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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삿갓을 쓴 무사는 계속해서 방을 뒤지다가 약 한 식경 후 나가버리려 했다. 그런데 놈은 이 공간의 법칙을 모르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발판을 밟아버리는 듯 했다. 일직선으로만 밟는다면 함정이 발동하지 않지만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는 무성의함 때문에 이미 함정은 발동 직전에 와 있었다.
' 어어?'
쿠콰쾃
그 순간 발판 위의 시간이 정지해버리는 함정이 발동했다! 삿갓 무사는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갇혀버리고 말았고 놈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중력이 수천 배가 되는 함정과 강력한 독액의 파도가 동시에 덮쳐왔다. 나라고 해도 저걸 당하는 순간 죽는 것 외에는 답이 없으리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시간정지가 풀리는 순간 놈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허억."
쿠구구궁
삿갓무사는 그대로 독액의 파도에 휩쓸려가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놈의 삿갓이 허공에 날았다가 떨어졌다.
" ......"
주, 죽은 건가?
저 괴물같은 놈이 이렇게 허무하게?
직전에 놈이 회피하거나 막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평범하게 죽은 듯 했다. 아무리 봐도 독액의 파도에 피와 살, 뼈가 동시에 녹은 형상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죽어서 고통은 그다지 느끼지 못했겠지만 끔찍한 죽음인 건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명경 안에서 튀어나와서 놈의 삿갓을 회수하려 했다.
" 하앗!"
이게 저 놈의 단서다! 어떻게든 가져가서 분석해야 해!
하지만 내가 손을 뻗어서 가져오려는 순간 삿갓은 번쩍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저 끔찍한 독액에도 전혀 녹지 않았던 삿갓이라서 독액 위에 둥둥 떠 있었는데 잡아채는 데 실패한 것이다.
" ... 쳇."
정체를 알아내는 건 실패한 건가?
나는 한숨을 쉬면서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잘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귀졸이나 귀장 등 이 염라부의 수십만 괴물들을 혼자서 회친 놈이 함정에 평범하게 당해서 죽는단 말인가?
물론 이 전륜성왕의 방 내부가 인세에 찾아볼 수 없는 극악한 함정이긴 했다.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독액의 파도와 수천 배 중력이 동시에 덮쳐오면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살아날 수 없으리라. 그렇다 해도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힌 놈의 죽음이라기엔 뭔가 맥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 뭐랄까... 익숙하다. 어째 가진 힘에 비해 어수룩한 느낌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저렇게 괴물같은 놈이 어수룩해서 죽을 리가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망량에게 통신해서 상황을 보고했다.
[ 망량. 놈이 죽었소.]
[ ......?]
망량 또한 영문을 모른다는 반응이었으나 이내 내 설명을 듣고는 말했다.
[ 죽은 게 확실한지 모르겠군. 이혼대법을 이용해서 혼의 기척을 확실히 탐지했소?]
[ 그렇소. 화안금정으로도 확인했소. 놈은 확실히 죽었소.]
[ 독액의 파도에 휩쓸렸다면 시신을 찾을 순 없겠군... 그럼 일단 돌아오시오.]
파앗!
나는 잠시 후 현세의 망량 앞에 서 있었다. 망량이 파천일월선을 사용해서 파천의 가호를 써서 나를 저승에서 소환해낸 것이다. 망량은 약간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으나 내게 말했다.
" 잘 갔다왔소, 백웅."
" 이제 남은 건 이틀인가?"
" 그렇소. 이제 우리가 갈 곳은 금오도... 쿨럭쿨럭!!"
망량이 갑자기 기침을 하더니 피를 토했다. 나는 놀라서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 괜찮소?"
" 음... 역시 아무래도 난 며칠 내로 죽을 듯 싶소. 한계가 빨리 다가왔군."
지독할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 걱정해줄 필요 없소. 내 죽음은 이미 확정되었으니 다음 대안을 마련했소."
" 확정되었다니?"
내가 망량의 말에 당황하자 망량이 말했다.
" 당신도 알다시피 스승님의 가호인 파천의 가호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나 다름없는 최강의 가호. 나는 지금까지 그 힘을 너무 많이 사역했고, 이제 한계에 다달았소. 이미 죽음은 피할 수 없기에 내 후임을 정해놓았소."
" ......!!"
" 후임은 당신도 알다시피 사제가 될 것이오. 그 외에는 자격있는 이가 없소."
나는 뭐라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망량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제 와서 내가 망량을 살릴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말했다.
" 이혼대법! 당신의 혼백을 뽑아서 인형에 이식시킨다면 계속 살 수 있을 것이오."
" 숙부가 나서지도 않겠지만, 대성에 이른 이혼대법으로도 무리요. 아버지의 도움으로 초상기인을 써도 무의미하오."
