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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921화 (919/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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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오랜만이라고?

나는 주시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존재는 말 그대로 거대한 눈(眼)이었다. 허무의 공간 속에서 하나의 눈동자가 떠올라 있었고, 그 눈동자는 눈꺼풀조차 깜박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허공에 눈만이 떠있는 것 같아서 괴기스러웠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 주시자시여... 저보고 하신 말씀이십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장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거신왕 수인이 어디에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어느 새 내 주위에서 아예 사라져 있었다. 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투구 위에 올라타 있었는데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으나 한동안 주시자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움직여보기로 했다.

' 혼돈이라고 해도 이젠 적응된 느낌이야.'

쉴새없이 존재가 뒤틀어지는 기분또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외우주에도 외우주만의 분위기같은 게 있는 듯 했는데 나는 어쩐지 그 파장에 맞추는 법을 알 것 같았다. 점차 나는 울렁거리던 기분이 사라지고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땅도 없는데 걸을 수가 있다. 나는 신기해서 한 걸음을 계속해서 내딛었는데 별안간 두 발이 쭉 늘어나더니 세상 끝까지 내려가는 걸 느꼈다.

" 헉!!"

뭐지 이건?!

내 다리가 엄청 길어졌...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당혹해했지만 어쨌든 다리에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고 계속 걸을 수가 있었다. 조금 더 걷자 팔이나 목이 죽죽 늘어나기도 했다. 환상이 아닌가 싶었지만 실제로 늘어나는 것 같았다.

너무 기묘한 경험인지라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주시자가 말했다.

[ 아주 잘 왔다. 여긴 윤회(輪回)의 서쪽이다.]

" ......?"

이번엔 또 밑도끝도 없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주시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시 요상한 말을 했다.

[ 중앙으로 갈 수 있다면 네 여정도 끝날 것이다.]

" 네? 무슨 말씀이시죠? 중앙에 뭐가 있는데요?"

[ ......?]

그러자 이번에는 주시자가 눈동자를 갸웃거리는 기색이었다.

설마 의아해하는 건가?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앗

" 허억!!"

주시자가 한 개의 눈동자를 또 떠올렸다!!

한 쌍이 된 눈동자가 묘하게 데굴거리며 내 등 뒤편을 쳐다보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주시자가 뭔가 알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 시간축이 엇갈렸구나. 헷갈렸다.]

" 시간축?"

뭔 소리여?

[ 조정해 볼까.]

주시자는 그 말에 따로 대꾸하지 않고는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떴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전신의 힘이 쫙 빠지는 걸 느꼈다.

" 으허...어어억!!"

뭐지?!

뭐야?!

나는 그와 동시에 내가 갖고 있던 내공이 모조리 소멸되고 동시에 음신지력또한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주시자가 나를 죽이려는 건가 싶었지만 그 순간 동시에 기이한 점을 깨달았다.

' 기, 기억이 가물가물...?!'

잊혀진다.

머릿속에 있던, 지금까지 수백 년 가까이 쌓아왔던 무공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술법능력, 모험의 기억 등이 싸그리 쓰레기통에 처박혀서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변해버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력감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잠시 후, 주시자가 말했다.

[ 최대한 맞춰봤는데 이게 맞을까나.]

" ......"

나는 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전생자의 감으로 뭔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거, 거울 좀..."

[ 그러마.]

치링

주시자가 친절하게 허공에 거울을 만들어주자,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제기랄!'

역시 그렇다.

첫 번째 삶 - 표사로 살다가 감기에 걸려서 산을 내려가다가 우연히 천암비서를 찾아서 들어갔다가 함정에 사망했던, 그 당시 중늙은이 이류표사 백웅의 모습이 있다! 나는 지금 주시자가 무엇을 했는지를 바로 알아채고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 주시자시여!! 이건 지금의 제가 아닙니다!! 과거의 저란 말입니다!!"

틀림없다.

주시자는 내 전생(轉生)을 거꾸로 되돌린 것이다! 방금 전에 느껴진 모든 상실감과 기억상실은 바로 전생동안 쌓아왔던 모든 결과물이 '없었던 것'으로 변하며 일어난 것이었다. 당연히 첫 번째 삶에서의 지혜와 힘이 고스란히 반영된 모습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 헷갈렸다는 게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안돼!'

그러자 주시자가 말했다.

[ 그런가. 너는 '몇 번째'인가?]

" 그건..."

나는 대답하려다가 문득 금기가 떠올라서 멈칫했다.

