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
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음신지력을 대성하자 미호를 데리고 중원에 되돌아왔고, 망량에게 가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망량이 말했다.
"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지만 큰 성취구려."
" 음신지력이 몸에서 넘쳐흐르는 것 같소."
" 흠... 그러면 이번에는 나와 함께 사제에게 가 봅시다."
" 천우진에게?"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제라면 그대의 음신지력을 사용해서 어떻게 술법을 익히는지 알려줄 것이오."
파앗
나는 망량과 함께 망량선사의 마을로 갔다. 그리고 환무의 진에 들어서자 천우진이 크게 경계하는 기색으로 내게 영언을 외쳤다.
[ 나가라!]
망량이 입을 열었다.
" 사제. 잠시 이야기 좀 하지."
[ 사형...]
어느 새 천우진이 환무진을 거두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망량은 그윽한 눈으로 천우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 스승님께 이야기는 들었겠지. 나는 현재 백웅을 돕는 중... 그러니 사형인 내 낯을 봐서 옆에 있는 백웅을 도와 주게. 우리를 직접 돕지 않아도 좋으니 그에게 몇 가지만 가르쳐주면 되네."
" ......"
" 마땅찮은 얼굴이군."
천우진은 약간 두려움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 사형. 지금 어찌되어가는 상황이오? 전날 천문을 관측했더니 전에 없이 성좌들이 요동치고 있었소. 모든 별들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단 말이오. 사형과 그 백웅이란 자가 뭔가 한 게 아니오?"
별이 분노한다고?
내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망량이 말했다.
" 당연한 일.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 반고의 가호를 얻어 정향의 인과율을 얻었기 때문이네."
" ......!! 반고의 가호! 그게 가능했단 말이오?"
" 구천현녀가 반고의 화신이었네. 그 사실을 알아내고 그녀를 통해서 질서의 좌표로 칠요를 공양했고, 반고가 그 공양을 받아들여 인과율을 준 것일세."
" ... 정말 무시무시한 짓을 했구려. 역사상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짓을..."
" 또한 현재 우리의 목표는 천계를 토벌하는 것일세."
" 그건 스승님께 들었소.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건만 반고의 가호라면 가능하겠구려."
천우진이 잠시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하아 -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사형과 그 일행은 반고의 가호가 끝나는 즉시 사악한 신들에게 공격받게 될 것이오. 자신의 집에 호랑이를 들여온 셈이니 그 누가 화를 내지 않겠소?"
" 그건 차후의 문제겠지. 설령 그렇다 한들 지금 내게는 한 점의 두려움도 없네."
" ......"
"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천우진은 물끄러미 망량을 쳐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말했다.
" 따라오시오."
" 나도 같이 가도 되겠나?"
" 마음대로 하시오, 사형."
나는 망량과 함께 천우진을 따라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 고양이 녀석은 이 일에는 간섭할 생각이 없나 보군.'
수면욕이 안 느껴져서 다소 상쾌한 기분으로 마을의 풍경을 지나치고 있자 천우진이 예전에 수련했던 계곡으로 갔다. 천우진은 폭포수 근처에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뭘 도와주면 되오?"
나는 내가 음신지력을 대성했으며 이제 대성한 음신지력을 이용해서 술법을 익히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천우진은 묘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 손 좀 줘보시오."
그리고 천우진이 내 손을 통해서 음신지력을 느끼고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경계를 잔뜩 담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 어찌 인간이 이 정도의 신력(神力)을 가질 수 있지. 신의 화신이나 사도가 아닌 다음에야... 당신 정체가 뭐요?"
" 사정이 있소. 그리고 날로 먹었다기엔 오랜 기간 수련을 거쳤으니 그런 말을 듣기도 싫소. 무엇보다 망량이 내가 인간임을 보증해 주잖소."
" 흠..."
전욱의 동상을 통해서 음신지력을 추출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이제야 겨우 아마테라스의 힘을 이용해서 절정지경에 오른 참이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고생했기에 천우진에게 비난을 듣고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천우진은 내 손을 놓더니 말했다.
" 지금까지도 음신지력으로 일정수준의 술법을 수련없이 쓸 수 있었을 것이오. 마치 요력을 쓰듯 힘으로 전개할 수 있었겠지."
" 그렇소. 그러나 단순한 술법에 한정되고 복잡한 술법이 되면 그렇게는 할 수 없게 되오. 실질적으로는 중급의 일부 술법이 한계요."
