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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질서라고?
생전 처음 듣는 이론에, 나는 그 말에 의아해져서 반문했다.
" 질서? 반고가 질서의 화신이란 말인가?"
제갈유룡은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 세상에 혼돈에 반(反)하는 개념은 질서뿐이지 않은가? 엄밀히 말하면 반대라고 할 수는 없고 거시적 시점에서는 질서조차도 혼돈에 귀속되지만 적어도 그 시점에서의 반고는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한 우주적 법리의 구현이었다. 반고가 혼돈의 알을 깨고 나와서 순식간에 자라났다는 전설 또한 혼돈의 바다뿐이었던 이 세계에 질서가 수립되어 물질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비유라고 할 수 있지."
" 음... 그렇다고 치지. 그럼 반고가 질서라는 게 반고소환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 절대적인 질서의 존재인 반고를 소환할 때 쓰는 의식은, 혼돈의 존재를 소환할 때 사용하는 공양의식과는 완전히 반대라는 뜻이다. 즉 이 상은 우주적인 질서의 좌표."
제갈유룡은 반고의 상을 다시 천제단 위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이 세계 우주홍황이 거대한 혼돈과 질서의 뒤섞임이라 한다면, 질서의 화신인 반고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질서 - 중용(中庸)의 경지를 구현화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중용? 그건 공자가 만들어낸 개념이 아닌가."
" 공자가 쓰는 개념과는 다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응룡(鷹龍)이 중용의 화신이라는 점과 같겠지. 그 어떠한 선악으로도 구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중립을 의미한다."
" ......"
뭔가 어려운 이야기다.
내가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어리둥절해하자 옆에 있던 망량이 내게 설명해 줬다.
" 백웅. 쉽게 말하자면 반고란 우주가 발생했던 질서의 특이점을 상징할 가능성이 높소. 그 특이점은 그저 현상일 뿐이지만, 현상 그 자체가 우주적인 신격(神格)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오."
" 현상 자체가 절대신이라고?"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나?
신이 인격을 가지고 공양물을 받아들이는 게 보통 아니었던가?
" 그렇소. 인격신이 아닐 가능성도 높지. 그리고 그 특이점은 대우주의 탄생 그 자체가 아니겠소? 당연히 모든 시공간을 초월해 있으니 일반적인 공양의식으로는 결코 닿지 않으나, 저 반고의 상에는 질서의 좌표가 내재되어 있으니 이 자리에 질서의 좌표를 구현함으로써 반고에게 일시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 ... 아직도 어려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 반고의 상은 굉장한 물건이란 말이군."
" 맞소."
" 그러면 저 반고의 상을 다른 [옛 지배자]나 신격한테 바치면 어찌 되오? 반고를 소환할 가능성이 있다면 엄청난 물건인건데."
내 질문에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 무의미할 것이오. 왜냐하면 [옛 지배자]란 우주적 혼돈이 뭉친 단위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존재들. 자신들의 근원과 정면으로 대칭에 서 있는 질서의 좌표를 어찌 반가워하겠소? 화를 낼 게 뻔하다고 생각하오. 그걸 받아버리면 질서의 특이점에 다가가게 될텐데 혼돈의 존재들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 으음."
반고 그 자체가 [옛 지배자]의 상극이란 말인가?
언뜻 모든 신격의 살해를 노리는 내 입장에서는 솔깃했으나 반고 그 자체가 현상이나 개념에 가깝다면 그리 쉽게 그 힘을 얻을 순 없으리라.
" 게다가 발산하는 힘을 내포한 혼돈과 달리 질서는 축으로만 존재하는 개념. 혼돈의 유물과는 달리 이런 질서의 유물은 대번에 사용자에게 큰 힘을 주거나 하진 않소. 그래서 지금까지 천제단에 별일없이 이 상이 보존되어 왔다고 생각하오."
망량이 거기까지 설명했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유룡이 말했다.
" 사실 반고의 상에 질서의 좌표가 내재되어 있는지는 아직 검증하지 못했다."
" 음..."
"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바로 반고의 화신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 뿐."
나는 제갈유룡의 설명을 다 들었고, 그제야 상황을 확실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 구천현녀 소환 준비를 그래서 했던 거군.'
