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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가지 말라니?
나는 제갈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대체 왜?"
내 말에 제갈사는 천천히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위에 갖다대었다. 침묵과 비밀을 상징하는 그 행동을 한 제갈사가 잠시 후 말을 이었다.
" 네가 말조심을 하는 이유와 같아."
" ......"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제갈사의 말에 큰 의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까지 내가 이번 삶에서 '전생'에 관련하여 입조심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책사들은 그걸 전제조건으로 여기고 있었다. 절대적인 금기를 내세우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제갈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태허궁에 가는 건 사실 그렇게 틀린 책략은 아니야. 형님의 관점은 설령 금기를 범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계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서왕모를 실각시키자는 것이다. 당장의 성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그러나 그건 형님의 관점이고, 백웅 너의 책사로써 볼 때는 차라리 이번 생에 서왕모에게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태허궁까지 가는 금기는 범할 수 없다는 말이다."
" 금기라고? 어째서..."
" 백웅. 됐고 여기서 제안하지."
제갈사가 눈을 빛냈다.
" 항우는 그냥 놔둬. 그리고 서왕모와 협상해서 이 자리를 타개하자."
" ......"
" 그게 지금은 가장 현실적이다. 마침 협상할 재료도 갖춰졌으니."
" 어떻게 할 건데?"
" 서왕모가 공격적이긴 하지만 구천현녀가 진심이 되면 자신도 위험할거란 사실은 알 거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는 구천현녀를 먼저 진심으로 만들어야겠지. 그러면 서왕모 또한 같이 죽기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구천현녀를 진심으로 만든다고?
' 제갈사는 어떤 계책을 쓰겠다는 말이지?'
내가 그 말의 뜻을 언뜻 파악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해하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정말로 네놈은 네 주군밖에 모르는군. 그건 백웅 외에는 모두가 불행해지는 선택지다."
아마 자신의 수를 읽었을 제갈유룡의 힐난이었으나, 제갈사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 책사가 책임져야할것은 주군밖에 없지 않나? 이상한 소리하지 마, 형님."
" ... 후."
제갈유룡이 한숨을 쉬더니 내게 말했다.
" 백웅. 네가 대의(大義)를 위해 싸운다고 주장할 거라면 내 말을 들어라. 제갈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 잘 모르겠는데..."
" 구천현녀와 서왕모의 차이는 지상을 지키려하는가 무시하는가이다. 구천현녀는 지킬것이 있기 때문에 약하다. 그렇기에 구천현녀가 지키려 하는 걸 없애버린다면 구천현녀는 더 이상 힘을 억제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럼 그때부터는 이쪽이 대등 이상으로 싸울 수 있게 되니 서왕모가 어쩔수없이 우리와 교섭에 나설거라는 말이다."
나는 그제서야 깨닫고 안색이 굳었다.
" 지상을 파멸시킨다고?!"
" 방법이라면 아마 간단하겠지. 우리가 원시천반을 손에 넣었으니 원시천반을 조작하면 현재 천계를 이루는 모든 결계를 무효화시키고 곤륜산을 붕괴시킬 수 있다. 그리고 천계가 무너진 여파가 세상을 뒤흔들테니 온갖 천재지변이 세상에 닥쳐올 것이다."
" ......!!"
" 백웅, 너는 그렇게 하고 싶은가?"
나는 제갈유룡이 예측한 제갈사의 계책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제갈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맞아. 역시 형님이군. 내 책략을 읽어내다니."
" 제갈사! 원시천반을 이용해서 거기까지 가능한 거냐?"
" 가능하겠지. 팔괘의 달인인 형님의 도움을 받으면 그 이상도 할 수 있겠지만 뭐, 안 도와주겠지? 그렇다 해도 나와 현이의 팔괘 실력이면 세계의 균형을 뒤틀어 천계를 몰락시키는 것까진 가능해. 원시천반은 인간이 제작한 게 아니라 삼황(三皇) 복희가 제작한 것이니 칠요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다."
" 그래도 안 돼. 세상이 멸망하는 선택지는 할 수 없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제갈사가 대꾸했다.
" 그럼 어쩔건데? 주군으로써 뭘 어떻게 해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지 말해 줘. 그럼 책사로써 그 의견에 보충하고 개선안을 내 주지."
" ......"
" 진퇴양난이라구. 어차피 인간이란 신이 키우는 가축과 다름없으니 좀 청소되어도 나쁠 건 없잖아? 과학기술만 좀 발전시켜주면 제멋대로 곰팡이처럼 자라날텐데."
