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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그 순간이었다. 내가 신농에게 공양하겠다고 선언한 순간, 내 주변의 모든 인간과 사물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공간같은 칠흑의 암흑에 서 있었고, 내 앞에는 총 8개의 옥좌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황제의 뜻으로 모든 제왕을 이 자리에 부르노라.
옥좌 -
하나하나가 모두 거대했으며 자세히 보면 별(星)이 뭉쳐서 하나의 단면을 이루고 있었다. 실제로는 수만 개의 별이 응결되어 옥좌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그 성좌의 조화를 보고 있으면 크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쿠궁
동시에 옥좌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옥좌에 앉은 자는 총 8명이었는데, 그들 하나하나가 고대의 제왕의 형상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바로 알 수가 있었다.
' 삼황오제!!'
이 광경은 언젠가 본 적이 있다...!!
17번째 죽음!
그 당시에 나는 제갈유룡에게 패배해서 막바지까지 몰린 끝에 결국 천제단에서 칠요를 공명폭주시켜서 자멸하는 길을 택했다. 그 당시에 칠요공명 때문에 천제단이 터져나가면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졌고, 동시에 삼황오제가 옥좌에서 일어서는 환영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보는 것은 그 때의 광경과 거의 비슷했다.
옥좌 위에 앉아있는 제왕의 그림자는 내가 평소에 보던 본체나 화신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들은 일종의 [상징]처럼 보였으며, 말 그대로 신적인 위압감을 내뿜으면서 나를 관조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상석(上席)에 앉아있던 새하얀 용포(龍布)의 제왕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말했다.
[ 백웅이여. 나는 너희와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내게 공양을 바치겠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그 제왕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형상이 아무리 달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상대의 정체 정도는 금세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대신에 씨익 웃으며 새하얀 용포의 제왕에게 말했다.
" 염제(炎帝) 신농(神農)이시여. 싫으시다면 저는 황제나 복희, 여와에게 이 공양을 돌릴까 합니다. 저 또한 과히 권유하는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겠습니다."
[ ......]
그렇다. 8좌 중에서도 유독 높은 곳에 있는 삼좌(三座). 거기에 앉아있는 흰색 옷의 제왕은 내가 공양을 바치겠다고 한 염제 신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좌(座)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감히... 네가 본좌를 배신한다는 말이냐?]
나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칠흑색의 제왕이 앉은 옥좌로 시선을 옮겼다. 그 곳에서는 얼굴이 시꺼먼 화염으로 불타오르는 제왕이 나를 마치 잡아죽일 듯한 살기어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 봉선의식의 주재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요구한 것 뿐입니다. 신하를 마음대로 갈취하는 왕 밑에서는 더 이상 일할 수 없습니다. 제 소원 하나 들어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 크흐흐... 아주 까불어대는구나. 좋다... 이 의식이 끝나면 어디 얘기해보자.]
" ......"
나는 오제 전욱의 말에 움찔했다. 전욱이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 한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오랫동안 전생해왔어도 폭군 전욱의 협박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순 없었다. 나는 제곡과 소호 쪽도 한 번씩 쳐다보았는데, 그들 또한 나를 강하게 노려보고 있는 듯 했다.
[ 재밌군...]
[ 하하. 이렇게 간이 큰 놈은 처음 보는걸?]
소호는 되려 허탈한 듯 웃고 있었으나 그 또한 나를 죽이려는 흉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제곡과 소호, 심지어 전욱조차도 좌에 앉아있을 뿐 나를 공격하려 들지 않았기에 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 제갈유룡의 말이 맞았어.'
방금 전 제갈유룡은 만에 하나 삼제가 나를 무시하고 봉선의식의 특권을 짓뭉개버리려 들 경우, 제왕 신농에게로 줄을 갈아타는 책략을 제시했다. 나는 그렇게 할 경우 전욱이 바로 나를 죽이려 들 것이라 생각해서 걱정했으나 제갈유룡은 단호하게 말했었다.
[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 왜?]
[ 잘 생각해 봐라. 봉선의식에 타 신격이 끼어들어서 주재자에게 맘대로 해꼬지하거나 훼방놓을 수 있었다면 어찌 진시황과 측천무후가 멀쩡할 수 있었겠느냐? 그들은 너처럼 인간시절에 강력한 힘을 가진 탐색자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측천무후는 삼황오제가 아닌 [지배자]와 계약했다.]
[ 아!]
[ 봉선의식 중에는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도 의식계약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삼황오제라고 해도 섣불리 네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 공손헌원이 주재하는 대의식이라는 건 그런 뜻이지.]
그의 말대로 였다. 봉선의식에서 난데없이 내가 전욱을 배신한다고 해도, 공양절차가 이뤄지는 동안에는 삼제가 나를 갑자기 죽이려 들 수 없는 것이다.
긴장감이 가득찬 가운데 순백색의 제왕, 염제 신농이 말했다.
[ 우선 네 소원부터 들어보고 싶군.]