구천현녀가 반고의 화신이라서 소환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상에 대해서나 반고의 이론은 지금 처음 들은 것이다. 이제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제갈유룡을 쳐다보았고,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 반고의 화신인 구천현녀를 소환해서 그녀의 본질을 각성시키고, 동시에 반고에게 공양의식을 할 수 있도록 부탁하는 것이다. 그 방법 외에는 반고에게 직접 힘을 얻을 방법이 없다."
" ......"
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 구천현녀가 각성한 후에 꼭 우리 편을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적이 될 가능성도 있는데."
실제로도 일요의 수호자로 각성했던 구천현녀는 최악의 적이 되었다. 그 악몽같은 기억을 갖고있는 나로서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대꾸했다.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 그럴 확률이 높아서 해보는 거다."
" 수호자로 각성하지 않는단 말인가?"
" 우리가 칠요를 모아서 칠요의 시련에 도전하지도 않는데 뭐하러? 본질은 각성할지라도 그럴 위험은 적어. 일단 불러보자고."
" 구천현녀가 '그걸' 알아도 돼?"
내가 슬며시 전생에 대해 지나가듯 말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 그녀는 상관 없어. 준비해."
" 알았어."
나는 제갈사가 준비한 대로 구천현녀 소환의식에 필요한 진과 제의를 마련하고는 중앙에 섰다. 그리고 제갈세가의 인물들이 주문을 외우며 사방에서 보조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진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천제단 위에 하나의 존재가 소환되었다.
번쩍!
[ 감히 인간이 오악의 천제단을 매개로 대라신선을 소환할 줄이야... 이 또한 천계의 제재를 받을 일이란 걸 알고 있습니까?]
다소 화난 목소리로 구천현녀가 천상의 백릉을 휘감고 소환되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힐끔 내게 시선을 향했고, 나는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 구천현녀여! 저는 백웅이라 합니다! 위대한 구천현녀께 소원을 빌고자 부득이하게 소환하게 되었습니다."
구천현녀가 다소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인간이여. 이미 그대는 나를 소환하며 죄를 저지른 것. 그대의 소환에 응하긴 했으나 부탁에 들어줄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그대에게 곧 천장(天將)을 보내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천제단은 인간이 섣불리 쓸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 그렇지만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이 상(像)을 봐서라도!"
내가 반고의 상을 치켜들자 구천현녀가 움찔했다.
[ 그 상은...]
" 네. 반고의 상입니다."
[ 어쩌라는 건가요?]
" 저는 이 상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잊혀진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 ......]
나는 재빨리 구천현녀에게 제안했다.
" 지금 이 소환을 천계의 많은 존재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연결을 끊어 주신다면 즉시 기억을 되살려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제천대성에게 섣불리 기억을 줘버리는 바람에 그걸 지켜보고 있던 천계 모두가 내 기억을 알게 되어 버렸다. 그 바람에 큰 난리가 났었기에 이번만큼은 그 사태를 방지해야 했다. 내가 제안하자 구천현녀가 크게 고민하다가 이윽고 손을 휘저었다.
스스스
허공에 새하얀 비단이 퍼져나간 후, 구천현녀가 말했다.
[ 모든 천계의 연결을 끊었습니다. 누구도 이 의식을 관찰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 그대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십시오.]
역시 구천현녀는 자신의 잃은 기억에 대한 열망이 큰 모양이었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는 흑요석에 가득 기억을 담아서 구천현녀에게 건네주었다.
" 이 흑요석을 받으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
구천현녀는 일개 마도의 보물이 자신을 오염시킬 순 없으리라고 확신하는지 망설임없이 흑요석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기억전송술을 시전하자, 구천현녀는 잠시 동안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윽고 탄성을 질렀다.
[ 이... 이럴수가... 그런 일이...?!]
나는 구천현녀를 바라보며 급히 그녀의 전생 언급을 막았다.
" 쓸데없는 말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아셨겠지만 당신께서는 황제의 부하이지만 동시에 반고의 화신입니다. 황제 공손헌원의 부하보다는 그 쪽이 원래의 소속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반고에게 칠요를 공양하려 하고, 이 상을 매개체로 반고를 소환하고자 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 ......]
