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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천계공략에서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바로 구천현녀와 그녀의 제자들이었다. 우리는 제천대성의 인도에 따라 천계의 뒷문 근처에 오자마자 하늘이 새까맣게 어두워지고 여기저기에서 낙뢰와 불타는 하늘이 번갈아가며 태풍이 몰아치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재지변때문에 생긴 호우를 맞고 있던 제갈유룡이 중얼거렸다.
" 구천현녀가 서왕모와 겨루기 시작했는가?"
제갈유룡의 질문은 제천대성을 향하고 있었다. 제천대성의 화안금정으로 천리안처럼 천계의 내부를 정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 위에 손날을 올리고 요리조리 살피던 제천대성이 입을 열었다.
" 아니. 아직 아냐. 그녀는 아직 준비중이야. 구천현녀의 제자들이 결계를 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군."
" 그 결계는 대라신선들의 술력을 낮추는 시해지술이겠지."
" 다 알면서 뭘 물어."
" 그럼 당장 진입한다. 우리가 밑에서 흔들어줘야 구천현녀가 본격적으로 천계를 뒤흔들어 혼란으로 몰아갈 수 있을 것이다."
촤아앗
이윽고 우리 일행은 모두 천계 내부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천계의 뒷문 쪽을 지키고 있던 투선(鬪仙), 나타태자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그의 곁에는 천계의 신장과 병졸들이 약 백여 명 정도 도열해 있었다.
" 뭐지?! 원숭이놈아, 그 인간들은 대체 뭐냐!"
제천대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타태자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 구천현녀의 손님이야. 그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비켜라."
" ...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군. 아무리 구천현녀의 손님이라 해도 천계의 뒷문을 허가없이 뚫고 들어오는 건 즉결처분이 가능한 대역죄다! 그리고 나는 위에서 아무런 명령을 듣지 못했다."
" 뭐냐고~ 상황도 전달 못 받았냐? 하여간 덜떨어진 놈."
" 뭐, 뭐라고?"
나타태자가 당황해하자 제천대성이 둘러대며 말했다.
" 옥황상제랑 삼청이 다같이 회의 들어가서 정신없다는 것도 몰랐어? 구천현녀가 임시로 서왕모랑 같이 관리중이잖아~ 그래서 나중에 허락맡아도 되는거라서 급히 인간들을 데려왔다구. 모르겠냐? 하긴 너같은 하급투선한테는 말 안하겠구만."
" 이익..."
나타태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 닥쳐라, 원숭아. 나는 상고시대부터 천계의 대라신선이었으니 너따위에게 능멸당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하는데 지금 당장 모든 무기를 버리고 이쪽에 투항해라. 네 말을 믿을 이유가 없다."
" 헹... 그러셔..."
"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나중에 확인해보고 풀어주..."
뻐어억!
" 흐아악."
그 순간 제천대성이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정권을 내질렀고 나타태자는 코뼈를 얻어맞고 뒤로 날아갔다.
슈콰콰쾅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나타태자가 바위산에 부딪히자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나며 산 절반이 통째로 무너졌고, 옆에 있던 신장과 신병들이 경악했다.
" 아, 아니!"
" 대성이여, 이 무슨 짓이오! 어찌 동료인 투선을..."
" 동료? 지랄하네~ 난 저 새끼 평소부터 맘에 안 들었거든."
제천대성이 껄껄 웃으며 여의봉을 크게 휘둘렀다.
" 아까 내가 한 말은 사실이니 너흰 빨리 길을 비켜라! 쓸데없이 말려들어 소멸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이다."
꽈광
신장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무너진 바위산에서 갑자기 보패 화첨쟁이 날아와서 창극(槍戟)이 제천대성의 미간에 꽂혔다. 제천대성은 벼락같은 반사신경으로 화첨쟁을 두 손가락으로 막아내었으나 충격의 여파만으로도 뇌음과 함께 세상이 진동하는 듯 했고, 이윽고 불처럼 분노한 나타태자가 바위산에서 솟아올라서 쩌렁쩌렁 소리를 내질렀다.
[ 아주 잘 되었구나! 이 기회에 널 천계의 반역자로 주륙해주마, 원숭아!!]
" 우하하하!!"
콰과광
잠시 후 제천대성의 수백 개나 되는 분신과 나타태자의 보패들이 부딪히기 시작했고 천지가 불꽃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나타태자가 혼천릉과 화첨쟁을 동시에 휘두르면 일개 국가를 반나절만에 멸망시킬 수 있는 위력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장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신장들 몇몇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 흐압!!"