절대로 내 전생에 대해서 다른 존재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존재를 제외하고는!

당연히 주시자를 믿을 수 있는 존재라 볼 수는 없었고, 나는 머뭇거렸다. 상대는 이미 내가 전생자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 해도 금기를 지키는 건 다른 문제다. 내 반응을 보자 주시자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 아... 그렇겠군. 슬슬 기어오는 혼돈이 냄새를 맡을 때가 되었는가? 복잡한 시기에 있는 놈을 불러내 버렸구나.]

" ......"

[ 그럼 어림짐작으로 해 볼까. 한 1000번째 전생자로... 그 놈을 만나려 했던 거니까.]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기겁해서 외쳤다.

" 아, 아니 천 번...?! 무슨 소리를... 잠깐만!"

그러나 내 외침을 무시하고는 주시자는 이번에는 반대로 왼쪽 눈을 떴다. 그리고 오른쪽 눈을 닫았다.

[ 우주여. 일만 배 빨라지거라.]

후우웅

" ......!!"

갑작스럽게 내 몸에 내공이 가득 들어차더니 음신지력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무공의 기억과 경험도 되돌아왔지만 난데없이 술법의 지식과 경험도 방대해졌다. 그것도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수준이 아니라 엄청나게 자세하게 숙성되어 이해하고 있는 술법지식이었다. 마치 지선 망량의 술법지식을 다 녹여낸 것만 같았다.

피잉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대여섯 개의 신술(神術)이 더욱 떠올랐다. 그리고 내부의 음신지력이 더욱 팽창하더니 등 뒤에 여덟 개의 새까만 흑조(黑鳥)의 날개가 떠올랐으며, 눈에는 3번째 눈이 떠올랐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나는 내가 절대지경의 기술을 여러 개 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아수라의 적멸무극을 사용가능하며 신성(神聖)이 발현되기 시작했음을 알았다. 세피로트 6계의 균형이 내 안에서 싹트며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츠아아악

오제 제곡을 죽인 자의 표식이 양 손바닥에 만들어졌으며 신을 거부하는 자의 낙인이 이마에 찍혀 있었다.

성좌(星座)가 울부짖는다. 계약을 맺은 성징(星徵)이 등 뒤에서 은하의 힘을 가져오는 중이었으며 신성과 합쳐져서 나를 한 단계 위의 존재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양자법칙을 다스리는 과학도구가 내 몸에 흡수되어서 시공을 제어할 수 있게끔 했다.

으윽... 그만해!!

그만하라고!

이게 무슨...!! 이대로라면 난 내가 아니게 되잖아!

나는 극심한 짜증을 느끼며 노갈을 토했다.

" 그 만 해!!!"

움찔!

그 때였다. 주시자가 놀랐는지 움찔거리더니 그만 양쪽 눈을 다 뜨고 말았다.

파앗

휘리리리리릭!!!

나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옴을 느꼈다. 나는 급히 내 몸을 더듬었다. 내 기억을 점검해 봤지만 원래 그대로였다. 주시자가 내 전생을 '미래'로 빨리 감으려다가 중단하고 원래대로 되돌려 준 것 같았다. 아쉬운 거라면 살짝 미래의 전생으로 갔을 때 얻었던 권능과 힘조차도 모두 망각했기에 다시 떠올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며 말했다.

" 사람 그만 갖고 노십시오!! 대체 뭘 헷갈렸다는 말입니까!"

[ 후후... 그렇군... 또 다시 우주의 [분기]가 생긴 것인가? 그래서 네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본 것이군.]

" ......?"

[ 정식으로 사과하겠다, 전생자여. 그대이자 그대가 아닌 자와 이 곳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시간축이 헷갈렸구나. 원을 지켜보고 있으면 미래와 과거가 늘 헷갈리는군.]

나는 왜인지 즐거워하는 주시자를 쳐다보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걸 알 수 있었다.

' 알고 있다...'

틀림없이 주시자는 내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원한다면 내 전생을 빠르게 되감기하거나 무효화시킬 수가 있다!

지금까지 나는 이렇게나 절대적인 존재는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보아왔던 신격들은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한계라는 게 존재했는데, 눈 앞의 존재는 그런 게 없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전생이라는 걸 너무 쉽게 눈치챈 데다가 그걸 조종까지 할 수가 있다니!

' 이것이... 외신(外神)!'

[옛 지배자]들조차 신으로 모시는 존재!

