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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우리는 항우를 앞세워서 마지막 혈주인 남극선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장소에는 아니나 다를까 태공망을 위시해서 3인의 혈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깨어난 남극선옹이 호오오, 하는 한숨소리를 내었다.
" 아주 슬픈 일이군... 사형께서 맡기신 대업(大業)이 이런 식으로 망가질 줄이야."
" 사숙.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남극선옹은 내가 가면을 썼을 때와 달리 경거망동하지 않았으며 매우 슬픈 표정으로 우울해하고 있었다. 그만큼 봉신혈주의 술법 중 2개가 파괴되고 고대인의 봉인이 풀린 것이 그에게 있어서 절망적인 일이라는 뜻이었다.
남극선옹을 달래던 태공망이 말했다.
" 봉인 모두가 파괴되지 않은 이상 고대인의 영혼은 이 원시천반에서 해방되지 않습니다. 저들을 해치우면 수습할 기회가 있습니다."
" 강자아, 너는 예전부터 아주 의지력이 강한 아이였지... 허나, 이미 쐐기가 뽑혀버린 이상 지상의 인간들에게 미칠 영향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석년의 사형만큼의 힘이 있다면 재봉인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너 자신을 희생해야할 터..."
" 그런 건 나중의 일입니다. 지금은 눈 앞의 적에게 집중해 주십시오."
" 으음."
" 항우는 강합니다."
태공망의 시선이 우리 쪽을 향했다. 태공망의 옆에는 깨어난 용길공주가 허공에 떠 있었는데, 그녀는 선계의 대원로이자 원시천존이 천계를 만들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고대의 신선이었다. 용길공주는 무감정한 눈으로 항우를 주시하다가 말했다.
" 무지막지한 존재로군. 어찌 저런 자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성좌의 힘을 도대체 몇 개나 갖고있는 거지?"
" ......"
" 도덕천존(道德天尊). 저 자를 봉인할 수 있겠소?"
도덕천존이라고 불린 청년이 나직이 말했다.
" 불가하오. 내 본체였다면 가능했겠지만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소."
" 어쩔 수 없군. 타신편의 힘에 모든 걸 걸어야겠구나."
그들이 우리를 앞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항우는 그들에게 바로 덤벼들지 않았다. 다짜고짜 모든 걸 박살내는 항우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으나 잠시 후 항우가 입을 열었다.
" 물어볼 게 있다."
항우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항우가 태공망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 이딴 걸 왜 지키는거지?"
" 무슨 말이오?"
"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게 풀려나든 아니든 이 세상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 본왕은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 또한 무의미한 싸움임을 알고 있다."
" ......"
항우가 태공망을 심유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너 정도 되는 놈이 무의미하게 죽는 건 아깝다. 그만 항복하고 원시천반으로 우희를 찾으면 살려주겠다. 그게 본왕이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다."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항우가 항복을 종용하다니!
여태껏 항우가 적을 때려부수면 부쉈지 결코 타협하거나 항복을 권유한 적은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항우에게 있어서 태공망은 인정할만한 상대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신화시대를 종결시키고 주왕과 달기를 없앤 전설의 대영웅이자 신선이니 어찌보면 그럴만도 했다. 또한 잠시동안의 대결이었으나 태공망이 항우를 상대로 멀쩡히 버텨낸 것도 놀라운 일이다.
태공망은 침묵하다가 말했다.
" 초패왕 항우여. 물론 신의 힘에 비하면 아무리 고대인의 권능이라 하나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오. 이 마지막 쐐기가 풀려난다 한들 지금 천계에서 날뛰고 있는 서왕모를 상대로는 별로 의미가 없소. 인간 중에 대단한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배출된다 한들 [옛 지배자]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러나... 이 쐐기가 풀려나는 진짜 의미는 다르오."
" 다르다고? 무슨 의미지?"
" 이 원시천반의 혈주는... 인과율을 이용한 1차 봉인이오. 2차 봉인이 풀려나는 일종의 [열쇠]."
