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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한 명의 장한이 서 있었다. 상당히 키가 크면서도 날렵한 인상의 사내였으며 편한 차림의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다. 다만 얼굴 생김새가 잘 보면 진소청을 많이 닮았기에, 그가 바로 진천휘라는 사실을 알기는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 아니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이청운을 살렸을 때와 크게 다른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위화감 때문에 내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였다. 불림을 들은 제갈유룡이 진천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술법을 썼다.
오행위화(五行爲火)!
순수한 화염의 오행이 결집된 술수가 마치 세 줄기의 창날처럼 진천휘를 향해 쇄도했다. 주문이나 준비과정따윈 전혀 없었지만 거기에 맺힌 오행의 힘이 강력하다는 건 언뜻 봐도 알 수 있었다. 웬만한 놈은 저 일격으로 가슴이 꿰뚫리겠지만 그 순간 진천휘는 날렵하게 오행위화를 피해냈다.
슈슉
술법을 피해낸 진천휘가 말했다.
" 이게 무슨 짓인가 유룡."
" 묶어라."
쿠르릉!
제갈유룡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손을 확 움켜잡았는데 그 순간 땅의 토사덩어리가 치솟아올라서 진천휘를 집어삼켰다. 토둔술법의 일종인 듯 했는데 의외의 기습인데다 범위가 넓어서 그대로 진천휘가 묻혀버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흙동산이 생긴 순간, 흙더미를 뚫고 빛살같은 강기를 몸에 휘감은 진천휘가 바깥에 튀어나왔다.
' 상당한 실력이다.'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진천휘의 실력은 최소한 절정고수 이상으로 보였다.
그리고는 탈출한 진천휘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 무슨 짓이냐고!!"
" ......"
제갈유룡은 그를 뚫어져라 보더니 말했다.
" 소림(少林)의 기초보법인 나한행신공(羅漢行身功)을 극성으로 익혀 철인갑(鐵人甲)의 강기를 두를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지."
" 내가 가짜인지 아닌지 의심했던 건가?"
" 일단은 그렇네."
진천휘는 훗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 상황이 어찌 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분명 그 때 죽어서 묻혔을텐데 어떻게 된 건가?"
" 이야기할 게 길다네."
제갈유룡이 입을 열었다.
" 천휘. 혹시 사후세계에 갔다온 건가?"
" 사후세계라... 모르겠군. 내 기억에 남아있는 건 황제의 명으로 산 채로 거열형을 집행당하던 그 날 그 순간의 기억 뿐일세. 고통과 함께 의식을 잃었고 분명 죽을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종묘 근처에 문득 서 있었다네."
" ......"
" 설마 나를 강시술같은걸로 되살린 건가."
나는 두 사람의 문답을 보면서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 제갈유룡 또한 진천휘를 의심하고 있다.'
상황이 이상한 건 사실이었고 진천휘가 권능으로 살아났다는 정황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나조차도 위화감을 느끼는데 천하에서 가장 머리좋은 제갈유룡과 제갈사가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자 제갈유룡이 대꾸했다.
" 강시술이 아닐세. 우선 이 곳에 오래 있으면 이목을 많이 끌게 되니 자리를 옮기지."
" 알았네."
슈우욱
우리는 다같이 신법을 써서 내황각으로 향했고, 내황각에 들어가자마자 제갈유룡은 손가락을 딱하고 마주쳐서 뭔가 결계를 발동시킨 듯 했다. 외부에서 격리된 공간이 된 게 느껴졌고 내부에 있던 야명주가 켜져서 불을 밝게 만들었다. 자리에 다같이 앉게 되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천휘.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나는 자네를 의심하고 있다네."
" 그래보이는군."
" 그래서 본인확인을 하고 싶네. 자네는 내게 죽기 전 하나의 계획을 부탁하고 죽었었지. 그 계획을 이 자리에서 말해줄 수 있는가?"
제갈유룡의 요구에 진천휘는 불쾌한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제갈유룡을 제외한 우리 셋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 이들은 누구지? 자네와 나만의 계획은 천하 그 누구에게도 누설치 않기로 했던 것이었는데 이런 외인들에게 섣불리 토설하란 말인가."
" 이들은 믿을만한 자일세. 한 명은 자네도 알다시피 내 동생인 사(邪)이고 다른 한명은 사의 동료들일세."
" 저 여인은 누구지?"
" 마도팔문 무영문 수장의 딸일세. 이름은 서문혜지."
지목된 서문혜가 살짝 고개를 숙여 진천휘에게 말없이 인사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그다지 인기척을 내지는 않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계속 우리 둘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천휘는 우리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나를 보고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 호오... 정말로 흥미로운 친구군."
