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
진공가향(眞空家鄕)
우우웅
지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거신 공공의 인도에 따라 염제 신농의 봉인지로 왔다. 제천대성이 나인교주와 싸워서 무사할지 걱정되긴 했으나 그의 승패를 일일이 따질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신농을 깨우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 예전에 이 곳에 와본 적이 있었지...'
공공은 내게 말했다.
[ 그대들, 신의 사도들에게 말할 것이 있다.]
좌중의 이목이 공공에게 쏠렸다. 공공은 꽤 힘을 회복한 듯, 천계공략 전보다 약간 덩치가 커진 상태였다. 그는 나와 망량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했다.
[ 먼저 내 주군의 봉인해제를 위해 전력을 다해준 것에 감사를 표한다. 나는 절대로 그 은(恩)을 잊지 않을 것이다.]
" 공공.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군."
공공이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 허나 내 주군이 풀려난다 하더라도 흉신과는 싸우지 않으려 할것이다.]
" 무슨 근거인가?"
[ 과거 대전(大戰)에서 주군과 황제 공손헌원은 수 차례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그 격렬한 대전 속에서도 거신족과 만신전은 암묵적으로 전쟁의 법칙을 정해서 지켜왔다. 그 법칙이란 바로 흉신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었다.]
" ......"
[ 흉신은 굉장히 위험한 존재다. 그가 잠들어있는 동안 괜히 건드리면 누구든 피를 보게 되어 있다. 주군의 측근인 나는 그 분께서 얼마나 흉신을 경계하는지 알고 있다. 더욱이 주군께서는 새로이 우리 종족을 규합하고 영도하셔야 하니...]
" 거신족을 다스리기도 바쁜 상황에서 강적과 싸우려 하지 않을 거란 말이군."
[ 주군의 힘을 빌려 작금의 상황을 수습하려는 그대들의 계획을 알겠으나 헛수고가 될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망량이 대꾸했다.
" 이상하군. 굳이 그걸 우리에게 말해봐야 그대나 주군에게 이득은 없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신농의 봉인해제를 포기하고 물러날 가능성만 높아지는 이야기지. 그런데도 어째서 일부러 그 사실을 말해주는 거지?"
공공이 무겁게 말했다.
[ ... 말했듯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입을 닫고있는 건 후안무치한 행위라 여겼다.]
" 그렇군. 의리의 차원인가."
망량은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 백웅. 어쩌겠소? 신농의 봉인을 풀지 않는다면 내 파천일월선의 힘은 많이 아껴질 것이오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안될 소리. 여기까지 온 이상 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없소. 설령 신농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를 풀어놓겠소. 그래야만 현재의 상황에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 맞는 말이오."
처억
망량이 파천일월선을 들어서 회색의 달을 겨누었다.
" 그럼 지금부터 삼황 염제 신농의 봉인을 해제하겠소!"
우우우우우!!
파천일월선 끝에서 시꺼먼 기운이 마치 새처럼 변해서 큰 파동을 떨치며 날아갔다. 한참을 날아가던 검은 기운은 회색의 달에 도달했고, 잠시동안 허공에 물방울이 퍼져나가듯 무형의 파장이 울렸다.
이윽고 회색의 달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회색의 달이 떨어지면서 은은한 어둠에 잠겨있던 세계가 더욱 더 짙은 어둠으로 변했고, 급기야는 칠흑같은 밤으로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시꺼먼 밤의 세계에서 환한 빛이 수평선 끝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파아앗
태양이 떠오른다!!
그리고 태양과 함께 수평선이 이글거리며 끓어올랐고, 마치 수평선 너머에 절벽이 있는 것처럼 거대한 화염의 손이 나타났다. 그 손이 바다 전체를 누르면서 거대한 폭염이 세계를 밝히기 시작했다. 손의 주인은 그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성공했소."
" 그럼 저 존재가..."
" 염제 신농이오."
일전에 봤던 모습과 달랐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염의 거신이라는 건 짐작이 갔지만 아직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예전에는 마치 오제들처럼 고대의 제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염제 신농의 화염은 다른 색깔을 품지 않은 순백(純白)의 은염(銀炎)이라 전욱의 불꽃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잠시 후 염제 신농의 영언이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 그대들이 날 풀어주었는가...?]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 그렇습니다. 저는 오제 전욱의 사도, 백웅. 그리고 옆에 있는 건 망량선사의 사도인 망량입니다!"
[ ......]
" 감히 부탁드립니다. 현재 흉신이 천하를 범하여 낙양에 있는 강대한 마의 봉인을 풀려고 합니다! 그 자를 막도록 힘을 빌려 주십시오."
[ 여와는 죽었는가.]
" 죽지는 않았습니다. 가사상태에 빠졌습니다."
[ 역시 그랬군...]