내가 대꾸하자 천우진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 이제는 그 제약이 없다고 봐도 좋소. 당신은 어찌된 일인지 상단전도 개발되어 영통력도 많이 개화되어 있으니, 이제부터는 음신지력을 정령화(精靈化) 시키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오."
정령화?
' 아, 그러고보니 천우진이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지...'
천우진이 자세히는 설명해주지 않았으나 대성의 경지에 오를 경우 음신지력을 정령화시키거나 태평요술을 대성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내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천우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 정령화가 뭐요?"
" 말 그대로 음신지력의 본질을 정령으로 신화(神化)시키는 것이오. 힘을 객체화시킴으로써 본디 술자가 연마해야 할 모든 역량과 노력을 무시하고 술법만 사용하는 게 가능할 것이오."
" ......!!"
" 혈인능력(血認能力)에 있어서 하나의 궁극. 요괴의 특수능력 같은 거지."
그렇게 편리한 술수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의아해서 천우진에게 물었다.
" 그럼 당신은 어째서 신기의 정령화를 쓰지 않소?"
그러자 천우진이 귀찮은 듯 대꾸했다.
" 난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쓰지 못하는 거요."
" 음?"
" 백웅 당신은 자기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의 신력을 갖고있는지도 잘 모르나 보군. 내 신기(神氣)를 아무리 모아도 당신의 1할에도 미치지 못하오. 내 생전에 나보다 신기가 특출난 인간이나 요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당신은 전대미문의 신력을 지니고 있는 셈이오. 그리고 그 정도의 신력이 아니면 정령화는 절대 엄두조차 낼 수 없지."
" 압도적인 용량의 신력이 있어야 정령화를 시도할 수 있단 말이오?"
" 그렇소."
천우진은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본디 인간이 그 정도의 신력을 품으면 몸이 터져죽는 게 정상일텐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버티는 거지? 딱히 영력수련을 극한으로 연마한 것도 아닐텐데..."
" ......"
" 아무튼, 지금부터 가르쳐줄 건 고대의 술법이니 난이도가 최상급이오. 그러나 이걸 터득하고 나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펼치지 못할 술법은 없게 될 것이오."
나는 천우진의 말에서 '최상급'이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나는 설마하는 눈으로 천우진을 쳐다보았다.
" 설마... 태평요술을 대성하는 것만큼 어렵소?"
" 비슷하지 않을까."
" ......"
" 그러나 인간기준 최상급이오. 당신에게는 어찌될지 모르겠군."
" 그건 또 무슨 말이오?"
" 인간이 억지로 이 술수를 겉핥기로나마 익히는 난이도가 매우 높은 것이고, 이 난이도는 실제로 당신 정도의 신력을 가진 자가 익히는 경우를 거의 상정하지 않았소. 당신같은 신력을 갖고 있으면 보통 신의 화신이거나 초월적 존재일건데 뭐하러 이런걸 따로 익히겠소. 그러므로 실제로는 난이도를 단정지을 수 없소."
" 흐음."
희망이 있다는 소리를 빙빙 돌려서 한 건가.
아무튼 좋은 소식이었기에 나는 의욕적으로 변해서는 외쳤다.
" 어디 해 봅시다!"
" 그 전에 잠깐만."
" 망량?"
갑자기 수행하기 직전에 망량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망량은 천우진에게 말했다.
" 사제. 부탁 하나만 더 하지."
" 사형은 무슨 부탁이 그리 많소?! 내가 다 들어주는 호구같소?"
천우진이 볼멘소리를 했으나 망량은 도리어 싱긋 웃었다.
" 설마. 사제가 그렇게 날 싫어하진 않을거라 생각하는 걸세."
" ... 무슨 차인지 모르겠군."
" 내 부탁은 간단하네. 백웅에게 그 술수를 가르쳐줌과 동시에, 한 명의 인간에게 자네가 알고 있는 최고의 봉인술을 걸어주게."
" 누구한테 말이오?"
이어진 망량의 말에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 진소청이라는 사내일세."
" 망량! 설마..."
망량은 한 줌의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설마요. 지금 당장 목갑에서 진소청을 꺼내시오. 이 기회에 사제의 술법으로 확실히 봉인하는 게 좋겠소. 이제는 죽이는 것도 애매할 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진소청을 봉인하려 드는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소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내가 경악스러운 눈으로 망량을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 백웅. 지금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나 끝까지 나... 그리고 우리를 믿어 주시오. 진소청은 이번 막(幕)에 등장해선 안될 인물이라고 이미 확정지었소."