" 부탁드립니다. 이 세계의 혼돈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반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구천현녀는 한참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제갈사와 제갈유룡을 한 번씩 쳐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 좋습니다. 반고를 소환해 드리지요. 이 상 또한 진짜이며 그대들이 천계를 부수려 함도 저의 의지와 일치하니...]
됐다!
계획대로 되자 나는 뛸듯이 기뻐졌다. 그러나 구천현녀가 이은 말에 표정이 급격히 굳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이대로는 안됩니다. 이 상태로는 당신들은 반고가 소환된 순간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 무슨 말입니까? 반고가 소환되면 우리를 다 죽인단 말입니까?"
[ 반고를 소환한다는 건 태초질서의 근원이 이 세상에 소환된다는 것. 이 세계의 혼돈과 질서가 만나게 되면 거대한 쌍소멸이 일어나게 되니, 마치 혼돈과 태허가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주가 멸망할 때나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 헉!"
[ 복희와 여와를 낳은 질서의 근원인 반고. 그 소멸의 도가니에서 하나의 은하계가 소멸하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없이 순수한 우주의 신격이니 소환 자체가 재앙입니다.]
" ......"
[ 물론 [옛 지배자]들이 인과율과 시공간을 조작해서 다시 복구하겠지만... 적어도 그 사태를 초래한 당신들을 되살려주진 않겠지요.]
창세신 반고를 소환하는데는 그런 위험성이 있었단 말인가?
내가 어리벙벙해하자 구천현녀가 말했다.
[ 그러나 제가 힘을 쓴다면 위험하지 않게 반고에게 공양을 바치는 게 가능합니다. 저는 그의 화신이니, 질서의 근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서 연결시켜줄 수 있습니다.]
" 오오!"
[ 대신에 이런 공양은 여러 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한 번이 끝일 것입니다. 질서의 특이점에게 공양을 바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되니까요... 이 반고의 상 또한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물건이니... 그래도 정말 하시겠습니까?]
" 하겠습니다!"
나는 곧장 내가 가진 칠요를 내놓았다. 칠요를 받은 구천현녀는 스윽 물건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 지금의 당신들이라면 칠요를 모아 시련에 도전할수도 있을텐데 하지 않는 건가요.]
" 네!"
[ 황제의 도움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나는 거칠게 대꾸했다.
" 전혀 안 합니다! 그 놈도 언젠가 쳐죽여야 할 뿐!"
그 생각은 칠요의 시련을 실패했을 때 굳어졌다. 황제 공손헌원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인과율을 농락하며 세상을 오시하는 절대자일 뿐, 필멸자에 대한 관용따윈 없다! 결국 모든 신을 죽여버리겠다는 내 목표는 전혀 달라질 게 없는 것이다. 공손헌원이 아량이랍시고 내민 칠요의 시련에 의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차라리 반고에게 공양물을 바치려는 것이었다.
구천현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좋습니다. 창세신 반고에게의 칠요 공양을 진행하겠습니다.]
쿠구구구...!!
구천현녀의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이 점차 가루로 변해서 사라지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구천현녀의 형태조차 남지 않았을 때 그 소용돌이 속으로 칠요가 빨려들어갔고, 나는 그 소용돌이 너머로 한없이 안정되어 있는 정적인 세계가 이어져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 어떤 변화도 없는 정지된 세계.
그것이 소용돌이 너머에 존재한다.
내가 홀린듯이 소용돌이 안쪽을 쳐다보자, 제갈사가 경고하듯 말했다.
" 너무 매혹되지 마라. 저건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모든 변화가 사라진 또다른 형태의 죽음이니까. 혼돈만큼이나 끔찍한 영겁이다."
" 아, 알았어."
그 때였다.
[ 그대들이여! 지금 무슨 짓을 하는가?! 이미 태고적에 역할을 끝낸 창세신 반고를 이 세계의 인과율에 끌어들이다니 그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거대한 포효와 함께 천공에서 금빛 비늘과 함께 거대한 용의 모습이 천천히 소환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응룡!!'
