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9====================
진공가향(眞空家鄕)
이번 생 최악의 위기가 닥쳐온 것 같다.
' 제길! 정신차리자!'
나는 삼황 여와가 강림했으나 더 이상 아군에게는 남은 수가 없다는 사실에 좌절할 뻔 했으나 이내 현실감을 되찾고 침착해질 수가 있었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미치거나 절망할 게 분명했으나 나는 이미 우주의 종말도 보았고 별의별 일을 다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 또 도박을 할 수밖에 없겠군.'
내 눈빛이 달라지자 망량이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말했다.
" 어떻게든 시간은 벌겠소."
" 고맙소."
나는 망량과 제갈사 등 동료들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들 또한 상황을 인식한 듯 내가 어떤 선택을 하려는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우우우우!!
나는 전신에서 항우에게 받은 성좌의 힘을 끌어올리며 음신지력을 더욱 더 강화시켰다. 내가 힘을 끌어올리는 사이에 여와는 또 다시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스르르륵
[ 아아아악...]
팔부신중 야차가 반항 한번 못한 채 소멸당했다. 그녀 말고 다른 팔부신중은 이미 모두 여와의 손짓 한번에 사라져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팔부신중의 전멸이라 할 수 있었다. 여와는 야차를 소멸시키며 중얼거렸다.
[ 슬슬 불러야겠군...]
여와는 동시에 양 손을 위로 뻗으며 뭔가를 소환하는 자세를 취했다. 우리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익히 추측하고 있었으므로 저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망량이 급히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 하아아앗!!"
그 순간, 내면에서 심장이 터지는 듯한 아픔과 함께 내 정신이 아득히 머나먼 세계에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사도의 권능]을 써서 시간을 되돌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내 음신지력이 쏟아지며 세계의 작은 굴레를 돌리려는 순간, 여와의 시선이 싸늘하게 내 쪽을 향했다.
끼이이잉 -
세계는 되돌아가려는 듯 왜곡되기 시작하다가 난데없이 뒤틀림이 사라졌다. 마치 수면의 파동이 잠잠해지는 듯한 현상이었다. 여와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 신의 사도여. 감히 여 앞에서 [작은 굴레]를 돌리려 하는가? 건방지구나!]
여와는 삼황오제이므로 [작은 굴레]의 회귀를 막는 게 가능한 듯 했다.
" 제길...!!"
그래도 포기 못한다.
되든 안되든 한번 더!!
인과율 때문에 사도의 권능은 일년에 세 번이 전부이지만 지금 그 세 번을 모두 써도 상관없어! 예전에 한 번 쓴 적이 있으니 이번이 아마 마지막 시도일 것이다!!
' 항우가 소멸하기 전의 시간대로! 최대한 과거로 되돌려야 해!'
이 한 번의 시도에 모든 걸 건다! 내가 다시금 음신지력을 폭발시키며 시간을 조작하자 방금 전보다 더욱 심한 시공의 왜곡이 일어나며 현실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대성한 음신지력에다가 항우가 건네줬던 2개의 성좌가 힘을 증폭시켰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여와조차 쉽게 막을 수 없는지 그녀는 잠시동안 뭔가를 소환하던 행위를 멈췄다. 그리고는 시꺼먼 눈을 빛내며 진노한 목소리를 울렸다.
[ 아둔하구나, 필멸자여. 그리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 주마! 최초의 시간대로 보내 주지!]
" ... 뭐?"
[ 수레바퀴를 가속시켜 주마...!!]
여와가 나를 가리켰다.
부웅!!
내가 여와의 말 뜻을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나타나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방금 전까지 여와와 싸우던 그 장소가 아니었다. 대신에 내 몸이 육지가 아니라 웬 우주공간에 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둥실
둥실
" ......!!"
어, 어째서 땅도 하늘도 없지? 여긴 완전히 비어있는 허무의 우주공간이 아닌가? 나는 어째서 내가 이런 곳으로 순간이동했는지 의아했으나 이윽고 폐가 막혀오면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나는 급히 음신지력으로 몸을 둘러싸서 생명을 보호했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군이나 여와의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수레바퀴를 가속시켰다는 게 무슨 말이지?
최초의 시간대라는 건?
하지만 내가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거대한 호통이 울려퍼졌다.