나는 대답을 하면서 신농이 여와의 상태를 짐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신농의 봉인 중 대부분은 여와가 펼쳐놓았기 때문에 여와가 큰 중태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봉인을 해제하기 좋은 때였기 때문이다. 신농이 말을 이었다.
[ 나의 권속, 공공이여... 너 또한 저 자들에게 구원받았느냐?]
[ 그렇습니다.]
[ 이리 오라.]
슈욱!!
공공은 갑자기 수평선 너머로 날아가더니 태양에 몸을 날렸다. 태양 속으로 스며든 공공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모습은 마치 신농이 공공을 흡수한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신농이 다시금 말했다.
[ 공공이 말한대로 본제는 너희를 도울 생각이 없다.]
" ......"
[ 허나 그대들은, 얄팍한 수로 나를 속박하려 들었구나... 이름을 걸고 계약하여 내게 흉신과 싸울 것을 강제시키려 들었느냐? 봉인을 다 풀고 싶으면 투견처럼 본제에게 싸울 것을 요구하려 했느냐?]
아차!
아무래도 공공이 신농에게 흡수되면서 그의 기억 또한 신농에게 흘러들어간 모양이었다. 공공은 계속 우리 곁에 있었으니 우리 계획을 보고 들었으리라. 하지만 이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으므로 망량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 진정하십시오. 그건 어디까지나 전욱을 설득시키기 위해 꺼낸 말이었습니다."
[ 그런 것 치고는 본제의 봉인을 2할만 풀어둔 상태군. 나머지 8할의 봉인을 풀게 하고 싶으면 흉신을 토벌시키는 약속을 하게 만들려는 게 아닌가?]
" ......"
[ 대답하라.]
염제의 분노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2할의 봉인이 풀린 상태에서도 우리를 전멸시킬 만한 힘이 있는 듯 했다.
" 그래주시면 좋겠지만 해주실 리는 없겠죠. 그냥 다 풀어드리겠습니다."
후우웅
망량이 다시금 파천일월선을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네 개의 시꺼먼 기운이 허공으로 날아가자, 잠시 후 공명과 함께 순염(純炎)의 거인이 서서히 수평선 너머에서 바다를 통째로 말려버리면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쿠구궁
" ......!!"
크다!!
커도 너무나 컸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신농의 발목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부분은 모조리 천상 어딘가로 뻗어있는 것 같았다. 단지 그가 뿜어내는 순염의 불꽃이 눈이 따가울 정도로 세계를 밝게 만드는 중이었다.
망량이 말을 이었다.
" 이로써 봉인은 모두 해제시켰습니다."
[ 이렇게 쉽게... 과연 망량선사의 사도로군. 그 자는 엄청난 존재로구나.]
염제가 감탄하고 있자 망량이 말했다.
" 저희의 진심을 이해해 주실 수 있습니까?"
[ 이야기 정도는 들어 주지.]
염제는 화가 풀린 듯 했다. 망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저희의 상황을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는 인간을 지킴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수해를 통과하여 외차원으로 갈 생각입니다. 또한 거신 치우 또한 부활시키려 합니다."
[ 치우를 말인가?]
" 그렇습니다. 그러나 치우의 사지가 찢겨서 천하 곳곳에 봉인되어 있으며, 전욱과 같은 강대한 존재가 직접 그 봉인을 지키고 있으니, 저희로써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욱에게 결코 밉보여서는 안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지라 본의아니게 염제께 무례를 범하게 된 일을 사죄드립니다."
[ 그런 사소한 사정은 알 바 아니다. 어째서 치우를 깨우려 하는가.]
" 치우의 힘이 있어야 만신전에 있는 황제와 그의 세력을 토벌하고 인간이 종말을 넘겨 생존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정 토벌이 되지 않는다면 종말의 때를 유예시킬 수도 있겠지요."
[ ......]
잠시 후 염제가 껄껄 웃었다.
[ 후후후... 하하하하.]
그는 잠시 동안 장소성을 울렸다. 분노나 비웃음이라기 보다는 유쾌한 감정이 느껴졌다.
[ 하하하하하하!!]
한참동안 웃던 염제는 곧 우리에게 말했다.
[ 너무 제멋대로라서 도리어 유쾌할 지경이구나, 인간들이여. 자기자신의 종족을 위하여 천하를 뒤집어 파멸로 이끈다는 말인가? 치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데 말인가? 지독히 이기적이며 우둔하지만, 그런 점이 도리어 재미있구나.]
" ......"
[ 허나 본제 또한 그런 인간의 양면성을 좋아했으니... 유쾌할 수밖에 없구나!]
망량이 차분하게 말했다.
