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878화 (877/1,615)

878====================

진공가향(眞空家鄕)

인과율이라고?!

" 인과율이 무기라는 게 무슨 뜻이냐."

내가 제갈유룡에게 묻자,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근처의 나무등걸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편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몇 년 만인가...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식을 찾았군."

" 설명을 해 달라고."

" 기다려 주게. 조금만 쉬고 싶어."

풀썩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다짜고짜 눈을 감고 앉아서 쉬었다.

" 이, 이봐."

우리가 습격할 걱정조차 하지 않는 듯, 무술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경계조차 풀어버린 모습이었다. 무인은 원래 수준이 높을수록 적이 다가올 경우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최소한의 감각을 살려두기에 잠잘때도 기습에 대응할 수 있는데, 제갈유룡은 그것조차도 풀었다는 게 느껴졌다.

정말 -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무방비하다. 완전한 아군도 아닌 우리 앞에서 저렇게 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

" ......"

저 녀석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제갈유룡이 난데없이 쉬고 싶다고 하니 어쩌라는건지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 제갈사가 눈빛으로 놔두라고 말했고, 나는 그냥 같이 앉아서 쉬기로 했다.

' 쩝... 그동안 나도 많이 못 쉬긴 했지...'

그 동안 남는 시간에는 죄다 일하거나 밤낮없이 서문혜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나는 먹지도 자지도 쉬지 않아도 무진장한 내공 덕분에 지치지 않으나 그렇다고 쉬는 게 싫지는 않다. 나는 간만의 짧은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짹 짹

산새소리가 흘렀다. 그리고 모두가 앉아서 쉬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 때 - 나는 제갈유룡이 쉬고 싶다고 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갈유룡은 그만큼 지금 얻은 반고의 가호, 인과율이 거대한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승산따위 무(無)에 불과한 이 세계의 절망에 맞서싸우며 피폐해진 정신이 이제야 최소한의 승산을 엿보았기에 - 잠시나마 심신을 쉬고싶어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리라!

잠시 후 제갈유룡이 휴식을 다 했는지 눈을 뜨더니 말했다.

" 백웅. 오늘 장령곡에서 여기에 오기 전까지 천계를 부수려면 뭘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그의 눈에는 전에 없던 생기가 돌고 있었다. 나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 ... 별로 생각해둔 건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힘에 대항하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생각했지. 반고의 가호가 그만한 힘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왔지."

" 그런가."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 더 이상 천계의 투선이나 강력한 대라신선의 술법에 대항할 방법을 따로 연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순리(順理)가 우릴 향해 불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

" 인과율을 얻었으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천계를 부순다 하면 당연히 천계의 전력들이 움직여서 우릴 죽이려 들 건데 맛이 가버린 것인가? 그러나 뜻밖에도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사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 그 말에 동의해, 형님. 이제는 밑준비만 좀 하면 될거야."

" 사. 너희는 너희대로 준비해라. 우리는 공격준비가 끝나면 알리겠다."

" 좋아. 그럼 이대로 헤어지지."

" 그럼 부아의 술법을 통해서 연락하겠다."

파앗

제갈유룡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내가 허탈한 눈으로 제갈유룡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자, 제갈사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다.

" 주군. 미호를 기신으로 만드는 계획은 내가 세이메이와 연락하며 진행하지. 순어구를 세이메이에게 주고 와."

" 잠깐. 정말 이걸로 끝이야? 반고의 축복이 뭔지도 잘 모르는데 칠요만 잃은 상태에서 진심으로 천계공략을 준비하는 건가?"

" 그래. 그냥 준비하기만 하면 돼."

" 이해가 안 가. 투선이나 대라신선을 상대할 방법은 무엇 하나 없는데 대체...!!"

내가 혼란스러워서 중얼거리자 제갈사가 말했다.

" 주군. 뭐든 원하는대로 이뤄졌던 대운(大運)의 축복을 받았던 때가 있었잖나."

" 그랬었지."

그게 분명히 12번째 삶이었을 것이다. 난데없이 대운의 축복을 중첩받아서 황궁에 돌격했고, 그 후에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운이 뒤따라주면서 황궁세력을 부수는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축복이 끝나자마자 사망했었다. 물론 대운의 중첩은 꽤나 쓸만했기에 이후에도 단발성으로 몇 번 써먹은 기억이 있다.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 이제부터 우리가 맞이할 상황은 조금 종류는 다르겠지만 대운의 축복과 비슷할 거야."

" ... 뭐라고?"

" 정확히는 대운이라기 보다는 시류(時流)라 할 수 있겠지. 이 세계의 운명에 불어오는 거대한 바람... 이라고 할까."

" ......?"