" 소원부터 말입니까?"
[ 네가 공양으로 바치려는 제물은 필멸자가 마련하기에는 굉장히 풍족하고 과하다고 할 수 있다. 본제는 이만한 공양을 받을 경우 그만한 대가를 주재자에게 내려줘야겠지. 그러나 본제는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기에 섣불리 대가를 주고받을 수 없는 처지이다.]
" ......"
[ 말하라, 백웅이여. 봉선의식의 주재자여. 너의 소원은 무엇인가?]
" 제 소원은..."
나는 소원을 말하려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말했다.
" ... 아 맞다, 신농 님. 지난번에 수해의 지배자를 물리쳐 달라고 부탁 드렸는데 그 일은 어떻게 된 건지..."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신농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아직 안 했다.]
" 네?! 그래도 약속을 하셨는데..."
[ 바로 해 주겠다는 얘기는 한 적 없다. 기다려라.]
" ......"
이, 이러기가 어딨냐!!
나는 신농의 봉인을 풀어주자마자 신농이 바로 수해의 지배자를 물리치고 멸해의 문을 뻥 뚫어줄 줄 알았는데, 여태 움직이지도 않았다는 소리란 말인가! 왠지 지금의 염제는 자신의 종족을 먼저 챙기는 기색이 강해 보였다.
하지만 신농에게 해달라고 독촉해봤자 말을 들을 리는 없다. 어차피 염제의 변덕과 호의로 성립된 부탁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하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네. 그리고 만일 제가 여기서 흉신에게 맞서서 인간을 구해 달라는 소원을 빈다면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
신농은 뭔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 거절하지. 그 경우에는 다른 자를 찾아봐라.]
" 예전의 대답과 같으시군요. 흉신과 맞서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 말입니까?"
[ 전에도 말했을 테지만, 흉신은 너무 위험한 존재다. 싸워서 이길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내게는 그 자와 종족의 명운을 걸고 부딪힐만한 이유가 없다. 그 이유가 고작해야 필멸자 종족의 성쇠에 불과하다면 더더욱 안될 일.]
" ......"
[ 네 소원이 그것이냐? 그렇다면 더 이상 본제와는 인연이 없겠구나.]
"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염제를 멈춰세우고는 고민했다.
' 제길... 봉선의식의 소원으로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군. 일반적인 공양의식보다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지만 이 의식 자체가 삼황오제에게 강제력은 없는거야... '
물론 삼황오제의 사소한 호의나 가호만으로도 필멸자에게는 차고넘치는 축복이기에 이건 봉선의식 자체의 문제점은 아니다. 내 목표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규격외일 뿐인 것이다. 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다가 염제에게 말했다.
" 염제시여. 혹시 이 질문에 대답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그 질문이 네 소원인가?]
" 아뇨..."
[ 염치없는 자군.]
" 윽."
나는 염제가 나를 비웃자 찔끔했으나 이내 염제가 말했다.
[ 좋다. 그대가 내놓은 공물은 신에게 내놓는 성의라고 보기에 충분하군. 질문을 허한다.]
나는 그 동안 줄곧 궁금했던 걸 염제에게 질문했다.
" 삼황오제가 모두 건재하다면 이 세계의 [종말]과 [계시]를 막을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삼황오제가 앉아있던 좌가 잠시동안 술렁인 듯 했다. 마치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듯한 반응이었고, 나를 살의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던 전욱조차 놀라워하는 기색이었다.
[ ... 그걸 어디에서 들었나?]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망설이다가 아무렇게나 둘러대었다.
" 신투지존이 말해줬습니다. 그 자는 천하제일의 도둑이라서 헌원검을 쫓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알아낸 듯 했습니다. 저는 그 정보를 믿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사실은 24번째 죽음 직전에 일요를 얻었을 때, 염제가 나를 불러서 전 인류를 성계로 이주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염제 본인에게서 겸사겸사 얻었던 정보였다. 물론 그런 전후사정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신투지존을 끌어들여서 둘러댄 것 뿐이었다.
[ 그 방법을 알기를 원하는가?]
" 네. 그렇습니다."
[ 좋아. 그 의천검을 바치면 가르쳐 주마. 그게 본제에게 유용하겠군.]
" 알겠습니다."
어차피 공물을 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의천검 정도는 이 상황에서 아까운 것도 아니었기에 냉큼 승낙했다. 어차피 칼 하나 있든없든 크게 달라질 상황이 아니었다.
후웅
염제는 손을 뻗더니 소매를 펄럭였고, 삽시간에 늘어난 소매는 갑자기 거대한 크기가 되어서 장내에 펼쳐져 있던 의천검을 빨아들였다.
이윽고 염제가 말했다.
[ 이 세계에 정해진 [종말]을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군가가 칠요를 모두 모아서 우리 삼황오제를 일거에 소환한다. 그리고 칠요로 얽힌 [옛 지배자]를 모두 소환한 상태에서 우리가 종말에 동의하지 않음을 만장일치로 합의하는 것이다. 동시에 칠요 또한 모두 계약해제가 된다. 그러면 종말은 최소한 1만 년 이상 유예되리라.]