" ......"
" 꺼내시오."
망량이 정말 내가 알고있는 망량이 맞는 걸까?
혹시 망량이 무언가에 홀리거나 씌였고 가짜 망량인 건 아닐까?
내가 평소에 알던 망량의 행동과는 전혀 달랐기에 나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진소청을 꺼냈다.
' 망량을 믿자.'
여기까지 와서 망량을 안 믿으면 누굴 믿을 것인가? 배신당하더라도 망량에게 배신당한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내가 기절해있는 진소청을 목갑에서 꺼내자, 천우진이 곧장 자신의 품에서 산하사직도를 꺼냈다.
슈르르륵
이윽고 보패 산하사직도에 진소청이 갇혀서 한 폭의 그림으로 화했다. 확실히 보패 이상으로 강력한 봉인술은 거의 존재할 수 없었기에, 저기에 들어간 이상 진소청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갇혀있게 되리라. 다만 진소청을 봉인했다는 사실에 찝찝해져서 내가 산하사직도를 쳐다보고 있자 망량이 말했다.
" 너무 괘념치 마시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알겠소. 털어내도록 하겠소. 다만 망량 당신도 강해져야 할 텐데 여기서 수련할 생각이오?"
내 질문에 망량이 훗하고 웃었다.
" 난 그다지 수련할 필요가 없소. 할 이유가 없지. 그렇다 해도 백웅 당신에게는 충분히 도움될 수 있으니 걱정 마시오."
" ......?"
뭐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망량이 기연이라도 얻은 건가?
" 그럼 수련이 끝나는대로 장령곡으로 돌아오시오. 당신의 수련이 끝나는 때를 기해서 천계토벌을 개시하도록 하겠소."
" 알겠소."
" 그리고 사제와는 말을 놓도록 하시오. 서로 불편할 터이니."
끄덕!
나와 천우진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망량은 홀연히 돌아가 버렸고 나는 천우진에게 음신지력의 정령화 술법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천우진은 처음부터 내게 주문했다.
" 우선 시작은 이 1499자의 경문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하지."
" 경문?"
스아아아
천우진이 허공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자 그대로 주황글씨가 허공에 남았고, 주황글씨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며 경문을 허공에 새겼다.
말이 1499자이지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려면 꽤나 골치아픈 일이었으므로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천우진이 말했다.
" 이 경문은 신대의 술법이다. 신력을 부작용없이 몸에서 떼어내서 찰흙처럼 빚을 수 있게 도와주지. 힘을 객체화시키는 기초단계... 이 경문을 달통해야 정령화의 첫 단계를 이룩할 수 있다."
" 첫 단계...? 이 다음은 뭐가 있지?"
" 일단 다 외운 다음에 물어보는 게 어떠냐? 내 생각에는 이걸 외우는데도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쳇."
나는 투덜거리면서 경문을 하루종일 외우기 시작했다.
' 으오오오오!! 외우자!'
나는 뜻도 해석 안하고 일단 닥치고 달달 입으로 외우기부터 시작했고, 상당한 양이었음에도 뇌정경을 발동시키며 집중하자 대략 열 시진 정도가 지나자 어느 정도 외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499자를 온전히 다 외운 것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계속 5일 밤낮을 외웠을 때였고, 나는 천우진에게 외운 걸 검사받았다.
내가 1499자를 모두 외운 걸 확인하자 천우진이 말했다.
" 좋아. 다 외웠으면 이제 가부좌를 틀고 이 경문을 머릿속에서 일천 번 암송해라. 한 글자도 틀리지 말고."
" ......"
" 외우면 외울수록 경문 자체에 담긴 힘이 네 신력을 자연스럽게 추출해 줄 것이다."
일천 번이라고?
장난하냐!
"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너무 많아."
천우진이 냉엄하게 말했다.
" 난이도가 최상급이라고 미리 말했을텐데. 그리고 보통 상급술법의 수련은 다들 이 정도 수련치는 된다. 술법의 길 또한 무공의 길에 못지 않은 고난의 길이지. 도사나 신선들이 할 짓 없어서 수십 년동안 하나의 술법을 수련하는 줄 아느냐? 네가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술법을 다뤄왔던 게 아닌가 싶군."
" 윽..."
