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886화 (885/1,615)

886====================

진공가향(眞空家鄕)

마후라가가 살해당하는 순간 팔부신중들은 단단히 작정한 듯 서왕모를 에워싸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다른 점이라면 천인(天人) 삼장법사가 맨 앞에 나서서는 기이한 술수를 쓰기 시작한 점이었다.

우우우 -

천인 삼장법사는 알 수 없는 술수를 동원해서 서왕모 주변의 공간을 왜곡시키며 동시에 뭔가를 소환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 술법이 뭔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라는 건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서왕모를 일시적으로 잡아둘 수 있다니 천인의 능력은 대단한 듯 했다.

[ 시간을 벌었군요.]

그리고 팔부신중들이 앞에서 시간을 끄는 사이에 지금까지 계속 서왕모를 전면에서 상대하던 구천현녀와 팔선들이 숨을 돌렸다. 아무리 그들이 신선이며 신적 존재라 하더라도 계속해서 소모만 거듭하면 피폐해지므로 팔부신중이 만들어준 틈은 소중했다.

" 구천현녀님!"

우리가 다같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자 구천현녀가 우리를 응시하며 말했다.

[ 백웅이여. 이대로는 우리는 질 수밖에 없습니다.]

" ......!!"

[ 기억을 각성한 덕분에 약간 힘이 돌아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서왕모를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서왕모는 필요하다면 지금보다 열 배, 아니 백 배도 강해질 수 있을 터이니 뾰족한 수가 없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듣기만 해도 눈이 캄캄해지는 소리였다.

나는 믿기지가 않아서 반문했다.

" 배... 백 배라고요? 지금보다 그렇게나 강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만 해도 일격에 마왕을 소멸시키는 괴물인데 여기서 백 배나 더 강해진다는 게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구천현녀가 말했다.

[ 본질적으로 우주적 존재인 여와 본체의 힘을 다 끌어온다면 그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인과율이 부숴지고 그녀 또한 만만치 않은 대가를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녀의 자제력이 어디까지인지에 달려 있겠지요.]

" 으으."

한 마디로 서왕모는 언제든 내킬때 우릴 모두 죽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반작용이 걱정되어서 자제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이를 악물고 있자 옆에 있던 제갈사가 천천히 걸어나와서 말했다.

" 한 가지 확실히 해야겠군."

좌중이 제갈사에게 이목을 집중하자 제갈사가 입을 열었다.

" 구천현녀여. 당신의 본체인 수호자의 형상으로 되돌아간다면 서왕모를 이기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동귀어진은 가능할 것이다. 당신은 그 정도 존재는 돼.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구천현녀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 그렇게 되면 이 세계에 남는 것은 멸망의 운명밖에 없습니다. 또한 제 본질을 드러내는 것 또한 그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 웃기는군. 여와 또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것이며 입장은 똑같을 것이다. 그런데 한쪽은 기세등등하고 한 쪽은 지레 겁먹고 있단 말인가?"

[ 똑같은 입장이 아닙니다. 여와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부서지면 다시 창조하면 그만인 장난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여와를 상대하려 세상을 멸망시키면 이 싸움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 그것도 변명에 불과해 보인다만. 뭐, 아무튼 그래서 구천현녀님이 우리에게 징징거리는 이유가 뭐지?"

[ 우리는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답을 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구천현녀와 제갈사의 문답을 듣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 구천현녀가 일요의 수호자가 되면 서왕모와 대등... 그러나 그렇게 되면 너무 강력한 존재들의 충돌로 인해 세계가 멸망할 가능성이 높다. 서왕모는 그것도 상관안하겠지만 구천현녀는 세상을 지켜야 하니 수세에 몰리는 건가.'

서왕모는 한때 흉신의 세력이 창궐하자 반고의 주문으로 지상을 날려버리려 한 적도 있었다. 지상문명에 애착같은 게 없는 건 이미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었다.

제갈사는 영 마뜩찮은 듯 했으나 구천현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 제갈사. 정향의 인과율이란 건 어떻게 작용하는 거지? 이대로라면 승산이 없다고 하는데 그 인과율이 우리의 편을 들어준다면 이 상황에서도 이겨야 정상 아닌가."

" 본래라면 그렇지.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인(因)을 만들어야 하는지일 것이다. 과(果)가 결과적으로 승리라고 하더라도 어떤 원인을 만드는지에 따라서 상황은 달라질 수 있겠지."

" 흠..."

그 때였다.

" 삼청궁으로 가야지."

우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뜬금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렸다.

" 제갈유룡!!"

제갈유룡은 좌측에 제갈부, 우측에 백호를 데리고 와 있었다. 그가 끌고다니던 나머지 병력과 마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제갈유룡이 냉막하게 말했다.