" 어... 어째서."
" 내가 가호를 많이 써서 죽는다 함은 인과율과 혼력(魂力)을 과하게 써서 내 존재 자체가 고갈되었다는 뜻이오. 고갈되어 말라비틀어진 혼을 인공육체에 옮긴다 한들 하루도 되지 않아 죽고 말겠지."
" ......"
" 백웅. 부탁이오. 내가 죽으면 이 파천일월선을 사제에게 전해 주시오."
슬며시 파천일월선의 손잡이를 내 쪽으로 내미는 망량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파천일월선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 망량선사는 전능하다고 하면서도 당신 하나 살리지 못하는군."
" 스승님은 딱히 전능하지 않소. 세상에서 가장 전능에 가까운 존재 중 하나일 뿐. 그리고 나 하나를 살리고자 균형의 추를 기울이는 건 도리어 내 쪽에서 사양일 것이오."
" 결국 제자인 당신조차도 벌레처럼 여기는 게 아니오?"
" 그렇다 해도 할 말은 없소만. 실제로도 그 이상의 차이가 있으니..."
" 후우."
나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망량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무슨 수를 써도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한 것이리라. 몇 번이고 망량의 죽음을 보아왔지만 새삼 또다시 봐야한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전신을 덮쳐 왔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할까.
이젠 꽤 강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아직도 신에게 대항하려면 역부족인 걸까.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격정적인 울분에 마음이 불타지 않았고, 그저 우울함과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정적인 족쇄가 되어서 가슴을 얽어매고 있었다. 했던 말을 또 하는 셈이었고 의미없는 감정소모라는 걸 마음속에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여러 번의 전생을 거치면서 생긴 변화일지도 모른다. 나는 말없이 망량을 쳐다보다가 있는 힘껏 미소를 지으려 했다.
[ 그냥 한 번 웃어.]
제갈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
그러나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감정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우울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개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웃을 수가 있단 말인가? 웃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 괴롭다.
머릿속이 안개에 갇힌 것 같다.
' 웃을 수가 없어. 제기랄...'
이딴 게 인생이란 말이냐.
이 우울함을 극복하려면... 어떤 힘을 얻어야만 하지?
내가 멍하니 있을 때 망량이 말했다.
" 마지막으로 금오도의 보물을 얻고 나서 백련교의 제단에 숨겨져 있는 법문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될 것이오. 이틀동안 될 지는 모르겠지만 차분하게 해 봅시다."
" ... 알았소. 금오도의 보물이라면... 그 알을 말하는거구려."
나는 기억을 살려서 대꾸했다.
금오도의 보물.
그건 분명히 예전에 금오도를 공격할 때 진소청이 뜬금없이 찾아냈던 의문의 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알의 정체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선지자는 그 알을 보자마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서 큰 대가를 내주었다. 분명히 귀한 물건이 틀림없기에 망량은 그 알을 얻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 그렇소."
" 금오도의 십천군이 그 장소에 계속 머물고 있으니 얻기가 쉽지가 않은데."
난관은 이것이다.
금오도 자체도 강대한 술법으로 봉인되어있어서 진입하기 쉽지 않은 이계인데다 비등으로 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금오도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알이 있으므로 잠입이 매우 어려웠다. 온갖 술법장벽과 함정으로 보호받는 곳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예전에야 다 때려부수며 전진했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우리가 금오십천군과 정면으로 전쟁할만한 여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러자 망량이 말했다.
" 이번 보물입수행의 동선을 정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오. 보물을 얻는 순서에 따라서 난이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오."
" 응?"
" 황천릉의 능력을 잘 생각해 보시오."
나는 망량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문득 깨닫고 입을 벌렸다.
" 아...!!"
" 이제 깨달았나보군."
" 그, 그러면 쉽게 얻을 수 있겠군."
" 금오도에 진입하는 게 문제겠지만 그건 내가 도와주겠... 소. 쿨럭!!"
망량은 크게 피를 토하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번의 토혈은 심상치 않은 듯 그는 잠시 동안 정신을 잃은 듯 했다. 그러나 마지막 기력을 다해서 외쳤다.
" 원시천반을 써서 위치를 특정한 후 요새에 진입하시오!"
" 알았소!"
" 반드시... 얻고 오시오!"
파앗!!
잠시 후 나는 원시천반을 사용한 후, 망량의 파천일월선의 힘으로 차원결계를 무시하고 금오도의 심장부, 십천군의 요새 내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황천릉을 휘두르며 주문을 외쳤다.
" 황천릉이여, 내 몸을 감싸라!"
휘리릭!!
