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
진공가향(眞空家鄕)
제일 먼저 앞선 것은 만귀전의 귀신군단이었다. 귀신들 하나하나는 대라신선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놈들 또한 음신지력을 사역할 줄 아는 존재들이었다. 지상의 대요괴를 훨씬 뛰어넘는 태초의 귀신들이 소름끼치는 귀곡성을 내지르며 수천 마리씩이나 날아드는 것은 공포나 다름없었다.
키아아아악!!
귀풍(鬼風)이 몰아치며 여와의 사방팔방에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여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이윽고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퍼런 장막이 귀신들을 몰아내었다.
우우웅
파아앗...
신기루가 흩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희뿌연 안개가 잠시 좌중을 둘러쌌다. 귀신들이 소멸한 듯 했으나 그렇다기 보다는 갑작스레 여와 주위를 둘러싼 장막 때문에 물러난 듯 했다.
만귀전의 축융(祝融)이 자신의 채찍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축융은 예전에 소환된 모습 그대로였으나 다른 점이었다면 아무런 광택도 나지 않는 칠흑의 갑옷을 전신에 장비하고 있었다. 거인 축융이 자신의 몸 주변에서 화염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 하하, 여와여! 당신의 목을 벨 수 있는 날이 오다니 기쁘기 한량없소!]
쉬이이잉
축융의 채찍이 시공간을 격하더니 갑자기 허공에 수만 개로 뻗어나갔다. 저것은 무공수법같은 게 아니었으며 축융이 자신의 신력으로 채찍을 분리시켜서 권능으로 공격하는 술수였다. 그와 동시에 축융의 채찍 끝이 눈에 비치지도 않는 속도로 여와의 방어막을 난자했고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쿠콰콰콰쾅!!
축융의 실력이 만귀전에서 손꼽히기 때문일까? 여와가 친 방어막은 축융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 금이 가며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축융이 일차공격을 하자마자 옆에 있던 열(噎)이 나서서는 입을 쩍하고 벌렸다.
쿠구구구 -
열의 몸뚱이가 흑룡(黑龍)으로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저건 용이라기 보다는 이계의 환수(幻獸)와 같은 모습이었다.
꽈릉 - !!
동시에 차원이 마치 유리처럼 깨져나가며 여와의 방어막을 한 점으로 관통했다. 그저 관통한 게 아니라 흑색 섬광이 마치 천공의 기둥처럼 뻗어서, 이 행성을 통째로 꿰뚫어버릴 기세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그러나 여와는 그 공격 또한 한 손을 내밀어서 가볍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되려 감탄한 듯 말했다.
[ 과연 만귀전이 자랑하는 상위 신격답군. 너희 둘은 제법 하는구나.]
[ 우리도 어찌할 수 없으면 주군께는 손가락도 닿지 않을 거요.]
[ 그런가? 그럼 일단 너희부터 추방해 주마.]
[ 헛소리...]
여와는 다음 순간 손가락을 뻗었고 여와의 권능이 발동했다.
[ 명하노니, 세계여 만들어져라!]
창세(創世)의 지(指)
여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축융이 있었고, 축융은 그 순간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온힘을 다해 채찍을 휘두르며 세계를 불태울 것 같은 화염의 폭풍을 소환했다. 폭풍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삽시간에 하늘 전체를 뒤덮고 우리 또한 그 범위에 말려들어갈 듯 했다. 그러나 폭풍이 번져나오는 순간 난데없이 축융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 아아앗.]
축융이 크게 당황한 듯한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파앗
축융이 사라진 순간 열이 또 다시 흑암의 기운을 퍼부었으나 여와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는 저만치 뒤편에 있는 전욱을 향해 도발적으로 말했다.
[ 어떠한가, 전욱. 부하를 아낀다면 구출하겠지?]
그러자 전욱이 팔짱을 낀 채 대꾸했다.
[ 꼼수를 써 봤자 그 정도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 여가 무슨 수를 쓴 건지도 알아채지 못했나 보군.]
전욱이 느긋하게 말했다.
[ 물론 알고 있지. 새로운 세계를 즉석에서 창조해서 축융을 강제로 쑤셔넣었잖은가. 삼황다운 권능이다.]
[ 서두르지 않으면 구출하지 못할 텐데.]
