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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우우우우
수인의 투구 안에 올라타서 외우주로 향하는 듯한 거대한 어둠의 통로를 쳐다보자,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선과 정신이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돈의 통로를 본 경험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눈 앞의 통로는 뭔가 특별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의 근원으로 향하는 듯한 친밀한 기분도 들었다.
나는 힐끔 옆에 있던 수해의 왕을 쳐다보았다. 수해의 왕은 얼굴이 혼돈으로 일그러져서 보이지가 않았는데, 그 모습이 왜인지 예전에 보았던 지배자를 연상하게 했다.
쿵...
시
거신왕 수인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세 걸음만 더 딛으면 외우주로 들어가는 셈이었는데 나는 생각난게 있어서 급히 말했다.
" 잠깐!"
쿵...
수인은 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아무래도 주어진 신농의 명령에 따를 뿐 나를 그다지 신경쓰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 수해의 왕에게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 빨리 하라.]
수인은 귀찮다는 듯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고, 나는 수해의 왕에게 말했다.
" 수해의 왕이여! 나는 당신과 비류가 원월천살법을 찾으러 이 세상에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소!"
수해의 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반응이 없어서 나는 쐐기를 박듯이 그의 반응을 유도하기로 했다.
" 그걸 찾는 이유는 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무예이기 때문이오?!"
[ ......]
처음으로 수해의 왕이 반응을 했다. 그는 마치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턱에 손을 잠시 갖다대고는 쿡쿡거렸고, 잠시 후 내 말에 대꾸했다.
[ 맘대로 생각하라.]
" 대답해 주시오!"
[ 필멸자여. 네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딱히 아니라고 말해두겠다.]
" 좀 자세히...!!"
[ 그럼 좋은 여행 되기를...]
슈욱
" 아앗."
수해의 왕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고, 거신왕 수인은 볼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외우주의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 간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츄와아악
항변할 사이도 없이 나는 마치 물에 뛰어든 것처럼 내 전신에 거대한 압력과 액체의 수압같은 게 짓눌러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신이 물에 젖는 것 같았고 폐가 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부글부글
' 컥... 이건...'
바다인가? 강인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억지로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의 눈 주위 근력으로는 이 중압에서 눈을 뜨는 것조차도 불가능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공을 불어넣어 몸을 강화시키며 겨우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수압이 팍하고 눈 안쪽을 찔러왔는데 호신기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즉시 눈알이 터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그르르르...
" ......"
바다... 이 곳은 바다같다.
다만 한없는 심연 속을 헤엄치고 있었으며 그 끝이나 수면 위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한계없는 어둠이었다. 나는 이 새까만 어둠 속에서 거신왕 수인의 투구 위에 발을 딛고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 이 액체는 뭐지?'
통상적이라면 바닷물이라 생각하겠지만 절대 보통 바닷물일 리는 없을 것이다. 호신강기와 음신지력을 두르지 않았다면 즉시 몸이 피범벅이 되어서 폭발할 정도의 엄청난 압력을 머금고 있었다. 또한 온몸을 뼛속까지 스미는 질척질척한 습기가 알게모르게 내 마음을 절망으로 이끌고 있었다.
쿠르르륵
거신왕 수인이 한 번 크게 헤엄을 치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한꺼번에 눈이 홱 돌아갈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튀어나갔고,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쿵
" 크윽."
엉? 말도 할 수 있네?
물에 적응이 되어서인지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신기했다. 나는 지금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 그렇군. 수인이 투구 주위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쳐주었고 그 덕분에 수인이 심연너머로 헤엄을 치는 충격에도 내가 죽지 않는거야.'
다만 방어막으로도 내가 죽지 않게 막아주는 게 전부로 보였고 실질적인 바닷물의 압력은 고스란히 내가 감당하는 듯 했다. 나는 입가에서 뽀글거리는 물방울을 만들어내며 수인에게 물었다.
" 거신왕 수인이여! 이 곳이 외우주입니까? 이 바다는 어디까지 가야하죠?"
[ ......]
" 수인이여! 대답 좀..."
[ 조용히 해라.]
거신왕 수인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움츠러들었다. 마치 전욱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듯한 압박감이었기에 더 이상 말을 하는 게 힘들었다. 나는 음신지력이고 뭐고 수인한테 한 방 주먹으로 맞기만 해도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설마 수인의 힘은 오제에 맞먹는다는 말인가?'
그렇게나 강력한 화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 하긴 서왕모의 예시를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하물며 같은 삼황이라면.'
내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인이 말했다.
[ 위대한 존재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중이다. 그 분의 부름에 따라서 찾아가는 중이므로 너는 조용히 하고 있는 게 좋을 것이다.]
