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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무릉도원!
그것은 전설로 내려오는 이상향이자 낙원으로써, 무릉에 살던 농부가 홀연히 산중의 마을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모든 인간들이 편하고 안락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릉도원을 나올 때 돌아 나온 길을 표시했으나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제갈유룡에게 말했다.
“무릉도원이라니… 그건 어떤 시인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나?”
“도연명(陶淵明) 또한 민간설화를 책에 수록한 것일 뿐 그의 창작이 아니다. 무릉도원의 고사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속세에서도 저 무릉도원으로 우연히라도 갈 수 있단 소리 아닌가. 굳이 천계를 부수고 삼청궁까지 돌파해서 원시천반 앞에 서야 할 이유가 따로 있는 거냐!”
내 의문에 제갈유룡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무릉도원이라 하는 명칭에서 모르겠는가? 그 곳은 복숭아가 만발한 곳(桃源)이다. 천계에 그런 장소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서왕모(西王母)의 정원!”
“삼청은 누군가에게 소멸 당했고 서왕모는 그 이후 천계의 실권과 모든 권력을 쥐고 휘둘렀다. 당연히 원시천존이 거주하던 이 삼청궁과 원시천반도 직접 관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원시천반 내부의 세계는 서왕모의 정원과 이어져 있다.”
“흠!”
이어져 있다니?
어째서 그래야 하지?
삼청이 고대 인간의 권능을 봉인하려고 잡아가둔 고대인간의 이세계가, 왜 서왕모의 정원과 통해있어야 한단 말인가?
“서왕모는 대체 무슨 속셈이냐?”
“배경설명은 여기까지 하겠다. 네게 일일이 다 말해줄 시간은 없다.”
제갈유룡이 내 말을 끊으며 나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선택해라. 우리와 함께 원시천반에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가겠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걸음을 돌리겠나?”
“무슨 소리지? 여기까지 왔는데 걸음을 돌리는 게 있을 수 있겠냐?”
“좋아, 그 말 절대 주워 담지 마라. 남아일언중천금이다.”
“…….”
당연히 들어가서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는데 저렇게 각오를 되새기라고 하니 괜히 힘이 빠진다. 저 말 하나하나에 계산이 스며들어있는 걸 느끼고 내가 짜증나는 표정을 짓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무릉도원에 들어가서 노려야 할 것은 바로 혈주(血柱)다.”
“혈주?”
“세 개의 기둥이 무릉도원을 떠받치고 있다고 들었다. 그 기둥을 혈주라 하는데, 그 혈주를 부술 수 있다면 이중으로 걸려있는 삼청의 고대저주를 해제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인간의 고대권능을 봉인하고 있는 핵(核)이지. 혈주는 역팔괘의 문양을 늘 새기고 있다.”
“흐음.”
“혈주를 찾아서 부숴라!”
“쉬워서 좋군. 그럼 원시천반에는 그냥 빨려 들어가도 되는 건가?”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원시천반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수십 마리의 마병들이 덤벼들었는데 마치 연기처럼 빨려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기다리고 있던 중이다. 정보를 확인해봐야 했으니까.”
“기다려? 뭘?”
그 때였다.
후와악!!
갑자기 원시천반에서 공간이 이지러진 균열이 나타나더니 균열에서 갑자기 거대한 부피의 무언가가 덩어리째 쏟아졌다. 급히 그 덩어리를 피하자 연이어서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치솟아 올랐고, 나는 재빨리 그 핏물을 피했다. 이윽고 바닥에 참혹하게 널브러진 것은 처참하게 찢겨서 마치 고기 경단처럼 뭉쳐진 마병들의 시체였다.
“으윽….”
“역시.”
“왜 순식간에 마병이 전멸한 거지?”
마병들은 약한 놈들이 아니었다. 제갈유룡이 천계공략용으로 준비한 마병답게 용인이나 마인에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원시천반을 이용해서 들어가게 되면 무릉도원의 마을 한가운데에 나타나게 된다. 마병들은 바로 거기로 이동했을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 거기로 이동했는데 왜 죽어?”
“…….”
제갈유룡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침묵했다. 그러자 나는 이윽고 그 답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마, 마을 사람들이 수십 마리의 마병을 순식간에 전멸시켰단 말이냐?”