그렇게 말한 태공망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 고대에 봉인된 것은 인간의 권능만이 아니오. 그건 사실 사소한 일이지. 진짜 중요한 건 [ 만신(萬神)을 파괴하는 자 ] 또한 함께 봉인되었다는 사실이오. 그 자가 풀려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기에... 몇 겹으로 봉인을 걸었던 것이오. 우리는 이 방법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 하더라도 실낱같은 평화를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이오. 당장 모든 것이 파멸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 만신을 파괴하는 자?"
" 그렇소... 이 원시천반이 1차봉인의 열쇠란 걸 알고 있는 건 오로지 삼황 여와와 삼청 뿐이었소. 오제(五帝)조차 그 사실을 모르오."
태공망은 쓴웃음을 지었다.
" ...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해봤자인가. 어쨌든 우리는 포기할 수 없소. 찰나의 평화를 위해서."
" 본왕이 그대들을 찢어죽인다 해도 말인가?"
항우의 말에 태공망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 죽이시오. 우리의 시체를 밟고 가시오. 그러나 우리는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의 유지를 받들어 사명을 다하겠소."
" 좋다."
스윽
항우는 팔짱을 풀고 손을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혈광을 내뿜으며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 모두 죽어라!"
쿠콰쾅!!
거대한 빛과 함께 항우의 주먹이 도덕천존이라고 불린 혈주의 몸에 쑤셔박혔다. 도덕천존은 항우의 주먹을 맞자 순식간에 가슴팍이 터져나간 듯 했으나 놀랍게도 도리어 손을 뻗어서 항우의 팔목을 잡았다.
도덕천존은 편안한 듯, 뭔가 체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미안하오, 패왕. 원한은 없소."
항우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릴 때 도덕천존이 뭔가 주문을 외웠다.
신술(神術)
도법자연(道法自然)
위잉
도덕천존의 모습이 난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항우는 갑자기 움직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 ......!!"
세상에 저럴수가!
항우가 멈춰설 수도 있었단 말인가?
항우가 멈춰서서 눈에서 시뻘건 혈광만 흘리고 있자, 뒤편에 떠 있던 용길공주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아아... 이런 일이..."
그녀는 진심으로 슬픈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 ... 도덕천존은 삼청 태상노군의 화신(化身)이었으나 태상노군이 독립시켜 자신의 의지가 존재하는 대라신선이었다. 그가 자기자신을 소멸시키며 대의를 관철시키려 하니 본녀도 모든 희생을 감수하리라!"
설마 도덕천존이 자기자신을 희생하는 신술을 써서 항우를 속박했단 말인가?!
쿠르르릉!
용길공주가 손가락 끝에서 새하얀 이슬덩어리같은 걸 만들어내더니 허공에 떨쳐냈다. 허공에 풀려나온 이슬덩어리는 잠시 후 마치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의 수량(水量)으로 변하더니 항우를 그대로 가둬버리고 말았다. 물 속에 갇힌 항우를 보던 용길공주가 자신의 모든 영력을 뿜어내며 주문을 외웠다.
신술(神術)
억년빙하월(億年氷河月)
치리리링
용길공주의 몸이 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영력과 신력이 물의 구체에 흘러들어가며 얼어버리기 시작했으며 그 온도는 틀림없는 절대영도일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던 제갈유룡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 이건 위험하군. 백웅, 항우가 풀려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 알았어."
" 태공망은 내가 견제할테니 남극선옹이 끼어들지 못하게 해라!"
" 견제할 수 있어?"
내 질문에 제갈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적어도 신술 태극도만은 못 쓰게 하겠다. 그것만 막으면 승산이 있다."
" 좋아!"
파앗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남극선옹에게 도전하듯 날아들었다. 그러자 가만히 서 있던 남극선옹은 내 검뢰를 피하지도 않은 채 희미한 눈을 들어서 나를 쳐다보았다.
까앙!