[ 멍청한 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나는 그 호통에 머릿속이 찌릿찌릿하게 울리는 걸 울렸으나 누가 내게 호통을 쳤는지는 즉시 알 수가 있었다. 머릿속에 어둠의 거인의 환영이 보였기 때문이다.
" ... 전욱이시여."
그랬다.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어온 것은 삼황오제 전욱이었다. 전욱은 다소 분노한 듯한 말투로 내게 으르렁거렸다.
[ 삼황 여와를 앞두고 [작은 굴레]를 돌리다니 이토록 어리석을 줄이야... 네놈은 지금 허무의 시간대로 돌아가 있으니 어찌 책임질 생각이냐.]
" 허무의 시간대라니 그게 무슨...?"
이어진 말에 나는 경악했다.
" 거기는 태양이 생기기 전의 과거다!"
[ ......!!]
" 여와가 네놈의 시간회귀에 가속을 붙여서 날려보낸 것이다."
뭐라고?!
내가 황당해서 입을 벌렸으나 전욱이 나한테 이런 걸로 속이거나 할 리는 없었다. 나는 제갈사에게 우주에 관련된 마도과학 지식을 배웠으므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 수... 수십 억 년 전이야!'
지구도 태양도 생기기 이전이라면 최소 40억년 전! 제대로 된 추측조차 불가능한 시간대였다. 그제서야 나는 여와에게 무엇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작은 굴레]를 돌려 시간을 회귀시킨다는 것은 물레방아를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았다. 여와는 처음에는 내 시도를 그냥 힘으로 막았으나 두 번째에는 귀찮아져서 도리어 내 과거환원력에 힘을 보태어서 굴레를 가속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가속도 때문에 나는 너무나 먼 과거, 수십억 년 전으로 와버린 듯 했다.
전욱이 말했다.
[ 네놈을 통해서 서왕모를 없애고 여와를 견제하려 했으나 실패했군. 그렇다면 네놈에게 부여한 권능과 단말이라도 거둬가야겠구나.]
우우웅
그 순간 전욱이 내 앞에 제왕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서서히 손을 내게 뻗었다. 그 손은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었으며, 닿이는 순간 나는 모든 음신지력과 권능, 단말을 빼앗길거라는 걸 깨달았다.
전욱 또한 [옛 지배자]이므로 시공간 수십억 년을 초월해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듯 했다. 신은 시공간을 뛰어넘은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위기를 느끼며 급히 외쳤다.
" 잠깐! 아직 이길 방법이 있습니다."
[ 다시 그 시간대로 돌아가봤자다. 여와는 신이므로 모든 시공간의 간섭이 통하지 않으니, 네가 본좌의 권능을 이용해 뭘 하든 무의미하다.]
"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 끝까지 변명인가? 좋다.]
전욱이 싸늘하게 말했다.
[ 본좌는 네놈에 대한 흥미가 아직 남아있으니 딱 한 마디를 더 허용하겠다.]
" ......"
[ 마지막 말은 잘 생각하도록 하라.]
단 한 마디로 전욱의 마음을 되돌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딱 하나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 전생자!'
내가 전생자라는 것만 밝히면 된다! 전욱은 전생자의 존재를 알게 되면 결코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테니, 다시 내게 기회를 줄 것이다. 나는 입이 근질근질했으나 동시에 책사들의 '경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절대 전생자라는 걸 밝히면 안 된다.
최소한 이번 생에서는.
" ......"
금기는 지켜야 한다...
하지만 전생자라는 비밀을 여기까지 와서 숨길 필요가 있나? 여긴 아까 그 시공간도 아니고 무려 수십억 년 전, 지구와 태양이 창조되기도 전의 억겁의 시간대였다. 이런 황량한 우주공간에서 대체 누가 내 말을 듣는단 말인가? 누가 삼황오제 전욱을 도청할 수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전생자라는 걸 밝히는 것 외엔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
이대로 자살해서 다음 생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너무 아까웠다. 서왕모를 여기까지 몰아붙여 놓고 죽는다면 이게 무슨 헛고생이란 말인가? 뭐라도 해 보고 죽고싶었기에 나는 내 자신이 전생자라는 걸 밝히고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 저... 는..."
말하자.
말해버리면 그만이다.