“그렇다. 정확히는 유폐되어 수천 년째 원시천반의 이 세계에 살고 있는 고대인들이.”
제갈유룡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침입자에 대해서 살육을 거리끼지 않는 모양이군.”
“쳇!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고대인이고 뭐고 일단 들어가겠다.”
이미 위험한 곳을 모험하는 일은 내 일상이 되어버렸다. 암천향이나 우주종말까지 다녀온 나인데 이제 와서 무릉도원 원주민들이 무섭다고 이 촉박한 상황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죽으면 죽는 거라는 생각도 내 마음속에서 용기를 주었다.
“좋은 자세다.”
내가 들어갈 자세를 잡자, 제갈유룡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백웅. 혈주를 없앨 때는 그 근원을 찾아서 없애라.”
“근원? 무슨 말이냐.”
“문헌에 쓰여 있던 공략법이다. 자세한 방법은 나도 가봐야 알겠지만 너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았으니까 닥치고 가자고!”
“그럼.”
파앗!!
잠시 후 우리가 발을 내딛자, 나는 잠시 후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구름이 가득 감싸고 있군.’
주변을 둘러보니 고대 양식의 건축물들이 하늘에 부유해 있었고 내가 서있는 장소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이 부유대지를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들이 떠 있는 중이었다. 어떤 원리로 이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부유한 대지 사이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제갈유룡을 쳐다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안 보이는데?”
“곧 공격해올지도 모른다. 나는 먼저 혈주를 치러 움직이겠다.”
파앗!
제갈유룡은 즉시 제갈부와 백호를 데리고 축지법으로 이동했다. 다만 그 기색이 너무 황급해서 이동이라기보다는 도망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제갈유룡이 급히 움직인 이유를 이내 알 수가 있었다.
스윽
자욱한 구름의 땅 너머에서 한 명의 소동(小童)이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소동은 남자아이로 보였는데 고대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아이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바깥에서 오셨군. 서왕모께서 보내셨습니까?”
알아들을 수 있다. 고대인이라서 고대어를 하면 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뜻밖에 소동은 대명제국 말을 할 줄 알았다. 나는 왠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원시천반의 입구를 통해 왔다.”
그냥 전부 솔직히 얘기하자. 왠지 서왕모가 보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자 소동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그럼 원시천존이나 태상노군께서 보내셨습니까?”
“그 분들은 서왕모의 손에 살해당했다.”
정확히는 그 흉수가 서왕모와 손을 잡은 거지만 공범인 서왕모도 방조했으니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대답에 소동은 갑자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흐흐흑…. 이…이럴 수가…. 정녕 이 곳에서 나갈 방법은 없단 말인가?”
“나는 백웅이라 한다. 다른 마을사람들은 없나?”
“…….”
“네 이름을 가르쳐 다오.”
“…나는 궁기(窮奇).”
쿠드드득
갑자기 소동의 몸이 마구 일그러지더니 꿈틀거리며 다른 형상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새까만 날개가 달린 대호(大虎)로 변했는데, 그 몸 크기가 삼 장이 넘는 듯 했다. 물론 나는 거대괴수를 하도 많이 보아와서 감흥은 없었으나, 이윽고 놈이 포효하자 움찔했다.
크르릉!
[나, 궁기가 원하노니. 너 백웅은 여기서 무얼 원하여 찾아왔는가? 그리고 여기를 빠져나갈 방법을 아는가?!]
“…….”
[말해라! 그렇지 않는다면 얼마 전 들어왔던 마물들처럼 찢어 죽이겠다.]
포효에 담긴 힘이 제법 강력하다.
단순한 거대요괴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게 즉시 느껴졌다. 아오키가하라 수해에서도 사해의 수준 보다 훨씬 강한 게 분명했다.
‘신화적 존재…. 그렇다면 저 놈은 사흉(四凶) 궁기(窮奇)인가!’
그의 이름에서 유추해본다면 놈은 전설의 사대마수인 사흉 중 하나인 궁기가 분명했다.
