 명이 신투지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섣불리 제자 5명에게 이혼대법을 걸어서 누가 신투지존인지 알아낼 수 없다. 이혼대법은 극악한 수법이기 때문에 달마는 자기 제자에게 흉악한 술법을 거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쳇... 신투지존 이야기를 제대로 해야 했어.'
달마에게 신투지존에 대해 이야기하고 놈을 색출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야 했다. 그러나 막 마주쳐서 서로 경계하는 상태에서 섣불리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다.
' 어쩔 수 없지. 내일이라도 얘기하자.'
내일이라도 신투지존에 대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혜가가 말한대로 이 백련교 내부를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타닷
나는 신법을 써서 날듯이 백련교 내부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얼추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이 곳이 우리 세계의 백련교와는 달리 그저 마을이 서너 개 옹기종기 모여있는 수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백련교주나 호법사자, 성련인같은 강력한 존재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백련교를 믿는 평범한 신도들이 뭉쳐있는 마을인 것이다.
다만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서 쌓아놓은 성벽은 그대로인 듯 했다. 나는 성벽 위에 서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과거 수신류의 마을쪽으로 가 보았다.
' 이 세계에도 수신류의 마을이 따로 떨어져 있을까?'
파앗
나는 기억을 살려서 수신류의 마을이 있던 장소로 가 보았다. 원래 우리 세계에서는 마치 요새처럼 폐쇄적이며 그 안에는 수신류의 마도서와 비밀서고가 가득한 장소였다. 그리고 기억나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수신류의 마을은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에 기이한 산과 동굴이 보이는 걸 알 수 있었다.
" 으음..."
언뜻 생뚱맞아 보이지만 사실 저 산 또한 원래 세계에 있었던 것 같다. 수신류의 마을은 산 자체를 깎아내서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인공적으로 다듬지 않았을 뿐 지형은 대동소이한 것 같았다. 나는 뛰어올라서 동굴 내부로 들어갔다.
동굴으로 들어가자 어설프게 인간이 만들어놓은 듯한 인도(人道)가 느껴졌다. 그나마도 동굴 내부로 깊게 들어가지 못하게끔 길이 끊겨 있었고, 나는 무공수법을 사용해서 진동으로 내부에 구멍을 뚫었다.
쿠구구궁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인공적으로 인간이 만든 듯한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나는 이 장소가 어딘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석관이 있던 장소다.'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다. 원래는 이 장소에 고도로 정제된 제단이 존재했으며 제단 근처에 수백 개의 불꽃이 날아다녔다. 그 불꽃들은 혼(魂)이었으며 먹이를 주기 위해 백련교주가 풀어넣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이 장소에 혼불은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공동의 심처에 있는 돌상자를 보자, 나는 마침내 침음성을 흘렸다.
" ... 으음. 천암(天暗)의 제단..."
그렇다.
이 곳은 아마 천암의 제단이 틀림없으리라.
[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달마사조의 비망록(備忘錄)이 새겨진 고대문서를 발견해서 해석했다. 그리고 이 산 내부에 고대의 유적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죽을 힘을 다해서 이곳까지 왔었지. 그 모든건 순전히 지식욕이었다.]
[ 그리하여 발견했다. 이 천암(天暗)의 제단을.]
[ 달마사조께서 외신의 도움을 받아 무생노모의 법문을 제작하셨으나 그 혼돈의 권능이 너무 강해서 세계 곳곳으로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달마 사조께서도 그 때 돌아가셨지. 그러나 마지막 한 조각만큼은 백련교가 보유하게끔 하기 위해서 법문이 완성되기 전에 이 제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 나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숙식했고, 법문을 해석하면서 거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예전에 백련교주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백련교주는 과거에 달마의 비망록을 손에 넣어 천암의 제단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 근처에서 숙식하며 법문을 해석했던 것이다. 백련교주의 가공할만한 힘은 그 때부터 수련하며 깨우친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백련교주 힘의 근간!
그리고 저 돌상자 내에는 강대한 최상급 마도서인 수신(水神)의 마도서가 두루마리의 형태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 마도서와 제단의 마력이 연동하자 너무 강한 압력 때문에 기절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 ......"