하긴 난 무공보다 술법재능이 더 없었는데 음신지력과 수요의 영통력 덕분에 손쉽게 술법을 다루는 편이었다. 게다가 술법이 꼭 필요한 국면에서는 내가 직접 술법을 쓰기보다는 술법을 쓰는 동료를 영입하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재능부족을 잘 직시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쨌든 시키는 대로 1499자를 일천 번 암송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한 번 암송하는데 대략 반 시진이 조금 안 걸렸고, 이런 식이라면 최소 두 달 정도가 지나야 수련이 완결될 것 같았다. 그나마도 먹지도 자지도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으며, 정상적인 수련 진도라면 최소한 일 년이 걸릴 것이리라.
우우우우
대략 십칠 주야 정도가 지났을 때 변화가 생겨났다. 엄청난 힘이 내 중단전에서 적층(積層)되는 듯 하더니 가볍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나는 머릿속에서 지선(地仙) 망량의 지식 중 일부가 마치 실타래가 끊어지듯 올올이 풀려나오는 걸 느꼈다.
퍼엉!
" ......!!"
이, 이해된다!
아니, 이해라기 보다는 체득(體得)한다! 원래 너무 고차원적이라 이해가 불가했던 지선의 술수가 마치 본능의 일부가 된 것처럼 내 혈맥에 새겨지는 게 느껴졌다. 새겨진다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이성으로 해석하지 못함에도 마치 새가 날개를 움직이는 법을 의식하지 못하듯 알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가 잠시 경문암송을 멈추고 천우진에게 이 상태를 이야기하자,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 수련의 부수효과인가 보군. 영통이 급격히 높아져서 그런 건가...? 그럼 네가 말하는 지선의 술수란 걸 써봐라."
" 좋아."
" 상급 술수로."
나는 지선 망량의 상급 술수 중 번양술(蕃養術)이란 걸 시전해 보았다. 이 술수의 효과는 산천초목의 생장력을 강화시키는 것으로써 산신령이 대지를 비옥하게 할 때 사용하는 술법이었다. 내가 번양술을 근처의 나무에 시전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 헛!"
갑자기 높이가 일 장 남짓이었던 나무가 육 장 이상으로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힘을 다 준 게 아니라 놀라서 도중에 끊었기에, 실제로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면 어디까지 커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삽시간에 인간세상에서 도저히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거목(巨木)이 나타나자 나 뿐만이 아니라 천우진도 놀랐다. 천우진은 거목을 만지더니 침음성을 흘렸다.
" 으음... 엄청난 힘이다. 같은 술수를 사용해도 신통력에 따라 위력이 차이난다지만 이 정도일줄은...."
" 나도 이제 상급 술사라고 할 수 있는 건가?"
" 그렇다기 보다는 신화시대의 혈맥을 이어받은 자가 그 힘을 각성한 상태라 할 수 있지. 정상적인 술법사와는 차이가 있다."
가볍게 대꾸한 천우진이 말을 이었다.
" 다만 이론을 이해 못하는 이상 고급응용까진 하지 못하겠지. 그게 혈인술사나 선조회귀자의 한계이기도 하고."
" 그럼 안 좋은 건가?"
천우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 ... 이런 설명을 하기도 참 짜증나지만, 지금 넌 네 수명이 어느 정도라 생각하나?"
" 엉?"
수명?
웬 뜬금없는 소리야?
나는 어리둥절하다가 대꾸했다.
" 음... 아마 이백 살이나 삼백 살 정도 되지 않을까."
내공이 극치에 이르렀으나 아무리 못해도 백오십살은 살 것이고 반로환동이나 환골탈태를 이루면 그 이상일 수 있다. 이미 명룡자나 독고성, 백련교주 등이 최소 백오십 세 이상이니 나는 이백살 이상은 살 것이며 삼백 살도 너끈하리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나이를 지닌 존재는 대부분 신적존재나 인외였기에 그 이상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무림에 그렇게 나이많은 존재가 나타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백 살 짜리 무림인같은 건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천우진이 말했다.
" 그건 무공경지와 내공만으로 이야기했을 때겠지."
" 그렇지."
" 지금 너는 신력을 절정까지 얻었으므로 그런 인간기준의 나이를 훨씬 초월했다. 네 절반의 신력만 갖고 있어도 최소 오백 살은 살 수 있으며 탈인간이지. 하물며 지금의 너라면 천 살은 우습고 이천 살이나 삼천 살도 여유로울 것이다."
" 헉...."
" 이미 반쯤은 인간이 아니지. 보통 너 정도면 등선해서 대라신선이 되거나 이면의 세계로 빠져서 마왕의 길을 걷거나 할 것이다."