역시 황제의 수하인 응룡은 이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가? 저 존재 또한 구천현녀와 마찬가지로 정령왕이자 반고의 화신이라 할 수 있었으므로 반응하지 않는 게 이상하긴 했다. 좌중의 모두는 응룡의 엄청난 존재감에 다들 움직일 수 없는 듯 했다.
칠요의 시련 때도 겪었던 응룡의 엄청난 존재감이었다. 응룡이 인과율을 감수하고 이 세상에 현신하려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 백웅. 이렇게 말하시오!"
하지만 그 순간 망량이 내게 해야할 말을 알려주었고, 이 중에서 유일하게 응룡의 압박을 이길 수 있는 나는 재빨리 응룡에게 외쳤다.
" 응룡이여! 구천현녀가 우리를 인정하여 반고에게의 공양을 받아들였소! 당신은 물론이고 삼황오제도 우리를 막을 명분은 없소!"
[ ......!!]
" 당신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그러자 응룡은 한참동안 침묵하더니 그 거대한 존재감을 거두기 시작했다. 응룡은 금빛 비늘을 다시 공간 너머로 감추며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 이미 이 우주는 혼돈의 장난감이거늘 이제 질서의 개입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응룡의 한탄과도 같은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만신전으로 되돌아가서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 휴우.'
어쨌든 응룡이 소환되어서 모두가 전멸하는 것만은 막았으므로 나는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망량을 쳐다보았다.
" 망량! 방금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었소? 응룡의 존재감이 퍼져나오면 필멸자는 아무것도 못 하는데..."
일요의 시련에서 투선 최상위급이나 마왕급 존재조차도 몸을 떨며 움츠러드는 걸 직접 보았던 나로서는 방금 망량이 멀쩡히 정신을 챙기고 조언을 해준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망량이 대꾸했다.
" 이유가 있소. 그리고 아까 했던 말대로 삼황오제는 우리에게 개입할 명분이 없으니 안심하시오. 당장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거나 삼황오제의 사도가 우리에게 공격할 일은 절대 없소."
" 정말이오?"
" 그렇소. 질서의 근원인 반고는 삼황오제보다 훨씬 윗줄에 존재하는 우주적 법리. 그가 우리에게 가호를 내리는 일에 그 아래격의 삼황오제가 직접 관여하는 건 불가하오. 하물며 삼황인 복희와 여와의 탄생이 그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바에는!"
" 으음!"
" 우리 제갈가문이 모든 걸 파악해서 면밀히 시행한 계책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그 순간 망량에게서 이질적인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치 아무런 영향을 안 받고 있는 듯, 마치 태풍의 눈을 마주한 기분! 어째서 망량에게서 이런 기분을 받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말로 믿음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였다.
나는 소용돌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걸 느꼈다.
환영처럼 소용돌이 너머의 풍경이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 ... 네가...]
그 목소리의 주인은 소용돌이 너머에서 옥좌의 뒤편에 서 있었다. 서 있다기 보다는 머나먼 거리에서 옥좌를 등지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거인(巨人)의 모습이 보였다.
거인은 천장같은 걸 떠받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천장은 우주 그 자체가 아닌가 싶었다. 거인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게 들렸다.
[ 네가... 아니다....]
무슨 소리야?
사아아앗!!
그 순간, 거인의 환영이 사라지며 나는 허공에 있던 소용돌이가 씻은 듯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삽시간에 천제단에서 일어나던 초상적인 현상이 모두 사라지고 평화로운 자연만이 항산의 천제단에 남았다.
나는 모든 것이 끝난 걸 알고는 내 몸을 살폈다. 하지만 뭔가 특별한 힘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내공도 그대로였고 내부의 신력도 그대로였으며 술법도 딱히 증진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신의 권능이 내게 임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 ... 성공한 거 맞아?"
창세신 반고의 가호라는 게 이렇게 보잘것없단 말인가?
내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제갈유룡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백웅이여. 느끼지 못하겠는가?"
" 뭘 말이냐."
제갈유룡은 이윽고, 희미한 미소를 띄며 중얼거렸다.
" 마침내... 그 어떤 수단으로도 얻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궁극의 무기. 인과율(因果律)이 우리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