" 나 또한 수상한 인물은 아니오, 진천휘."
" 자네의 이름은 뭐지?"
" 백웅이오."
" 백웅... 백웅... 흐음... 특별할 것은 없는데."
진천휘는 왜인지 내 이름을 되뇌이며 특별함을 찾는 모양이었고 도리어 어리둥절해 하는 기색이었다. 왜 저런 반응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윽고 진천휘가 말했다.
" 흥미롭다 한 이유는 자네의 외모 때문은 아닐세. 자네의 무공이 범인을 초월하여 절대지경에 근접한 것이 느껴지기 때문일세. 설마 반로환동한 고수인가?"
" 반로환동은 아니오."
" 흐음... 그럼 그 나이에 그 경지에 도달하는게 가능한가."
" 내 이야기는 나중이라도 해 주겠소. 우선은 제갈유룡의 말대로 해 주셨으면 하오."
" 좋네."
진천휘는 내심 말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유룡. 내가 자네와 세웠던 계획은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한 계획이었지."
" ......"
" 대명제국을 구했으니 세계도 구해보자, 라는 사소한 의기에서 시작되었었어..."
세계의 종말?!
" 나는 북방 이민족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우연히 발해의 초조(初祖)인 대조영을 만나서 그에게서 세계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들었고, 그 예언에 종말에 대한 것이 들어있음을 알게 되어 자네에게 전달했었네. 그리고 자네는 그 사실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아내의 신기(神氣)를 이용해서 미래를 엿보는 일을 감행하지 않았던가."
" ......"
대조영?!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놀라서 제갈유룡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발해의 대조영이 왜 나온다는 말인가? 제갈사 또한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고 모두의 시선이 제갈유룡에게 쏠렸다. 제갈유룡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랬지."
" 큰 희생을 치렀지. 그 대가로 대조영의 예언이 진실인 걸 알게 된 우리는 대명제국에 이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큰 계획을 세웠지. 그건 바로 세계의 어둠과 접촉해서 힘을 얻어 미래에 다가올 파멸에서 인간종족을 구하자는 계획이었네."
" ......"
" 다만 나는 운 나쁘게도 계획에 끝까지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있었지... 그래서 자네가 그 손으로 내 죽음을 계획했고 나 또한 납득했던 걸로 기억하네. 그게 내가 죽은 이유지."
" 맞네."
" 더 이상 말할 게 있는가?"
" ... 없네."
제갈유룡은 철석간담의 표정이 무너지고 씁쓸한 표정이 가득차 있었다. 저게 바로 제갈유룡이 평소에 내심 감추고 있던 진짜 감정일 것이리라. 제갈유룡은 제갈사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진짜 진천휘이다."
" 그런 것 같군. 하지만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지, 형님."
" 내가 동료인 진천휘의 죽음을 계획한 이유 말인가."
" 기왕 같은 배를 타기로 했다면 그것까지 다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 ......"
제갈유룡이 망설이고 있자 듣고 있던 진천휘가 도리어 입을 열었다.
" 본인 입으로 하기 쉬운 얘기는 아닐테니 내가 대신 말해도 되겠는가, 제갈사?"
" 하시오."
" 천계 측에서 나와 유룡의 연대를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있었네. 천장(天將)을 시켜 유룡의 아내를 죽인 후에도 우리 둘을 고위험군 인물로 분류하여 지속적으로 도청과 감시를 일삼았지. 이대로라면 수명이 다 지날때까지 아무것도 못할 상황인지라 우리는 내분이 일어난 척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천계측에 보여주기로 했었네."
" 흐음."
" 그 때문에 유룡이 얼치기 황제를 세워서 타락한 척, 나를 정치력으로 주살하는 계획을 세운 거지. 나는 그 계획이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받아들여서 죽은 것이었네."
제갈사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그 계획은 당신이 입안한 것이오?"
" 그렇네."
" 방법이 그것뿐인 건 아니었을텐데."
" 다른 방법도 있었겠지. 그러나 내게 뿌려진 천계의 의심이 아들에게까지 이어질까 두려웠네. 천계는 마음만 먹는다면 내 구족을 멸족시킬 수 있었으니 내 후사를 유룡에게 부탁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네. 다행히 지금 보니 유룡은 의심을 풀고 계획을 열심히 진행하고 있었나 보군."
" 당신의 아들이 지금 어디서 뭘하는지 알고 있소?"
" 모르지."
진천휘의 표정이 일순간 사나워졌다.
" 이만큼 아는 걸 다 털어놓은 지금, 그건 그대들이 내게 반드시 말해줘야 할 정보겠지."
