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
진공가향(眞空家鄕)
술.
미야모토 무사시의 첫 기억은 그것이었다.
쏴아아
수림(樹林) 사이로 어마어마한 양의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은 폭우에 가까운 호우, 본디 산행을 해선 안 되는 날이었음에도 부자(父子)는 산 정상에 있는 사당에 와 있었다.
액신(厄神)을 억누르기 위해 술을 바쳐 공양하는 제사 - 이즈모(出雲) 지방의 산간에 액신이라 불리는 나무에서 행해졌던 그 제사. 어째서 그가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 나무에 짚으로 만든 두터운 새끼줄을 칭칭 동여매서 제물을 꽂았다. 그리고 나무 밑에는 술병을 두었는데, 여기에 오미키(右神酒)를 넣어두었다.
쪼록….
기이하게도 그 액신나무의 뒤편에는 건무신정(建武新政)이라는 붉은 빛 글자가 새겨진 조그마한 사당이 있었다. 나이가 채 여덟도 되지 않은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의 앞에서 있던 아버지를 따라 왔는데, ‘제물’ 을 그가 직접 호리병에 넣어서 가지고 왔던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 당시에 그는 어린 무사시에게 말했다.
“이제 신이 내게 대가를 줄 때가 되었다. 기다려라.”
대가?
어린 무사시는 그 말이 무슨 뜻인 지 알 수가 없었으나, 아버지는 마치 씹어뱉듯 중얼거리곤 했다.
“벤노스케(辯之助). 그 눈….”
“…….”
“아직도 내 검술이 하찮아 보이느냐?”
쏴아아
비는 여전히 내린다. 침묵이 흘렀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아명(亞名)은 벤노스케였다. 벤노스케라고 불린 그는 물끄러미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대꾸했다.
“무니사이(無二齊). 댓가가 뭐야?”
그는 검술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조부 히라타 쇼겐 때부터 검과 짓테(十手)의 명수로 알려진 무가(武家)의 출신이긴 했으나 그 아들인 신멘 무니사이에게는 그다지 무재(武才)가 없었기 때문이다. 검술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봤자 무니사이는 화만 낼 것이다.
아버지에게 경어를 쓰지 않는 이유는 -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지만.
아버지인 자신에게 벤노스케가 경어를 쓰지 않는 걸 보고도 무니사이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신의 검술이다.”
뭐?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모르겠다는 기이함이 그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벤노스케가 멍하니 서 있자, 아버지 신멘 무니사이는 향불을 태워서 세 개를 향로 위에 꽂으며 말을 이었다.
“이 사당에서는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의 제사를 지낸다. 우리가 하리마국(播磨国)에서부터 이 이즈 모까지 오는데 몇 개의 사당을 거쳤느냐.”
“2 개.”
“하나는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의 사당이었고 또 하나는 카쿠츠치(軻遇突智)의 사당이었다. 모두 필요한 과정이었지. 나는 오늘에서야 목적을 달성했다.”
“……?”
“고서(古書)에 나온 과정대로 차례대로 공양을 바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 공양이다.”
공양.
그 말을 잠시 뇌까리던 벤노스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람의 목을 벤 거야?”
“그렇다. 그 호리병에는 반드시 사람의 생피를 담아야 한다. 그래야 사당에 바쳐진 신선한 제물을 보고 천진신(天津神)이 기뻐하기 때문이다.”
벤노스케가 목격했던 것.
그것은 아버지 신멘 무니사이가 사당에 오르기 전, 근처 마을에 있던 평민들을 습격해서 그 목을 베고 생피를 호리병에 담은 것이었다. 벤노스케는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으나 그게 일상적인 행위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인신공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렇다 해도 많이 죽였다. 한 명만 죽인 게 아니라 적어도 10여명 이상의 목을 베어서 종류별로 담았다. 그 과정을 떠올리던 벤노스케가 예전에 들었던 지식을 말했다.
“야마타노오로치는 천진신이 아니라 괴물이잖아.”
“그건 실존하는 괴물이 아니라 치수(治水)의 현상이다. 이 세계를 모두 뒤덮었던 고대의 대홍수가 있었을 때, 그 홍수를 천진신이 제압했던 것이다.”
“…….”
무사같지 않아.
벤노스케는 내심 중얼거렸다.
무사의 재능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주 예전부터 강해질 수 있는 방법에 골몰해왔던 모양이었다. 가문의 영지까지 팔면서 천축이나 중원의 고문을 수집하고, 혹은 음양사의 유물이나 어두운 신화의 전설을 찾아서 헤매었다. 결코 이 전국시대의 무사답지 않은 행동이었고 심지어 신멘 무니사이가 뭘 원하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다만 오늘에야 확실해진 건 아버지가 ‘신의 검술’이란 걸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벤노스케가 침묵하고 있자 신멘 무니사이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놈들은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신(神)은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두 번이나 그들에게서 계시를 받았다. 두 번의 공양으로 그들의 호의를 샀으니, 이번에는 틀림없이… 신의 검술을 내려줄 것이다.”