신장들이 우리를 공격해 왔다. 그들은 인간계의 무사와 달리 영체덩어리라서 천계 내에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과 속도로 움직일 수가 있었고, 본래라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와 서문혜가 앞으로 달려들어서 신장들을 베어넘겼고, 다섯 명의 신장이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슈캉
" 크아아악..."
" 으아악."
그렇다 해도 지금의 나와 서문혜는 인간계 최강의 수준에 이르러 있기에 신장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우두머리인 신장들이 몰살당하자 신병들은 주춤거렸고, 우리는 그들을 놔두고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갔다.
타다닷
제일 선두에 있던 제갈유룡이 말했다.
" 곤륜십이대선을 모조리 제압하거나 암살해야 한다. 사전에 논의한 대로 사파(四派)로 나뉘어서 일개 파가 정해진 시간 내에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십이대선을 제압하는 걸로 한다."
" 알았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나?"
" 그렇게 하지."
그 때 망량이 날카로운 눈으로 제갈유룡을 노려보며 말했다.
" 당신네 상황이 좋지 않게 되어도 우리측에선 지원군을 보내줄 수 없소."
" 기대도 하지 않는다."
제갈유룡이 훗하고 웃었다.
" 도리어 너희가 우리 우군의 도움을 받지 않기를..."
제갈유룡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병력을 데리고 가 버렸다. 십이대선은 천계 각지에 흩어져 있기에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바삐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제갈사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 우리쪽이 삼파인 건 알고 있지? 서문혜는 혼자서, 그리고 백웅과 내가 함께, 망량은 미호와 같이."
" ......"
" 백웅. 뭐가 문제냐?"
" 정말 이걸로 될까? 전력 면에서 너무 불리한데..."
이론상으로는 각 파에 배치된 인원은 십이대선 한 명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서문혜는 이미 선조회귀능력을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되살렸기에 초인수준이 되었으며 미호 또한 기신의 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나도 제갈사와 힘을 합치면 한 명 정도는 어찌할 수 있으리라. 격이나 능력에서 떨어지진 않는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곤륜십이대선에 정면결투를 신청하는 것도 아니고 천계에 쳐들어와서 암살을 하려는 거니 십이대선 측에서는 결코 곧이곧대로 혼자서 싸워주지 않으리라. 실제로 십이대선과 싸우게 되면 당연히 단시간에 기습해서 해치우지 않는 이상 십이대선은 지원군을 부를 것이고, 각지에서 십이대선을 돕기 위해 투선이니 신선들 따위가 마구잡이로 쏟아지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망량이 태연히 말했다.
" 이제부터가 정향의 인과율이 작용하는 국면일 것이오. 걱정 말고 가시오."
" ... 알았소. 망량 당신도 몸조심 하시오."
" 후후. 당신에게 위기가 닥쳐오기 전까진 그럴 일 없을 거요..."
타닷
일행이 나뉘어졌다. 나는 제갈사와 함께 북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 우리가 상대할 건 구류손 대법사였던가?"
" 그래. 알고 있겠지만 곤선승의 주인이다. 놈의 밧줄은 뭐든 묶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겠지."
" ... 흐음."
나는 맨몸으로 대라신선과 싸우면 어찌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대라신선급 존재인 금오십천군과 싸워본 적이 있긴 했지만, 제대로 일대일로 승부를 겨뤄 쓰러뜨린 적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언제나 나보다 한 수 위의 존재였기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칠요가 내 손에 없다는 게 심리적 불안감을 주었다. 나름대로 보검을 장비하고 있긴 하지만 칠요에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칠요에 담긴 힘이 상당한 술법저항을 주는데다 술법을 벨 수 있는 능력까지 갖고있다는 걸 생각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앗!"
쓔웅 -
갑자기 차원에 균열이 일어났고, 하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제갈사가 재빨리 내게 숨으라는 신호를 보냈고, 나는 즉시 지선 망량의 술수 중 음영술(陰影術)을 써서 나와 제갈사의 모습을 나무그림자 속에 숨겼다.
파아앗!!
나는 거대한 그림자같은 게 허공에 날아가는 걸 숨죽이며 쳐다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눈코입이 없는 거대한 빛의 인간처럼 보였는데, 나는 그 모습의 주인이 누군지 익히 알고 있었다. 이윽고 그 광인(光人)이 사라지자 나는 음영술을 풀고 나와서 제갈사에게 말했다.