" 위대한 존재? 그게 누굽니까?"
[ ... 이 외우주를 통제하시는 분이지.]
" 아."
나는 그 순간 수인의 말에서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유추할 수 있었다.
주시자(注視者)!
[외차원은 이 우주가 태초에 [아버지]의 뜻으로 창조되었을 때 발생한 시원(始元)의 혼돈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장소... 우주의 확장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별개의 차원이다... 그러나 그 혼돈 속에서도 혼돈을 관리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를 일컬어 주시자라고 존칭한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한 '눈'... 그 분께서는 외신(外神)으로 숭앙받는다.]
[외신 주시자는 다른 방법으로 들어온 존재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으나 정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문]을 통해 들어온 자에게 경의를 품으며 또한 도움을 준다고 한다. 외차원에서 사대신기를 찾고자 한다면 [문]을 정식으로 통과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생의 초반에 선지자에게 들었던 정보가 생각났다. 애초에 그 정보 때문에 이번 생에서 특이점을 피하고자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이 외차원까지 찾아온 것이다.
' 외신 주시자는 [문]을 열고 들어온 자에게 도움을 준다. 그리고 [문]이란 아오키가하라 수해... 내가 문을 정식으로 열고 들어왔기에 주시자에게 도움을 받을 조건이 된 것이고, 주시자는 거신왕 수인에게 자신을 찾아올 것을 명한 것이구나!'
거신왕 수인이 심연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이유가 확실해졌다.
그는 이 외우주에 도착하자마자 [주시자]에게서 계시를 받아서 찾아갈 곳을 알게 된 것이리라. 아무래도 나는 이 외우주에 너무 급박하게 찾아오게 된 탓에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던 모양이었다.
나는 생각이 정리되자 수인에게 말했다.
" 거신왕 수인이여."
[ 조그마한 인간이여. 너는 정말 궁금한 게 많구나.]
" ... 아까 그 수해의 왕이 나갈 때 문을 닫겠다고 했잖습니까. 그럼 되돌아갈 방법이 없을 텐데, 그 때는 놈과 싸워서 뚫고 나가야 할까요?"
[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 알 수 없다니요?"
[ 애초에 놈은 자기의 의지로 문의 개폐를 결정할 수 없다. 놈이 우리에게 문을 열어준 건 자신의 권한이 아니라 더욱 위대한 존재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 ......?"
수인이 나를 타이르듯 말했다.
[ 수해의 왕 따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니 너는 침착하게 기다리는 게 좋다. 이 곳은 그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협이 가득한 장소다.]
무슨 소리지?
싸워서 뚫고 나가야 하냐고 질문하니까 엉뚱한 대답을 들은 기분이다.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거신왕 수인이 말했다.
[ 이제 혼돈의 유해(遺骸)를 돌파한다.]
후와악
그 말이 끝난 순간, 나는 갑자기 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바닷물같은 게 썰물처럼 사라지는 걸 느꼈다. 방어막 바깥으로 물덩어리가 사라졌고 내 폐를 채우고 있던 물이 쿨럭거리며 입밖으로 토해졌다. 나는 기공을 끌어올려서 몸을 보호하며 빠르게 칠공에서 물을 토해냈는데 문득 그 색깔을 알아보고는 경악했다.
" 거... 검은색!!"
폐에서 토해낸 물도 눈코귀입에서 토해낸 물도 죄다 칠흑빛이다!!
당연히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나는 내가 물을 칠흑으로 따로 인식할 수 있는 게 '색깔이 있는 세계'로 진입했기 때문이란 것도 알아차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의 바다에서 광활한 성계(星界)의 우주로 도착한 것이다. 나는 음신지력을 크게 일으켜서 시꺼먼 물을 멀리 날려버리며 수인에게 말했다.
" 혼돈의 유해?! 우리가 지나온 심연의 바다가 그런 이름입니까!"
[ 그렇다. 태초에 발생했던 혼돈의 존재들이 전쟁을 벌이매, 그 끝없는 전쟁은 수억 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 전쟁이 끝나고 남은 혼돈의 찌꺼기들이 우주의 한구석을 채우게 되었으며 외우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고, 그 우주의 무덤을 혼돈의 유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 ......!!"
[ 내가 방어해주지 않았다면 너는 일반적인 성간(星間)보다 수백억 배 농밀한 혼돈의 점성에 묻혀서 그대로 혼돈의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방금 토해낸 것은 혼돈의 시체란 말인가!
' 크윽. 제기라알...'
기분이 더러웠으나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모험하면서 별별 일을 다 겪었으므로 비위 또한 마찬가지로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당장 내 몸에 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일단 버티고 보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수인에게 말했다.