[ 여와,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대야말로 시간을 끌고 싶어서 초조해하는군.]
[ ......]
두 삼황오제는 서로를 노려보며 가만히 대치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대치에서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탐색전을 하고 있는 거군!'
생각한 것처럼 전면전으로 불붙는게 아니라 여와와 전욱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국(對局)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전욱은 부하를 시켜서 여와의 힘을 소모시킴과 동시에 여와의 수를 알아보고, 여와는 중간간부인 축융을 인질로 잡아서 거꾸로 전욱을 소모시키려 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한 후 생각했다.
' 지루해지겠군.'
둘 다 거대한 존재들인 만큼 섣불리 나서면 승패가 한순간에 갈릴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대국판에서 겨루고 있으니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답답한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그 때 망량이 나서서 전욱에게 외쳤다.
" 전욱이시여! 여와의 비장의 한 수를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 수를 차단할 터이니 부디 여와를 공격해 주십시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망량에게로 향했다. 여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척 했으나 신경쓰고 있다는 게 전욱의 감각으로 느껴졌고, 전욱 또한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전욱이 힐끔 망량을 보며 말했다.
[ 그 수가 뭐지?]
" 영혼의 조각입니다!"
[ ... 호오, 그렇군.]
전욱은 뭔지 알아챈 듯 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서 진언을 외웠다.
[ 파괴되어라, 세상이여.]
파칭!!
그와 동시에 여와가 창조한 신세계에 빨려들어간 축융이 다시 거울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에 나타났다. 전욱이 자신의 힘을 써서 축융을 구출해 준 것이다.
[ 귀찮은 벌레들부터 없애야겠구나.]
여와는 거기에 대응하듯 또다시 창세의 지를 뻗어 세계에 흰색 영역을 번지게끔 만들었다. 이번에 그녀의 손가락이 노리는 건 내 동료들이었다.
위이이잉
" 아아앗."
" 이럴 수가..."
순식간에 동료들 대부분이 창세의 지에 빨려들어가서 사라져 버렸다. 제갈유룡이나 제갈사 등 제갈일족은 물론이고 미호나 서문혜 또한 저항이 불가능한 듯 했다. 다만 망량만큼은 무사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 제기랄! 이건 무슨...'
나는 삼황 여와의 힘에 아연해졌다.
한 순간에 저항 한 번 못하고 아군이 전멸했다!
아무리 격차가 난다 해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서왕모 또한 강력했으나 이건 아예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있었다. 진정한 신이란 게 무엇인지 눈 앞에서 본 듯한 느낌이었다.
창세신 여와가 쓸 수 있는 창세술법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신세계를 창조한 후 몽땅 가둬버리는 식이라 마왕조차 저항하지 못하고 영겁토록 봉인당하는 것이다.
전욱은 망량만 남은 것을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지 다시금 망량에게 말했다.
[ 너 하나만 있어도 여와의 술수를 차단할 수 있겠지. 본좌의 승리를 위해 일하라.]
" 큭!"
망량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 후 절망을 이겨낸 듯 했다. 그리고는 전욱의 전면에 대고 외쳤다.
" 그럴 순 없습니다! 여와의 술법에서 동료들을 구해 주십시오!"
[ 본좌는 이미 네 말의 의도를 알아챘다. 굳이 네 도움을 받지 않아도 여와를 궁지로 몰 수 있다는 걸 알텐데?]
" 동시에 그 난이도가 천양지차란 것도 아실 겁니다. 부디 현제의 자비를 구하옵니다!"
[ 건방진...]
전욱이 망량을 노려보았다. 삼황오제가 직접 살기를 품고 노려보면 인간은 무슨 수를 써도 저항하지 못하고 영혼이 갈가리 찢겨 죽게 되어 있었다. 나는 망량이 살해당한다고 직감하고는 전욱에게 외쳤다.
[ 전욱이시여, 제발!!]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양보할 수 없습니다!"
망량은 전욱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받으며 기세를 도리어 강화시킨 것이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 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놀라서 상황을 지켜 보았고, 잠시 후 전욱이 뜻밖의 말을 했다.
[ 좋다... 네 말대로 해 주마. 대신에 그건 네놈이 인과율상 본좌에게 빚을 졌다는 뜻이겠지.]
