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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917화 (915/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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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황제의 수상쩍은 눈빛에 나는 찝찝함을 느꼈다.

' 음...'

지금 황제에게 말을 걸어볼까?

하지만 왠지 이 자리에서 출석해 있는 건 화신체가 아닌 듯 했다. 나는 짐작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염제에게 말했다.

"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이 옥좌에 출석해 있는 건 삼황오제의 본체이거나 화신입니까?"

[ 아니다.]

" 그러면..."

[ 이 곳에 나타나 있는 모습은 황제가 태초에 만들어낸 정령체(精靈體). 즉 황제가 회의용으로 만들어 준 특수한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몸뚱이에 의지만을 보내서 봉선의식에 참가하는 것이다.]

" ......"

그렇다면 전욱이나 여와를 천제단에서 불러냈을 때 흔히 나타났던 그 모습은 황제가 만들어 준 삼황오제 전용화신이었단 말인가?

' 아귀가 맞는군.'

여와가 반인반사로 소환될 때는 여와의 진짜 화신인 서왕모나 본체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었다. 어째서 일부러 그런 모습일지 의아해 했었는데 답은 간단했다. 그 모습은 여와가 만든게 아니라 황제가 만들어 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욱이나 제곡 등의 오제(五帝)가 인간의 고대제왕같은 모습을 띄고 있는 것 또한 황제의 의도일 것이리라.

나는 그 말에서 문득 깨닫고는 말했다.

" 그렇다면... 이 자리에 8인이 다 있다고 해도 삼황오제가 다 출석한 건 아니란 말입니까?"

[ 당연히 아는 줄 알았건만... 그렇다. 봉선의식용 화신에 삼황오제가 자신의 의지를 불어넣지 않으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 ......!!"

나는 삼황 중 여와와 복희가 안 좋은 상태이며, 요순이 소멸지경인데도 좌석 8개가 다 채워져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회의용 화신이 앉아있다 한들 본체가 조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황제에게 말을 걸어도 헛수고일 확률이 높아.'

그래서 전욱, 제곡, 소호 등은 황제에게 반기를 들 마음을 굳혔음에도 이 자리에서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리라. 어찌보면 삼황오제의 원거리 회합에 불과한 자리에서 황제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의도를 내비치는 건 바보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염제 신농과의 교섭이다. 그와 잘 이야기해야만 이 봉선의식이 끝난 후 삼제(三帝)가 나를 죽이려 하는 걸 막을 수 있고, 또한 앞으로 수해탐색과 흉신억제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머릿속에서 상황분석은 다 되었으나 나는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 제길.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머리 쓰는 자리에 왜 책사들이 옆에 없냐고...'

결국 제일 중요한 순간에 믿을 건 내 자신의 감 뿐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 ... 염제시여. 혹시 복희가 칠요의 계약해제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끔 되어 있습니까?"

이건 좀 확실히 알아두고 가야하지 않을까.

나는 염제가 대답해줄 줄 알았지만, 염제는 그저 옥좌에 앉아서 묵묵부답이었다. 침묵이 점차 길어지자 내가 다시 말했다.

" 염제시여. 혹시..."

[ 건방진 놈.]

" 네?"

[ 한두 번은 관용으로 봐주겠으나 아무것도 바치지 않은 채 몇 번이나 정보를 캐물으려 드느냐? 실로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 ......"

윽... 도를 지나쳤단 말인가?

내가 내심 쫄아있을 때 전욱이 말했다.

[ 염제여. 그 배신자와 정말 교섭할 생각이오? 그 자는 우리의 뒤통수를 쳤으니, 한 번 배신한 자가 또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소.]

그러자 염제가 전욱의 말에 훗하고 웃었다.

[ 후후...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는가? 너희의 계획 정도는 대충 짐작하고 있다. 본제와 관련없기에 그냥 방관할 뿐.]

[ 으음.]

[ 저 필멸자와 교섭하려는 건 개인적인 흥미일 뿐이다. 서툴게 끼어들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이다.]

[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지켜보겠소.]