주시자에게는 내 전생에 대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미 알고 있는데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내가 확신이 들지 않아서 머뭇거리자 주시자가 말했다.

[ 말해도 된다. 어차피 [기어오는 혼돈]의 영향력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니까.]

" 저... 정말입니까."

[ 나 주시자의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다. 그 자는 여기서는 부외자(部外者). 내게 간섭할 수는 없다.]

" ......"

약간은 안심되었다. 외신이 이름까지 걸었다면 이 장소는 정말 안전한 것이다.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는 질문했다.

" 주시자여. 당신은 제가 전생자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암비서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까?"

[ 천암비서라고 부르나 보지? 예전에는 #%&*^@&$^... 혹은 %^&@#&라고 불렀는데.]

" ......?"

[ 그 서(書)는 나타날 때마다 명칭이 달라진다.]

천암비서의 예전 이름은 외계의 언어였기에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로써 천암비서에 대해서 외신 주시자가 알고 있다는 게 확실해진 것이다. 나는 약간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 처... 천암비서의 정체를 가르쳐 주십시오!!"

어쩌면?!

이 정도로 대단한 절대자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나는 기대를 걸고 주시자를 쳐다보았으나 그의 대답은 간명했다.

[ 그건 네가 알아내야 한다.]

" 네?! 어째서..."

[ 그런 '규칙'이기 때문이지. 달리 말하자면 스스로 천암비서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건 너 뿐이다.]

" ......?! 이해가 안 됩니다! 정체를 아는데 알려주지 않는다니... 설마 당신이 천암비서를 만든 겁니까?"

[ 그건 아니다. 내가 천암비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외신에게 불가능한 일이지. 그건 마도서와는 전혀 다른 물건이다.]

" ......"

[ 상황을 네 지능에 맞도록 설명해 주지.]

주시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전생자여! 너는 거대한 우주의 바둑판에 말려들었다. 그리고 너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국(對局)을 하는 중이며, 나는 옆에서 그 바둑판을 구경하는 관객(觀客)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어오는 혼돈]도 내게는 절대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 ... 방관한다는 말씀입니까."

[ 그렇다.]

" 한 쪽이 반칙을 저지르면요?"

[ 지금 네가 하는 것처럼 말이냐?]

" ......"

[ 너 정도는 반칙이 아니긴 하지. 다만 보통 소소한 반칙은 그 서(書)가 직접 심판하곤 할 것이다.]

천암비서가?

나는 어리둥절해서 품속의 책을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연속으로 주시자에게 말했다.

" 그, 그럼 제 인과율의 특이점을 무마시켜주실 수 없겠습니까? 제가 이 곳에 온 것도..."

[ 알고 있다. 사대신기를 이용해서 결과적으로 특이점을 물리려는 게 아닌가?]

" 맞습니다."

주시자가 말했다.

[ 그럴 순 없다.]

" 네?!"

[ 아까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지금 네 행동은 바둑을 두다 말고 관객한테 한 수 물려달라고 몰래 부탁하는 셈이다. 말이 되느냐?]

" 어... 안 되네요..."

[ 흐음.... 다만 사대신기를 이 곳에서 찾을 기회 정도는 주겠다.]

" ......"

스스스스

[ 나의 옥좌에서 이만 나가라. 진정한 외우주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대신기는 알아서 능력껏 찾거라.]

주시자의 말이 끝나자 천천히 그의 눈동자가 사라지고 별바다같은, 혹은 별안개 같은 우주공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 이 우주공간에서 사대신기를 찾으란 말입니까!!"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수백 배는 더 어렵지 않은가!!

내가 외치자 주시자가 희미하게 웃는 말투로 말했다.

[ ... 도저히 666번 이내에 끝낼 상은 아니군. 어째서 '그'가 마지막에 한 게 이런 선택인지 더욱 흥미로워졌다.]

파앗!!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거신왕 수인의 투구에 앉은 채 멍하니 우주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위대한 존재와 이야기는 끝났는가?]

" 아, 그게..."

[ 이제 남은 건 사대신기를 찾는 것인가.]

" 그렇습니다."

방금 전 나는 뭔가 굉장한 정보를 얻은 느낌이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외신]이라 칭해지는 자들은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내 전생을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외신 주시자만큼은 그랬다. 또한 그들은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그저 먼산보듯 방관하기만 할 뿐이었다.

또한 천암비서의 정체에 대해서 한층 의문이 깊어졌다. 나는 어찌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 ... 이걸 믿어보는 수밖에."

나는 천천히 목갑에서 원시천반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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