황천릉이 내 몸을 감싸는 순간 요괴선인 동천군(董天君)이 갑자기 숨 두어 번 쉴 순간이 지난 후 공간이동으로 근처에 나타났다. 동천군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 흐음... 뭐지... 분명히 인간의 형상과 기척이 느껴졌는데 갑자기 사라졌구나!]
" ......"
[ 이봐, 원천군(袁天君)! 네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 못 봤나?]
동천군이 내게 말을 걸어오자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 못 봤는데..."
[ 정말 못 봤나? 어렴풋이 천리안으로 보니 못생긴 인간사내였는데... 지독히도 못생겼기에 잘못 봤을 리가 없어!]
" ... 못 생겼다고?"
[ 그래!! 그렇게 못생긴 인간꼬맹이는 처음 봤어!]
나는 이를 빠득 갈면서 대꾸했다.
" 크윽... 그, 그래 못생겼나 보군... 헌데 못 본 사이에 인간의 미적 관념에 관심이 많아졌나 보군!!"
[ 흐후후...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난 원래 인간세계에 오래 있어서 대충은 알고 있어. 아무튼 은신술법으로 사라졌나본데 찾아내면 잡아죽이게.]
" 그러지..."
후웅
동천군이 술법을 써서 다시 사라졌다. 나는 내 몸을 칭칭 감은 황천릉이 전혀 움직임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중얼거렸다.
" 진짜 대단한 보물이군..."
황천릉.
본디 황천릉이란 저승제일의 존재인 전륜성왕의 비밀 행차를 위해 바쳐진, 저승제일의 직사(織士)가 만들어낸 최고의 직물이었다. 전륜성왕이 지옥시왕이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
그런 만큼 엄청난 능력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황천릉을 두르고 있는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는 모습으로 인식되며, 친밀한 동료의 모습으로 보이게끔 되어 있었다. 게다가 위화감이 극도로 희석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요괴선인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십천군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속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황천릉을 써서 삿갓무사에게서 도주할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위험해서 시도할 수가 없었다. 만일 삿갓무사가 천하에서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모두를 적으로 생각하는 놈이라면 황천릉을 쓰더라도 문답무용으로 베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곳은 십천군의 요새였고 십천군끼리는 면식이 있어서 바로 공격할 리가 없었기에 황천릉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걸로 의심받지 않고 요새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찌보면 내가 가면을 쓰는 능력의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게 황천릉이었다. 비록 모습을 빌린 상대의 능력을 빌려오는 건 할 수 없으나, 내 가면술로는 결코 십천군정도 되는 존재를 속일 수가 없었다.
' 내가 가면을 써서 십천군 행세를 했다면 바로 알아채고 공격했겠지...'
단순히 변신과 환혹이라는 면에서 친다면 황천릉이 압도적으로 내 기술보다 나았다. 나는 새삼 황천릉을 잘 얻었다는 생각을 하며 원시천반으로 아까 확인했던 장소로 향했다.
저벅 저벅
나는 걸어가던 중에 금광성모(金光聖母)를 발견하자 움찔했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 여기엔 무슨 일이냐 원천군?]
" 동천군이 말하길 못... 생긴... 인간이 침입했다더군. 찾아보던 중이야."
[ 그런가... 여기에선 내가 찾아볼 테니 돌아가라.]
" 어?"
[ 이 곳은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장소다. 내가 담당하는 구역이란 건 알고 있겠지?]
" 물론 알고 있지..."
이런, 곤란하게 됐군.
동료인 걸 의심받지는 않지만 십천군도 들어갈 수 없는 장소가 있는 듯 했다.
' 쳇... 알이 있는 장소는 틀림없이 저 안쪽인데...'
여기까지 와서 무력으로 돌파해서 달아나야 하나?
나는 얼쩡대면서 금광성모에게 말했다.
" 이봐. 못 찾으면 네 책임인 거 알아?"
[ 알고 있다... 이만 꺼져라...]
" ......"
태도가 강경해서 바꿀 것 같지 않다. 나는 고민하다가 망량에게 순어구로 말했다.
[ 망량. 난관에 부딪혔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차 말했다.
[ 망량. 듣고 있소?]
잠시 후 망량의 목소리 대신에 다른 목소리가 순어구를 통해서 내게 전달되었다.
[ 백웅. 알은 포기하고 되돌아와라.]
[ ... 제갈유룡?]
순어구를 대신해서 받은 것은 제갈유룡인 듯 했다.
[ 그렇다. 아쉽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지원해줄 여력이 없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급히 되돌아와라. 거기서 무리하다가 네가 죽으면 큰일난다.]
[ 무슨 소리야. 망량의 파천의 가호를 쓰면서까지 여기에 왔는데...]
[ ......]
이어진 제갈유룡의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 방금 전 망량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