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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망했다.
나는 달마를 보는 순간 눈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이 회전이 되지 않고 세상이 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인물을 여기서 만나버린 것이다! 나는 얼굴이 딱딱히 굳어진 채 외팔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우웅
검에 검뢰가 감돌자 달마가 다가오다말고 멈칫했다.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네 명의 인간들에게 멈추라는 듯 손짓하다가 말했다.
[ 기이한 능력이군. 그 힘을 뭐라고 부르지?]
" ... 검뢰(劍雷)."
[ 칼에서 치솟는 번개라는 뜻인가... 그건 어떤 지배자와 계약해서 쓸 수 있는 힘인지 말하라.]
" ......"
나는 어찌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지금이라도 그냥 자살할까?'
달마의 말같은 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제갈사에게서 배웠던 수많은 자살방법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떤 걸 쓰든간에 일단 자살하는 것 자체는 가능할 것이다. 삼황오제 앞에서도 자살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자살하게 되면 정말로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달마와 신투지존의 행방에 대해서 일부 알게 되었고 외우주의 실체를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외우주에 오는 것 자체가 극히 어려운 상태에서는 이대로 이번 생을 끝내봐야 결국 내 특이점 때문에 더욱 힘든 상황만 계속될 뿐이다.
하지만 싸워봤자 승산은 없다. 눈 앞의 달마는 거신왕 수인조차도 전투를 꺼려할 정도로 강력한 [옛 지배자]의 힘을 갖고 있다. 내가 아무리 강력하게 결의를 하고 온힘을 쏟는다 해도 절대적인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 이건 지배자와 계약해서 얻는 힘이 아니야. 기(氣)를 운용해서 쓸 수 있는 힘이다."
[ 기(氣)?]
" 세상 만물에 흩어져있는 자연의 힘이다. 수련을 해서 기를 느끼고, 기를 심법(心法)에 따라 정제한 후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다."
일단 달마와 대화를 해 봐야겠다.
달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때려잡지 않았으니, 내게 흥미가 생긴 게 분명했다. 지금은 그에게 맞춰서 정보를 주면서 나 또한 달마의 정보를 알아내는 게 낫다. 조금이라도 삐끗했다가는 즉시 벌레처럼 죽고 말 테지만 할 수밖에 없다.
[ ......]
달마는 그 말에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말했다.
[ 네 말은... 기라고 하는 게 인간 고유의 힘이라는 말인가?]
" 그래."
[ 그렇다면 네 눈(眼)은 무엇인가? 그 눈에서 또 다른 성질의 힘이 느껴진다.]
화안금정을 말하는 건가?
나는 내 눈두덩을 쓰다듬으며 설명했다.
" 이건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는 투선(鬪仙)에게서 받은 고유능력이다. 이 눈으로 환영과 술법을 간파할 수 있다."
[ ......]
달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 술법...? 그 눈 또한 술법의 눈이란 말인가.]
" 그렇다."
[ 너희 세계에는 술법이란 게 실존했단 말인가... 한낱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는 방사들의 현학(衒學)이 실존하는 힘을 가졌단 것인가.]
" ... 있어."
[ 투선이란 무엇인가?]
" 인간이 술법능력을 쌓아서 등용문을 통과하면 신선이 되는데, 그 신선들이 모인 세계를 천계(天界)라 한다. 그 천계에서도 전투능력이 특출난 존재를 투선이라고 한다."
[ 흥미롭군...]
달마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였다. 뒤에 시립해 있던 다섯 명 중에서 깡마른 인상에 눈매가 부리부리한 사내가 크게 외쳤다. 사내는 특이하게도 머리를 빡빡 밀어서 대머리처럼 보였다.
" 스승님! 저 놈이 특이점이라는 놈이라면 더 이야기를 섞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 해치우고 놈의 힘을 흡수하십시오."
달마는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 황우(黃牛). 기다려 보거라.]
황우가 조급한 기색으로 외쳤다.
" 말씀하신 대로라면 특이점을 해치우지 않으면 스승님이 위험하신 게 아닙니까!"
[ 본디 그렇다. 특이점은 내게 다가온 운명의 시련이다.]
" 그렇다면 왜..."
[ 저 자에게서는 뭔가 다른 게 느껴진다...]
" ......"
스승님?
나는 달마 뒤쪽의 인간들이 모두 승려인가 싶었지만 머리를 깎은 것은 황우라고 하는 깡마른 사내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으며 팔이 하나뿐인 기인도 있었으며 단단해보이는 사내도 있었고 연약해보이는 문사도 있었다.
달마가 잠시 후 말했다.
[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따라오라.]
나는 달마를 따라서 교주전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전생하면서 몇 번이고 들렀던 백련교의 교주전이었으나 이 곳은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 초라하군...'