" 삼청궁에 가서 원시천반을 얻고 고대의 봉인을 깨야 한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이니 나를 따라 와라."

" 고대의 봉인이라고?"

" 그 봉인을 깨면 인간의 봉인된 권능이 풀려나서 서왕모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삼청궁이란 본래 삼청이 거주하고 있는 천계 최고의 중지를 의미했다. 다만 지금은 삼청이 모두 소멸되었으니 그저 명목상의 궁전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 곳으로 가자는 말인 듯 했다. 그러자 구천현녀가 말했다.

[ 인간이여. 고대인의 봉인을 풀 경우 세상에 엄청난 혼란이 닥칠 터...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제갈유룡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대꾸했다.

" 구천현녀여. 당신이 뭐라하든 상관치 않소. 내 목적은... 처음부터 그것 뿐이었으니."

[ ......]

" 시간이 없다. 삼청궁의 봉인을 깰 방법은 내가 알고 있으니 얼른 따라와라."

파앗!!

제갈유룡이 축지술로 바로 사라졌고, 망량이 내게 말했다.

" 백웅. 이 자리는 나머지에게 맡겨두고 다녀오시오."

" 나 혼자 말이오?"

" 그렇소. 나머지가 모두 힘을 합쳐도 서왕모를 막을까말까이니 그 전에 뭔가 해결해야 하오. 그리고 당신과 제갈유룡의 힘이라면 충분히 깰 수 있을 것이오."

" 망량 당신은..."

" 나는 따라갈 수 없소. 당신 일을 하시오."

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투지로 차올라 있는 걸 확인한 후 결연하게 대답했다.

" 알겠소!"

파앗

나는 재빨리 제갈유룡의 흔적을 찾아서 그의 뒤를 따랐다. 축지법을 썼다고 해도 화안금정과 신력을 동원하면 어떻게든 찾아낼 수가 있었다. 곤륜산의 정상에서 한참 먼 곳에 있는 수백 리 밖의 삼청궁에 도착했을 때 제갈유룡은 안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말했다.

" 갈 길이 바쁘다."

" 제갈유룡. 이 삼청궁에 고대 인간의 권능이 봉인되어 있단 말이냐?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잖나!!"

" ......"

저벅

제갈유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를 뒤따르며 물었다.

" 너는 서왕모가 새긴 기이한 성천도의 문양을 유룡집에 넣지 않았나? 대체 서왕모와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

제갈유룡은 대꾸하지 않았다.

' 제길!'

아예 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기에 나는 내심 화가 났지만 제갈유룡을 지금 윽박질러봤자 무의미했고 나머지 동료들이 목숨걸고 시간을 벌어주는 중이었기에 더 따질 수가 없었다.

도리어 제갈유룡 옆을 따라가고 있던 금의위 수장, 백호가 내게 이죽거렸다.

" 흐흐. 떠벌떠벌대지 말고 주변이나 살피는 게 어떻소? 우린 이미 삼청궁의 결계에 들어와있는 것 같은데."

" 그건 나도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삼청궁에 들어오는 순간 시공간이 왜곡되며 화안금정에 수많은 결정체같은 게 비쳐보였다. 아무래도 왜곡된 시공의 단면이 고스란히 보이는 것 같았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함정이었다. 발 하나만 잘못 디뎌도 영원히 미아가 되어버릴 수가 있었다.

" 알면 똑바로 따라오시오. 제갈유룡 님만이 이 고대의 결계를 파해해 줄 수 있으니."

나는 금의위 백호가 나를 조롱하자 급격히 분노를 느꼈다.

" 오냐. 이 개같은 결계를 파해하면 네놈의 아가리를 찢어버리겠다."

" 흥, 무슨..."

우우우우

" 와라, 흑웅!"

나는 그 순간 절정에 이른 음신지력을 정수리에 모으는 감각을 발현시켰다. 그와 동시에 내 음신지력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령, 흑웅(黑熊)이 내 가슴팍 앞에 소환되었다. 소환된 흑웅이 내게 말했다.

[ 부르셨습니까, 백웅 님.]

" 흑웅. 삼청궁의 결계를 깨 버려라!"

[ 알겠습니다.]

키이잉 -

흑웅이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듯 하더니 갑자기 내 양팔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두 팔이 완전히 순백으로 물들었을 때 팔 전체에 음신지력이 뒤덮히더니 이내 손바닥 위에 새하얀 구체가 떠올랐다.

' 이건... 음신지력을 뭉친 것인가?'