전욱이 도리어 내게 벌벌 길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윽고 망량과 미호, 제갈사 등의 동료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 황제 공손헌원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말할테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전생자라는 말보다는 불확실하지만 일단 이걸로 가는 수밖에 없다. 쉽게 가려면 전생자 이야기를 하는 게 쉽겠지만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내 전생 최악의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금기를 범하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신뢰만은 저버릴 수가 없다.
그러자 전욱의 손이 멈칫했다.
[ 진실로 그런가?]
" 네."
[ 으음...]
전욱은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하는 듯 했다. 어쩐지 나라면 알 수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듯 했다. 이윽고 전욱이 입을 열었다.
[ 그 말이 거짓이라면 네놈은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 ......"
전욱의 눈에서 광망이 흘렀다.
[ 네놈에 대한 예우로 편히 죽여주려 했으나, 그럴 경우 지금부터 아까 그 시간대까지 계속 찢어죽여 주마. 너는 그 때마다 아귀의 먹이가 될 것이다.]
잘못 풀리면 전욱의 만귀전에서 수십억 년 동안 사지를 찢기는 건가... 전욱이 죽음을 금지하고 계속 살려둘 수 있다는 건 이미 긴나라를 고문할 때 본 적 있었다.
' 쳇. 일단 하는거지 뭐 있나!'
실로 무시무시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하나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한 상황도 몇번 겪었기 때문인지 침착하게 대처할 수가 있었다. 어차피 내 인생은 모험의 연속이었으므로 쫄아봤자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다.
" 공손헌원의 진짜 의도는 종말의 옥좌에 도달하는 겁니다!"
[ ......?!]
전욱이 처음으로 당황한 듯 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대꾸했다.
[ 무슨 소리냐? 종말의 옥좌라니?]
" 저는 이 세계의 종말이 다가올 때 지구가 멸망하고, 혼돈의 옥좌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전욱 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 알고 있다.]
"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간 후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아는 자는 거의 없는 것 같더군요. 위대한 황제 공손헌원은 알고 있지만."
[ ......]
전욱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나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 공손헌원은 최후에 그 옥좌의 앞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걸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마 인과율을 계산해서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삼황오제조차도 장기의 말로 쓰고 있는 거겠지요. 그리고 최후의 때에는 그 희생을 발판으로 옥좌에 가려 합니다."
[ 믿기지 않는다. 너는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느냐?]
" 제가 흉신의 주문을 쓰는 걸 보셨겠지요."
나는 말을 이었다.
" 아시다시피 그 주문은 매우 강력하고, 흉신과 아주 친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흉신에게서 흉신의 주문을 얻음과 동시에 석판의 비밀을 듣는 데 성공한 겁니다."
[ ......!!]
나는 당당하게 외쳤다.
" 석판에는 미래의 계시가 적혀 있었고 옥좌에 대한 것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 공손헌원의 의도를 알 수 있었지요!"
사실 거의 다 뻥이다!
내가 그냥 머릿속으로 지어낸 거다!
다만 망량과 제갈사가 내가 [우주의 종말]에 갔을 때 내가 중간에 마주쳤던 게 황제 공손헌원일지도 모른다는 유추를 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게 공손헌원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대충 이야기를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난 흉신과 친하기는 커녕 그놈의 석판에 뭐가 적혀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전욱은 내 말을 듣고 심사숙고하면서도 믿으려 하는 듯 했다.
[ ... 흠. 그랬군. 그래서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가면을... 그러면 설명이 되겠군... 상황이 맞아 떨어진다.]
통하나?!
어, 진짜 통하는건가?!
나 혹시 천재인가!
잠시 후 전욱이 말했다.
[ 좋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종말의 옥좌에 도달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 황제 공손헌원, 그 분의 진짜 뜻을 알고 싶다. ]
" 어... 그게..."
[ 말하라. 말해준다면 본좌가 전력을 다해 도와줄 것을 약속하겠다.]
의외로 전욱이 도리어 몸이 달아있는 듯 했다. 나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막히는 걸 느꼈다. 종말의 옥좌에 도달하면 뭐가 좋길래 황제 공손헌원이 가려고 하는가? 그 이유같은 걸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난번처럼 전욱에게 또 조잡한 얘기를 들었다면서 환멸당하고 말 것이다. 나는 같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하다가 번뜩이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다.
" 더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겁니다! 옥좌에 도달하려고 흉신과 황제가 경쟁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 ......]
" ... 어, 그, 그러니까 [아버지]한테서 직접 힘을 받는다던가 뭐 그런..."