망량은 눈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전욱의 직접적인 압박 때문에 몸에 부하가 걸린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외쳤다.
"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 배짱은 인정할 만 하군. 과연 인간 주제에 선택받을 만 하군...]
뭔가 감탄하듯 말한 전욱이 손을 휘둘렀다.
후웅!
그와 동시에 창세의 지에 당해서 전멸했던 아군이 도로 되돌아왔다. 전욱은 구출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새까만 방어막을 아군에게 만들어 줬는데, 아마도 같은 수에 또 당하는 걸 막아주는 듯 했다. 망량이 한숨을 쉬었다.
" 감사합니다, 전욱이시여."
[ 너희가 이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 그럼 저희는 준비를 하겠습니다."
전욱이 으름장을 놓았으나 망량은 크게 괘념치 않는 듯 했고, 이윽고 막 안에서 동료들과 뭔가 꾸미는 형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와가 비웃듯이 전욱에게 말했다.
[ 고작 인간의 말을 믿고 여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믿다니, 오제의 격도 땅에 떨어졌구나 전욱.]
[ 고작 인간이 아니지. 저 놈은 믿을만한 격이 있다. 그대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 웃기는구나.]
[ 겁먹어서 떨지 않아도 된다, 여와. 본좌에게 승기가 있음은 이미 확신했다.]
[ 맘대로 지껄여라, 애송이!]
여와가 노한 듯, 이번에는 전욱을 직접 공격했다.
[ 우주와 함께 태어난 자로써 명한다. 그대 천상의 이름을 빼앗노라!]
찬탈의 언(言)
그녀의 언령이 토해지자 세계에 섬광이 한 차례 일어나더니 모든 게 어둠이 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전욱의 몸뚱이가 계속해서 쪼그라들었고 그것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내 시야가 정상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욱에게 동화되어 있는 지금, 나는 이 공격의 정체를 신의 힘으로 간파할 수 있었다.
' 신성(神聖)을 강탈하려 한다!'
권능싸움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격법! 전욱이 보유하고 있는 신성을 억지로 강탈해오는 공격이었다. 당연히 수십 수백가지의 권능을 동원해서 시공간을 찌그러뜨리는 수법이 동원되었고 아무리 전욱이라 해도 이런 공격을 맨몸으로 감당하긴 힘들었다.
예전에 창힐과 삼황오제가 싸울 때의 양상과는 달랐다. 그 때의 창힐은 인과율따윈 생각도 하지 않고 물질세계를 제멋대로 뒤튼 것에 불과했기에 서로 수정덮어쓰기만 반복했으나, 이런 방식의 강탈에는 그런 간단한 복원이 먹히지 않았다.
여와가 최상위신격끼리의 결투에 매우 익숙한 싸움꾼이라는 증거였다. 격 낮은 신격이 이런 공격을 당하면 즉시 소멸할 것이다.
[ 으으...]
전욱은 잠시 힘겨워하는 듯한 신음을 흘리다가 이내 오른팔에 불끈 힘을 쥐며 휘둘렀다.
[ 같잖은 짓이구나!]
파앙
[ 이거나 받아라.]
여와의 압력을 이겨낸 전욱은 곧장 한 자루의 암창(暗槍)을 소환하더니 여와를 향해 던졌다. 늘 하던 것처럼 수백 자루를 소환한 게 아니라 고작 한 자루였으나, 거기에 담긴 권능은 실로 막대했다. 여와는 시공간을 가르고 날아오는 암창을 피하지 못하고 어깨죽지에 그대로 맞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투쾅
[ 이놈...!!]
여와가 비명인지 분노인지 모를 외침을 내질렀다.
[ 크으으.]
암창을 투척해서 여와에게 일격을 먹인 전욱은 약간 힘이 소모된 듯 휘청였다. 아무리 전욱이라도 여와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상대하는 건 버거워보였다. 그는 중얼거렸다.
[ 예상 이상이구나. 좀 더 확실하게 해치울 수밖에.]
전욱이 그와 동시에 어둠의 양팔을 하늘로 뻗으며 뭔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창힐의 싸움 때와는 달리 서로 강한 유효타를 주고받은 상태에서 뭘 하려는지 궁금했으나, 나는 이윽고 전욱의 생각 속에서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 아앗!'