" 염제의 의향을 여쭙고 싶습니다. 저희는 궁극적으로 치우를 깨우려 합니다만 염제께선 그의 봉인해제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염제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 본제가 다시 묻고 싶군. 그대는 나와 치우의 관계를 어떤 관계라 생각하는가?]
" 치우는 염제님의 먼 후손이자 거신(巨神)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치우를 일족의 한 명으로 생각하여 황제와의 싸움에서 동맹을 맺으신 게 아닙니까?"
[ 인간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나 보군...]
" ......?"
[ 전혀 다르다.]
염제의 말이 조용히 이어졌다.
[ 치우는 처음부터 혼자서 황제에게 싸움을 걸어서 첫 대면에 황제의 화신을 죽였다. 그리고 놈을 따르던 것은 거신족이 아니라 인간족속들이었으며, 본제는 그저 치우의 전투를 방관했을 뿐이다.]
" ......!!"
[ 놈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또한 우주적인 힘의 덩어리. 놈은 나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거신족이 아니다. 본제와 치우의 일을 엮어서 생각하지 말라.]
치우가 거신족이 아니라고?!
망량은 다소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 ... 봉인해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 그렇다.]
" 어째서..."
[ 말했듯 놈은 무한히 위험하다. 어차피 삼황오제의 체계도 난장판이 된 이상 본제가 거신족을 이끌고 움직이기는 손쉬운 일. 굳이 그를 깨워서 위험만 높일 필요가 없다.]
" ......"
[ 그대들은 치우를 깨워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한 아군으로 본제를 점찍은 듯 하지만 그 요청에 응해줄 이유는 없을 듯 하군. 마찬가지로 흉신과도 싸우기가 싫으니 그렇게 알도록 하라.]
제기랄!
봉인을 풀어준 건 고마운데 그냥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소리 아냐?!
나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염제의 반응에 기가 막혔다. 지난번에는 풀려나자마자 해신이나 아오키가하라 수해를 박살내는 등 온갖 마물을 없애주었기에 호의적일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는 화가 나서 외쳤다.
" 염제 신농!! 너무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당신을 구해준 것 또한 인과율에 따르면 보은해야 할 은혜가 아닙니까!"
[ 그대들이 명백한 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 것에 은혜를 느낄 필요는 없지. 고마운 건 마음 뿐, 이용당할 필요까진 없다.]
" 윽, 그게 아니라..."
나는 당황하다가 이내 말할 꺼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 흉신이 상륙해서 낙양의 봉인을 푼다면 최악의 마가 세상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건 막아야하지 않겠습니까."
[ 괜찮다. 상관없다.]
" 괜찮다니요?"
[ 본제는 이제 이 세상엔 염증이 난다. 일족을 모두 데리고 다른 세계로 가겠다.]
" ......"
[ 더 이상 우리 거신족이 상관할 일은 아니다.]
나는 염제의 말에 황당했으나, 이내 그가 전혀 태도가 바뀐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 그... 그랬지.'
칠요의 시련에서 일요를 얻었을 때도 염제는 내게 다른 세계로 같이 넘어갈 것을 제안했다. 그 때는 마냥 고마운 제안이었으나, 생각해보면 염제가 이 세상의 일에 굳이 계속 개입하기 보다는 그냥 다른 세계로 이주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뜻이었다. 염제가 흉신과 피터지게 싸우면서까지 이 세상을 지킬만한 동기는 약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걸까?
내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 염제시여. 정 그러시다면 단 하나의 존재만 쓰러뜨려 주십시오."
망량이 나섰다. 망량의 제안에 염제가 말했다.
[ 흉신은 안 된다고 했을 터.]
" 물론 알고 있습니다.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왕만 때려 잡아 주십시오."
[ ... 좋다. 문지기를 없애는 건 어차피 본제로써도 쾌히 받아들일 일이구나.]
" 감사합니다."
[ 이만 나가라.]
슈욱!!
다음 순간, 우리 모두는 염제의 봉인에서 나와서 지상세계에 와 있었다. 염제가 우리를 내보낸 게 틀림없었다. 망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했군..."
최소한의 목적.
그것은 이번 생에서 내가 특이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외차원으로 가야하는데, 그 외차원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왕이였다. 어떻게 그 존재를 때려잡을지 고심하고 있었는데 염제의 힘을 빌려서 해결하게 된 것이다.
최소한이라고 한 이유는 아쉽게도 염제의 힘을 빌려서 흉신을 막아내거나 치우의 봉인을 풀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타삼득을 노렸으나 최소한의 목적만을 이룬 모양새였다.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 망량. 흉신을 막을 방법은 없겠소?"
" ......"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망량이 잠시 후 말했다.
" 없소."
" 없다니..."
그는 다소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 백웅 당신이 해야할 일만 하시오. 나머지 운명은 우리가 감내하겠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흉신이 세계를 유린하는 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