“신의 검술을 익히면 얼마나 세지는 거야?”
“그 검성(劍聖) 카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를 일검에 벨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헤에.”
벤노스케는 그저 심드렁했다. 어린 그에게 신의 검술이니 검성이니 하는 이야기를 해도 전혀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해서 뭐 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신멘 무니사이의 눈이 순간 날카로워지더니 잔인한 빛을 흘렸다.
“너는 천재라서 아무 걱정이 없다 이거냐?”
“응?”
“나는 내 아들이 천재면 기쁠 줄 알았다. 그런데 결국 내가 강해야 모든 게 만족스럽겠더군. 네 무심한 태도며, 그 오만한 눈빛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어쩌라는 건지.
벤노스케는 이 모든 게 지루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의 나이 칠 세, 검을 배운지 석 달만에 신멘 무니사이의 검을 모두 피해내고 그의 검술을 파해해서 쓰러뜨렸기 때문일까. 이미 그는 어른무사인 아버지를 뛰어넘어 있었다.
상식을 초월한 재능에 신멘 무니사이는 처음에는 될듯이 기뻐하다 어느 순간 강렬한 열등감을 품었고, 이윽고 아들을 볼 때마다 가시돋힌 태도로 변했다. 평생동안 무의 재능으로 멸시받았기에 그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벤노스케는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이내 약한 아버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경어도 쓰지 않는 것이다.
주르르륵…!!
그 때였다. 갑자기 액목(厄木)에서 마치 선혈같은 수액이 마구 뿜어져 나왔고 나무 밑둥을 붉게 물들였다. 어찌나 거센지 시냇물이 뿜어져나온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가히 공포스러운 광경에 부자가 둘 다 눈을 부릅뜬 채 쳐다보고 있자, 잠시 후 일그러진 무언가가 사당의 문을 열고 서서히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꾸물
꾸물텅
‘저게 뭐지?’
말로만 듣던 요괴라는 것인가?
‘너무 기괴하다….’
벤노스케가 칼을 들고 경계하고 있을 때 그것은 마치 괄태충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유연한 살덩이가 꾸물거리며 바닥에 진득한 점액을 흘렸고 두 눈 대신에 손바닥같은 게 처참한 형상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쳐다보고만 있어도 정신력이 고갈될 듯한 끔찍한 형상이었으나 신멘 무니사이는 되려 기쁜 듯 광소를 터뜨렸다.
“흐, 흐하하! 옛 신의 사도!! 자아, 내게 원월천살법(圓月天殺法)을 다오!!”
그는 핏발섞인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
“무예의 천재 백여 명이 자신들의 원한을 담아 창조한 궁극의 절예(絶藝), 신을 죽이는 살법을!!”
“…….”
벤노스케는 그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그게 말이 돼?’
신을 죽이는 살법을 어떻게 신이 내려준다는 말인가?
그 때였다. 사당에서 빠져나온 괄태충같은 괴물이 갑자기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점액을 전방으로 토해냈다.
츄아악
벤노스케는 경계하고 있었기에 재 빨리 피했으나 신멘 무니사이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그 점액을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몸이 약간 부풀어오르는 듯 하더니, 전신에 새하얀 포자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츄르르륵 츄르륵
“하으으아아악….”
신멘 무니사이의 살점이 빨려들어 가며 포자가 급속히 성장했고, 이윽고 사람의 머리통만한 버섯이 무려 십여 개나 그의 몸 위에서 자라났다. 신멘 무니사이는 눈알마저 빨려 먹힌 채 비틀거렸고 이미 생명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벤노스케는 망설임없이 뒤로 구르며 샛길로 빠져나갔다.
우당탕
살아야 한다.
저 괴물한테서 도망쳐야 한다.
저런 건 칼솜씨로 어떻게 될 놈이 아냐.
“헉! 헉!”
그는 필사적으로 나무 사이를 헤치며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쫓아오지 않는 걸 깨닫고는 잠시 동굴 안에 들어가서 쉬었다.
“…….”
아버지가 죽었다.
아들에게 열등감이나 품는 한심한 아버지였으나, 그런 아버지였어도 그의 혈육이었으므로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슬픔은 의외로 적었으나 먹먹함마저 잊을 수는 없었다. 벤노스케가 멍하니 칼 한 자루에 몸을 기대어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였다.
“마(魔)의 봉인이 풀린 게 느껴져서 와 봤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기이한 목소리.
벤노스케는 슬며시 눈을 들어서 눈앞을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동굴의 입구에는 은빛 머리카락의 미동(美童)이 서 있었다.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의 그 소년은 은구슬같은 눈동자로 벤노스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야. 네가 야마타노 오로치의 봉인을 풀었느냐?”
“…아니야. 아버지가 풀었어.”