그렇게 해도 되나?!
세상이 안 망하나?
하지만 내가 걱정을 하든말든 전욱은 이윽고 주문을 끝마쳤고, 잠시 후 그의 몸 주변에 다른 인영이 소환되었다.
슈슈슈슉
인영은 총 두 명이었다. 둘 다 제왕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시꺼먼 윤곽만 보일 뿐 제대로 된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이 엄청난 존재라는 건 느껴지는 신력만으로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소환된 자들 중 왼쪽에 있던 제왕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 무슨 일이오? 여와랑 왜 싸움박질을 하고 있소?]
오른쪽에 있던 제왕이 팔짱을 끼며 거들었다.
[ 나는 아까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소, 전욱. 난 이 싸움에 끼어들 생각 없소.]
그들 둘을 쳐다보던 전욱이 말했다.
[ 소호 금천(少昊 金天), 제곡(帝嚳). 본좌를 도와서 여와를 쓰러뜨려야 하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가능한 일이오.]
그랬다.
전욱이 소환한 것은 다른 오제인 소호금천과 제곡! 요순이 소멸해있는 지금으로써는 오제의 모두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제곡이 사납게 대꾸했다.
[ 끼어들 생각 없다 했잖소. 여와와 싸워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소.]
소호금천 또한 귀찮다는 듯 말했다.
[ 귀찮소. 정말 귀찮소... 여와님의 성격이 더럽긴 하지만 뭐하려고 나이든 할머니를 괴롭히고 그러시오? 연장자를 공경하는 게 좋소.]
[ 농담이나 할 때가 아니오.]
전욱이 여와를 노려보며 말했다.
[ 여와를 놔두면 우린 절대 가면을 벗을 수가 없소. 그녀는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상황을 목숨걸고 반대하는 측이오. 이 기회에 여와를 제거하고 가면까지 벗어버립시다.]
소호금천이 대꾸했다.
[ 그거 참 구미가 당기는 일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이 가면이 불편하긴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가진 혼돈의 형질을 잠시 다른 걸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잖소. 여와까지 죽여가며 벗을만한 일은 아니오.]
[ 본좌 또한 본디 그리 생각했소. 그러나...]
전욱이 말을 이었다.
[ 황제는 우리의 가면을 이용해서 우리를 제물로 공양하고 천상의 옥좌에 오를 생각이오. 가면을 쓰고 있으면 우리의 존재가 이용당할 터이니,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할 뿐.]
[ ......]
[ 정말이오?]
전욱의 말에 두 명의 삼황오제가 의혹어린 눈길로 쳐다보았으나 전욱의 다음 말은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 나 전욱의 이름을 걸고 확언할 수 있소. 황제는 우리를 이용해 제물로 바치려 할 게 틀림없소. 우리는 그에게 반역하여 황좌를 찬탈해야 하오.]
[ 이, 이름을 걸다니.]
[ 정말인가보군.]
삼황오제가 자신의 이름을 건다는 건 존재 그 자체를 건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얼마나 중한지는 예전에 여와의 화신인 서왕모가 자살하고 공공 또한 무력화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었다. 삼황오제조차도 한번 이름을 걸고 약속을 하면 어기는 게 불가능했기에 전욱은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한다는 걸 상대방에게 납득시킨 것이다.
소호금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 뭐... 어쩔 수 없지... 노인폭행은 취미가 아니지만 가끔은 할 수도 있는거 아니겠소!]
제곡이 동의했다.
[ 좋소. 여와를 죽이고 나서 그 신성을 셋이서 갈라먹읍시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군.]
[ 이야기가 잘 됐군. 본체로 현신하시오.]
[ 하는 김에 우리 부하들도 불러오지.]
파아앗!!
잠시 후 전욱의 양옆에 소호금천과 제곡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호금천의 본체가 나타나자 하늘 전체가 날개로 뒤덮였고, 소호금천의 거대한 눈동자 한 쌍이 세계를 오연히 내려다보는 모습이 되었다. 소호금천의 형상은 행성을 가볍게 에워쌀 정도로 거대한 우주의 붕조(鵬鳥)였다.
