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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여기까지라고...
' 말도 안 되는 소리!'
염제 신농과의 교섭에 실로 모든 보물을 다 쏟아부었다. 아무리 내가 전생자이며 이세상의 귀한 보물을 다 모을 수 있다고는 해도 이번 생에는 진짜 더 이상 보물을 찾는 게 무리였다. 하물며 이미 외우주로 넘어온 상황에서 어떻게 신농에게 더 대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거신왕 수인이 여기서 포기해 버린다면 나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이 나가서 수인에게 되는대로 소리지르는 대신에 침착하게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수인에게 말했다.
" 왜 그러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상황을 명확히 설명해 주십시오."
[ 좋다.]
후웅
수인이 손으로 허공을 밀자, 갑자기 시간이 멈추었다. 정확히는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나와 수인만이 움직일 수 있었고 부숴진 황궁이나 주변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을 멈춰버리는 걸 보면 역시 수인은 오제 못지않은 신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인이 잠시 후 말했다.
[ 네가 방금 쓰러뜨린 건 화신이다. 그리고 그 놈의 본체는 나보다 강하다. 나는 신농의 화신으로서 널 돕고 있으나 그 존재와 싸우는 건 대가를 넘어서는 일이지. 이보다 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한가?]
" ... 그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본체라니."
나는 수인에게 말했다.
" 설마 놈이 [옛 지배자]라도 된다는 겁니까?"
[ 잘 이해했군.]
" ......!!"
진짜?!
나는 설마했지만 충격적인 사실이 직접 눈앞에 닥쳐오자 머리가 띵해졌다.
[옛 지배자]라니!
그렇다면 일개 인간이나 마도사의 범주에서는 볼 수 없다. 상대는 이미 우주적(宇宙的)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초월자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자]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지배자의 경지에 도달한 자 뿐, 필멸자인 내 힘으로는 절대 닿지 않는다.
나는 정신을 차리며 다시 물었다.
" 수인이여. 그 말이 사실이라고 쳐도... 우린 아직 놈의 본체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천하의 거신왕께서 어찌 적을 보기도 전에 자신보다 강하다고 단정짓는단 말입니까?"
[ 신적 존재들은 서로 대면하는 순간 서로의 격(格)을 파악할 수 있다. 상대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더욱 쉽게 알 수 있지. 그리고 본왕이 파악했던 본체의 힘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격을 지니고 있었다.]
" ......"
[ 전 우주에서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존재가 틀림없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 그 말씀은... 달마 본체의 힘이 삼황 신농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까?"
[ 그렇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우주적인 존재를 상대로 신농의 화신인 나로서는 이길 수 없다는 소리다. 아무리 내가 신농의 무력을 대변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어느 정도 합은 붙을 수 있겠으나 신격의 격차 때문에 권능이 딸려서 결국 지겠지.]
자신이 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독히도 담담했다. 그것은 거신왕 수인이 신격의 전투에 관해서 경험이 많으며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 달마의 힘은 최소한 삼황오제에 준한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 적절한 분석이구나.]
" 으... 으음..."
나는 아득해짐을 느끼며 침음성을 흘렸다.
' 설마... 달마가 삼황오제급의 [옛 지배자]일 줄은...'
달마가 원래부터 [옛 지배자]였는지, 아니면 창힐처럼 인간출신으로 지배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나와 수인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그다지 달마를 이길 승산이 높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설사 이길 수 있다 하더라도 수인 입장에서는 그런 사투(死鬪)를 벌일 이유가 없기에 더 이상의 조력을 거부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내가 대단한 공양물을 바쳤다 하더라도 신의 본체와 싸우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눈이 벌개져서 필사적으로 생각에 몰두했다.
' 안 돼...!! 이번 생엔 죽을 때 죽더라도 어떻게든 사대신기만큼은 얻어내고 죽어야 해!'
만일 지금 죽어버린다면 이 고생을 또 해야 한다.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왕을 뚫는 건 필멸자의 힘으로 거의 불가능하기에 또다시 신격의 조력을 얻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또 엄청난 숫자의 보물을 모아야 하고, 그 와중에 어떤 변수가 생겨서 일이 꼬일지 모른다.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은 엄청나게 운이 좋았으며 그 운을 [질서의 근원] 반고가 내려준 정향의 인과율이 뒷받침해줬기 때문이다!
이번에 죽는다면, 앞으로 100번을 죽어도 두 번 다시 외우주에 못 올 가능성이 있다. 사대신기를 얻지 못하고 죽는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얻지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행방만큼은 알아내야 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갖고있던 원시천반을 공손하게 두 손으로 내밀며 외쳤다.
" 원시천반을 드리겠습니다!! 이걸로 어떻게든..."