내가 이미 반쯤 불로불사가 되었단 소린가?
내가 얼떨떨해서 멍하니 서 있자 천우진이 본론을 꺼냈다.
" 그 정도의 시간이 있다고 친다면 지금 당장은 혈인능력으로 술법을 체득해서 휘두르는것밖에 못해도, 기나긴 시간을 들여 술법을 차츰 습득하게 되면 고급응용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수련시간만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이 들겠지만 어차피 늙지도 죽지도 않는데 상관이 있겠나?"
" ......"
" 그런 질문은 지금도 열심히 수련하는 선도와 도사들을 모욕하는거나 다름없다. 배부른 소리 마라."
천우진이 싫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어쨌든 그가 말해준 건 내게 이득이 되는 정보였다.
지금 당장은 상급 술수를 힘으로 휘두르는 셈이지만 앞으로 방대한 시간을 들이면 지선 이상의 술수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건 내게 있어서 술법의 길이 희미하게 트이기 시작했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였다.
나는 그 날 이후로 더더욱 경문의 수련을 빨리 해치우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해서 매달렸다. 머릿속으로 외우고 또 외웠으며, 비가 하루종일 쏟아져도 절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집중했다. 한 시도 쉴 틈이 없다 생각해서 노력에 채찍질을 거듭했으며 몸과 마음은 힘들어도 묘한 만족감이 마음속에 감돌았다.
그렇게 대략 두어 달이 지났을 때였다. 수련이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어서 일천 번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스스스스...
파앗!!
갑자기 내 이마에서 거대한 광선이 일어나더니 허공에 무언가를 투영해 냈고, 그 모습은 마치 시꺼먼 흑암의 영체(靈體)처럼 보였다. 거인처럼 강대한 위압감이 뿜어져나왔다. 그 영체는 찰흙이 빚어지듯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온전히 인간아이 정도의 크기로 성장했고, 대지에 발을 딛고 섰다.
' 저게 음신지력의 정령!'
나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서서 정령화된 음신지력과 마주했다.
' 저 모습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리고 왠지 어디서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하자 음신지력의 정령이 입을 열었다.
[ 나는 그대로부터 태어난 존재. 그대의 염원. 나의 주인이여, 내게 이름을 지어주시오.]
" 이름?"
[ 이름을 주신다면 그대를 위해 모든 능력을 바치겠소.]
그러고보니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는 특별한 주술적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고민하다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 ... 흑웅(黑熊)!"
내 이름이 백웅이고 저 놈은 새까맣다.
그럼 흑웅으로 하자!
그러자 흑웅이 이름을 받자마자 시꺼먼 안광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 좋소. 나는 흑웅. 나의 모든 힘은 소멸할 때까지 주인을 위해 사용하게 될 것이오!]
슈슉
흑웅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 ......"
나는 생각보다 허무하게 음신지력의 정령화 의식이 끝나자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정령이 자기소개를 하고 이름을 지어준 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천우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 일이 끝났으면 꺼져라!"
" 이제 흑웅을 필요할 때마다 소환하면 되는 거냐?"
" 그럴 필요도 없다. 쓰잘데기없이 방대한 신력을 응축시켜서 정령으로 만들었으니 놈이 알아서 다 해줄 것이다. 이건 원래 [지배자]의 화신이 쓰던 전용술법이니까."
" 흐음."
" 그리고 충고 하나 하겠다."
웬 충고?
내가 천우진을 쳐다보자 천우진이 경계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 충고라기보다는 당연한 말이지만... 절대 웬만해선 그 힘의 본질까지는 꺼내쓰지 마라. 보조효과로 상급 술수를 쓰는것에 만족하는 게 좋다."
" 왜지? 음신지력의 본질을 꺼내쓰면 상급술법보다 몇 배나 강력할텐데."
" 그 힘의 원래 주인에게 안 들키는 게 좋을테니까..."
" ......"
나는 순식간에 천우진의 말을 이해하고 얼굴이 굳어졌다.
' 그렇겠군.'
아까 흑웅의 모습이 낯익었던 이유 - 그것은 모습이 작아졌을 뿐, 그 흑암의 거인의 형태는 바로 삼황오제 전욱의 본체와 같았기 때문이다. 음신지력은 본디 전욱의 힘이니, 정령 또한 그의 모습을 띄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전욱이 지금까지 시간역행의 능력을 쓸 때마다 얼마나 노해서 끼어들었는지를 생각하면 결코 함부로 쓰지 않는 게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