사흉은 도철, 도올, 궁기, 혼돈의 네 마리를 일컬었는데 신화시대 때부터 온갖 사악하고 포악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했다. 단지 전설로 만 알았던 사흉의 마수가,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화안금정으로 궁기를 살피자 전신에서 가공할 영력이 뻗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마기(魔氣)라고 표현할 수 없는, 태초의 순수한 기운이 포악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느낌이었다.
궁기 또한 투선급 존재인 건 분명 했으므로 나는 놈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싸워야 하나? 왜 무릉도원에 이딴 전설의 마수가 있는 거야!’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음신지력과 술법, 그리고 무공을 총 동원하면 상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기력을 소모하게 될 것이고 매 시간이 아까운 이런 순간에 궁기 하나를 붙잡고 허송세월 할 수는 없었다. 팔선 여동빈이나 토벌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강대한 마수와 목숨 걸고 싸울 새가 없다.
‘길어도 반 시진 내에는 여기에 있는 혈주를 모두 파괴해야 해. 시간이 없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래…!!’
나는 음신지력을 강하게 돋우며 흑웅에게 힘을 최대한 강하게 방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흑웅은 이내 내가 원하는 대로 과시하듯이 음신지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으으…!! 넌 신의 사도냐!]
궁기가 내 신력의 기세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대성의 경지에 이른 음신지력을 보면 아무리 궁기가 신화시대의 마수라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궁기를 오연한 눈으로 쳐다보며 외쳤다.
“궁기여! 네가 어찌 여기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세계에 갇힌 자들을 풀어주러 왔다. 나를 도와라.”
[무슨 말이냐…?]
“나는 삼황오제 전욱의 사도! 이 음신지력만 봐도 알겠지? 전욱의 의지로 고대인을 해방하러 왔다는 소리다.”
[오…오오…, 전욱…!]
궁기가 움찔거리며 놀랐다. 그는 눈치를 살피다가 이윽고 거대한 동체를 앞으로 숙이며 자세를 낮추었고, 이내 고양이가 앉은 듯한 자세로 나를 응시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백웅 너를 최선을 다해 돕겠다.]
“시간이 없다. 나는 혈주라는 걸 부숴야 한다. 혈주를 부숴야 이 세계를 부술 수 있다.”
[혈주…가 무엇인가…?]
엥?! 모르나?!
나는 다급한 마음이 들어서 급하게 설명했다.
“그, 그러니까 이 세계를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이고, 역팔괘를 새기고 있다고 들었다.”
[으음…!! 그런가. 그걸 말하는 거군.]
“뭔가 알고 있나?”
궁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내 등에 타라. 즉시 혈주에게 데려다 주겠다.]
타닷
내가 궁기의 등에 올라타자 궁기는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날개달린 대호가 허공을 쓍 날아다니는 건 기이한 광경이었다. 궁기는 한참을 날다가 어떤 봉우리 위에 도착했는데, 그 봉우리 위에는 마치 거대한 철판 뚜껑 같은 게 하늘을 거대하게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궁기가 철판뚜껑에 나있는 구멍 쪽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기 떠 있는 것…, 팔괘가 둘러 싸고 있지 않은가….]
“저건….”
[잘은 모르겠지만 저게 혈주라는 거겠지….]
나는 ‘혈주’의 모습을 보자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
구멍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이었으며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떠있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고대의 도복을 입고 있어서 도인이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도인의 몸 주변에 팔괘가 역으로 떠다니는 걸 발견하자 혈주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망설이지 말라고 한 게 바로 그 뜻이었나.’
‘혈주’라고 하는 무고한 인간을 베려 하는 걸 내가 거부할까봐 제갈유룡이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각오를 굳힌 채 검을 빼들고는 곧장 달려들었다.
‘미안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것저것 다 따질 순 없어!’
내 동료들 목숨이 다 걸려있다. 완전히 인륜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일단 하고볼 수밖에 없다. 나중에 속죄해야 한다면 할 수밖에!
슈아악
내 검뢰가 즉시 혈주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혈주는 베인 흔적조차 없었으며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
내가 수십 번을 더 베어보았으나 마치 환영을 베는 듯 베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가 땅에 착지하자 궁기가 말했다.