[ 안 된다. 그게 아무리 태고의 보패이자 복희의 창조물이라 하더라도 이미 상황은 도를 넘었다.]
수인이 냉담하게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 애시당초 아무리 계약이라 하더라도 [지배자]가 필멸자에게 내려주는 것은 언제나 호의일 뿐 의무적 관계가 아닌 것이다. 나, 거신왕 수인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본체 신농에게 큰 타격이 가므로 더욱 도울 수 없다.]
" ......"
수인이 사망하면 신농이 입는 피해가 무조건 더 크기 때문에 아무리 큰 공양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인 건가?
그렇다면 이제 공양을 해서 활로를 찾는 건 실패다. 이제 내 손에 남은 보물이라곤 목갑이랑 비등, 원시천반 뿐인데 원시천반도 단칼에 거절하는 판에 목갑과 비등을 줘봤자 무의미할 것이다. 이것들도 뛰어난 마도의 보물이긴 하지만 둘을 합쳐도 원시천반 절반의 가치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수인을 붙잡지 못하면 달마에게 덤벼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인데... 사대신기를 되찾는 건 엄두도 못 내게 된다.
정말 뭔가 방법이 없는 걸까?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던 중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말했다.
" ... 이 책을 바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이판사판이다!
'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나는 품에서 천암비서를 슥 꺼내서 수인에게 내밀었다. 이제 내게 남은 패라고는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 흠. 이건 마도서인가?]
수인은 천암비서를 받아서 촤르륵 하고 한 번 읽어보는 기색이었다. 그리고는 휙하고 내게 도로 던지면서 말했다.
[ 모르는 외계어군. 어느 은하단의 시골문명 마도사가 만들어낸 것인가? 나한텐 필요없으니 어디 버려라.]
따악
나는 수인이 던진 천암비서의 모서리에 이마를 맞고는 정신을 차리고 책을 집어들었다.
" ......"
어라...
이상한 일이었다. 창힐이나 요순은 천암비서를 읽자마자 기괴한 반응을 보이면서 책에 잡아먹혀버렸는데, 수인은 그냥 뭔 소리 하냐는 듯 쓰레기 취급한 것이다.
' 혹시 천암비서가 책 안에 놈들을 가두는 역할인가 싶어서 기대해 봤는데...'
뭐지?
창힐과 요순은 빨려들어가는데 수인은 왜 그렇지 않지?
' 빨아들이는 기준이 따로 있나?'
내가 내심 의아해하고 있을 때 수인이 말했다.
[ 할 말은 이걸로 끝이냐?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다.]
" 잠까아아안!! 여긴 외우주인데 어떻게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 주시자께서 아까 내게 말씀하셨다. 돌아가고 싶을 땐 언제든 돌아가라고. 아까 통과했던 영역으로 다시 돌아가면 나는 귀환 가능하다.]
휘익
수인이 등을 돌렸다. 이제 눈 한번만 깜박하면 수인은 진짜 떠나고 말 것이었으므로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도 모르게 외쳤다.
" 법 - 문 - !!!"
멈칫
수인이 공간이동으로 우주 너머로 사라지려다가 멈췄다. 차원의 문을 다시 손으로 밀어서 닫은 수인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무슨 법문을 말하는 거냐?]
" 무, 무생노모의 법문... 달마가 바로 그 법문을 제작할 겁니다!!"
[ 음...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건가...]
" 네!!"
나는 필사적으로 되는대로 이야기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 무생노모의 법문이 다 모이면, 어, 뭐냐 진공가향이 일어납니다!! 진공가향은 나쁜거라고요!! 그게 일어나면 큰일나서 막 다들 법문을 뺏을려고 한다던데, 거 뭐냐 우리가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횡설수설... 나도 내가 무슨 소리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든 이번 생에서 반드시 이뤄야 할 임무가 생겼기에 체면 가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말을 대충 수인이 알아들었는지 그는 멈춰서서 곰곰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그가 말했다.
[ 위화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이 세계는 우리 세계의 과거모습인 것 같군. 그리고 달마 또한 우리 세계에서는 [과거]의 인물일진대 여기서는 현재를 살고 있는 건가? 시간이동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말도 안되는 시공간의 거리... 그렇다면...]
수인은 생각하더니 이윽고 결론을 내린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군. 그럼 잘 있어라.]
" ... 네?!"
나는 급히 달려들듯 수인 앞으로 가서 방방 뛰며 외쳤다.
" 잠깐만요!! 법문이란 말입니다! 완성되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는 그 법문이라서 모든 [옛 지배자]들이 그 법문을 확보하려 한다는데, 수인님께서는 그 위험성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 당연히 알고 있다. 봉인되어 있을 때도 소식이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 또한 기회가 된다면 이 존재를 바쳐서라도 법문을 확보할 것이다.]
