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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망량과의 이야기를 마친 후 동료들에게 돌아가서 원시천반을 꺼냈다. 그리고 원시천반을 본 제갈유룡이 말했다.
" 백웅. 내 목적은 이제 달성되었다 생각하는가?"
" ... 그렇지 않냐?"
나는 황당한 눈으로 제갈유룡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 네가 원하는대로 다 해줬잖아! 천계를 부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길래 천계가 부숴졌지. 게다가 옥황상제도 사라졌고, 고대인의 봉인도 풀었어! 이제 또 뭐가 남았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쩌다보니 나는 이번 생에 제갈유룡을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최선을 다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온갖 시련과 고난을 넘고 그의 뜻을 성취시켜준 것이다. 나는 이제와서 제갈유룡이 딴 말을 하려나 싶어서 불안해졌으나 제갈유룡이 나직이 말했다.
" 고맙다. 백웅."
" ......"
" 너희와 이번 여정을 함께 하며 느꼈다. 기초단계조차도 나 혼자 힘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 아, 아니 뭐. 고마우면 됐고... 아무튼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야?"
나는 뜬금없이 제갈유룡이 감사를 표하자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제갈유룡이 힐끔 제갈부와 망량, 제갈사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말했다.
" 우리 일가가 모두 모여있는 날이 올 줄이야."
그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 백웅. 내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딱 하나의 단계가 남았다. 당초의 계획까지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다고 할 수 있지."
" 그게 뭔데? 네 목적이 뭐냐고."
" 신의 부활이다."
" ......"
나는 제갈유룡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무슨 소리냐? 설마 너... 복마전의 제사장으로서 황궁의 [옛 지배자]를 현세에 소환하고싶어서 이 모든 일을 저질러왔다는 말이냐?"
제갈유룡은 황궁세력의 배후이자 복마전의 제사장이었고, 신과 직접 소통하는 존재였다. 그라면 [옛 지배자]를 직접 세상에 소환하는 게 가능했으며 실제로 그런 적도 몇 번 있었다. 이번 천계공략에서도 태공망을 물리치기 위해서 소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제갈유룡은 진정한 극악인(極惡人)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망량이 나직이 말했다.
" 그건 너무 초라한 목적이오, 백웅. 그건 아닐 것이오."
" 망량. 초라하다니?"
" 고작 그게 목적이었다면 아버님은 진작에 했을 것이오. 인신공양으로 꾸준히 제물과 영혼을 모아서 백만 단위를 이루기만 한다면 [옛 지배자]를 소환하는 것쯤 뭐가 어렵겠소? 대명제국의 권력을 한손에 쥔 아버님의 궁극적인 목표라 하기엔 초라하며 너무나 쉽소..."
" 아."
" 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미 본인이 밝혔소. [세계구원]이라고."
" 하지만 신을 부활시킴으로써 어떻게 세계를 구원시킨다는 말인지..."
" 바로 그거요, 백웅. 황궁의 [옛 지배자]가 비교적 격조높은 존재이긴 하지만 쟁쟁한 삼황오제를 상대로 판세를 뒤집어엎고 세계의 종말까지 뒤바꿀 정도로 강력한 존재는 절대 아니오. 기껏해야 오제 중 하나와 막상막하겠지. 그래서 당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이오."
" 으음."
망량의 논리적인 이야기를 듣자 정신이 들었다. 하긴 황궁의 [옛 지배자]가 강하다 하더라도 삼황오제를 뒤집어엎을 비장의 한수라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신격이 많다는 것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아오지 않았던가?
나는 의문이 들어서 제갈유룡에게 물었다.
" 도대체 어떤 신을 부활시킨다는 거냐?"
제갈유룡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입을 열었다.
" 세계의 종말... 젊었을 적의 나는 세계의 종말에 대한 다른 복안이 없었다. 세계의 진실을 파악하기만도 급급했지. 그러다가 아내와 진천휘를 떠나보낸 후 나는 마도에 몰두했으며 온갖 고대의 지식을 섭렵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단 하나의 전설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지."
" 어떤 전설 말이냐."
그는 한숨을 쉬었다.
" 백웅. 네가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길 바란다. 고작해야 팔괘의 술법만을 지닌 미천한 인간이, 삼황오제를 모조리 없애고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내게는 무한의 시간과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사도나 마왕이 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있었다. 결국 신의 힘을 빌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데, 어떤 신을 부활시켜야 종말을 이겨낼 수 있을지를."
" ... 그거야 삼황오제보다 더 강력한 신이겠지."
" 그런 신은 일만 년 중화의 역사 속에서 딱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 ......?"
그런 놈이 있었어?
내가 제갈유룡의 말에 의아해하자 그가 말했다.
