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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무사시는 오륜천서를 얻은 후 안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심 움찔하고 말았다.
‘비류란 자…, 인간이 아닌가?! 어찌 이리 생겼단 말인가?’
구다라라고 불리는 백제라는 고대 왕국의 시조, 비류. 그는 도저히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 오륜천서 내에는 백제 고대왕 비류와 코토아마 츠카미라 하는 동영 고대신들이 처음으로 접촉하여 대화를 나눈 삽화가 들어가 있었는데, 양쪽 모두가 괴물 그 자체처럼 생겼던 것이다.
코토아마츠카미라 하면 격조 높은 신이라서 현명한 인간의 모습을 하게 마련이라 그들이 차마 쳐다보기조차 끔찍한 모습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비류….
비류는 마치 혼돈이 뭉쳐서 응어리진 듯한, 존재를 형언할 수 없는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필설로 형용하기조차 애매한, 아니 생체적으로 저런 존재가 성립할 수 있는지조차 의아할 지경이었다. 저걸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으리라.
호기심이 생긴 무사시는 오륜천서를 오랫동안 탐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내 은거할 장소를 찾아서 조용히 오랫동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했다. 5권에 이르는 책은, 모두가 비류와 코토아마츠카미의 접촉을 요사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대화록, 그리고 고대 백제와 동영의 교류를 말하고 있었다. 또한 무사시는, 책을 심도 있게 읽은 지 닷새 만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는 어휘가 너무 많고 어렵다!
나름대로 무사의 자식으로 자라나 기초적인 글과 한자를 알고 있는 무사시였으나, 오륜천서에 있는 고급 진 어휘나 고대어는 잘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무사시는 다시금 혼간지의 법주인 혼간지 죠노신을 찾아 갔고, 죠노신은 별다른 요구 없이 무사시에게 오륜천서의 내용을 옆에서 해석해 주었다. 무사시의 무력이 이미 그를 뛰어넘었기에 차라리 그와 손을 잡는 게 이득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탐독하기를 약 석 달, 무사시는 오륜천서를 모두 읽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책을 다 읽은 마지막 날 -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어느 여름에 침묵하며 밖을 쳐다보았다. 물 냄새가 콧가에 고이고 있었다.
‘원월천살법….’
원월천살법을 최초로 언급한 것은 백제의 비류였다. 책에서 설명되기로 비류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였는데, 죠노신은 그 표현이 이계(異 界)에서 강림한 격조 높은 존재를 뜻한다고 설명해 줬다. 당연히 혼돈으로 이루어진 존재였으며,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비류는 동영의 코토아마츠카미들을 제압하고 자신이 동영 땅의 주인이 되려 했으나, 코토아마츠카미들의 힘도 만만치 않아서 전투양상이 동격이었다. 결국 비류는 휴전협정을 맺어 혼돈의 존재끼리 각자의 땅을 다스리기로 했고, 그 휴전회담의 내용이 바로 오륜천서였던 것이다.
그런 비류가 휴전회담에서 원월천살법을 언급한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비류가 동영을 지배하고자 했던 이유. 그건 동영에 원월천살법이 있는지 의심했고, 그걸 찾아내어 없애버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혼돈의 신 비류는 어째서 굳이 단 하나의 무공서를 찾아내기 위해 강대한 코토아마츠카미들과의 전쟁도 불사했던 것일까?
다만 코토아마츠카미들 또한 휴전 회담에서 원월천살법 같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답변했다. 비류 또한 그들의 말을 믿었고, 대신에 코토아마츠카미들에게 원월천살법을 찾게 되면 반드시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코토아마츠카미들이 그 요청에 응하면서 오륜천서는 끝을 맺었다.
결과적으로 오륜천서에는 원월천살법은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무사시는 헛고생을 한 셈이었으나, 전혀 좌절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눈빛은 생기로 넘쳤다.
‘원월천살법은 실존한다! 지금 난 그걸 확인한 것이다!’
오륜천서에 쓰인 비류의 말에 따르면 원월천살법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었다.
첫째. 정통계승자가 존재한다.
둘째. 검술이다.
셋째. 신을 죽일 수 있다.
둘째 조건은 별것 아닌 걸로 보였으나 상당히 큰 특징이었다. 이 세상에는 백팔 반, 그 이상의 다양한 무기가 있었으며 세부로 나뉘면 수 천 종류나 되었다. 그 중에서 딱 잘라서 검종(劍種)의 무공이라고 하는 건 상당한 단서였다. 게다가 셋째 조건인 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건, 보는 이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나 무사시의 신경을 묘하게 거슬리게 하는 건 바로 첫 번째 특징이었다.
‘정통계승자?’
설마 대대로 한 명의 후계자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거란 말인가? 무사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신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검술이 수천 년 동안 전승되어 오고 있는데, 어째서 역사에는 원월천살법의 흔적조차 없는 것인가? 그렇게 강력한 검술의 소유자가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럴 수는 없다.