본래 나는 방대한 음신지력을 이렇게 세세하게 운용할 수가 없었다. 흑웅이 나 대신에 음신지력을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나는 자신감을 갖고는 쌍장을 앞으로 뻗었다.

" 하압!!"

콰과광

양 손바닥 위에 있던 두 개의 구체가 전방으로 광선이 되어 튀어나가더니 서로 나선으로 꼬여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폭발음을 내며 화안금정으로 보았던 차원의 균열을 향해 충돌한 것이다!

쩌저적

그러자 차원의 균열은 마치 살얼음이 얼듯 굳어버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완전히 단단해져서 균열이 사라지고 말았다. 음신지력이 마치 얼음을 굳히듯이 신의 힘으로 시공간을 고착시킨 것이다. 나는 음신지력과 내 힘의 연결이 끊기지 않았다는 걸 이마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정신을 집중해서 차원의 균열을 계속해서 얼려버리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쩌저적...

이윽고 내가 근처에 있던 균열을 모조리 얼려버리고 나자, 갑자기 앞서서 걸어가던 제갈유룡이 걸음을 멈추었다. 제갈유룡은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부적 하나를 꺼내서 불을 붙였고, 부적이 타들어감과 동시에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후웅

방대한 삼청궁의 복도가 씻은듯이 사라지고 대신에 수천 년은 된듯 낡고 허름하고 음침한 궁궐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약 삼십 장 앞에 거대한 원반이 벽에 걸려있는 걸 볼 수 있었다.

" 자, 아가리 벌려라."

" 히익."

내가 이를 갈며 다가가자 백호가 움찔하며 뒷걸음질쳤다. 내게 한 주먹도 안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이 개자식! 너 때문에 망량이 죽었었는데 감히 날 조롱해?'

그 때였다. 제갈유룡은 힐끔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 신의 힘이란 놀랍군. 결계는 본디 해법을 찾아내어서 답을 내게 되어있거늘 시공간의 균열 자체를 얼려버리다니..."

" ...음."

나는 막 백호의 아가리를 생으로 찢으려고 덤벼들려다가 멈칫했다.

"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건 너잖아. 이제 인간의 봉인인지 뭔지를 풀기만 하면 될텐데 그건 어디에 있지?"

" 저기에 있다."

" 저거라면..."

이 자리에서 제갈유룡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있는 특징적인 물건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크기가 삼 장은 될 법한 거대한 팔괘원반 뿐이었다. 제갈유룡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면서 말했다.

" 삼황 복희가 직접 제작한 최초의 보패, 원시천반(元始天盤)이다."

" ......"

" 저기에, 삼청이라 불리는 자들이 인간의 가능성과 미래를 봉인해 버렸다."

그는 약간 원한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백호에게 지시했다.

" 백호. 마병(魔兵)을 모두 불러내라."

" 넵!"

쨍그랑

백호가 품 속에서 둥그런 구체를 꺼내더니 바닥에 던져서 깨 버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튀어나오더니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크오오오!!

제갈유룡은 냉엄하게 명령했다.

" 모두 원시천반으로 돌격."

크오오오오!!

괴물들은 괴성을 지르며 우르르 팔괘원반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팔괘원반에 막 접촉하는 순간, 괴물들이 난데없이 비명도 못 지르고 팔괘원반으로 휘리릭 빨려들어가버리고 말았다.

" 뭐지?!"

눈 깜짝할 사이에 괴물들이 전멸하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역시 문헌대로 원시천반의 내부는 이세계(異世界)인 듯 하군."

" 무슨 소리야?"

제갈유룡이 원시천반을 쳐다보며 말했다.

" 아무리 삼청이 위대한 신선이며 술법사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능력, 종(種)의 기원 자체를 봉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피의 농도를 '옅게' 만들어서 서서히 없애버리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들은 수백 년, 누대에 걸쳐서 강력한 '피'를 가진 고대인과 그 일족들을 찾아내었다."

" ......!"

"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삼청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다른 세계로 이주시킨 것이다. 동시에 전 세계의 인간종족을 남모르게 개조해서 그 권능이 나타나지 않게끔 수를 썼겠지."

삼청은 이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자였단 말인가?

나는 제갈유룡의 말에 황당해서 대꾸했다.

" 원시천반 안에는 은주시대의 고대 중원인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냐?"

" 보패 원시천반의 능력 중 하나다.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

도저히 생각도 못했던 봉인법!

제갈유룡이 서서히 말을 이었다.

" 삼청은 세상의 균형을 위해 그들을 봉인한 걸 미안하게 느껴서 최고의 낙원향을 내부에 건설해 줬다고 하지."

제갈유룡이 측은한 눈으로 원시천반을 쳐다보았다.

" ... 그리고 그 세계를 인간세상에서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부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