' 크윽.'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내 검이 통째로 튕겨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남극선옹이 만들어낸 술법의 방어막일텐데, 지금의 내 검술이면 설령 팔선이 친 결계도 자를 수 있었기에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남극선옹에게 재차 모든 내공과 음신지력을 담아서 일격을 날렸고, 이번에는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남극선옹의 방어막이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극선옹의 눈매가 서서히 사나워졌다.
" 이 못된 놈들... 감히...!!"
남극선옹이 순간 입에서 새하얀 입김을 흘려내는 게 보였다. 나는 남극선옹의 가면을 썼었기에 기억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게 뭔지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신술 창천대신광!'
저 술법은 신급술법인데다가 한번 시전되면 무수한 빛의 줄기가 광속으로 상대를 관통하게 되는데, 그 줄기에 조금이라도 접촉하면 상대방은 영겁토록 얼어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창천대신광이 펼쳐진 동안에 남극선옹은 자유자재로 빙기를 조종하며 무한의 술력을 얻게 되니 결코 펼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사흉 궁기를 한방에 보내버리는 술법이 펼쳐지게 되면 나 또한 즉사한다!
나는 창천대신광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방법이 딱 하나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재빨리 모든 음신지력을 집중시키면서 장심에 모았다.
" 하압!"
음신지력(陰神之力)
창천대신광(蒼天大神光)
번쩍
그와 동시에 새하얀 빛이 장내를 휩쓸었다. 남극선옹이 창천대신광을 뿜어내는 순간 나 또한 음신지력을 이용해서 대충 흉내뿐이지만 마주 창천대신광을 시전한 것이다! 물론 정확한 주문을 모르는데다가 숙련도도 없었기에 위력이 별로 없었지만 음신지력의 힘으로 때워서 어떻게든 상쇄시킬 요량이었다.
끼기기깅
내 생각은 맞아들어갔는지 남극선옹이 뿜어낸 냉기의 빛이 허공에 보이지 않는 막이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막혔다. 다만 점차 힘으로 밀리는 기색이었는데 역시나 진짜 창천대신광이 훨씬 더 강한 듯 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버티다가 남극선옹이 힘을 풀자 뒤로 튕겨나갔다.
내가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하자 남극선옹이 경악했다.
" 아... 아니! 어찌 네놈이 창천대신광을 흉내낼 수 있느냐? 그 술법은 나만의 술법이다!"
흉내일 뿐이었고 제대로 된 술수가 아니었으나 어쨌든 상쇄에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 헤헷, 그 정도쯤..."
내가 씨익 웃으며 대답하려 할 때였다.
우우웅
갑자기 장내의 시공간이 왜곡되더니 사방에 팔괘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내가 뒤를 힐끔 바라보니 제갈유룡이 앉아서 가부좌를 튼 채 토요 팔괘도를 소환한 상태였고, 제갈부가 그 옆에 서서 제갈유룡을 보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우우우우 -
이윽고 진이 완전히 펼쳐졌을 때, 난데없이 창천대신광의 빛은 물론이고 항우를 에워싸고 있던 거대한 물의 감옥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홍수가 일어나듯 파도가 장내에 몰아쳤고 용길공주는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갇혀있던 항우가 몸을 꿈틀거리며 서서히 일어섰다.
나는 그 상황을 보자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 팔진도!'
제갈유룡이 토요 팔괘도를 소환한 후 그 힘을 기반으로 팔진도를 함께 전개한 것이다! 저렇게 되면 토요 팔괘도의 술법무효화 능력이 극대화되므로 신술(神術)이라 할지라도 무효화시키는 게 가능했다. 또한 토요를 지닌 제갈유룡이야말로 대라신선들과의 싸움에서 상극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 토요는 신급 술법이라도 무효화시키는 게 가능한 거였군!'
가장 위협적이던 신술 태극도를 봉인시킨 셈!
