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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작전은 가닥이 잡혔다. 우선 한 시진의 유예를 이용해서 준비할 일을 다 하기로 한 것이다. 망량이 말했다.
" 어서 갑시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화요의 봉인지로 향했다. 그리고 화요의 봉인결계를 뚫기 위해 음신지력을 끌어올린 채 팔진도의 중앙에 섰다. 팔진도에는 삼재의 축으로 제갈유룡, 제갈사, 제갈부가 서 있었다. 팔진도를 전개하던 제갈유룡이 말했다.
" 흑웅이 없으니 원래라면 너 혼자 음신지력으로 태평요술을 발동할 수 없겠으나, 우리가 팔진도를 이용해서 보조하겠다. 여기에는 토요 팔괘도의 힘도 있으므로 화요의 결계를 무력화시키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 알았어."
" 너는 진 중앙에서 음신지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만 해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쿠우우우
잠시 후 팔진도가 파랗게 빛났고, 팔괘가 천공에 나풀거리며 무수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괘수를 차분하게 읽어내던 제갈유룡이 제갈사에게 계산결과를 전달했고, 그 암호같은 말을 들은 제갈사는 즉시 해석하고는 옆에 있던 제갈부에게 다시 전했다. 그리고 잠시 후 팔진도는 내가 중앙에서 뿜어내던 음신지력을 빨아들이더니 태평요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태평요술
천후지변(天候之變)
파아앗
하늘을 향해 빛의 기둥이 뻗어져나가더니 잠시 후 하늘의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움직이는 건 구름 뿐만이 아니었으며 이윽고 맑은 하늘이 시꺼멓게 변했고 잠시 후 일식(日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태양이 요사스러운 빛을 내뿜었고 그 힘이 서서히 화요의 결계에 잔광처럼 내려쬐기 시작했다. 빛의 물결을 받은 결계는 잠시동안 버티는 듯 하더니 이내 계란껍질처럼 쩌적거리며 깨졌다. 화요의 결계가 완전히 깨지는데는 고작해야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화요의 결계를 해제한 나는 제갈사에게 말했다.
" ... 그냥 태평요술의 종사인 남화노선을 데려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 놈이 우리 말을 순순히 들어줄 리도 없고, 단순히 [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네가 남화노선보다 몇 배나 높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남화노선이 전력으로 태평요술을 써도 지금처럼 쉽게 화요의 결계를 깨진 못했겠지."
" 흐음."
" 빨리 가자. 한 시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제갈사의 말대로였다. 우리가 화요의 내부에 진입하자 공공이 완전히 전투태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공공이 무섭게 화를 내며 말했다.
[ 이놈들... 감히 화요를 침범하려 하느냐!]
나는 공공을 구슬리는 일 따위는 이제 어린아이에게 떡 하나 주는 것과 다를바없이 쉽다고 여겼다. 하물며 이 정도로 상황이 뒷받침해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공공에게 말했다.
" 공공이여. 지금 천계가 붕괴해가고 있으며 서왕모가 진체(眞體)인 여와의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소."
[ 아... 아니 뭣이!]
나는 공공에게 간략히 상황을 설명한 후 말했다.
" ... 그리하여 우리는 여와가 지상을 부수기 전에 그녀를 공격해서 이 세상에서 추방할 생각이오."
[ ......]
" 공공이여, 우리를 도와주시오. 그러면 당신을 얽어매고 있는 그 주박을 이 자리에서 즉시 풀어주겠소."
[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 의심스럽다면 그냥 해 드리지. 일단 화요를 내놓아보시오."
[ 으음...]
" 나는 전욱의 사도이기도 하오. 임무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 알았다.]
나는 공공을 구슬려서 화요를 건네받은 후 용화수의 씨앗까지 얻어서 곧바로 낙양심처로 가서 책사들과 함께 화룡신검을 되살렸다. 그리고 화룡신검을 가지고 와서는 공공에게 새겨져 있는 주박을 풀었다.
촤아악!!
마치 가시덩굴처럼 얽혀있던 주박이 풀려나자 공공은 환희어린 표정을 지었다.
[ 오오...]
" 난 약속을 지켰소. 당신도 우릴 도와주시오."
[ 도와줄테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솔직히 서왕모가 그정도의 힘을 발휘한다면 이제 와서 내가 본체의 힘을 찾는다 해도 큰 도움은 안 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그게 아니오. 당신은 염제 신농의 봉인지를 알고 있지 않소?"
[ ......]
" 이 기회에 그를 깨워서 여와에게 대항케 하고자 하오. 하는 김에 그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
[ 그렇군! 좋다, 가자!]
파앗
우리는 공공을 따라서 염제 신농의 봉인지로 갔다. 그리고 봉인지에 걸려있는 여와의 봉인을 살펴보았는데, 공공이 실망스러운 듯 말했다.
[ 이런... 여와의 봉인이 많이 약해진 것 같지만 아직까지 강력하다. 이건 단시간에 부술 수 없을 것이다.]
" 그런 것 같군."