" ......!!"
[ 칠요를 일단 모으는 것이 전제가 될 것이다.]
뭐라고?!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소리였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 뭐... 뭐라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 왜 말도 안 되는가?]
" 칠요를 다 모으게 되면 칠요의 시련에 도전하여 결과적으로 수호자를 뚫고 일요를 손에 넣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런 길이 있다는 얘기는 그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염제가 비웃듯이 대꾸했다.
[ 당연하지 않은가. 그건 황제가 나중에 만든 별개의 길이니까. [인간의 왕]같은 건 칠요를 만들 당시에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 네?"
[ 칠요를 다 모았을 때 너희 필멸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황제의 시련에 도전하여 [인간의 왕]이 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칠요를 계약해제하여 종말의 유예로 가는 길을 택하는 것... 그러나 후자를 택한다 한들, 우리가 종말의 유예를 원하지 않는 이상 무의미하지 않겠는가?]
" ......"
[ 필멸자라면 당연히 승산없는 도박보다는 [인간의 왕]이 되길 원하겠지.]
맞는 말이었다. 칠요를 이용해서 삼황오제와, 그 짝이 되는 [옛 지배자]를 다 소환한다고 한들 - 저 계약해제는 삼황오제가 적극적으로 종말을 유예하려 든다는 상황이 전제가 되었다.
' 그래서 전승이 안 되었던 건가?'
필멸자가 뭔 수를 쓰든간에 삼황오제의 의사가 없으면 애초에 무의미한 일이다. 설령 진시황이나 측천무후가 이 사실을 알았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으리라. 그들은 [인간의 왕]을 택할지언정 삼황오제 본인의 의사에 따른 칠요의 계약해제라는 도박을 택할 자들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압도적인 불합리를 깨닫고는 외쳤다.
" 원하지 않는다고요?! 어째서! 칠요의 계약을 해제하면 삼황오제 또한 자유가 되는 게 아닙니까? 왜 종말을 유예하기 싫어하십니까!"
[ 그 계약은 [계시]를 기다려 이 세계에 우글거리며 모여있는 수천 마리의 [옛 지배자]와 일일이 전쟁을 벌이기 싫어서 맺어놓은 평화조약이다. 가만히 [종말]과 [계시]를 기다린다고 우리에게 불이익도 없는데 뭐하려고 무한의 싸움터를 열겠는가?]
" ......"
[ 생각해 보라. 칠요의 계약을 해제하고 종말을 유예한다는 진짜 뜻은... 우주의 섭리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강림을 거부하고 1만년 이상 지배자들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 우리가 필멸자, 그것도 고작 인간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하겠는가?]
" 그... 그건."
내가 말문이 막히자 염제는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서 앉았다.
[ 또한 종말 이후에 우리 삼황오제는 이 조그마한 행성에서 풀려나서 은하계를 누빌 수도 있다. 우리 개개인의 힘은 전 우주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이니,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그렇게 말한 염제가 말을 이었다.
[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군. 이미 삼황의 쌍좌가 비어버린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칠요의 계약 또한 위태하며 흉신이 침략해온다면... 본제는 칠요의 계약을 해제하고 종말을 미룰 의사가 있다. 먼저 협정을 거스른 건 흉신이니까.]
" 흠."
[ 그 경우 삼황오제가 합심해서 흉신을 몰아낼 수도 있으리라.]
나는 염제의 말에서 뭔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 보물을 바친다면 칠요의 계약해제를 도와주시겠단 말입니까?"
염제가 은근하게 말했다.
[ 그렇다. 이미 네가 칠요를 공양한 것 같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나머지 놈들을 힘으로라도 설득해 주지. 그리고 수해의 지배자라는 놈도 한방에 쓰러뜨려 주겠다. 어떤가?]
" ......"
[ 인간세상에 남은 칠요는 지금 네 능력이면 어떻게든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나는 크게 혹하는 느낌이 들었다.
' 어라... 이거... 설마 이번 생에 한꺼번에 다 해결되는 거 아냐?'
특이점은 미루고, 세상을 흉신에서 구하고, 동시에 종말까지 유예해서 인류를 구원한다!
말 그대로 일타삼득(一打三得)!
잘만 하면 염제 신농의 도움으로 이번 생에 내 최악의 과제를 전부 다 끝내버리고 홀가분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 어쩌면... 그래... 특이점을 몰아내는 게 급선무이긴 하지만... 사대신기를 찾는데 힘을 빌려달라는 것까지 [소원]으로 협상을 하면 잘만 하면!!'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싸아아악
나는 뭔가 싸늘한 느낌이 들어서 제일 상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금색 용포의 제왕이 팔짱을 낀 채 아까부터 말 없이 나를 주시하는 게 보였다.
기분 탓일까?
그가 웃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행동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