" 수인이여. 당신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수인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 바보같은 질문이군. 우리 거신족은 태초부터 우주의 수십 조 광년 은하단을 활개치며 돌아다녔으며 우리의 문명수준은 너희 인간종족 따위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나 수인은 염제 신농의 화신으로써 그런 거신족에서 수십 억 년 동안 거신왕이었거늘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 ......"
[ 하긴... 너같이 하찮은 꼴을 보고 희희낙락하려고 [옛 종족]이 우리 모습을 본따서 인간을 만든 거겠지. 고약한 놈들.]
수인은 경멸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말투에는 오만함이 느껴졌으나 실제로 오만할 만한 지위였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주제를 돌리려고 우주를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수인에게 말했다.
" 수인이여. 저는 그동안 신적인 존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모험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대와 같은 존재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동안 어디 계셨던 것입니까?"
[ 그렇군. 너는 인간으로써 전욱의 사도가 된 존재였지.]
수인은 납득한 듯 하다가 대답해줬다.
[ 나는 신농의 화신이므로 그 공간에 함께 갇혀 있었다. 당연히 볼 수 없었겠지. 또한 나는 신농의 무력(武力)을 대변하는 존재이므로 더 강한 봉인이 걸려 있었다.]
" 아..."
[ 허나 내가 풀려나 있었더라도 세상일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인은 다소 염세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뭔가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고, 나는 더 이상 말을 걸면 수인이 짜증낼 거라는 걸 알아챘기에 잠시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나라도 많은 정보를 얻어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것저것 질문을 하긴 하지만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면 역효과란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빛조차 초월한 속도로 우주공간을 날아가던 수인이 문득 말했다.
[ 이제 곧 진정한 '경계'가 나타날 것이다. 너는 마음의 준비를 해 둬라.]
" 경계라니요?"
수인이 진중한 말투로 말했다.
[ 지금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외우주가 아니라 그에 근접한 공동(空洞), 우주의 구멍같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돌파할 장소는 문명을 지닌 필멸자들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경계... 세계의 [바깥]. 이제 곧 그 경계를 돌파하게 되면 모든 법칙이 풀어헤쳐지고 무(無)로 환원하려 할 것이다.]
" ......!!"
[ 경계를 넘는것은 나 거신왕 수인으로서도 처음이다. 너는 음신지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대비를 해라.]
경계!
우주의 '바깥'!
난생 처음 듣는 개념이었기에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이해가 안 되어서 수인에게 말했다.
" 엄청난 초과학을 가진 문명도 있지 않습니까? 어째서 문명을 지닌 필멸자는 [바깥]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 물론 우주의 대공동과 초은하단을 넘을 마도문명을 가진 자들도 있다. 그러나 '주시자'께서 그들의 외우주 탐사를 허락치 않았기에, 금기(禁忌)를 범한 자들은 문명째로 순식간에 소멸당하고 말았다.]
" 헉!"
[ 우리 거신족 또한 그 일로 데인 적이 있었지... 허나 이번에는 정식으로 [자격]을 얻어서 통과하는 것이니 괜찮으리라.]
주시자는 그 정도로 초월적인 기술력을 지닌 외계문명조차도 없앨 수 있단 말인가?!
여러모로 상상을 초월하는 느낌이었기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이윽고 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 진입한다!!]
위잉 -
지이잉 -
그 순간, 나는 빛나던 별빛과 우주의 공간이 통째로 사라지고 그저 백색의 공간이 천지간에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무(無)를 내 시야가 백색으로 인식할 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어마어마한 무력감과 함께 이 공간 속에서 나는 물론이고 거신왕 수인조차도 마치 벌레처럼 조그맣게 변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부조하는 존재감이 신경을 찢어발기면서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
이 기분은... 맞아.
'옥좌'에 처음 들어갔을 때 비슷한 기분이 한 순간 들었었는데, 그 느낌이 장시간 연장된 기분이었다.
아 아 아 아 아
마치 메아리처럼 존재가 비명을 질렀고, 수인이 '바깥'으로 나아갈 때마다 마치 수백만 개의 유리창에 비치는 것처럼 똑같은 존재가 수억 개나 복사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시야와 존재가 혼탁해지면서 갑작스럽게 내 내장의 위치가 제멋대로 뒤섞이며 신경가닥이 신명나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여긴 지옥.
지옥이다.
그저 혼돈에 잡아먹혀서 모든 게 사라지는 영겁의 지옥!
나는 이 와중에도 내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게 너무나 신기했다. 보통 인간이라면 옛날옛적에 미쳤을 텐데도 나는 아주 또렷하게 지금의 상태를 인지하고 심지어 재밌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을까?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랫만에 만나는구나.]
주시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