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0====================
진공가향(眞空家鄕)
제갈유룡은 내 손에 들려있는 흑요석을 보고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는 잠시 후 말했다.
“…그건, 기억을 전송하는 술수인가?”
“그렇다.”
“제갈사도 그 술수를 시전 받았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유룡은 한눈에 내가 하려는 일을 눈치 챔과 동시에 상황을 파악하는 듯 했다.
“…….”
제갈유룡이 한참 후 손을 내밀어서 흑요석에 손을 뻗었고, 그가 각오가 됐다고 생각한 나는 곧장 기억을 전송했다.
우우웅
제갈유룡에게 기억이 전송되자, 그는 잠시 동안 비틀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내심 조마조마했다.
과연 제갈유룡은 미칠 것인가?
일반적인 인간들이 예외 없이 미치거나 자살을 선택했던 선례를 생각 해 볼 때, 여기에서 제갈유룡이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인외의 광기를 품고 있는 제갈사나 신과 합체한 세이메이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 미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제갈사는 제갈유룡이라면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도박에 걸게 된 것이다.
잠시 후 - 제갈유룡은 자신의 코에서 주륵 흐르는 코피를 소매로 슥 닦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전생자. 부탁이 있다.”
“괜찮은가? 정신에 이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가 보았던 모든 기억들은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것들이었기에 그리 충격은 크지 않았으니.”
“…….”
세계의 종말이나 운명, 심판의 시간을 머릿속에 늘 그리고 있었단 말인가?
오백 년이나 남은 시점에서?
제갈유룡의 경우는 이미 짐작하던 걸 확인하는 것이었기에 그리 정신 충격이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갈유룡의 부탁이 이어졌다.
“진천휘를 살려다오.”
뜻밖의 제안에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천휘라면 진소청의 아버지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그를 왜 살리는 거지?”
나는 난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흑패는 한 번의 생에서 한 번밖에 쓸 수 없다. 죽이든 살리든 최고의 효용성으로 써야만 해. 진천휘가 지금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진천휘는 본디 소림 속가제자로써 뛰어난 무공을 지닌 장군이었으며, 최고의 지략을 지닌 천재이기도 했다고 들었다. 원래였다면 한 번쯤 살려볼까 생각할만한 인물인 건 맞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언제 특이점이 찾아올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상태에서 하루라도 빨리 수해를 돌파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인데, 진천휘가 내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내 질문에 제갈유룡이 대답했다.
“그럼 말을 다시 하지. 진천휘를 살려주지 않는다면 네 동료가 되지 않겠다.”
“뭐?!”
“내 요구조건을 받아들여라.”
“…….”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흑요석을 준다면 그 순간 전생자와의 우열관계를 확실히 인지하게 마련이라서 내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는 데, 제갈유룡이 여기까지 와서 내게 협상을 시도할 줄이야!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가 거절해도 아무 상관없잖아.”
제갈유룡이 눈을 빛냈다.
“상관있겠지. 나는 네가 내 요구조건을 거절한다면 즉시 복마전을 통해서 천지의 신격들에게 전생자의 존재를 알리겠다.”
“……!!”
나는 흠칫했다.
“난 네 기억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전생자는 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으며, 그 존재와 정체가 알려지는 순간, 신격들은 너를 경계하거나 봉인하려 한다. 그렇다면 네 정체가 신들에게 알려지는 것 자체가 위험이 되겠지.”
이런 식의 협박은 생각도 하지 못 했는데!
하지만 확실히 [옛 지배자]들이 전생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강한 행동을 취해올 게 분명했다. 칠요의 주인만 해도 천지의 균형을 뒤흔들 정도라서 자신들의 화신을 보내서 접촉해 왔는데, 하물며 [큰 굴레]를 넘나든다고 추정되는 전생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자 내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사가 훗하고 웃었다.
“형님, 그 협박을 내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은가.”
“사.”
“확실히 전생자인 백웅에게는 유효한 협박이야. 알려진 순간 백웅에게 온갖 신들이 달라붙어서 더 이상 정상적인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겠지. 그러나 그건 동시에 뭘 의미 하는 줄 알아?”
처억
제갈사가 제갈유룡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무슨 수를 써도 형님 자신의 꿈을 이루는 건 불가능해진다는 뜻이야. 전생자만 손에 얻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옛 지배자]도 부지기수일 텐데, 이제 와서 복마전의 졸개에 불과한 형님에게 누가 관심을 가져주겠어? 오백 년 동안 버티든 말든 그 순간 형님은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뜻이겠지.”
“…….”
“앞으로 그 어떤 강대한 물주도 형님과 교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거고, 형님은 오백 년 동안 처절한 무력감만 느끼면서 혼돈의 종말만을 바라볼 뿐. 정말 그걸 원하나?”
“원하지는 않는다.”