그렇다면 이제 항우만 풀려나면 이긴거나 다름없는 게 아닌가? 그러나 항우는 용길공주의 술법이 풀렸는데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태공망이 싸늘하게 말했다.
" 칠요 중 토요 팔괘도인가? 확실히 그걸로 신술조차 없앨 수 있겠지만 도덕천존이 목숨을 버리고 시전한 술법은 인과율 때문에 일반적인 신술을 뛰어넘는다. 아무리 항우 그대가 대단한 존재라지만 단시간에 풀 수는 없다."
" ......"
" 타신편의 준비가 끝났다. 사라져라, 항우."
우웅
타신편의 옥색 손잡이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타신편에서 다섯 개의 광채가 뿜어져나오더니 항우를 타격했다.
퍼버버벅!!
타신편의 쇄가 길어지더니 항우의 몸뚱이를 꿰뚫는 게 보였다.
" 안돼!!"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설마 항우가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달리 타신편의 끝이 몸에 박혔는데도 항우의 몸에서는 전혀 피가 흐르지 않았다. 태공망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 항우의 손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타신편의 쇄를 꽉 붙잡았다. 동시에 항우가 흉소를 흘렸다.
" ... 크크크크... 크하하하하!!"
파지직 파지직
시꺼먼 번개가 항우의 몸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이윽고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앙천광소하던 항우는 그대로 기개세를 일으켜서 태공망에게 달려들었다.
꽈릉!!
태공망은 항우를 꿰뚫은 타신편을 움직여서 침착하게 항우의 몸을 찢어버리려 했으나 항우의 권력(拳力)은 전혀 멈추지 않았고, 태공망은 타신편을 늘린 채 뒤로 부웅 날아갔다.
" 하압!"
허공에서 태공망이 다시 타신편을 휘둘러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자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항우의 몸이 움찔했으나, 항우는 다시 한 번 주먹을 내뻗었다.
꽈앙!!
" ... 크윽!! 봉신방(封神榜) 삼백육십오선의 가호가..."
쿨럭
태공망의 입에서 처음으로 선혈이 토해졌다. 태공망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자기자신을 강화해서 항우의 권을 맞고도 일격을 무난히 버텼으나, 두 방을 맞자 중상을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태공망은 왼쪽 가슴팍이 내려앉았으나 포기하지 않고 거대한 사자후를 내질렀다.
[ 나 타신편의 주인으로써 명하노니 - 부숴져라, 신성(神聖)이여!]
빠지직
그 순간 항우의 몸을 꿰뚫고 있던 타신편이 마치 뱀처럼 요동쳤고, 항우의 몸 내부에 새하얀 별 같은게 떠올랐다. 그리고 타신편이 옥색 빛을 뿜어낸 순간 항우의 몸에 떠오른 별 중에서 일곱 개가 그대로 부숴져버리고 말았다.
저게 뭐지?
설마 타신편이 성좌(星座)의 힘을 부쉈단 말인가!
비틀
항우가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가에 선혈이 흘렀으나 도리어 재밌다는 듯 흉소를 흘릴 뿐이었다.
" 크크크크!! 재밌구나. 재밌어!"
기이한 일이었다. 일곱 개의 별이 부숴졌으나 나머지 별이 더욱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항우의 몸에 머물던 기개세는 몇 배나 더 강력해진 것이다.
항우는 한손을 뻗어서 타신편을 쥐었고 타신편의 표면에 금이 갔다.
우지직
" 으윽. 신성이 일곱 개나 부숴졌는데 어떻게...!!"
" 크하하하."
" 정녕... 타고난 성좌만으로 [옛 지배자]의 경지에 올랐는가?!"
처음으로 태공망이 평정을 잃은 듯 했다. 타신편으로 타격을 줬는데도 항우가 죽지 않았다는 걸 믿을 수 없어하는 얼굴이었다.
주욱!