마치 아버지가 원월천살법을 이야기할 때와 같은 모순이었다. 검기만 쓸 수 있어도 세상에 온갖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인데, 인간을 초월한 검술을 쓸 수 있는 정통계승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니.
물론 그들 모두가 욕심과 욕망을 버린 존재라면 가능할지도 몰랐으나, 무사시는 인간의 무욕(武慾)을 알고 있었으므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한두 명이면 몰라도, 수천 년 역사라면 최소한 수백 명의 계승자가 있을 텐데, 그들 모두가 욕심을 버렸다고?
고민하던 무사시는 결국 마음을 정했다.
‘좋아. 승려문파나 명가(名家)의 검호들을 찾아가 보자. 그러다보면 원월천살법의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가 향한 곳은 코후쿠지였다.
이곳은 창술과 봉술을 연마하는 승려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무사시는 숨어서 그들의 수련모습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냐….’
무사시는 즉시 기운이 빠졌다. 분명 강한 무술이긴 하지만 자신이 찾던 강함은 아니다. 무사시는 그냥 가려고 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무술을 한 번 겪어나 볼까?’
일단 대적해 보면 뭐든 흡수하듯 익힐 수 있다.
지금까지 아무 형태 없던 자신의 아류가 더 강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무사시는 그렇게 마음먹고는 코후쿠지의 승려 중 하나를 꼬여내서 간단하게 몇 초식을 겨루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무사시는, 코후쿠지 호조인류 창술의 요체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동영천하의 온갖 문파를 돌아다니며 남몰래 무예를 습득했다. 물론 그는 원월천살법을 탐색하는 입장이었고, 그다지 명성을 알리기 싫었기에 모든 과정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의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나갔고, 이내 동영에서 가장 강한 무사 중 하나로 취급받기에 이르렀다.
무사시는 귀찮았다. 원하는 원월천살법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날파리들이 그를 귀찮게 하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의 아류(亞流)가 명문가의 무예를 받아들이면서 더 강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무런 형태가 없었다. 마치 그런 무예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듯 했다. 그랬다. 무사시는 아직도 별다른 검술의 체계가 없이 그냥 감으로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평생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패전적을 쌓아가던 도중 그는 문득 생각했다.
‘여긴 너무 좁아. 다른 세계로 가야 해.’
약 오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그렇게 결심했다. 동영에 있는 웬만한 검술비기는 다 배웠고, 그런 습득능력조차 그를 별로 강해지게 만들지 못했다. 사실 초절정이라 불리는 경지를 훨씬 넘어선 건 예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경계가 느껴진 것이다. 그 경계는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의념지경의 궁극처럼 느껴지는데, 자신만의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느낌!
그는 예전에 동영이 아니라 고려와 중원에는 엄청나게 강력한 고수들이 넘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 슬슬 도전해볼 마음이 든 것이다. 그들과 싸우다보면 자신이 더 강해지고 더불어 경계를 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동영에서 싸울 마지막 상대로,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와, 츠카하라 보쿠덴을 꼽았다. 지금까지는 눈에 띄기 싫어서 그들에게 직접 도전하지 않았지만, 기왕 동영을 뜰 바에는 한 번 싸워보고 싶었다. 그런데 결투를 할 준비를 하던 그에게 난데없이 웬 어중이떠중이가 승부를 걸어왔다.
“무사시! 나는 사사키 코지로다. 승부를 받아라!”
사사키 코지로라는 웬 무사가 그에게 도전해 온 것이다.
무사시는 그의 실력이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걸 알고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동네방네 소문이 났으니 안받아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무사시는 문득 묘안이 떠올라서 혼간지 죠노신과 후마 코타로에게 도움을 청했다.
승부 당일.
무사시는 사사키 코지로를 일 초식 만에 쓰러뜨리고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네가 무사시다.”
“……?”
“못 알아들었나? 넌 무사시로 살다가 내가 나중에 동영에 돌아오면 그 자리를 넘겨주면 된다. 그때까지 무명을 쌓든 뭘 하든 맘대로 살아라.”
그리고는 무사시는 후마 코타로에게 배운 역용술법과 죠노신의 비기를 이용해서 사사키 코지로를 자신의 모습처럼 바꿔버렸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무사시]가 이긴 걸로 하고는, 한동안 사사키 코지로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동시에 자신이 아류로 터득한 이도류를 책에 담았는데, 이름을 〈오륜서〉로 짓고, 사사키 코지로에게 넘겨줬다.
무사시가 이렇게 복잡한 행보를 취한 이유는 간단했다. 혹여 자신의 행보를 추적하는 자가 있다면 혼란을 겪게끔 하고 싶었다. 종종 그가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르는 암수를 걸어오는 음흉한 단체가 있다면, 이런 대비를 해놓고 동영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사시는 코지로를 다 가르친 후배를 타고 동영을 떠나려 했다. 그는 고려와 중원의 고수들과 겨룰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배를 타려던 해안가에서 묘한 유적을 발견하고는 멈칫해서 그 유적 내부로 들어갔다.
‘저건?’