" 제갈유룡은 팔괘의 달인이니 반고의 가호를 받은 순간 팔괘를 통해서 후천팔괘의 리(理)를 점쳤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흐름이 순(順)이라고 확신한 순간 모든 긴장이 풀렸던 거겠지. 왜냐하면 그건 정말로 반고의 힘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정향(正向)의 인과율을 얻었기에 가능해진 거고."

" 시류가 따라준다... 흠..."

시류가 따라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나는 제갈사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말했다.

" 그러니까, 동료 모두에게 대운의 중첩같은 강력한 운빨이 임하게 된다는 말이냐?"

"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단순하게 적용되진 않을거야. 알다시피 그 대운중첩에는 한계가 있었지 않은가."

" 그랬지."

"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지만... 반고의 가호인 만큼 그 한계는 아마 측정할 수 없을 거다. 우린 지금부터는 즐기기만 하면 돼. 어쨌든 천계는 부술 수 있을거야."

" ......"

이해가 안 돼.

너무 희망적인 거 아닌가?

나는 제갈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언뜻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두 사람을 데리고 항산에서 본거지인 진랑곡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제갈사의 말대로 대기하며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잘 지켜보기로 했다.

' 인과율이 뭐가 어쨌다는 거야.'

며칠 후 세이메이가 시키가미(式神)를 보내서 나를 급히 불렀다. 시키가미는 음양술로 만들어내는 소환수의 일종인데 종이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연락을 위해서 내 몸에 갖고다녔던 것이다. 나는 세이메이가 부르는대로 동영으로 향했다.

파앗

동영에 도착했을 때, 세이메이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 이, 이걸 봐."

" ......!!"

나는 깜짝 놀랐다. 세이메이가 츠치미카도 일족을 통해서 잡아온 듯한 미호가 결계봉인 속에 갇혀 있었는데, 그 미호는 전신에서 환한 금빛을 내뿜고 있는 중이었다. 그 금빛은 신성한 힘을 품고 있었기에 언뜻 보아도 미호가 다른 차원의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세이메이가 말했다.

" 미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결계봉인에 가사상태로 가둬두고 있었을 뿐이야. 그런데 어제부터 계속해서 영력이 증폭하더니 이젠 모든 음양사들이 힘을 써도 이 결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어."

" ... 어떻게 된 거지?"

" 내가 묻고싶은 말이군. 혹시 지난번부터 받겠다던 반고의 가호를 받은 건가?"

" 그래. 사실은..."

나는 세이메이에게 상황설명을 했다. 그러자 세이메이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미호에게 정향의 인과율이 작용한 거군. 하긴 그렇게 해야 인과율의 위화감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천계를 맨입으로 이길 순 없으니 재료가 필요하겠지."

" 무슨 말이야?"

" 책사들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면 네가 기고만장해질까봐 설명을 잘 안 해준 모양이지만 지금 미호의 상태가 급하니 이야기해 주지. 쉽게 말하자면 반고의 가호를 받은 그 순간부터..."

세이메이가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 이 세상은 너희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 ......?!"

이게 뭔 소리야?

뜬금없는 말에 내가 멍해져있자 세이메이가 말했다.

" 그 자리에 모여있던 너희의 공통된 의지는 바로 하나, 천계타도였다. 그리고 제갈유룡과 제갈사가 인과율을 운운하며 그토록 승산을 자신했다면 쉽게 반고의 가호에 있는 효과를 추측할 수 있어. 바로 너희가 [천계타도]를 이룰 그 때까지 이 세계의 모든 인과율은 너희에게 무조건 득이 되는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란 말이다."

" 대운의 중첩과 같은 건가?"

" 너희에게 유리하다는 점에서는 같겠지만 대운의 중첩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과율을 맞춰가면서 결론적으로 너희의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세계의 운명이 계속 표변(表變)해 나간다고 생각하면 쉬울 거다."

" 아."

나는 그 순간 경극이 생각났다.

경극에서 선역과 악역은 정해져 있고 - 단지 어떻게 연기를 하느냐에 따라 극의 진행이 극단마다 차이가 날 수는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흐름과 역사가 무조건 우리의 승리를 전제로 맞춰지게 된다는 소리인가?

꿀꺽

' 엄청나다...'

그 말대로라면 이 세계가 우리를 중심으로 흐른다는 말도 전혀 과장된 게 아니었다. 거대한 인과율의 순리가 무난하게, 결과가 달라짐 없이 유장한 흐름으로 우리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운의 중첩을 뛰어넘는 효과!

나는 혹시하는 마음에 말했다.

" 그럼 제갈사와 제갈유룡이 준비를 해야한다고 했던 이유는..."

" 당연히 인과율에 위화감이 크게 발생하면 할수록 반고의 가호가 빨리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칠요를 바쳤다지만 그 가호 또한 유한하지 않겠나? 최대한 이길조건을 맞춰서 자연스러움만 유도할 수 있다면 그 가호는 무적(無敵)에 가까울 것이다."