" 제갈사. 저 놈은 설마..."
" 크크크. 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제갈사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 제갈유룡이 우리 뒤통수를 때린 건 아닐 거다. 놈은 이번 일에서 최대한 타 세력의 간섭을 피하고 싶어했으니까. 아마도 이게... 인과율이란 거겠지."
" ......"
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 놈이 어디로 가는 거지?"
" 저 방향이면 아마 서왕모가 있는 궁전이겠군. 보아하니 놈들도 이 기회를 틈타서 천계를 치고싶은가 보군."
" 으음..."
" 아주 잘 됐어. 우린 예정대로 구류손에게 가지. 일이 몇 배는 쉬워졌다."
나는 결국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제갈사에게 말했다.
" 이러면 천계를 토벌하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팔부신중은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거야?!"
그렇다.
방금 천계의 차원을 뚫고 쳐들어온 신적 존재는 바로 팔부신중의 일인인 천인(天人) 삼장법사! 저 놈이 다짜고짜 본체 모습으로 쳐들어온 걸 보면 싸울 준비가 만만이라는 뜻이었고, 놈들도 천계를 갈아엎기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천인 혼자서 쳐들어올 리가 없으니 동료의식이 강한 팔부신중이 죄다 쳐들어올 게 뻔했다.
제갈사가 히죽거렸다.
" 크크크... 일단 가자."
" 으으."
뭐 이렇게 복잡하담?
앞날 걱정때문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만 행동해서 나만 죽으면 모르겠지만 이번 일에 동료들의 목숨이 죄다 걸려있으니 걱정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구류손대법사가 거주하는 동혈에 도착하자,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구류손 대법사는 동혈 바깥에 나와서 우리를 미리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곁에는 팔선의 일원인 장과로(張果老)와 여동빈이 함께 서 있었다. 무려 3명이나 되는 대라신선이 서 있는 셈이었으므로 나는 대번에 눈이 캄캄해졌다.
' 이, 이런 제기랄!'
여동빈까지 있어?!
모여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게다가 여동빈 한명만 하더라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팔선 중 가장 술법에 능통하다는 장과로, 그리고 봉인술과 포박의 대가인 십이대선 구류손까지 상대하면 승산이 없다!
' ... 제갈사의 힘을 빌려도... 될까...?'
자신이 없다.
천지간에 위명이 쟁쟁한 상위 대라신선 3명을 상대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저들 셋이면 마왕이라도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과율 덕분에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릴거라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구류손 대법사는 새하얀 눈썹 밑의 조그마한 눈을 꿈벅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 동빈이가 말한대로구나... 정녕 기이한 자로고..."
" ......?"
나는 의아한 눈으로 여동빈을 쳐다보았다. 여동빈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검을 등에 빗겨매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여동빈이 구류손에게 내 이야기를 한 것인가?'
상황파악이 안 되서 내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팔선 장과로가 말했다.
" 구천현녀께서 말씀하셨네. 자네들이 천계를 멸망시키러 올 것이라고."
" ......"
구천현녀는 어째서 극비계획을 이들에게 털어놓은건지 모르겠다.
' 설마 구천현녀가 배신을...'
머릿속이 하얘진다. 설마 그녀가 배신한 거라면 다른 곳으로 간 동료들은 모조리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대비하고 기다리는 천계를 상대로 우리가 이길 방법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옆에 있던 제갈사는 생각이 다른지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고는 대꾸했다.
" 잘 아는군. 목을 내줄 생각인가?"
" 설마... 단지 그 멸망을 지켜볼 생각일세."
" 흐음. 동료라고?"
" 그럴 리가. 그저 관조할 뿐."
" 관조는 무슨... 방관이겠지."
제갈사가 이죽거리더니 문득 여동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 여동빈! 천계가 멸망하면 남은 오백 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지? 천계가 무너지면 당신이 쌓고 있던 힘도 더 이상 쌓을 기회가 없어질 터, 당신은 그래도 괜찮나?"
" 제갈사!"
상대가 저렇게 나오면 안 싸워도 되잖아!
일이 잘 풀릴 마당에 왜 이렇게 도발을 해댄단 말인가?!
내가 깜짝 놀라서 제갈사를 제지하려 했으나 여동빈이 냉막하게 대답했다.
" 마도사여. 난 너와 이야기할 게 없다."
" 그럼?"
" 연자여. 앞으로 나와라."
나는 여동빈의 말에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여동빈이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 이미 신격을 갖춰가는군. 연자 그대는 신이 될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