짧은 대화였으나 그 대화 속에는 염제가 전욱 등이 황제를 치려하는 계획을 파악하고 있으며, 이 봉선의식 속에서 굳이 황제에게 그걸 까발릴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전욱 또한 그 뜻을 알아들었기에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않고 둘 사이의 교섭을 지켜보기만 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리라.

염제가 말했다.

[ 백웅이여. 본제는 네게 판단할만한 정보를 다 주었다. 옳은 결정을 내리는 건 너의 몫이다.]

" ......"

[ 네가 나와 교섭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다. 저 공물들이 탐나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원하는대로 하라.]

나는 염제와의 교섭이 까다롭다는 걸 알아챘다. 상대측에서 여유가 없다면 쉽게 이쪽의 의도대로 끌어당길 수 있으나, 염제는 절대자답게 심심풀이로 나를 갖고노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아직은 그 변덕이 내게 호의를 담고있어서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염제에게 죽을수도 있었다.

' 으으. 어떻게 하지. 어떻게...'

이대로 공물을 전부 염제에게 바쳐야 하나?

그렇게 하면 일타삼득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직전에 봤던 황제의 미소가 걸렸다. 게다가 이 상황은 책사들 중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기에 뭐가 옳은지 판단이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러던 중 문득 망량의 얼굴이 떠올랐다.

' 망량.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망량이라면 이 상황에 무엇을 선택했을까?

' ... 그래. 내가 망량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자.'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 이상 망량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戰友)다. 당연히 나만이 알 수 있는 망량의 특징이나 그의 버릇도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최고의 책사는 바로 망량이었기에 나는 그런 망량이 되었다는 가정하에 판단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망량이라면 - 일타삼득을 얻을까?

' 아냐. 그렇지 않아.'

망량은 이번 생에 급박하게 쫓겨서 최대효율을 추구하려고 급박히 움직이긴 했으나 그건 원래 망량의 성격이 아니었다.

원래 망량은 조금 돌아가더라도 큰 그림을 보고 큰 실수없이 움직이는 걸 선호했으며, 길이 아니면 나아가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원칙을 깨는 일이 있었다면 그건 언제나 나 때문이었다. 망량이라면 이 상황에서 눈앞의 이득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일타삼득을 한번에 얻는 건 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타삼득을 얻으려 하면 생기는 위험은 무엇인가.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어봤지만 언뜻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최악의 경우가 생각났다.

" ......"

아무리 그래도 설마?

너무 과한 것 같은데?

하지만 한 번 위험성이 생각난 이상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염제에게 말했다.

" 염제시여. 만일에 제가 거래하겠다 하면 저를 지켜주시겠습니까?"

[ 소원으로 빈다면.]

" 소원으로 해야만 합니까?"

[ 이상한 질문이군. 이 세계에 몰아치는 폭풍의 중심에 있는 자를 보호하려 들면 크게 성가시고 힘들 게 분명하거늘 아무 대가 없이 그런 일을 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역시!!

나는 속으로 꺼지는 한숨을 쉬었다. 염제가 [소원]을 써야 나를 호위해주고 외차원까지 가호를 불어넣어준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교환이 꼭 이득이 되는 게 아니다. 결국 일타삼득은 내 허상일 뿐인 것이다.

아니... 아직은 이득이다.

하나만 포기하면.

그 하나는 바로 인류의 생존이었다.

" ......"

내가 그냥 인간세상을 버린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모든 보물을 바치는 대신에 염제 신농에게서 칠요 계약해제에 도움을 얻고, 봉선의식의 [소원]으로써 내 호위와 외차원에서의 생존을 위임한다. 이렇게 하면 다 해결되지만 문제는 이럴 경우 지상을 침공하고 있는 흉신에게서 인간을 구원할 방법은 완전히 무(無)가 되는 게 문제였다.

망량이나 제갈사 등 책사들은 당연히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인류까지 지키는 건 말도 안 되므로 전생자의 전생을 믿고 일단 내 특이점을 해결하는 일에만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망량도 처음부터 5일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흉신을 막기만 할 뿐 인류구원의 계책은 생각지도 않았다.