나는 진천휘와 책사들의 대화를 보면서 헷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 진천휘는 분명 의심스러워. 하지만... 얘기하다보면 그런 의심이 날아간다.'
그가 진실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나 뿐만이 아닌지 모두가 진천휘의 말에 숨어있는 허실을 분명하게 간파하지 못하는 듯 했다. 뭔가 더 의심하려고 해도 진천휘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인간성 때문에 더 이상 인외의 존재라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혼돈의 존재가 이만큼 완벽하게 인간을 따라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갈사가 말했다.
" 대조영을 만나서 예언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 예언의 내용을 말해줄 수 있소?"
" 물론..."
진천휘는 이윽고 총 192자로 된 예언시를 읊기 시작했다. 시는 대부분 함축과 불분명한 함의를 머금고 있었지만 종종 세계의 종말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었고, [옛 지배자]의 귀환을 노래했으며, 심지어 흉신의 존재와 창힐의 팔부신중이 미칠 해악, 과학문명을 발전시킨 인간이 대항하는 모습까지 같이 들어 있었다.
' 진짜다.'
나는 대조영의 예언시가 진짜배기란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인간들은 저걸 들어봤자 무슨 개소리냐고 할 테지만 종말을 생생하게 겪고 온 나는 저게 다 사실인 걸 알고 있었다. 제갈유룡이 흑요석의 암기를 버틴 이유도 아마 저 예언시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 발해의 초조인 대조영은 어떤 자였소? 신적 존재였나?"
" 그는 전신이 영체화(靈體化)된 존재였네. 북방의 설산에서 마주쳤는데 그는 마치 순수한 대라신선처럼 한 줌도 육신이 남지 않았지. 그런만큼 강대한 힘을 지닌 채 세상을 떠돌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내게 예언시를 전달하고는 다시 떠났네."
" 흐음."
그 때였다. 생각을 거듭하던 제갈사가 뜬금없이 순어구를 이용해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백웅. 잘 들어. 이제부터 전생자 관련 언급은 최대한 금지해라. 그리고 그걸 전제로 한 이야기도 최대한 자제해. 말을 안 하는게 차라리 낫겠군.]
[ 뭐?]
[ 티내지 마. 판은 이제 시작했으니까.]
......?
제갈사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지만 티내지 말라고 한 이상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으므로 나는 그를 믿기로 했다.
" 이제 그대들이 내게 말해줄 때가 되었네. 내 아들은 어떻게 되었나?"
나는 제갈사가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 게 보였기에 대신 나서서 대꾸했다.
" 당신의 아들인 진소청은 이광의 손에 키워져서 현재는 어엿한 상승의 무인으로 자랐소. 또한 뇌신류의 전승자가 되었소."
" ......"
그 말에 진천휘는 정말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 ... 이, 이광? 정말인가? 그가..."
" 그렇소. 그는 정쟁에 휘말린 후 은퇴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진소청만 키우며 살았으며 현재는 청룡무관이라는 관중 무관의 관주노릇을 하고 있소."
진천휘가 탄성을 흘렸다.
" 허! 믿겨지지 않는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유룡이 입을 열었다.
" 내가 손을 써서 보호하려 했지만 뜻밖에 이광이 강하게 진소청을 보호하고 싶어해서 크게 나서지 못했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인 진소청을 데리고 낙향했는데 다른 마음이 없는 듯 해서 나도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지."
" 흠... 이광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었는데 정말 놀랄 일이군."
" 나도 예상치 못했던 일일세."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 셋이 친우라고 들었는데 나머지 둘이 보기에 이광은 절대 애를 키울 사람이 아니었단 말인가?'
뭔가 알 것 같기도 하다. 전성기의 이광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수도 있으리라.
' 그런데... 정말로 이광은 무슨 생각이었던 거지?'
절친한 자들이 이렇게 평가할 정도면 웬만한 심경변화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광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진소청을 맡아서 갓난아이 때부터 청년까지 홀로 도맡아서 키운 것일까? 이 시대에 결혼하지 않은 홀아비가 아무리 명예와 권력이 높아도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명예를 깎는 행위라는 걸 생각하면, 이광의 행동은 자기모순이나 다름없긴 했다.
내가 이광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진천휘가 말했다.
" 나도 이제 전후사정을 들을 권리가 있다 생각되는군. 이게 무슨 난리인지."
사실 이 정도까지 사실확인이 되었으면 더 이상 진천휘에게 사정을 감출 필요는 없어보였다. 내가 입을 열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제갈유룡이 말했다.
" 천휘, 미안하네."
이어진 제갈유룡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 지금부터 우린 자네를 봉인하겠네. 협력해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