" 잘 이해를 못한 듯 하니 다시 말하지. 삼황오제의 필두는 누구인가?"
" 그야 황제 공손헌원이지."
" 그가 삼황오제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이기도 하다. 삼황 중 그 누구도 황제를 넘어서지 못했고 기껏해야 동격을 자처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황제가 다른 오제를 창조하며 꽤 힘을 소모했으니, 태초에는 황제가 삼황보다 더 강력했을 것이다."
" 흐음."
" 그러나 그 강대한 황제에게 승리했으며 삼황오제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은 신성이 딱 하나 존재했다. 황제는 그 자에게 계속해서 패하다가 간신히 구천현녀와 응룡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최후의 승리를 거뒀지. 오로지 그 존재만이 황제를 이길 가능성이 있다."
" ......"
나는 거기까지 듣자 그게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경악하며 외쳤다.
" 치우(蚩尤)!!"
" 그렇다. 바로 그를 말하는 것이다."
" ......!!"
치우!
그는 묘족(苗族)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며, 중원의 모든 역사서에서 고대를 논할 때 한번씩은 출현하는 자였다.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갖고있다 하여 동두철액(銅頭鐵額)이란 표현이 출현한 것도 치우부터였으며 당해낼 자가 없는 무적의 괴물이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치우는 홀연히 나타나서 황제 공손헌원과 신화시대 최대의 전쟁인 탁록전쟁(涿鹿戰爭)을 벌였으며 황제 공손헌원을 수도 없이 패퇴시켰다는 전설이 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황제에게 패하긴 했으나 분명히 황제를 이긴 적이 있는 존재이며 절대신성인 것이다.
하지만 그저 전설이 아니었던가?
' 실감이 안 난다...'
나는 지금까지 삼황오제를 직접 대면하면서 그들의 초월적인 권능을 눈 앞에서 보아왔다. 그래서인지 그 강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을 패퇴시킨 고대의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치우의 고사는 물론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설마 그런 게 존재할 수 있을까 헛소문처럼 여긴 것이다. 치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도 그 태도를 뒷받침했다.
제갈유룡이 정심한 눈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 내 궁극의 목적. 또한 인류를 구하기 위한 방법론. 그것은 바로 군신(軍神) 치우(蚩尤)를 부활시켜서 다시 한 번 탁록대전(涿鹿大戰)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 뭣...!! 그건 신의 전쟁이잖아! 삼황오제가 치우와 싸우는 전쟁이잖나."
나는 놀라서 그에게 외쳤다.
" 신들의 전쟁이 일어나면 인간은 벌레처럼 죽어나간다고! 그게 어떻게 인간을 구하는 방법이라는 말이냐!"
이번의 천계공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삼황오제가 아주 짧은 순간 몇 수를 부딪힌 것에 불과했으나 천계는 반파당해버렸다. 신들의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지상의 필멸자나 생명체는 하나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 탁록대전이 일어나면 삼황오제는 다같이 힘을 합쳐서 종말의 유예를 다시 한 번 크게 미룰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최소한 수천 년은 더 생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 ......!!"
" 외계 [옛 지배자]의 세력도 그 경우 납득할 수밖에 없겠지. 치우의 힘은 그들에게도 엄청난 위협일 테니. 내 생각에는 이게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 으음..."
" 인간의 문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종말을 미루고 싶었다."
나는 제갈유룡의 진짜 의도를 듣자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절대파괴신, 치우를 부활시킴으로써 종말을 한차례 더 유예하는 작전이라니!
나는 제갈유룡에게 혹시나 해서 물었다.
" 치우가 진짜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었나? 삼황오제를 홀로 물리칠 정도로 강력한 존재라니 비현실적인지라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는게 정상같은데..."
" 당연히 나는 검증을 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전설과 고문헌을 모았고, 특히 묘족을 직접 방문해서 그들의 유적을 꼼꼼하게 조사했다. 그리고 치우는 과거에 존재했다는 확신을 얻었다."
" 흠."
제갈유룡은 엄청난 확신을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
"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치우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망량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 좋은 계획이구려. 백련교주의 계획보다 현실성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 그런가...? 나는 그와 내가 별 차이가 없다 생각한다. 현실성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고작해야 인간에 불과했으며 너무나 무력했으니... 어차피 이상을 꿈꾸며 덧없이 사라져갔겠지. 백웅 네가 없었다면."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제갈유룡이 말을 이었다.
" 그러나 나는 태산노옹으로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치우부활 계획을 세우던 중 큰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지."
" 문제?"
제갈유룡은 천천히 손을 들더니 세 개의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하나의 손가락을 굽히며 말했다.