여와가 서왕모의 힘을 끌어다썼다가 광성자에게 잠시 봉인당한 여파일까? 봉인은 3할 정도의 힘이 빠져 있는 듯 했으나 아직까지 핵이 건재하다는 걸 화안금정으로 알 수 있었다. 공공의 말대로 이렇게 강력한 결계는 결코 쉽게 깰 수 없었고 하물며 한 시진 내에는 불가능했다.
' 염제를 깨우는 건 무리인가?'
역시 염제의 봉인은 예전처럼 여와가 직접 풀어주는 게 아니면 풀기 힘들 듯 했다. 내가 고민에 빠지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어차피 서왕모에게 큰 타격을 줘서 소멸지경에 이르게 되면 이 곳의 봉인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그 때 염제를 구출한 후 그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여 수해를 돌파하면 된다."
" 흠!"
우리는 한 시진의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화요와 화룡신검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갈유룡이 말했다.
" 목요와 금요를 얻기에는 시간이 꽤 촉박할듯 하니 포기하자."
" 십이율주를 설득하거나 팔리아스에서 얻으면 안되는 건가?"
" 그게 고작 반 시진 사이에 가능할거라 생각하나? 둘 중 하나도 불가하다. 그 둘을 무력으로 윽박질러봤자 그들은 만만치 않은 존재이니 칠요를 뺏지도 못하고 원한만 살 뿐이다."
" 음..."
" 이것만으로 해 보는 수밖에 없겠다."
" 칠요를 갖고 온 건 좋은데 이걸 어떻게 쓰지?"
칠요는 신급 보물이긴 하지만 상대가 삼황 여와, [옛 지배자]라면 이걸 장비하고 싸워봤자 무의미할 것이다. 내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칠요공명을 이용하는 거다. 그 이상의 강화방법은 없다."
" 두 개의 칠요가 공명한다면 확실히 강하긴 하겠지만, 통할지 모르겠군."
" 당연히 그냥 쓰면 안 되지. 한 명에게 힘을 몰아줘야 하며 일격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항우에게로 향했다.
항우!
거의 유일하게 서왕모에게 피해를 줬던 그의 힘이라면 칠요공명까지 쓴다면 흉신의 주문으로 약화된 서왕모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항우는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듣고있었을 테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걱정스럽게 항우를 쳐다보고 있을 때 망량이 말했다.
" 백웅. 잠시 이리로..."
나는 망량이 부르는대로 인적없는 곳으로 갔다. 둘만이 남은 자리에서 망량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스승님의 전언이오. 얻으려 하면 잃게 될 것이니,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소."
" ......?"
" 그리하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하셨소."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 망량선사가 내게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이오? 대체 왜..."
" 이유는 모르겠소. 허나 스승님께서는 반드시 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거라 예언하셨소. 부디 귀담아 들으시오."
" ... 알았소."
나는 망량에게 가장 궁금한 게 하나 있었으나 도저히 물어보지 못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어째서 망량선사는 이번 생에 유독 훈수를 많이 두는 걸까?
원래 그 고양이놈은 지독히도 내 일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싫어하는 기색마저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왠지 망량을 통해서 내 일에 많이 간섭하려는 듯 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의아하게 느꼈으나 망량에게 물어봤자 알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내가 망량선사의 의도와 태도변화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자 망량이 말했다.
" 백웅. 덤으로 신공표도 깨웁시다."
" 위험하지 않겠소?"
" 어차피 여와보다 위험하진 않소."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며 곧장 제천대성에게 가서 여의봉을 빌렸고, 음신지력을 소모해서 신공표의 봉인을 풀었다.
[ 나는 절교교주, 신공표! 이제 나의 봉인이 풀렸구나!]
" ......"
[ 으... 으음? 뭐냐 너희는!]
봉인에서 풀려난 신공표가 날뛰려 했으나 이내 장내에 쟁쟁한 존재들이 가득한 걸 보자 멈칫거렸다. 팔부신중은 물론이고 기세가 등등한 항우, 제천대성 등을 보자 왠지 기가 질린 기색이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 조용히 좀 해 봐. 날뛰지 말고."
[ 뭐냐? 지금이 어떤 상황이냐?]
" 신공표. 여와를 죽여야 하니까 도와다오."
나는 신공표에게 상황을 설명했으며 삼청이 암살당한 정황에 대해서도 모두 이야기했다. 원시천반에서의 싸움까지 이야기하자 신공표는 언뜻 질린 눈으로 항우를 쳐다보았다.
[ 타신편을 쓰는 사형을 죽였다고...? 나도 동귀어진을 각오해야 할 터인데... 저 괴물같은 놈.]
" 어쨌든 안 싸우면 지상은 멸망한다. 좀 도와줘."
[ 좋다. 대신 타신편은 내가 쓸 테니 내놔라.]
" ......"
[ 내가 쓰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보패 욕심이냐!
하지만 확실히 타신편처럼 강력한 보패는 신공표가 쓰는 편이 좋았기에 별말없이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신공표 입장에서도 서왕모와의 싸움은 피할 이유가 없는 듯 했다.
