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
진공가향(眞空家鄕)
태극도에 갇혀버린 이 상황을 어찌 해야할까?
나는 내심 기가 막혔다.
‘제기랄! 정향의 인과율이라며! 왜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건데!!’
마치 대운중첩처럼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어찌 된 게 천계에 들어와서 서왕모와 겨룬 후부터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인 듯 했다. 한탄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흑웅에게 말했다.
“힘을 쓸 수 없는 것 뿐이냐? 음신지력이 사라지진 않지?”
[…그렇습니다만…. 이 공간은 절대적인 무(無)입니다…. 시간이란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더 위험합니다….]
“허차원같은 건가?”
[그것과는 다릅니다…. 인식으로 인해 생겨나는 모든 개념을 무위로 만들어버립니다. 혼돈과 무(無)는 완전히 다릅니다….]
“음…. 빠져나갈 방법이 정말 없겠냐.”
[…….]
흑웅이 침묵하며 점점 쪼그라들었다. 흑웅은 미안한 듯 말했다.
[백웅 님…. 신력의 연결이 점점 사라집니다…. 곧 못 볼 듯 싶습니다.]
“사라진다고? 왜 신력만 늦게 사라지지?”
그러고보니 다른 능력은 모두 즉시 사라져 버렸는데 어째서 흑웅의 음신지력은 한동안 버티다가 사라지는 걸까? 내가 의아한 기분이 들어서 흑웅에게 그 사실을 물어보자, 흑웅이 말했다.
[저는 음신지력에서 태어난 정령…. 음신지력은 전욱이 가면을 써서 자기가 본래 지니고 있던 혼돈의 형질을 바꾼 힘이니….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음신지력은 전욱과 인과율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이 허무의 공간에서도 인과율의 법칙만은 허무가 되지 않습니다…. 신력이 강한 만큼 인과가 맺어져 있으므로 존재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그러나 아무리 대성지경이라 하더라도 이 공간이 너무 강력해서 더는 힘들겠군요….]
즉 삼황오제와 인과가 맺어진 힘이기 때문에 신의 권능 덕택에 태극도에서도 잔존할 수 있었다는 건가. 내가 가지고 있던 영력이나 내공같은 것들은 그런 인과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저 수련으로 얻어낸 힘이었기에 태극도에서는 완전봉인이 되어버린 듯 했다.
‘왠지…. 이건 중요한 단서같은데.’
지금은 분명히 위기상황이지만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 이런 경험은 숱하게 해 보았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그래! 그거야!’
나는 기민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흑웅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흑웅. 어차피 봉인당해 의식이 사라질 거라면 그 전에 날 위해 일을 해 다오.”
잔인한 계획이지만 어쩔 수 없다. 영겁토록 봉인당해서 정신이 망가지기 전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이 공간에서는 ‘죽음’조차 없는 걸로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살이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이러면 수단방법을 가릴 수가 없다.
달리 말하면 이 방법 외엔 없을 것 같다.
[물론입니다 주인님….]
“네 모든 걸 바칠 수 있겠냐?”
나는 그 순간 흑웅에게 내 생각을 공유했다. 내 계획을 읽은 흑웅은 순간 옅은 웃음을 띄는 듯 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이 있다면… 또 한번 같이 깽판을 치고 싶군요….]
“그렇게 될 거야.”
우웅
나는 흑웅의 머리에 손을 뻗어서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흑웅의 내부에 존재하는 거대한 음신지력을 고스란히 내 안으로 흡수하면서, 정제 되어있던 기운을 풀어버리기 시작했다. 원래 음신지력이 쓸데없이 방대하기만 했지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기에 흑웅에게 압축시키면서 모든 걸 효율화시켰는데, 그 압축을 도로 풀어버린 것이다.
쿠구구구!!
‘윽, 으윽, 으으으으….’
전신에 혈관이 불거지면서 급격한 팽창 때문에 격통이 덮쳐왔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힘이 전달되는 걸 견뎌내면서 동시에 흑웅의 머리를 꾹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나, 사도의 권능을 사용하노니….”
다음 순간, 나는 눈에서 시꺼먼 음신지력의 안광을 뿜어내며 외쳤다.
“과거로 되돌아가라!!”
파앗!!
그와 동시에 흑웅의 몸이 사라지고 내 몸에 넘쳐흐르던 음신지력의 거대한 줄기가 뚝 끊겼다. 마치 순식간에 실종된 것마냥 없어져 버렸고 내 주변의 고요한 무(無)의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찌지지직….
마치 얇은 천이 찢어지듯 여기저기에 균열이 일어나는 게 눈에 보였다. 대성한 음신지력이 요동치면서 어떤 존재에게 ‘공양’ 되었고, 나는 그 힘을 이용해서 내 권능을 극대화 시켰다. 그리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대존재 때문에 태극도의 공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통했나…?’