그러자 미동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흐음, 그런가. 다행히 첫 봉인만 풀려서 아마츠카미의 미약한 사도가 소환되었으니 지금이면 빨리 수습할 수 있겠군…. 너희 아버지는 어떻게 그 방법을 알았다고 하더냐?”
“옛날 고서를 보고….”
벤노스케가 상황을 설명하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옛 것]의 사교놈들은 늘 세상에 말썽을 남기는군. …그렇다 해도 이미 피의 공양을 지내서 꽤 사도가 강할 것 같긴 하니 음양두를 몇 명 더 부를까.”
“…….”
“아이야. 나는 음양사인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라고 한다. 이 곳은 위험하니 나와 함께 가자.”
동년배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음양사 복장의 소년이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데도 벤노스케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왠지 저 놈은 보이는 대로의 나이가 아닐 것 같았고 알 수 없는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벤노스케는 아베노 세이메이가 내민 손을 곧장 잡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원월천살법이란 신의 검술…. 왜 신이 내려주지 않은 거야?”
“그런 건 없다. 네 아버지가 어떤 고서를 봤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런 존재를 들어본 적이 없군. 확실한 건 저 위의 사당에 봉인된 것은 야마타노오로치이자 천진신의 대리자이며 저 사당의 봉인을 풀었기에 사악한 존재가 이 세상에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
“네 아버지는 원월천살법이란 가상의 검술을 미끼로 사악한 신에게 속았다고 할 수 있지.”
속았다고.
‘제기랄….’
그 순간 그는 내심 마음속에서 뭔가가 울컥하는 걸 느꼈다.
형편없는 아버지였으나 그런 아버지를 속아서 죽게 만든 존재가 있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있어.”
“뭐?”
벤노스케는 걸음을 옮겨서 아베노 세이메이를 등지고 산을 내려갔다.
“원월천살법은 있다고.”
아베노 세이메이는 내려가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이상한 꼬마군.”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사당에 풀려난 고대신의 사도를 재봉인하러 갔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벤노스케는 일단 미야모토 마을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이번 이즈모 행이 끝나면 그 마을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처에 승려인 외삼촌도 있으니 사는데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랫동안 걸었고, 아홉 살이 되는 해에 하리마국의 미야모토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신멘이라는 성을 버렸고 미야모토라는 성을 쓰기 시작했다. 외삼촌의 권유로 이윽고 아명을 버리게 되었고, 무사시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다케조라고도 불렸으나 그는 무사시라고 불리는 걸 더 좋아했다.
“무사가 될 생각이냐?”
외삼촌의 집에 머물기 시작한지 반 년 동안 무사시가 매일마다 목검을 휘두르자 외삼촌이 어느 날 문득 물어왔다. 무사시는 땀으로 가득한 이마를 천천히 닦으며 대꾸했다.
“난 이미 무사야.”
“그럼 어째서 칼을 휘두르는 것이냐?”
“알 수 있으니까.”
“뭘 안단 말이냐?”
부웅
그는 냉막한 얼굴로 일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내가 계속 강해지고 있다는 걸…."
스승은 따로 없다. 있다고 해봤자 잠시동안 검의 기초를 가르쳐 준 아버지, 신멘 무니사이 뿐이다. 승려인 외삼촌은 무사시가 검의 길을 가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는 그저 혼자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시는 느낄 수 있었다.
보인다.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지 계속해서 길이 제시되는 느낌이었다. 몸 한올 한올이 꼿꼿이 서면서 자기자신의 헛점을 알려주었고 그걸 보강하기만 하면 되었다. 검술의 류(流)나 초식은 하나도 배우지 못했지만 그냥 어디로 휘두르면 될지 눈에 보였다.
그렇다.
이렇게 쉬운 길이다.
내게 스승따윈 필요없지 않은가?
퍼벅!
“크허억….”
그리고 무사시가 열 세살이 되던 해, 그는 떠돌면서 무사수행을 하던 아리마 기헤에라고 하는 무인과 싸워서 일 초만에 이겼다. 아리마 기헤에의 목을 찔러서 죽일 때 자신의 검 끝에서 희미한 기운이 선명하게 맺혀서 유형화되는 걸 느낀 무사시는 생각했다.
이 기운은 편리해.
아리마 기헤에는 그의 역량을 판별하기에 너무 약했다. 무사시는 이미 검기를 쓸 수 있었기에 고작해야 일류에 턱걸이하는 그의 실력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깨달음을 줄만한 놈은 아니었군.’
이제 곧 검기를 넘실거리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무사시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 당시에는 몰랐으나 그는 검염(劍炎)을 깨닫기 직전의 경지였다.
무사시는 결심했다.
더 큰 세상으로 뛰어들면 더 빨리 강해질 것이다.
‘전쟁터에 가자.’
미야모토 무사시.
그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의 여름,
동영을 둘로 가르던 희대의 대전쟁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무작정 참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