" 그럼 달마와 싸우면 되겠군요!"
[ 안 싸운다.]
" 아니, 대체 왜..."
[ 여긴 외우주이기 때문이지. 우주의 [바깥], 그 어떤 상식도 통하지 않는 장소.]
수인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 그러므로 여긴 우리 세계의 [과거]가 아니다. 겉모습만 비슷하게 생겼을 뿐 완전히 다른 세계. 어쩌면 우주의 법칙조차도 우리와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우리 세계의 법문이 아닌 것을 확보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법문의 상징성과 권능조차도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 ......"
[ 백웅이여. 네가 무슨 의도로 외우주에 왔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겠구나.]
" 잠깐..."
수인이 한숨을 쉬었다.
[ 잠깐이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그럼.]
파앗!
그 자리에서 수인의 모습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시간이 정지되어있던 공간이 원래대로 되돌아 왔다. 틀림없이 더 이상 나와 말을 섞기가 싫어서 외우주를 떠나기로 한 것이 분명했다.
" ......"
수인이 튀었다...
나는 순간 절망에 빠져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 으아아아..."
이제 다 끝장이다.
수인의 도움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정향의 인과율으로 밀어붙여서 달마와 싸워 이길 수도 있었을텐데, 이제는 달랑 맨몸으로 삼황오제급 [옛 지배자]인 달마와 싸워야하게 생긴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승산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보다 수십 배 낮을 것이다.
죽으면 편해진다.
죽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다시 시작하면 여기까지 오기 너무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곳에서 승산도 없는데 괜히 뭉기적거리다가는 달마에게 붙잡혀서 고문당하거나 다른 생물으로 개조당할지도 몰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는 그저 텅빈 눈으로 숨만 쉬는 상태였다.
촤촤촥
그리고 그렇게 꿇어앉아있는 내 목에 차가운 창날이 수십 개나 겨누어졌다.
파괴된 건물 너머에 숨어있던 소연(蕭衍) 황제가 버럭 소리를 쳤다.
" 저 발측한 괴인을 당장 포박하라, 근위대!!"
퍼버벅
근위대들의 발길질이 쏟아진 후 누군가가 내 팔을 뒤로 묶어서 포승줄을 매었다. 아주 단단하게 매었다고 확신한 건지, 근위대는 이윽고 나를 체포해서는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덜컹!
나는 철창 안에 투옥된 상태로 멍하니 앉았다. 양손양발에 차가운 쇠사슬이 매여져 있었으나 그런 걸 신경쓸 정신이 아니었다.
" ......"
역시.
이 곳 사람들은 무공을 못 쓴다...
보통 황궁에서는 근위대나 금의위같은 강력한 무사집단을 고위층 호위용으로 배치하게 되어있었는데, 당연히 그들은 대부분 무공의 고수였다. 그러나 방금 전 나를 제압하려고 근위대가 때리고 발길질하는 공격에서는 전혀 내공을 느낄 수가 없었으며, 나를 묶은 포승줄도 무림고수를 제압하기 위한 아룡삭(牙龍索)같은 게 아니었다.
즉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근위대는 무공을 모른다는 것. 지금 내 손발을 묶고 있는 쇠사슬도 그냥 내공만 한 번 떨쳐주면 바로 박살이 날 정도로 허약하다.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 하아..."
왜 굳이 잡혔는가.
그 이유는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거 이 세계의 진실을 확인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 사람들이 내공을 쓸 수 없다는 [진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셈이다.
'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왜 달마 시대의 인간세상에 사대신기가 있는지라도 알아내야 해.'
사대신기를 탈환해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정보만이라도 알아내야 한다.
계속 좌절해 있을수만은 없었기에 지금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동료들이 이어준 이 목숨을 함부로 포기하는 건 그들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후 전욱과의 단말을 연결해서 전욱을 불러보려 했다.
" ......"
안 통해.
마치 세계의 종말 당시와 마찬가지... 이 무반응이 뜻하는 건 아마도 전욱이 이 세계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 정말 수인의 말대로 이 세계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곳인가?'
그렇다고만 보기엔 뭔가 수상쩍은 점이 있었다.
나는 이 감옥에 갇힌 김에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얻었다고 생각하기에 끈질기게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뭘 해야할 지를 알 수 있었다.
" 원시천반이여."
촤르르륵
나는 눈을 빛내며 원시천반을 발동시켜서 괘수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직이 원시천반에 명령을 내렸다.
" 신투지존을 찾아내라."
천 년 전에 이미 외우주를 넘어왔던 그 존재.
신투지존만이 지금 상황의 단서가 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