파지지직! 파지직!!
“…….”
나는 전신에 힘이 빠져서 멍하니 검은 번개가 눈 앞에 일어나는 것만 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완력으로 천을 찢고 들어오려는 기세가 선명히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시꺼먼 번개는 이내 흑염(黑炎)의 손아귀처럼 변해서 공간에 낼름거리기 시작했다.
우지직!!
뭔가 부숴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틈새로 나타난 거인의 손은 그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고, 이내 틈새를 통해서 흑풍(黑風)이 홀연히 불어오는 듯 했다.
우우우우
이내 나타난 것은 고대의 제관을 하고 있는 묵영(墨影)의 군주였다. 그는 내게서 일 장 거리에 다가와서 마주섰는데, 마치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너와 나의 인과가 이어졌으나 그 연유를 본좌가 모르는 이상, 네게 남은 것은 지옥 뿐이다.]
상대는 억지로 신급 술법인 태극도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느라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신적 존재라도 한계는 있는 것이다.
다만 상대가 고작해야 화신체를 데려다놓았음에도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공간에서 모든 힘이 봉인되었기 때문에 신의 존재감을 버티기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속에서 울혈이 치밀어오르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신선한 음신지력은 잘 받으셨습니까? 그럼 받으신 만큼 이 미욱한 사도를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욱이시여.”
[…….]
그렇다.
이 자리에 소환된 것은 바로 삼황오제 전욱!
음신지력이 전욱과 인과율로 연결 되어 있기에, 나는 흑웅으로 상징되는 나의 모든 음신지력을 전욱에게 공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전욱은 공양을 받음과 동시에 인과율이 생겼으므로 신술 태극도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곤혹스러워 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전욱은 내게 추궁했다.
[본좌는 너같은 놈을 내 사도로 임명한 적이 없다. 그리고 본좌의 권능을 쓰는 방법을 알려준 적도 없으며, 지상세계에 음신지력의 잔재를 그렇게 많이 놔둔 적도 없다. 그러나 너는 이 모든 금기(禁忌)를 범했다.]
“…….”
[또한 천계에서 일어나는 환란을 본좌가 모를 줄 아는가? 네가 이 일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으니, 너는 오늘 본좌의 자비를 바라지 마라.]
스으으
전욱의 눈에서 광망이 흐르기 시작하자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전욱이 진심으로 날 잡아족치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하긴 이 태극도라고 하는 절대무의 공간에서 영원히 갇히는 것보다야 일단 전생할 수 있으니 그게 좋겠지만, 나는 좀 더 좋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전욱이시여. 이 기회에 여와가 사라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그러자 전욱이 그림자의 시선을 내게로 흘렸다. 약간의 관심을 보이는 반응이었고, 그가 멈칫거리는 사이에 나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면]을 벗으려는 건 오제(五帝)의 공통된 관심사이지만 설혹 인간세상이 멸하여 가면을 벗을 기회가 생긴다 하더라도 삼황 여와는 끝까지 반대할 것입니다.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단언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 생의 종말에 실제로 오제와 여와의 말다툼과 갈등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황과 오제는 비슷해 보여도 서로 전혀 다른 견해와 관점을 갖고 있는 지배자들이었다.
내가 정확하게 심중을 짚었는지 전욱은 살기를 약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
[너희 따위가 서왕모를 쓰러뜨릴 순 없다.]
“해보지도 않고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어찌 그리 단언하십니까?”
[서왕모는 특수한 화신이다. 해와 달과 별의 모든 정기와 운명(運命)이 여와의 뜻에 의해 벼려져, 기어코 세계의 근원에서 혼돈의 심장을 얻어낸 화신이다. 우리 삼황오제 중 그 누구도 그렇게 강력한 화신을 만들어낼 생각은 하지 못했으며, 여와의 강한 지배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전욱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서왕모는 정말로 여와가 작정하고 만들어 낸 존재인 듯 했다.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본좌를 바보로 아는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선뜻 동의하기를 바랬느냐.]
마치 바보를 보는 듯 전욱이 빈정거렸으나 나는 그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대꾸했다.
“태공망도 그렇고 모든 자들이 서왕모에게 겁을 집어먹고 보는군요. 하긴 서왕모의 의도도 모르는데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 끝만이 보이니 누군들 겁을 먹지 않겠습니까? 결국 희생자가 생겼음에도.”
[…무슨 말이지? 희생자라니?]
“요순(堯舜)을 말하는 겁니다.”
내가 뜻밖의 말을 꺼내서인지 전욱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내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겠다는 태도로 바뀐 것이다. 나는 왠지 전욱이 동네 아저씨같다는 느낌이 들자 웃음이 나올 뻔 했으나 일단 표정을 관리했다.