제곡의 본체는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백색의 날개달린 거인이었으나 이번에는 가지고 강림한 힘의 단위가 다른 듯, 여와조차도 제곡의 위상에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오제의 셋이 본체를 드러내서 여와와 맞서자 여와 또한 더 이상 여유롭지는 못한 기색이었다. 여와가 잔뜩 화가 난 기색으로 말했다.
[ 미친 놈들! 허황된 꿈을 꾸고 있구나. 네놈들이 가면을 벗으려는 시도 자체가 황제의 계산에 읽히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느냐?]
[ 가면은 존재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제약. 이걸 가만히 놔두고 있다가 당하는 게 더 멍청한 짓이오. 황제께서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외신이 아닌 이상 우리 셋을 결코 쉽게 감당할 순 없으니, 이 일은 위대한 변혁이 될 것이오.]
[ 황제는... 절대 그걸로 끝내지 않는다. 그 놈은 흉신을 비롯해 전 우주의 쟁쟁한 존재들을 위축시킨 기린아이자 간웅(姦雄). 이런 행동이 도리어 놈에게 유리해진다는 걸 모르느냐.]
[ 친남매인 복희마저 봉인시킨 당신에게 듣고싶은 얘기는 아니구려.]
[ ......]
[ 마침 잘 됐군. 당신을 찢어죽이고 복희도 먹어치우러 가야겠어.]
[ 멍청한 놈들...]
쿠오오오
잠시 후 소호 금천이 자신의 날개를 한 차례 휘두르며 경쾌하게 외쳤다.
[ 노인공격을 시작해 볼까!]
성단멸우(星團滅雨)
삼황오제, 소호 금천.
그의 이명(異名)은 은하(銀河)를 집어삼키는 붕조였다. 황제 공손헌원이 오제를 만들 때 은하의 중심에서 수만 개의 별을 집어삼킨 정체불명의 혼돈의 붕조를 자신의 권속으로 만든 게 바로 그였다.
위이이이잉
그의 수많은 깃털이 천공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억 개의 깃털이 떨어지는 순간 깃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크기의 폭발으로 부풀어올랐고, 그 폭발은 마치 우주 저편에서 날아오는 광선처럼 대지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하계의 중심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은광을 깃털을 이용해서 소환한 것이다.
번쩍!!
성단멸우가 쏟아지는 순간 수많은 존재들의 비명이 울려퍼지는 게 신의 감각에 느껴졌다.
[ 크아아아아!!]
[ 이게 무슨 일이...]
[ 은하부족동맹이여!! [옛 지배자]가 파괴행위를 시작했다! 우리 행성을 도와다오...]
[ 안돼!! 살려줘!!]
쿠콰과광
수많은 외계존재와 문명들이 한 번의 섬광에 사라지면서 수많은 단말마가 쏟아졌다. 엉뚱하게도 외계인들이 학살당하는 중이었다. 성단멸우를 시전하는 순간 외계의 힘을 끌어오기 때문에 그만큼 다른 은하와 성단에 대재앙이 닥치는 것이었다.
무수한 성좌의 빛이 사라지면서 소호 금천의 깃털에 그만큼 빛이 맺혔다. 소호 금천의 권능이 워낙 막대해서 은하계 전체에 민폐를 끼치는 수준이었다.
대지는 이미 반쯤 멸망해 있었고 대륙이 실시간으로 황폐해져가는 게 느껴졌다. 그나마 이들이 싸우면서 파괴범위를 제한하고 집중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정상적이라면 이미 행성이 파괴되었으리라. 중원의 절반이 사멸하여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지근거리에 있는 아군들은 전욱의 보호막 덕에 무사한 듯 했다.
여와가 성단멸우를 막아내고 있을 때 전욱이 뛰어들어 여와의 목젖에 암창을 내질렀다. 여와는 전욱의 창을 피해냈으나 그때는 제곡이 거대한 외침을 내질러서 여와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 으으으.]
여와는 격렬하게 화가 끓어오른 듯 했으나 삼황오제의 셋이 협공하는데야 방법이 없어보였다. 나는 승기가 보이자 전욱에게 말을 걸었다.
[ 전욱이시여,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 ......]
[ 전욱 님!]
전욱은 막 여와에게 암창을 던지려다가 멈칫하며 말했다.
[ ... 너는 응원이나 해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