허무감을 담은 제갈사의 말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과 광기가 스며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서 제갈사가 책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지금 내 상황이 더 이상 대의를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나쁜 상황이 되었다는 것과 동의어이기도 했다.
' 어떻게 하지?'
제갈사의 계획대로 천계를 원시천반으로 멸망시키고 곤륜산을 지상에 떨어뜨려 대재앙을 일으키게 된다면 구천현녀는 어쩔 수 없이 서왕모만이라도 제압하기 위해서 힘을 쓰게 된다. 그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었으나 당연히 극악(極惡)한 계획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갈사의 말에 마냥 대의만 앞세워서 반대하기에는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제갈유룡이 말했다.
" 태허궁에 가자. 그리고 항우를 돕자."
" ... 금기라고 했잖아."
" 금기지만 그건 '인식'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될 것이다."
" 무슨 소리야?"
" 제갈사가 했던 경고를 네가 지키기만 한다면 금기가 최악의 상황이 되어서 돌아올 일은 없다. 의도치 않은 흐름은 도리어 상대가 즐기게끔 되어 있으니까... 우연이기만 하면 문제 없어."
" ......?"
" 백웅 네가 그리 똑똑하지 않은 게 도리어 다행이라는 말이다."
뭐야?
왜 갑자기 내 지능을 갖고 난리야?
제갈유룡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비비 꼬아서 이야기하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듣고 있던 제갈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주군이 끝까지 착한 척을 하려니 답이 없군... 이 상황에서는 그냥 인간세상을 박살내는
게 효율적인데! 백웅, 더 이상 시간을 끌어도 무의미하니 형님의 말대로 해."
" 태허궁에 가라고?"
" 그래. 위험하더라도 항우의 결말을 보는 편이 낫겠다. 그건 어마어마한 정보니까. 하지만 '금기'만 어기지 마라. 그것만 해낸다면 괜찮을 거다."
" 알았어!"
" 당부하는데 모르는 걸 굳이 알려고 무리하지 마."
" 알았다구."
파밧
나는 일단 뭐가 뭔지 모르겠으나 책사들이 시키는대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제갈유룡과 함께 태허궁으로 향했고 궁궐의 내부로 들어갔다. 제갈사는 다른 동료를 딸려보낼 필요가 없다고 했기에 그냥 제갈유룡, 제갈부와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태허궁에 들어오자 나는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느낌이 어째서 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 아무런 결계도 없어.'
천계의 모든 궁궐에는 소유주가 있으며 대개 그 소유주는 대라신선이었다. 대라신선들은 자신의 궁을 지키기 위해 모종의 결계나 술법을 걸어두게 마련이었고 그 술법의 기척은 내 음신지력과 화안금정에 걸리게끔 되어 있었다. 실제로 삼청궁에서도 그런 결계를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태허궁은 이상할 정도로 술법이나 결계의 기척이 없었다. 텅 빈 무언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내부 풍경은 그럭저럭 도가의 궁전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 곳은 텅 비어있는 곳이다.
가만히 있던 제갈부가 입을 열었다.
" 아버님. 백 장 앞에 두 존재가 대면하고 있습니다."
" 그런가..."
" 한 명은 항우인 듯 하고 한 명은 묘령의 사내입니다."
" ...... 흐음. 시작됐군."
제갈부의 보고에 침음성을 흘린 제갈유룡이 말했다.
" 가자."
우리는 잠시 후 항우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궁의 최심부에는 허름한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그 제단은 고대 도가(道家)의 양식을 하고 있었다. 둥그런 판처럼 생긴 대리석제단 위에는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 사내는 훗하고 웃으며 항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자네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미 많은 걸 추측하고 온 거겠지?"
" ......"
" 오랜만일세. 자네를 이 모습으로 보게 되는 건 아마 오백 년쯤 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대면하게 되었군."
아주 느긋하고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긴 했지만 왠지 나는 저 말투를 어디서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항우는 뜻밖에도 달려들지 않고 천천히 상대에게 말했다.
" 유방(劉邦). 본왕 또한 널 보고 싶었다."
......?!
유방이라고?!
적룡왕이라 불리며 한나라 왕조를 연 사내가 지금 항우 앞에 있는 자라는 말인가?! 항우의 유일한 대적자라 알려졌으며 역사 최후의 승자로 이록된 한 고조가 뜻밖에도 태허궁에 있는 것이다!
유방이 말했다.
" 항우여,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주먹부터 쓰지 않는군. 내 곁에 소하와 장량, 한신이 없으니 날 한주먹에 죽일 수 있지 아니한가?"