" 하나. 치우는 봉인당한 게 아니라 황제 공손헌원의 손에 [죽은] 것이다. 마치 네 몸속에 스며들어있는 아마테라스처럼 말이다... 알다시피 신은 죽지 않으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아주 오랜 세월동안 부활과정을 겪게 된다."
" 그건 그렇지."
" 봉인과는 달리 신을 부활시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신이 본래 지니고 있던 신성의 위대함에 비례하여 부활의 난이도와 기간도 급격히 높아진다."
" ......"
" 두 번째. 그 뿐만 아니라 치우가 그래도 부활에 성공할 것을 대비해서 그 시체를 조각내어 신들이 엄중하게 봉인을 걸어두었다."
" 시체를 조각냈다고?"
처음 듣는 소리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삼황오제의 손에 치우의 사지(四肢)와 머리, 몸통이 모두 갈가리 찢겼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심장마저 도려내었으며 머리까지 잘랐지. 그 조각은 어디론가 사라졌으나 아마 삼황오제의 손길이 닿는 곳에 봉인되어 있을 것이고, 그 봉인을 풀기 전에는 치우는 신으로써 자연부활조차 불가능한 상태다."
" ......"
" 삼황오제는 그만큼 치우를 두려워했던 거지."
" ... 자, 잠깐."
내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그러든말든 제갈유룡이 마지막 세 번째 손가락을 꼽았다.
" 세 번째. 그래도 치우가 부활할 가능성이 있기에, 신들은 세상에 퍼져있던 치우와 거인족의 혈맥, 성좌의 힘 따위를 모조리 찾아내어서 천계에 봉인했다."
" 원시천반의 봉인."
" 그렇다. 그 봉인은 옥황상제가 주관하고 있었으며 삼청이라 불리는 천계의 지존들이 실행했지. 만에 하나라도 치우가 인과율을 이용해서 혈맥(血脈)의 공명(共鳴)으로 깨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마지막 쐐기다."
나는 입술을 떨었다.
" ... 이봐..."
" 왜 그러지?"
" 그게 말이 돼? 그 정도까지 부활을 못하게 막아놓은 치우를 대체 어떻게 부활시킨단 말이냐!"
나는 황당해졌다. 이 정도라면 제갈유룡이 포기 안한게 이상할 정도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백련교주가 되려 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세상에 신을 죽인 것도 모자라서 2차, 3차 봉인까지 추가로 걸어놓다니!
삼황오제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봉인된 존재를 되살리는 게 가능할까?
내가 외치자 제갈유룡이 대꾸했다.
" ... 나도 당초에는 어려울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도를 터득하여 복마전의 제사장이 되는데 성공했고, 마도 내에서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를 찾았다."
" 마도를 추구한 이유가 그거였나."
" 정상적인 선한 존재의 한계는 기껏해야 중화팔선 수준이었으며 고대신이라는 존재들은 직접 이 세계에 간섭하는 걸 몹시 싫어했으니까... 그래서 마도의 힘으로 창힐과 팔부신중은 물론이고 황궁의 [옛 지배자]의 힘까지 빌리기로 했던 거지. 그 정도는 되어야 완력으로 언젠가 천계를 박살낼 수 있었을 테니까."
" 으음."
뭔가 씁쓸한 이야기다.
" 하지만 네 도움으로 세 번째 조건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옥황상제는 모종의 이유로 소멸했으며, 원시천반의 봉인을 풀어 고대인들을 세상에 꺼내놓았고 천계 또한 파괴했다."
제갈유룡은 약간 감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오백 년, 아니 오천 년이 걸려도 힘들 거라 생각한 일이었는데... 여기까지 올 수 있을 줄이야!"
" 그런가..."
나는 전후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갈유룡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의 구원인데 어째서 신의 제사장이 되어서 마도에 몸담아 사악한 인신공양을 일삼는지 궁금했었다. 알고 보니 그건 전부 중간단계에 불과했으며 그는 결론적으로 천계의 봉인을 풀어서 치우를 부활시키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듣고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 형님. 하지만 그 계획을 더 이상 진행하기는 무리일 것 같은데."
제갈유룡이 힐끔 제갈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탁자에 턱을 괴며 말했다.
" 다 좋지만 우리에게 언제 그 괴인무사가 습격해올지 몰라. 치우의 몸뚱아리나 찾아다닐 시간이 없단 말이지. 당장이라도 정비해서 수해를 돌파해야 할 판이라고."
" 걱정 마라. 하나의 일만 해 주면 되니까."
" ......"
" 네 두뇌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하고 있겠지."
제갈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말했다.
" 요동(遼東)에 있는 [신의 무덤]을 봉인해제해 달란 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