" .......!!"

" 그리고 지금 미호의 갑작스러운 영력강화 또한 반고의 가호를 오래 유지시키기 위한 인과율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군."

그렇게 말한 세이메이가 흡족한 듯 말했다.

" 십이율주의 협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필요 없겠어. 보물도 공양할 필요가 없겠어. 그냥 이 상태로 바로 기신으로 진화시켜도 되겠군."

" 잠깐!"

" 왜 그래?"

" ... 기신으로 진화하면 현재 미호의 인격은 사라지는 거지?"

" 그렇게 되겠지."

" ......"

" 어쩔 수 없는 일. 그렇다고 미호를 가만히 놔둬서 서왕모 공략을 힘들게 할 수도 없고 죽일수도 없다면 기신으로 진화시킨 후 전력으로 쓰는 수밖에."

나는 내가 발안했던 일임에도 막상 눈앞에 두자 죄책감이 들었다. 이번 삶에 얼마나 큰게 걸려있나 생각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희생이란 생각도 들었고, 동시에 뜬금없이 이번 삶에서 자기의 인생을 짓밟힌 미호에 대한 죄책감도 크게 일어났다. 그래서 세이메이에게 말했다.

" 세이메이. 잠깐 결계를 풀어 줘. 미호에게 흑요석을 주고 싶어."

" ... 제정신이냐? 여기까지 와서 그녀가 흑요석의 마력때문에 폭주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 지금의 영력이라면 버틸 수 있을거야."

" 흐음... 어쩔수없군."

세이메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미호를 가둔 봉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봉인에서 풀려난 미호에게 내가 흑요석을 주자, 미호는 잠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세이메이처럼 눈의 색깔이 변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적응했는지 원래대로 돌아오며 말했다.

" 백웅. 하고싶은 말이 있다."

내가 미호를 결계에서 풀어주자, 미호는 나를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 ... 너는, 내가 서왕모 님과 싸웠으면 좋겠느냐?"

" 아니. 서왕모는 내가 쓰러뜨릴 거야."

" 후우... 어쩌다 이런 일이."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 백웅, 그렇다면 나는 기신이란 게 되겠다. 대신에 기신이 되고 나면 네가 내 이름을 불러다오."

" 뭐?"

" 그럼 나는 지금의 인격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 ... 아!"

나는 미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인연'의 연결!

하지만 그건 칠요의 시련 막바지라고 하는 무척 특수한 상황에서 겨우 이전회차의 미호를 큰굴레를 넘어 이끌어낸 것이었다. 과연 칠요의 시련이 아닌 상태에서도 그게 가능한 걸까? 내가 염려하자 미호가 싱긋 웃었다.

"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반고의 가호가 지금 함께 하지 않느냐."

미호의 말대로였다. 미호가 기신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기신이 된 미호의 이름을 부르자, 미호는 금세 원래의 인격을 되찾았다. 기신은 태어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완전히 텅 빈 [신의 그릇]을 채우게끔 되어있는데 이름을 부르는 의식을 통해 그걸 무시하고 미호를 원상복구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쉽사리 기신의 힘을 손에 넣은 강력한 미호를 손에 넣자 반고의 가호가 진짜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이거라면 정말 가능할지도 몰라.'

모든 게 내 뜻대로 흐르고 있다.

칠요가 없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리고 미호와 함께 장령곡에 되돌아오자 망량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말했다.

" 백웅. 미호 님을 다시 얻으신 걸 축하하오. 이로써 천계공략의 확률이 크게 상승했구려."

" 망량. 어디까지 준비를 해야 반고의 가호로 확실히 천계를 없앨 수 있겠소?"

" 숙부와 함께 이런 저런 계산을 해 보았으나... 반고의 가호가 있으면 뭐든 대충해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소. 아마 숙부께서도 필요한 준비만 마치고 나면 제갈유룡과 합류할 생각인 듯 하오."

" ......"

그 정도란 말인가?

' 좋아. 그럼 천계만 부수면 곧장 수해를 뚫는다...!!'

내가 기쁨으로 실실 입이 벌어지자, 망량이 날카로운 눈을 하며 내게 경고했다.

" 그러나 백웅, 명심하시오. 우린 이미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소. 그러니 끝까지 입조심을 하지 않으면... 재앙이 닥쳐올 것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마시오."

입조심?

' 아, 전생에 관해 누설하지 않는 걸 말하는 거군.'

정말로 그걸 누설하는 것 하나가 반고의 가호마저 무시하고 모든 걸 뒤틀 정도의 패인인 걸까. 나는 내심 그럴것같지는 않았지만 망량이나 제갈사가 없는 소리를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진중하게 대답했다.

" 알았소. 절대 입조심 하겠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