[미리 말하는 걸 잊었군…. 우리 사흉도 이 공간을 빠져나가고자 저 혈주를 수도 없이 공격해 보았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수만 번은 공격했음에도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저건 환영이다.]
“환영이라고…? 혹시 다른 곳에도 저런 혈주가 있나?”
[두 군데에 더 있다.]
제갈유룡의 공략정보는 일단 옳은 듯 했다. 혈주는 총 3개가 있다는
사실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사흉이라는 신화괴수들이 수도 없이 공격했는데도 무반응이었다는 혈주를 벨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흠… 그 정도라면 일단 혈주에게 일반적인 공격, 술법, 무공 같은 건 절대 안 통한다는 건데….’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궁기에게 말했다.
“궁기. 혈주 위에 있는 저 거대한 철판뚜껑 같은 건 대체 뭐지?”
[우리도 모른다…. 하늘 위까지 계속 올라가 본 적이 있으나 무한히 뻗어있을 뿐 그 끝을 볼 수는 없었다.]
“으으음.”
나는 골치 아픔을 느꼈다. 그러자 문득 제갈유룡의 조언이 떠올랐다.
‘혈주를 치려면 그 근원을 치라고 했지.’
그렇다면 저 철판뚜껑을 쳐야하는 거구나!
내 시선이 철판뚜껑을 향하자 궁기가 말했다.
[안 된다…. 우리라고 그 생각을 못해본 줄 아는가? 저 철판뚜껑은 일단 공격을 맞아주긴 하지만 그 어떤 수단으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알아서 할 테니까 조용히 좀 해 봐.”
제갈유룡이 아무런 방법도 전해주지 않고 나를 덜렁 보냈을 리가 없다. 근원을 치라고 했다면 그 조언에 뭔가 뜻이 있는 것이리라.
나는 일단 무공술을 써서 하늘로 뛰어오른 후 혈주의 눈앞으로 갔다.
…으,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근원을 치라니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고! 결국 철판뚜껑을 치라는 소리일 텐데 일반 공격으론 안 깨질 게 뻔하다.
나는 이 수수께끼 같은 시련에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던 중 문득 혈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선풍도골의 늙은이였다.
그래. 지금 수수께끼를 풀 시간 여유 같은 게 어딨겠냐.
머리를 굴려서 이 시련을 통과하는 건 제갈유룡에게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불가능하다.
그럼 가진 걸로 어떻게든 시도해 볼 수밖에.
‘될까나…?’
나는 서서히 혈주의 환영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윽고 눈에서 안광을 빛내며 궁극의 비술을 시전했다.
108자의 진언이 내 입가에서 외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눈을 떠라… 가면이여.”
절기(絶技)
천면공자(千面公子)
스스스스!
혈주의 등 뒤에서 심연의 가면이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중얼거렸다.
“네가 봉인의 쐐기라면, 그 쐐기를 뽑아 주마.”
다음 순간, 나는 가면을 뺏었다.
내가 혈주의 가면을 뺏어 쓴 순간이었다.
나는 난데없이 방대한 양의 지식과 선술(仙術)이 머릿속으로 휘몰아쳐 들어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양은 지선 망량이 갖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았으며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 했다.
“우우우우웁!!”
동시에 나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점차 의식이 침잠해 들어갔고, 머릿속이 쥐가 날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 과거 철혈문주의 가면을 뺏어 썼을 때보다는 훨씬 버틸 만 했지만 결국 나는 넋을 놓고 말았다.
동화되어 간다.
내가 마치 혈주인 것처럼, 그의 인격이 내 위에 덧씌워지는 게 느껴졌다.
…….
…….
그렇군.
“나는….”
혈주가 된 지 수천 년 만에 깨어 난 것인가.
곤륜산은 지금 어떻게 됐지?
강자아는 아직도 내부를 관리하고 있는가?
원시천존께 받은 밀명을 수행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결계가 풀리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 밑에 사흉 궁기가 있는 걸 보면 아직까지 괜찮은 것 같긴 하다.
“남극선옹(南極仙翁)이다.”
삼황 복희의 방계 제자이자 원시천존의 사제, 그것이 바로 나 남극선옹.
진정한 봉신계획(封神計劃)을 위하여 지금까지 나 자신을 봉인의 쐐기로 만들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