지금도 저 안에 수신의 마도서가 있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성큼성큼 걸어서 천암의 제단 최상층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돌상자 앞에 섰을 때 기이한 걸 깨달았다.
' 응? 그 때와 달리 전혀 머리가 아프거나 압박감이 안 느껴지는군...'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일단 돌상자를 열어보았다.
끼이익
돌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예전에 봤던 두루마리가 있었다. 나는 두루마리가 바로 수신의 마도서란 걸 알아채고는 손에 잡아들었다. 그리고 기절하기는 커녕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내 마도저항력이 강해진 건가?'
음신지력 덕분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그 당시에 느꼈던 압도적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음신지력의 힘으로 저항을 이겨냈다기에는 너무 큰 격차가 나는 것이다.
그 때는 기절했고 지금은 아닌 이유가 대체 뭘까?
나는 이런 차이가 왜 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수신의 마도서를 품 속에 집어넣었다.
우웅!
바로 그 때 내 눈앞에 달마가 순간이동으로 나타났다.
" 허걱!"
[ ......]
쿠웅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나는 찔끔해서 급히 수신의 마도서를 도로 돌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 그냥 뭐가 있는지 봤을 뿐인데..."
[ 역시 그대는 나보다 후대(後代)의 역사에서 활동한 존재군. 내가 제자들에게도 비밀로 만들어 낸 이 천암의 제단...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이 제단을 마치 미리 알고 있다는 것처럼 찾아왔다는 건가.]
" ......"
[ 그렇다는 건 그대는 천암의 제단을 이용해본 적이 있다는 말이겠지.]
정확하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자 달마가 말했다.
[ 마침 잘 됐군. 아무도 없으니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는 게 낫겠다.]
" 응? 무슨 말이지?"
[ 그 곳에는 듣는 귀가 많았기에 섣불리 그대와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달마가 나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커다란 두건을 뒤로 젖혔다.
이족의 얼굴.
하지만 완전한 이족은 아니었으며 인간과 반반씩 섞여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흉악하다기보다는 저게 바로 외계인의 형상이 아닐까 싶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달마가 말했다.
[ 그대가 나와 같은 존재라고 가정하고 이야기하지. 그대는 어떻게 해서 세계를 구하려고 하는가?]
" ... 으음."
나는 달마의 질문에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사실 아직 방법이 보이지 않아. 아주 많이 노력했다고 생각하는데도... [종말]과 [계시]를 어떻게 해야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지금은 그저 나 자신의 특이점을 극복하려고 사대신기를 찾으러 온 것 뿐이다."
[ 계시? 그게 무엇인가.]
달마가 반문하자 나는 갸웃했다.
" ......? 알고 있지 않나. 위대한 [아버지]의 도래를 예고하는 [허공록(虛空錄)]이 이 지구에 강림하는 시기가 존재하는데 그 때 일어나는 일을 [계시]라고 하는 게 아닌가?"
[ ......]
" [옛 지배자]들은 계시를 듣기 위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거고..."
달마는 내 말을 듣자 충격을 받은 듯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경악한 듯 말했다.
[ 세상에 그런 건 없다...!!]
" 엥? 없다고?"
[ 그렇다. 네가 말한 [계시]라는 건 우리 세상에는 존재치 않는다. [종말]은 존재하나 그런 특이한 사건은 존재치 않아.]
" 그럴 리가..."
[ 정말이다.]
이어진 달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이 세계는 1999의 해, 일곱 번째 달에 멸망한다. 그 멸망은 [아버지]나 [허공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그저 끔찍한 [옛 지배자]들의 변덕에 의한 것일 뿐이다. 별이 울부짖으며 혼돈이 세계를 잠식하는 멸망의 정황이 어찌 이리 다를 수가 있는가?]
" ......!!"
[ 그렇군... 시간축이 다른 것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계획했던 게 이루어진 결과인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달마는 이윽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 백웅이여. 그대의 힘으로 나를 도와 다오. 그렇게 해 준다면 그대에게 사대신기를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