경악하던 태공망은 끌려가지 않고 알 수 없는 술수로 타신편을 무한히 늘어나게 해 버렸는데, 항우가 더 강력한 힘으로 홱 잡아당기는 순간 태공망의 몸뚱이가 바닥에 부딪혔다. 태공망의 눈에 절망이 떠올랐다.
쿠웅
태공망이 쓰러진 순간 항우가 발을 들어서 태공망의 등뼈를 짓밟았다.
우지직
" 컥! 헉! 흐윽... 허억."
짓밟힌 태공망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토혈만 거듭했고 땅에 피웅덩이가 고여서 흘렀다. 그가 저항하려는 듯 타신편의 옥색 손잡이를 꽉 쥐며 항우의 몸에 박힌 타신편에 힘을 불어넣었고 마치 뭔가가 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빠지직
타신편이 내부를 지지는 광경이 고통스러워 보였으나 항우는 끄덕도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태공망의 등뼈를 밟았다.
콰직!
" 끄아아악!!"
태공망이 비명을 내질렀다.
" 이노오옴! 강자아를 놔줘라!"
태공망이 짓밟히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남극선옹이 보패 남극칠광기를 휘둘러 공격했으나 항우는 귀찮다는 듯 한쪽 팔을 휘둘렀다.
퍼벅!
" 크아악."
그러자 놀랍게도 항우의 일 권에 남극칠광기가 부숴졌고 남극선옹이 비명을 지르며 피떡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토요 팔괘도 때문에 모든 술법이 무효화되는 공간이라지만 남극칠광기에 빛이 감도는 걸 보면 고유술법을 쓸 수 있었던 모양인데, 항우가 그 힘을 통째로 깨버린 것이다.
장내의 모든 대라신선들이 패배해서 널부러져 있자 항우가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자신의 몸에 박혀 있던 타신편을 뽑으며 말했다.
" 태어나서 제일 재밌는 싸움이었다."
" ... 허억, 허억..."
" 본왕의 권태를 달래줘서 고맙구나."
항우에게 밟혀서 숨을 헐떡대던 태공망이 힘겹게 말했다.
" ... 불행한 자여... 타고난 학살자여... 결국 그대 또한 신에게 농락당할 뿐인 것을... 어째 힘에 휘둘려... 대의를 그르치는가..."
" 질릴 정도로 듣던 이야기군."
" 난...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할 수..."
" 흐음."
항우는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태공망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그의 멱살을 잡아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절벽 끝으로 걸어가서는 태공망의 손을 비틀어서 타신편을 빼앗아서 씩 웃었다.
" 태공망, 본왕이 너를 기억하리라."
" ......"
휘익
태공망은 다음 순간 항우의 손에 던져져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동안 바람이 부숴지는 소리가 났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원시천존의 수제자이자 봉신계획의 관리자였던 태공망의 최후였다.
모든 대라신선을 처치한 항우는 이윽고 무감정한 표정으로 되돌아왔고, 있는 힘껏 일권을 휘둘러서 영겁지벽을 때렸다.
콰과광
후두둑...
영겁지벽이 부숴지면서 최후의 봉인이 풀린 듯, 내부에서 마치 안개구름처럼 무수한 영혼들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련의 상황이 끝난 걸 느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휴우."
이제 고대인의 봉인을 풀었으니 서왕모와 싸우는 아군에게 합류하면 되는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크크... 크크크크."
심상치 않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항우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를 돌아보았는데, 그의 눈에서 또 다시 혈광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 싸... 싸한데...?'
나는 상황파악을 하고는 슬며시 제갈유룡 일행과 함께 도망칠 준비를 했다. 어쨌든 고대인의 봉인을 푼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뒷걸음질치고 있을 때 항우가 말했다.
" 너흰 지금 당장 원시천반으로 우희를 찾아라. 빨리."
" 아, 알겠습니다."
내가 제갈유룡에게 곁눈질하자 제갈유룡이 별 수 없다는 듯 술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항우가 냉막하게 말했다.
" 본왕이 너희를 죽여버리기 전에."
" ......"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