우리는 싸울 준비가 끝났음을 팔부신중 측에 알렸다. 팔부신중들은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의 작전을 들은 후 말했다.
[ 우리도 공격 때 힘을 합치겠다.]
" 궁금한 게 있소만."
[ 뭐냐?]
" 서왕모를 죽이는데 이토록 집착하는 건 단순히 동료가 죽은 원한이오? 서왕모를 죽이면 당신들은 무엇을 얻소?"
[ 우리가 그걸 말해줄 이유는 없을 터.]
긴나라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하지만 정황상 그들이 결코 동료가 죽은 원한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서왕모를 쓰러뜨리고 나서 연속으로 팔부신중과 싸우게 될지도 몰랐기에 나는 내심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우리는 서서히 광성자의 봉인이 풀려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연꽃의 빛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서왕모의 시간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게 보였고, 이윽고 완전히 봉인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나는 즉시 흉신의 주문을 외웠다.
쿠구구구구!!
흉신의 주문이 시전되는 순간, 서왕모의 강고한 결계에 구멍이 잠시 뚫렸다. 역시 흉신의 주문은 강대한 주문답게 서왕모의 방어조차 뚫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한계인지 서왕모의 본체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항우가 두 개의 칠요를 몸 주위에 띄운 채 주먹에 힘을 모았다. 항우가 완전히 힘을 모으기 전에 결계에 뚫린 구멍이 더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 나머지 동료들이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콰과과광!!
마치 세상이 망하는 듯한 폭음과 굉음, 섬광과 함께 서왕모 주변에 쉴 새 없이 열옥(熱玉)의 덩어리가 휘몰아쳤다. 마왕 팔부신중들이 모든 힘을 끌어내서 권능으로 공격하는데다 미호와 서문혜까지 가세해서 공격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팔선들도 멀리에서 공격을 쏟아붓고 있으니 가히 가공할 기세였다.
빠지직
서왕모의 결계구멍은 줄어드는 듯 하다가 공세 때문인지 도로 넓혀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항우가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화요와 토요의 힘을 끌어올리며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공명의 힘이 항우가 뿜어내는 성좌의 기운을 한층 더 강하게 하는 게 보였고, 그의 몸속에 있던 성좌들이 쉴새없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성좌의 핵이 항우의 심장에 모여들어서 하나가 되었고 항우는 일 권을 내뻗었다.
성좌공명(星座共鳴)
패왕권(覇王拳)
퍼벅!!!
마치 하나의 광시(光矢)처럼 뻗어간 항우의 몸뚱이가 흉수 서왕모의 목에 틀어박혔다. 잠시동안 살에 박혀서 꿈틀대는 듯 하던 항우는 주먹을 뒤틀면서 다시 한 번 내질렀고, 그와 동시에 서왕모의 목이 터져나갔다.
푸콰콱
해낸 건가?!
저건 치명상이다!
드디어 서왕모를 해치운 것인가!
그러나 옆에서 보고 있던 신공표가 크게 안색이 안좋아지더니 급히 외쳤다.
[ 가라, 사보검!!]
투웅!
그와 동시에 선계 최강의 위력을 갖고있다고 일컬어지는 네 개의 보검보패가 날아가서 서왕모의 사지를 꿰뚫었다. 신공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타신편을 전방으로 내던졌다.
[ 타신편이여, 신성(神聖)을 파괴하라!]
꾸웅
타신편의 쇄가 서왕모의 육중한 동체에 날아가 박혔다. 마치 시체를 난도질하는 듯 잔혹한 광경이었으나 신공표는 한층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 이... 이런... 서왕모의 육신에 신성이 존재하지 않아... 그렇다는 건...]
이어진 신공표의 말에 나 또한 안색이 급변했다.
[ 저건 빈껍데기다...!!]
다음 순간.
항우는 힐끔 자신의 등 뒤를 쳐다보았고, 그 자리에는 '어떤 존재'가 서 있었다. 다른 세상의 신비한 생물처럼 보였으며, 별처럼 빛나는 까만 눈은 마치 보석과 같았다.
허공에 떠 있던 그 존재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 패왕 항우. 여는 그대의 힘에 경의를 표한다. 그대는 방금 전 여에게 최악의 위기를 느끼게끔 했다.]
스윽 하며 그 존재의 손이 항우를 가리켰다.
[ 허나 그대는 스스로 죽고싶어했다... 그것이 운명의 분기점이 되었다.]
항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 훗."
다만, 그저 편해보이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잘 가거라, 패왕이여.]
스르르륵
항우의 몸이 가루가 되어서 흩어졌다. 초패왕 항우의 소멸이었다.
" ......?"
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현실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망량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백웅. 도망치시오."
스르르륵
다음 순간 팔부신중 긴나라와 천인이 소리소문없이 소멸했다. 그 존재가 눈빛으로 쳐다본 것만으로도 팔부신중 두 명이 사라진 것이었다. 저걸 공격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그 존재가 사라지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대상은 모조리 소멸해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 ... 우린 실패했소."
하지만 떨리는 망량의 말과 함께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삼황 여와가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