본래 교주전은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기색이었다. 엄청난 금력과 세력을 지닌 백련교가 모든 힘을 다해서 지은 궁전이라는 느낌마저 들었었다. 그러나 이 교주전은 궁전이라기 보다는 그저 조금 큰 건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허름한 기색이 강했다. 곳곳에 거적때기를 깔고 있는 빈민들이 누워있기도 했다.
이윽고 우리는 커다란 거적때기 위에 둘러앉게 되었다. 의자도 평상도 없었으며 말 그대로 맨바닥만 면한 곳이었다. 백련교가 지극히 가난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나는 달마의 반대편에 앉는 상태가 되었다.
잠시동안 침묵이 감돌았고, 달마가 입을 열었다.
[ 다른 우주에서 온 자여. 그대의 이름은?]
" 백웅."
[ 그대와 동행하던 신격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 존재는 어디로 갔는가.]
" 의견이 맞지 않아 우리 세계로 되돌아갔다."
[ 여기에 온 이유는?]
나는 달마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 ... 사연이 길다. 그 전에 나부터 알고 싶은 게 있다."
[ 무엇을 묻고 싶은가.]
" 어째서 나를 당신의 특이점으로 단정짓는 것이지? 나는 특이점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외우주를 넘은 게 아니야. 내 용건은 전혀 다른 것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 ......]
달마가 침묵하다가 서서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나는 이맘때쯤 그대와 같은 존재가 [바깥]에서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대가 [바깥]의 존재임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지.]
" 뭐...!! 어떻게!"
[ 왜냐하면... 내가 특이점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 ......!!"
뭐라고?!
' 특이점을 앞당겼다고?! 그 말은...'
달마 또한 나와 마찬가지 행위를 했다는 말인가!
내가 경악하는 표정을 짓자 달마의 말이 이어졌다.
[ 그대는 특이점을 알고 있는가? 그걸 앞당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알고 있어."
[ 이야기가 빠르겠군...]
달마가 말을 이었다.
[ 나는 [세계의 기록]을 열람했고, 본디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최강의 수호신기(守護神器)를 이 세상에 소환했다. 이 행위는 본디 우주의 법칙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 그러나 꼭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 특이점을 대가로 바쳤다. 그리고 그 후에 그대가 나타났으니 나는 그대를 특이점이라 생각할 수밖에.]
" ......?"
세계의 기록?
나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문득 예전의 기억이 생각났다.
[ 파천의 가호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파천의 가호는 망량선사의 권능이지만 동시에 이 대우주(大宇宙)에 직접 작용하는 거대한 법칙이자 축인 [세계의 기록]에서 직접 뽑아오는 권능이야. 그래서 인과율과 거의 대등한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옛 지배자]조차 족칠 수 있는 원리지.]
[ 네가 만일에 전생하게 된다면 과거의 나에게 [세계의 기록]을 읽으라고 조언해 줘. 그 단서를 얻지 못하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니까.]
[ 술법사로써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환신지경(幻神之境)이란 [세계의 기록]에 도달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어. 다만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다.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닿을 수가 있지.]
[ 쉽게 말하자면, 존재의 계가 얽힌다는 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특이점의 현상을 말하는 거다. 그리고 그 특이점을 알게 되면 '길'이 열리지. 신공표는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세계의 기록]에 도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환신지경은 비유에 불과해. 굳이 말하자면, 술법은 삼황오제의 힘이지만 그 한계를 초월해서 [옛 지배자]만이 인식하고 열람할 수 있는 대우주(大宇宙)의 권능을 얻어오는 경지를 말하는 거다.]
그래.
분명히 들은 적이 있다.
[세계의 기록].
그것은 신공표나 천우진처럼 술법의 극한에 도달한 존재들이 어떤 식으로든 접촉하려고 갈망하는 최종적인 목표였다. 심지어 망량선사의 권능인 파천의 가호조차도 [세계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우주적(宇宙的) 권능의 집결지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눈 앞의 달마는 세계의 기록을 직접 열람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 달마는 순수한 능력만으로도 우리 세계의 환신지경에 버금가는 권능을 성취했다는 말인가? 무공도 술법도 없는 세계에서 순수한 마도의 성취만으로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달마의 말에 곰곰히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 설마 그 수호신기라는 건 4개가 아닌가?"
[ 그렇다.]
" ......"
[ 아무래도 나는 그대 세계에 존재하던 물건을 우리 세계에 소환해버린 모양이군...]
나는 달마의 말을 듣자마자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 사대신기(四大神器)!'
거의 틀림없다!
종말의 거룡이 죽으면서 그의 몸에 박혀있던 사대신기가 우주의 혼돈으로 흩어졌고, 그것들이 달마의 [부름]에 의해서 외우주를 넘어서 이 곳에 소환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으나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아... 아닌데. 이건... 이상해!'