“요순이 어느 날 갑자기 소멸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그는 본디 옥황상제로 가장하여 세계를 암중에서 지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석이 되었습니다. 또한 천계에서 요순의 화신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존재는 하나 뿐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내가 가진 천암비서가 요순을 집어삼킨 일이 전생할 때마다 반영되는 것 뿐이지만 나는 적당하게 상황을 갖다붙이기로 했다.
[그건 네놈의 억측이다. 여와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다. 우리와 사이가 틀어지면 그녀는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능력은 있으나 동기가 없다는 말씀이시겠지요. 그러나 여와에겐 그럴만한 강한 동기가 있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음…. 그러니까….”
어… 이제 어떻게 하지?
할 말이 생각 안 난다!
어떻게든 알고있는 지식을 가지고 여기까지 끙끙대며 끌어오긴 했지만 막상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더 이야기가 길어진다면 전욱이 내 말의 헛점을 금세 알아채버리고 말 것이다.
‘에라이 될대로 되라!’
나는 여기가 승부수라는 걸 깨닫고 아무 말이나 하기로 했다.
“그녀는 흉신(凶神)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흉신이 가진 석판을 통해 종말의 비밀을 전해듣는 대신, 오제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로 한 겁니다!”
[…….]
전욱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조잡하구나. 더는 못 들어주겠군….]
“…네?”
[헛소리를 듣고 있었다니 본좌 스스로가 한심하구나.]
헉?!
정향의 인과율 아니었나!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듣게끔 흘러가는 세상이 아니었단 말인가? 설마 내가 ‘정향의 인과율’ 이란 걸 잘못 이해하고 있었나? 말 실수로 갑작스럽게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여태껏 이런 일이 거의 없었기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전욱의 손아귀가 천천히 내 머리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안돼…!!’
역시 전욱쯤 되면 아무리 태극도 속이라고 해도 화신의 힘을 사용하는 게 가능한 듯 했다. 그리고 전욱의 거대한 흑염의 손바닥이 내 머리를 붙잡는 순간이었다.
전욱이 문득 말했다.
[더욱 거대한 인과율에 파묻혀 있군…. 그래… 이건 태초의 질서인가…. 그래서 너희가 감히 천계에 쳐들어왔었군….]
“…….”
머리가 불타지 않는다. 대신에 전욱이 붙잡은 손바닥을 통해서 가공 할만한 힘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생각이 바뀌었다.]
전욱이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본좌는 자비로우니 네가 공양했던 힘에 이자를 보태어 하사하겠다. 본 좌의 사도라 자칭할 거라면, 그 힘으로 어디 서왕모를 해치워 보라.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음을 증명 해 보아라.]
“……!!”
[그러나 이 태극도는 본좌의 본체 마저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술법…. 아무리 본좌라 해도 화신의 힘만으로 여기서 꺼내줄 순 없다. 그래서 공양받은 인과율을 이용해 세계의 직조를 바꿀 터이니 너는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타개하라.]
다음 순간 눈앞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파아아앗!!
“헉!”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태극도 내부가 아니었다. 도리어 원시천반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며 삼청궁의 결계를 파괴하고 원시천반을 앞둔 제갈유룡이 막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인간세상에서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부르지.”
“으, 음….”
나는 상황을 금세 파악했다.
‘전욱이 [작은 굴레]를 대신 돌려 줬다!!’
전욱은 아마 태극도를 찢어서 직접 꺼내주는 대신, 세계의 [작은 굴레]를 움직여서 태극도에 갇히기 훨씬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이리라. 본디 신술 태극도를 그런 식으로 회피할 수는 없겠지만 내게서 대성의 음신지력을 받은 게 컸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제갈유룡 뿐만 아니라 태공망도 시간회귀를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놈은 미래를 모르지만 나는 미래를 알고 있는 상황!
나는 이 찰나의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태공망한테 기습은 안 통해. 이대로 혈주를 무작정 부수려고 원시천반 내부로 들어가면 태공망이 의외로 강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도 필패한다. 지금으로서는 태공망의 타신편과 신술 태극도를 이길 방법이 없어.’
일단 내 음신지력은 원상복구된 듯 했다. 다만 흑웅의 정령화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흑웅을 다시 만들려면 또다시 수련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흑웅이 있든없든 태공망같은 적수를 상대로는 그다지 의미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떤 상대든 간에 허무의 공간에 봉인할 수 있는 신술을 상대로 음신지력은 별로 힘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하나 뿐이다!
“제갈유룡.”
“왜 그러지?”
나는 놈에게 최선의 한 수를 말했다.
“항우를 데려올테니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