우우우
유적은 나선형 계단으로 끝없이 내려가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단에는 수많은 이물(異物)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고, 계단의 끝인 나락에는 한 명의 해골 무사가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해골 무사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어서서 무사시를 쳐다보더니 영언으로 말했다.
[인과율이 닿았군. 어서 와라, 인간이여.]
“……?”
[원월천살법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넌 누구냐? 어찌 그걸 알고 있나?”
해골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 아쉽게도 넌 정통 계승자의 자격이 없군. 넌 자격미달이다.]
“…….”
개소리군.
무사시는 말없이 달려들어서 해골을 베었다.
[훗, 그 정도 실력.]
촤악
그러나 해골은 여태껏 누구든 일참에 쓰러뜨렸던 무사시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는 도리어 무사시의 팔죽지를 베어버렸다. 명백히 해골의 검기가 무사시보다 훨씬 위였기에 무사시가 흠칫하자, 해골이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죽어라. 나 또한 가짜 계승자지만 정통 계승자를 기다리는 중이니까. 아무래도 인과율이 잘못 계산된 것 같군.]
“정통 계승자…? 그 자격이 대체 뭐냐!”
[적어도 넌 아니다. 넌 절대 그 자격을 충족시킬 수 없다.]
해골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일렁였다.
[나는 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経)! 인간이여 그대의 이름을 밝혀라!]
“내 이름은 미야모토 무사시! 네놈을 베어죽이겠다!”
[하하!]
콰광
키이이잉!!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도(刀)에서 기이한 광채가 여덟 줄기 일어났다. 잠시 후 그의 몸이 차원 사이에서 분영(影)을 일으키며 무사시를 공격해 왔다. 무사시는 그 분영이 흔한 검기라 생각했으나 이내 그 모든 것이 거짓이자 실체라는 걸 깨닫고는 눈을 부릅떴다.
말 그대로 죽음의 위기!
이윽고 무사시는 전력을 다해서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공격에 맞섰고, 그 순간 절대지경에 이르렀다.
파칫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사시는, 자신의 아류가 팔 끝에 집약되며, 그동안 흡수해 왔던 모든 검호의 기술이 하나로 합쳐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궁극의 베기(斬)였다.
무사시의 일참은 절대지경에 오른 순간 요시츠네의 공격을 모조리 꿰뚫고 그대로 요시츠네의 목을 찔렀다.
쿠콱!
[내 팔쌍베기를…?! 십만대군을 혼자 뚫었던 기술일진대….]
요시츠네는 믿기지 않는 듯 자신의 목을 뚫은 무사시의 검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인간 무사여. 이 일격의 이름은 무엇이냐?]
“…헉 …헉….”
무사시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홀황경에서 간신히 다음경지로 넘어 간 데다, 모든 심력과 기력을 쏟았기 때문이다. 요시츠네가 한 칼만 휘둘러도 죽을 위기였으나, 요시츠네는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행동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해골모습에 생전의 모습이 잠시 덧씌워지며 훗하고 웃었다.
[이름을 지어주지. 신살참(神殺斬) 이라고 해라….]
스아아아
요시츠네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두쿵!
쓰러진 무사시의 머릿속으로 생전의 요시츠네가 가지고 있던 모든 무술, 병법, 그리고 지식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깨어난 무사시는, 자신이 해변가에 쓰러져 있었음을 알았다. 해골의 유적은 온데 간데 없었다.
“…….”
무사시는 모래를 꽉 쥐었다.
그는 요시츠네의 사정을 이해함과 동시에 자신의 무력감을 느꼈다.
‘아직 대륙에 갈 때가 아니군.’
그는 자신이 깨달은 이 경지를 좀 더 온전히 만들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절대지경에 오른 순간, 세상에 이 정도 경지에 이른 초고수가 존재 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사시는 고려행을 그만두고, 곧장 세상에서 가장 험난하다는 아오키가하라 수해로 향했다.
아오키가하라 수해로 간 무사시는 그의 무력을 살려서 곧장 생해를 뚫었고, 사해에서 상당한 수의 마물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사해에서 입해로 넘어가려 할 때 중간에 그의 앞에 웬 은빛 머리의 소년 음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의 꼬마가 많이 컸구나.”
“아베노 세이메이.”
“기억하고 있었군.”
“나를 왜 가로막지?”
“후후.”
아베노 세이메이는 묘하게 웃더니 한 자루의 검을 꺼내서 무사시에게 주었다. 무사시가 그 검을 건네받자,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그 검은 아메노하바키리. 동영 역사상 세 손가락에 꼽히는 신검(神劍)이다.”
“이걸 왜 내게 주지?”
“넌 결국 수해의 ‘왕’에게 도전하게 될 거다. 난 그걸 말릴 생각은 없어. 사실 너 정도 실력을 지닌 수해의 도전자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말이야….”
아베노 세이메이가 웃었다.
“아메노하바키리로 왕에게 한 칼만 꽂아다오. 그러면 더 바랄 게 없겠구나.”
“…흥.”
무사시는 아베노 세이메이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수해의 왕을 이길 순 없겠지만, 부상이라도 입히라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