제갈유룡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전생자의 인형이 되어 무수한 굴레를 휘둘리는 삶 또한 비참 하긴 마찬가지지. 나는 이 교환이 그렇게 큰 손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기억을 들여다보니 너희가 이번 생을 허무하게 날리는 것 또한 큰 손해일 텐데? 게다가 너흰 이미 도를 넘었다.”
스윽
제갈유룡의 손가락이 바닥에 널브러져 죽어 있는 제갈부의 시체를 가리켰다. 제갈부는 죽은 게 억울한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봐라. 너흰 이번 생에서 제갈부가 그다지 쓸모없어서 사 너의 성질대로 죽여 버리고 말았지. 부아의 잘못은 어쩌다보니 전생자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는 것뿐이다. 너희가 나까지 이런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으윽….
제갈부의 시체를 보자 나는 골치 아파져서 관자놀이를 지끈지끈 눌렀다. 그리고 순어구를 통해 남몰래 제갈사에게 말을 걸었다.
[제갈사! 그러길래 뭐하러 제갈부를 죽인 거야. 괜히 일만 꼬였잖아….]
그냥 고를 흔들어서 고통만 주는 걸로 충분했을 텐데 과했던 느낌이다. 그러나 내 힐책에도 제갈사는 전혀 대꾸하지 않고 되려 유들유들하게 제갈유룡에게 대꾸했다.
“제갈부만 쓸모없겠어? 형님도 사실 쓸모없긴 마찬가지야. 세계의 흐름이 종막에 치달을수록 투선조차 벌레처럼 죽어나가는 마당에, 인간계의 평가와 서열이 무슨 소용이 있나? 다만 형님의 두뇌와 발상만큼은 인정할 수 있기에 한 번 써보려는 것 뿐.”
“…….”
“우린 형님한테 휘둘릴 생각이 없어.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여유도 없어. 하고 싶으면 맘대로 해.”
“책사가 하는 건 진언과 책략수립 뿐. 지금 너는 주군 백웅을 무시하고 다 말해버리는 것 같군.”
그렇게 쏘아붙인 제갈유룡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들었겠지만 나는 각오가 되어있다. 너는 각오가 되어있는가? 백웅!”
“…….”
나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제갈유룡은 한다면 정말 하는 놈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유룡의 무서운 점은 단순히 최고의 두뇌를 지니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강렬한 독심과 실행력, 침착성, 과단성에 있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알았다. 진천휘를 흑패로 살려 주지.”
제갈유룡에게 마냥 원한만 품고 다음 생으로 넘어가기엔 여유가 없다. 이번 생에서 어떻게든 뭔가 결론을 내지 않으면 시간만 낭비할 뿐이고, 애초에 적이었던 제갈유룡을 더 미워해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게다가 제갈유룡을 옹졸하게 붙잡아서 고문하거나 해봤자였으므로 일단 들어줄 건 들어주기로 생각했다.
“좋다. 그럼 나도 너희를 돕겠다.”
그러자 순어구를 통해서 제갈사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쳇…. 형님이 다 포기하고 꺾일 가능성이 7할이었는데, 그냥 요구를 들어줘 버리다니.]
[제갈사! 3할의 실패가능성을 감수 하기엔 지금은 여유가 없어.]
[멍청아. 뛰어난 교섭은 그걸 무시하고 밀어붙일 때 승기를 잡는 건데…. 뭐 됐다. 주군이 선택한대로 해.]
제갈사는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너무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전생자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만큼 관용을 보여야 해.’
내가 제갈사 말대로 그냥 강하게 밀어붙이게 되면 상대방은 너무 큰 절망감을 맛보게 된다. 무한의 생을 반복하면서 노예화될 수 있다는 공포와 무력감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활로를 열어주지 않으면 결코 나중에 진심으로 동료가 될 수는 없으리라.
나는 제갈유룡에게 말했다.
“일단 약속대로 살려주기는 할 건데 이유가 뭐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면서까지 그를 살리려는 건지 이유 정도는 듣고 싶군.”
“이유라….”
잠시 침묵하던 제갈유룡이 말했다.
“현 대명제국이 수립되기 전, 무수한 환란과 고난이 닥쳐왔었지. 이민족의 침략과 내부의 부정부패, 황권의 약화, 흉년 같은 것들이 제국을 멸망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정상적이라면 이 제국은 예전에 멸망해야 했고 새 황조가 들어섰겠지.”
“흠….”
“제국을 위기에서 구한 자가 바로 진천휘였다. 나와 이광을 비롯한 사신위가 그의 뜻과 책략대로 행동했고, 하나하나 위험요소를 제거하며 선대황제의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의 책략은 나를 훨씬 뛰어넘었고, 무공 또한 절대지경에 근접했었으니, 그를 살리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뛰어난 인물이다.”
“진천휘의 무공이 절대지경에 근접 했었다고? 그건 처음 듣는데.”