모순(矛盾)이 아닌가?
뭔가가 빠져 있다.
이게 정교한 인과율의 구조라고 한다면 누군가가 고의로 한 부분을 빼버린 듯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성급히 단정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나는 침묵했다.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움직이다보면 내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일이 분명히 있었기에 좀 더 침착하게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내가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보던 달마가 말했다.
[ 허나, 수호신기를 소환한 대가로 찾아온 특이점이 그대라면... 너무나 약하다. 수호신기의 힘과 권능을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에 걸맞는 재앙(災殃)이 나를 찾아왔어야 정상일 것... 무언가가 이상하기에, 나는 그대와의 첫 격돌 이후 이야기를 나눌 필요를 느낀 것이다.]
" ......"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의아함을 느껴서 나와 얘기할 마음이 생겼단 말인가.
어떤 의미로는 처참한 기분이었지만 사실 그런 기분조차도 사치였다. 왜냐하면 달마의 힘은 삼황오제급인데, 이미 은하계를 주무를 수 있는 절대자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나는 아직 그 힘의 티끌에도 미치지 못하기에 그의 자비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 그랬군."
[ 백웅. 이제는 그대의 이야기를 해 보라. 그대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왜 우리 세계에 오게 되었는지...]
말해도 될까?
나는 내게 붙어있는 제약을 생각하고는 흠칫했다. 전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달마가 숨기는 게 있다고 즉시 눈치챌 것이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사대신기를 찾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최대한 전생능력은 빼놓고 이야기에만 집중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대신기를 찾게 된 경위, 그리고 여동빈이 겪었던 천 년 전 종말의 거룡과의 결전 등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세계에 와서 무지개뱀을 만난 이야기를 했으며 무지개뱀이 이 곳으로 보내버리는 바람에 오게 되었다는 경과도 이야기했다.
달마는 내 이야기에 집중해서 귀기울이는 기색이었고 주변에 있는 다섯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쯤 달마가 질문했다.
[ 그런가... 그대 또한 특이점을 앞당겼는가? 그리고 특이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대신기를 찾으러 왔는가.]
" 그래."
[ 어째서 앞당겼지?]
대뜸 해 온 질문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다가는 전생에 대한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에잇... 말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전생능력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달마에게 고문당할 각오를 하고 있을 때 그가 뭔가를 이해한 듯 말했다.
[ ... 그래. 그대 또한 나같은 존재였군.]
" ......"
[ 무리해서 말하지 않아도 좋다.]
나같은 존재?
저게 무슨 말이야?
내가 달마의 묘한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달마가 말했다.
[ 그럼 우리의 이해(理解)가 일치하는지 상반하는지 확인부터 해야겠군. 오늘 그대와 대화를 하려 함은 사실 이런 이유였다.]
그렇게 말한 달마가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외팔이 기인(奇人)에게 말했다.
[ 혜가(慧可). 수호신기를 가져오너라.]
혜가라고 불린 외팔이 기인은 한쪽 손만으로 예를 표하더니 말없이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혜가가 다시 되돌아왔을 때, 나는 그가 수레에 실어서 갖고 온 4개의 무구(武具)를 볼 수가 있었다.
" ......?"
응?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수레 위에 놓은 4개의 무구를 힐끔 쳐다본 달마가 내게 말했다.
[ 보라. 그대가 말한 사대신기가 맞는가?]
" 잠깐... 봐야겠어."
나는 벌떡 일어서서 무구를 덥석 쥐어서 매만졌다. 형태를 확인하고 이리저리 살피며 내부에 깃들어 있는 신력(神力)을 살폈다.
땡그랑
그리고는 잠시 후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모두 땅바닥에 떨구며 대답했다.
" ... 아니야."
형태는 비슷하게 생겼으나 이건 결코 사대신기가 아니다.
사대신기는 커녕, 이건 그냥 그럴싸하게 생긴 싸구려 무기에 불과하다.
신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며 영험함, 심지어 마력(魔力)마저도 아예 없다. 무기점이나 장식점에 가면 멋으로 비치해뒀을 법한 싸구려들이다. 역사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대신기에 스며있었다던 사대지력이나 자연력조차 없다.
이게 사대신기일 리가 없어.
이런 삼류 무기로는 절대 종말의 거룡에게 맞설 수가 없어!
아무리 사용자에 따라 진가를 발휘하는 무기라고 해도 화안금정 앞에서까지 그 진가를 숨길 순 없다. 대단한 물건은 대단하다는 증거를 무조건 드러내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건 설마...
[ 크크크...]
내가 힐끔 달마를 뒤돌아보자, 그가 쓸쓸하게 웃었다.
[ 역시 그건... 가짜 수호신기였나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