마치 도발하는 듯한 말이었으나 항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아주 냉정하고 담담한 눈으로 유방을 쳐다보고 있었으며 살기조차 제어하고 있었다. 저런 항우의 모습을 보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으므로 내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항우가 입을 열었다.
" 그 놈들은 모두 네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본왕은 해하(垓下)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 모든 성좌의 화신보다 네놈이 더욱 두려운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네놈이라도 쳐죽이려고 마음먹었을 때 유방 네놈은 우희를 들먹거렸지."
" 하하하."
유방은 껄껄 웃더니 말했다.
" 솔직히 그 때 나는 죽어도 어쩔수 없다 생각했으나, 항우 자네에겐 생각보다 인간의 마음과 정(情)이란 게 남아 있더군. 생면부지의 타인은 백만 명을 때려죽여도 무정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마음이라... 아주 아름다웠어."
" ......"
" 그래, 나는 자네와의 약속을 이행했네. 자네가 자결하는 대신 나머지 초국의 병사들을 모두 살려줬고 차별해서 등용하지도 않았어. 이제 와서 무엇이 문제이길래 천계의 태허궁까지 왔단 말인가?"
" 진짜 문제는 네놈이 태허궁에 있다는 사실이겠지."
항우의 눈빛이 번득였다.
" ... 어디서부터 본왕을 농락한 거냐? 적룡도 아니면서 적룡왕이라고 자칭했던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 뭐, 그렇군. 지상에 강림할 때 대충 끼워맞춘 거였지만 자네가 그 일 때문에 남방용왕을 패대기치고 멱살잡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어. 하하하."
" 네놈이 무엇이냐 물었다. 이 태허궁의 주인이자 유방을 자칭했던 네놈의 진짜 정체 말이다."
" 진짜 정체라..."
유방이 빙긋 웃었다.
" 그런 건 잘 모르겠는걸... 하도 가면을 많이 갖고있다 보니, 이제는 어떤 게 원래 가면인지를 잊어버리고 말았네."
" 뭐라고...?"
유방은 문득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시종일관 농락하는 듯한 인상이었는데 왠지 절망한 듯한 기색이었다.
" 또한 이 모습도 내 하나의 가면일 뿐이고, 이 가면에 다양한 이름이 붙어있을 뿐일세. 가면에 어떤 인격이 있든간에 내 진짜 얼굴의 인격을 추측할 순 없지 않은가? 그게 가능하다면 가면은 가면이 아닐테니... 말일세."
" ......"
" 내 정체를 물어봤자 무의미하네. 자네가 추측하는대로 나는 태허궁의 주인이자 유방이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아니니까 말일세. 다만 지금의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몇 가지 있겠군."
유방이 자신의 등 뒤편으로 엄지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 우희를 보고 싶은가? 아니면 내 진짜 정체를 정말로 알고 싶은가? 둘 중 하나만 들어 주지."
" 건방떨지 마라."
" 후후후! 어떤 선택이든간에 나는 나름대로 즐길 수 있으니 만족하겠네. 어느 쪽도 승복하지 못하고 날 때려죽인다 해도 받아들이지."
" ......"
당연한 말이지만 항우는 바보가 아니다. 이 상황에 유방을 때려죽이는 게 바보짓이라는 건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은 항우는 함묵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항우라지만 이런 선택을 쉽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지금이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끼어들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성큼 앞으로 나서면서 유방에게 말했다.
" 한고조 유방이여! 나는 백웅이라 하오!"
유방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나는 그에게 외쳤다.
" 당신이 누군지 상관없으니까 서왕모나 좀 멈춰주시오! 대가는 지불하겠소!!"
" ......"
내 말에 유방이 처음으로 평정심을 잃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문득 호기심어린 표정을 짓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지만 백웅이라 했던가? 자넨 참 묘한 자더군. 무공, 술법능력 모두가 범상치 않은데 정작 두뇌는 그 역량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쟁쟁한 대존재들의 신뢰를 얻고 있으니 그 또한 신기하군."
나는 씩 웃었다. 저런 비꼬기는 곧이곧대로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 하핫. 칭찬하지 않아도 괜찮소."
" ... 어, 아니, 뭐 그렇다 치고."
뭔가 기가 질린 듯한 유방은 어물쩡 말을 돌리며 말했다.
" 아무튼 자네는 혹시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닌가?"
" 어떤 능력 말이오?"
" 이를테면..."
유방의 눈에서 무색의 혼돈이 넘실거리는 듯 했다.
" 죽어도 다시 시작하는 능력이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