나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황연 장군을 뛰어넘는 군략의 천재가 아니었나?”
“그건 세상에 드러낸 능력의 일부 일 뿐. 그는 단언컨대 천하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
“진천휘가 살아나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겠다.”
뭔가 숨기는 느낌이 든다.
진천휘가 엄청난 고수였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고 거짓말 같진 않았지만, 왜인지 그를 살리는 이유가 그것 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단 해 주기로 약속한 이상 제갈유룡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맞을 것이다.
“좋다. 기다려라.”
파앗
나는 밀림의 신에게 혼자 가서 흑패를 사용해서 요구했다.
“신이시여! 진천휘를 살려 주십시오!"
쿠구구구….
신은 뜻밖에도 즉답을 하지 않고 그저 고요한 혼돈만을 일으키며 나를 관조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뜸을 들이며 망설인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 이런 적은 없었는데….’
죽이든 살리든 즉시 해결해버리는 게 밀림의 신이 행동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우물쭈물하듯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내게 큰 적의를 보이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 때, 밀림의 신이 영언으로 입을 열었다.
[살릴 수 없다.]
“……?!”
[다른 소원을 빌어라.]
살릴 수가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생전 처음 일어난 상황에 나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외쳤다.
“신이시여! 살릴 수 없다니 무슨 말입니까? 죽음의 반대편에 삶이 있지 않습니까? 어째서 살릴 수가 없는 겁니까?”
[…….]
신은 또다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살릴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라도 좀….”
[…더 이상 그의 일을 언급치 말라. 한낱 유희로 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신이 반쯤은 성을 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혹시 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어… 그러면 설마 지금 살아있어서 또다시 살릴 수가 없는 겁니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가…!!]
부글부글
신의 몸 표면에 녹색 기포 같은 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성을 내기 시작했다는 뜻인 것 같았다. 저 존재가 제대로 화를 내려는 건 처음 보았으므로 나는 잠시 찔끔하고는 신에게 말했다.
“조, 좋습니다. 그럼 진천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뒤집어서 [존재하게] 해 주십시오.”
남에게 부탁을 받았으면 일단 끝까지 들어줘야 할 것이다.
오기로라도 진천휘를 살리고 만다!
[…….]
“…….”
[정말 끈질기구나…. 네게 응결된 그 가공할 인과율이 아니었다면, 넌 이 자리에서 영겁의 지옥을 겪었으리라. 내 호기심이 분노보다 앞섬에 감사하라.]
“네.”
신경질 내듯 이야기하던 신이 툭 내뱉듯 말을 이었다.
[좋다. 네 말대로 해 주겠다. 그러나 그 책임은 모두 네가 져야 할 것이다….]
파앗
이윽고 나는 현실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곧장 비등을 써서 제갈유룡과 제갈사가 기다리는 황산 봉우리 위로 올라갔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제갈유룡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종묘(宗墓)로 가자.”
“황실의 종묘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진천휘의 시체는 그 곳에 안장되어 있다.”
파앗
우리는 궁궐로 가서 종묘로 향했다. 그리고 종묘 근처에 도착해서 진천휘를 찾아보았는데, 진천휘의 모습이나 인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제갈유룡과 제갈사가 온갖 술법을 동원해서 찾았는데도 그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유지될 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갈사가 말했다.
“정말 신이 진천휘를 살린 게 맞나?”
“사실은 놈이 진천휘를 안 살려주려는 것 같아서 꼼수를 써서 [존재하지 않는 걸 존재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놈은 그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어.”
“흠… 그건 말의 뜻이 다르게 해석 될 수 있다. 그럼 상황을 하나하나 추려야겠군.”
제갈사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일단 진천휘의 무덤을 파 보자.”
“뭐?! 무덤을 파자니 그건….”
“지금 그깟 게 대수야? 빨리 파.”
파바박
제갈유룡의 토둔술과 내가 내공을 발출한 공격이 합쳐지자 진천휘의 묘는 순식간에 파헤쳐졌다.
그리고 석관을 열어서 내부를 보았을 때였다.
없다.
원래 천천히 썩고 있어야 할, 실질적으로는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으니 당연히 백골만 남아있어야 할 진천휘의 시체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제갈사는 석관 내부를 자세히 살피며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
“시취(屍臭)와 골취(骨臭), 그리고 곰팡이나 얼룩도 없어. 설령 백골이 썩었다 해도 이렇게는 될 수 없어. 여긴 애초에 시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
“알 수 없는 상황이군. 형님, 어떻게 된 거지?”
“…이럴 수는 없다.”
제갈유룡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그가 묻히는 걸 보았다. 그의 관을 닫아준 게 나였다….”
그 때였다.
“오랜만일세, 유룡(遊龍)!”
활기찬 목소리가 종묘의 입구 쪽에서 들려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