인류가 고통받아서 멸망하기 전에만 사대신기를 찾아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정 뭣하면 내가 자살이라도 해 버리면 인류의 고통은 끝나는 게 아닌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류를 버리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 과연 내가 죽고 난 후의 세상이 어찌 되는지는 이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고 나서도 이 세상이 고스란히 굴러간다면?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는 최악의 악당이 되어버린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슈르르륵 -

갑자기 회의장에 웬 거대한 거북이가 나타났다. 그 거북이는 거북의 몸이었으나 용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느리지만 둔중한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오더니 영언으로 염제에게 말을 걸었다.

[ 위대하신 삼황오제 신농을 뵈옵니다.]

그러자 염제는 그 기이한 거북이를 아는척 했다.

[ 영귀(靈龜). 오랫만이구나.]

[ 봉인이 풀리심을 감축드리옵니다.]

염제는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 그대가 내게 굳이 찾아오다니 정말 기분이 좋군.]

영귀!

나는 그가 최고의 신수, 사령(四靈) 린봉귀용(麟鳳龜龍) 중 영귀라는 걸 알아채고는 놀랐다. 왜냐하면 저 거북이와는 구면이었기 때문이었다.

' 영귀가 내게 변용술을 가르쳐 줬었지!'

이번 삶의 초기에, 그가 인간인 척 하고 내게 변용술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고 액땜용 가면을 써서 나를 [무언가]에서 보호해 준 적이 있었다.

영귀는 힐끔 나를 보더니 말했다.

[ 귀인이여... 그대의 대흉(大凶)은 해결되지 않았음이니... 지켜보다가 이 세상을 위하여 나서게 되었소...]

" 대흉이라니."

[ ... 그대는 이 세상의 흔한 영웅호걸과 다른 존재일 거라 믿고 싶은 바램이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던 영귀가 천천히 염제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 염제시여. 저 자신을 인과율로써 바치겠나이다! 그로써 이 세계에 들러붙은 대흉의 주인, 흉신(凶神)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 뭐라고...]

[ 부탁드리옵니다.]

[ ......]

웅성

순간 염제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출석해 있던 다른 삼황오제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당황하는 공기가 내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영귀가 청한 부탁이 이례적이란 걸 알 수가 있었다.

염제 신농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듯 말했다.

[ 영귀여... 그대는 이 세계에 수십억 년 전부터 존재하던 원초의 정령이자... 그대가 세계의 중심에서 본디 응룡과 동격으로서 우리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 신격이다. 그대 또한 어떤 관점에서는 [옛 지배자]의 한 명이라 볼 수 있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쇠하지 않을 절대자로다.]

[ 그렇사옵니다...]

[ 그런 그대가... 고작 이 조그마한 세계... 그것도 필멸자 인간을 위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바치겠다 하는 것인가?]

[ 그렇사옵니다.]

[ 그건 마치 인간이 개미집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불에 뛰어들어 목숨을 바치는 듯한 어리석은 행위... 나는 같은 고위존재로서 그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한 신농이 문득 화륵 하고 자신의 눈두덩에서 백염(白炎)을 폭사하며 말했다.

[ 대답하라 영귀여! 그대가 자신을 번제로 불사르려 함은, 누군가 타 존재의 강압이 있었는가?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구나!]

[ ......]

[ 황제인가? 그가 그렇게 시키던가?]

[ 그렇지 않사옵니다. 황제는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영귀는 잠시 침묵하다가 서서히 대답했다.

[ 정향(正向).]

[ 뭣이.]

[ 위대한 정의의 인과율이 저를 이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머나먼 우주의 별을 바라보던 영귀의 말이 이어졌다.

[ 위대하신 어버이 반고께서 이 세계에 질서의 인과율을 주청하였고, 저는 겨우 구원을 얻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혼돈으로 뒤엉켜 필멸자와 불멸자들이 다같이 씻을 수 없는 지옥으로 빠져들어감을 어찌 기분좋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손을 놓은 듯한 반고께서 다시금 자신의 뜻을 펼치셨다면, 그 분의 손으로 창조된 피조물인 저는 모든 존재를 바쳐 이 세계를 지키려 할 따름입니다.]

그랬다.

사대신수 영귀를 움직인 것은 - 바로 정향의 인과율!

반고의 영향력이 지금 움직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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