전욱이 침묵하다가 반문했다.
[ 그걸 위해서 황제께서 우리 오제를 공양한다는 뜻이냐?]
" 그,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말하고 나서 보니 괜히 후회가 되었다. 내가 말하고도 너무 허황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아... 젠장... 하지만 달리 생각이 안 나는 걸 어쩌라고!'
황제 공손헌원은 삼황오제의 필두로써 전 우주적으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외신급일지도 몰랐다. 그런 공손헌원이 뭐하려고 더 강력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말인가? 더 웃긴 것은 이미 세상이 멸망한 상태에서 그 조그마한 옥좌 앞에서 더 강력한 존재가 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실패했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갑자기 전욱이 광소를 터뜨렸다.
[ 크흐... 흐흐... 흐흐흐흐하하!! 그랬던 거군! 어째서 우리에게 가면을 씌워 본질을 강제했는지 줄곧 의아했었는데 이제 모든 게 해결되었다! 황제 공손헌원이여, 우리 사제(四帝)를 창조했다 하여 우리 모두가 그대에게 귀속된 노예라 생각했던가.]
전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그렇다면 더 이상 존경과 양보는 없다! 최후의 경쟁을 향하여 우리 또한 도전하리라. 만신전을 깨부수고 황제의 목을 치고 그 황좌를 얻으리라!!]
전욱은 신답지 않게 크게 격앙된 듯 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는 강렬한 적의와 함께 고양감을 느끼는 듯 했다. 나는 전욱이 어째서 이런 지어낸 이야기를 금방 믿는지 의아했으나, 이윽고 내가 한 말이 그가 평소에 품고 있던 의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전욱이 갑자기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 본좌는 약속을 지키겠다. 너는 행운으로 생각하라.]
" 네?"
[ 간다.]
휘리리릭!!
다음 순간, 시공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전욱의 영체가 내 정수리를 통해서 몸에 스며들었고, 나는 내 몸 속에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들어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의식이 먼 곳으로 갇혀 버렸고 육체의 통제력이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휘리리릭 -
시간이 엄청난 속도로 감기기 시작했다. 신의 권능으로 수십억 년의 시간이 통째로 감기는 중인 것이다. 잠시 후 내 몸은 전욱의 의지에 따라 무채색의 공간에서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했고, 한 걸음마다 수억 년의 세월이 지나쳐감을 알 수 있었다. 실로 전능자의 한 걸음이었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내 몸은 원래 시간대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내가 원했던 대로 항우가 소멸되기 전의 시간대가 아니라 여와가 나를 과거로 추방한 직후인 듯 했다.
파앗
내 모습이 나타나자 여와는 강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뜻밖의 말을 했다.
[ 전욱. 무슨 생각이냐?]
그 질문에 내게 강림한 삼황오제, 현제(玄帝) 전욱(顓頊)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 여와(女媧)여, 본좌가 보기에 그대는 너무 오래 산 것 같소.]
[ ......]
[ 쉴 때가 된 것 같군.]
여와가 불쾌한 듯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 황제의 자손 따위가 감히 여에게 도전한다는 말이냐?]
[ 예전부터 말했을 텐데. 황제께서 당신을 상위로 인정하라는 명을 내렸기에 인정하고 있을 뿐이라고.]
쿠구구구구
[ 나 전욱, 그대보다 혼돈의 권능이 밑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소.]
[ 고작 필멸자 때문에...]
[ 후후. 그것과는 상관 없소. 본좌는 지금이 그대를 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되는군.]
내 내면의 음신지력이 갈수록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 인간의 형상이 잔뜩 헝클어졌고 신력이 대신해서 내 몸을 구성했다.
진정한 삼황오제의 힘이 천상의 단말을 통해 연결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음신지력의 수백, 아니 수천 배나 되는 힘이 쏟아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몸이 혼돈의 거인으로 변화면서 혼돈의 수용력이 인체보다 급격히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망량이 침음성을 냈다.
" 강제 신화(神化)..."
잠시 후 나는 거대한 흑암의 거인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이 뒤틀리더니 흑암 속에서 수많은 귀신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에는 축융이나 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여와를 포위하기 시작했고 여와는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 전욱이 자신의 손을 위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 만귀전, 여와를 일제 공격하라.]
[ 존명!!]
삼황과 오제가 태초 이래 첫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