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860화 (859/1,615)

860====================

진공가향(眞空家鄕)

여동빈의 모습을 한 채 검신동체(劍身同體)처럼 검 한 자루에 의지한 채 날아가던 나는, 그 순간 오만 생각이 들었다. 생사결을 앞두고 이런 태도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과연 지금 여동빈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내가 그에게 어느 정도 근접해 있을지가 궁금해졌으며, 무사시에게 내 천둔검법이 통할지 알고 싶어졌다.

스아앗

무사시의 검이 횡으로 흘렀다. 흘렀다고 표현했지만 상식을 초월한 쾌검이 뿌려지며 육의성천도의 운결이 즉시 부서진 것이다. 검운(劍雲)이 상대를 감싸기도 전에 처참하게 난도질당하는 광경은 내 미숙함을 증명하고 있었기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굉장하구나, 무사시. 그 찰나에 검운의 결을 파악해서 가장 약한 부분을 벨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언제까지고 너한테 매달려 있을 순 없다.

너를 넘어서서 더 높은 경지로 가야한단 말이다!

내 안광(眼光)이 크게 빛나더니 육의성천도의 여섯 가지 조화를 검 끝에서 떨쳐내고는 다시 천둔검법으로 회귀했다. 이 천둔검법은 원형에서 화룡진인이 진화시킨 것으로서, 나는 그녀가 내 몸을 빌린 동안에 무수히 사용하는 걸 느꼈으므로 매우 익숙했다. 육의성천도의 검형만을 베끼는 것보다는 검술 그 자체로 접근하는 게 무사시에게 더 잘 통할 것 같았다.

천둔검법(天遁劍法)

수화룡(水火龍)

용음(龍音)이 울리 듯, 내 검이 기쾌하게 움직이며 용의 형상을 한 검강을 떨쳐냈다. 물과 불의 성질을 가진 용형지기가 뿜어져 나오자, 무사시는 즉시 발도술로 검결을 절단해 버렸고, 용의 목이 허공에서 잘려나갔다. 나는 무사시의 공격에 재 반격하듯, 그에게 한 걸음을 내딛으며 이번에는 퇴법(腿法)으로 공격했다.

뇌신류(雷神流)

뇌운강권(雷雲强拳)

천룡퇴(天龍腿)

꽈앙!!

무사시는 내 발차기가 자신의 머리통을 노리자 반사적으로 어깨를 올려서 고법(靠法)으로 막아내었다. 내 온 내공이 실려 있는 발차기였는데, 아무리 의념천주를 실었다 하지만 멀쩡히 받아낸 걸 보면 저 놈은 체술에도 능한 모양이었다.

동시에 무사시가 일격필살의 기세로 또다시 백뢰섬열을 써 오자, 나는 그와의 거리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삼보절기를 시전했다.

파바밧

“음.”

무사시가 침음성을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보절기를 써서 천지인을 움켜잡고 피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나를 일 초 만에 공격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칠대절학 요결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상승신법이라 할 수 있는 삼보절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자 무사시는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무사시가 뒤로 물러서는 속도 만큼 그대로 그에게 달라붙어서 천둔검법으로 계속 공격했다. 낭창거리며 백색의 검로(劍路)가 그의 퇴로를 막아서자 무사시는 귀찮다는 듯 위협스러운 절기를 시전했다.

고대검술(古代劍術) 넨류(念流)

극의(極意)

유성베기(流星斬)

푸콱!!

그 순간, 나는 시공간이 끊긴 듯한 찰나에 난데없이 왼손 검지가 떨어져 나간 걸 깨달았다. 무사시의 반격이 워낙 정밀하면서도 음유한 검기를 품고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나는 손가락이 잘려나갔다는 생각에 투지가 꺾일 뻔 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사시에게 집중했다.

손가락쯤이야 주겠다.

나는 네 팔을 받아가겠다, 무사시!

지금까지보다 더욱 집중하면서 나는 여태껏 없었던 기세로 포효하며 천둔검법을 펼쳤다.

“으아아아아아!!”

화르르륵

용염(龍炎)!

화룡진인이 천둔검법을 펼칠 때 흔히 일어났던 현상!

내가 천둔검법 81초를 전개할 때 마다 검염(劍炎)이 마치 천공을 흐르는 시뻘건 용암처럼 흐르며 잔상을 남겼다. 그 용염은 단순한 검염이 아니라 검강지기가 실체화된 것으로, 궤적에 남아있는 자들은 그대로 타격을 받게끔 되어 있었다. 지금 같은 추격전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상대를 압박하기 좋았다.

일단 근접검투를 피하려 하던 무사시 또한 내 기세가 갈수록 증폭되자 더 이상 물러서는 건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자세를 잡고 제대로 천둔검법에 맞서기 시작했다. 무사시가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며 동영검술의 오의를 펼쳐내었다.

요마퇴산(妖魔退散)

카마이 타치(鎌鼬)!

피이잉

순간 보이지 않는 바람의 검기가 내 몸 주변을 빽빽이 에워싸는 게 느껴졌고, 그 풍검(風劍)이 용염과 뒤섞이며 살기와 함께 터져나갔다. 간단하게 용염의 압박을 벗어난 무사시는 한 호흡도 물러서지 않으며 이번에는 무쌍참을 써서 내 목을 바로 노려왔다.

“……!!”

무쌍패!

꽈르릉

나는 무쌍패를 써서 무쌍참을 또다시 막아내었지만, 이번에는 천둥소리와 함께 우리가 서 있던 일대가 터져나가는 듯 했고, 기가 만들어낸 소용돌이에 두 사람의 몸이 휩쓸려서 붕 떴다. 아까의 와류보다 훨씬 큰 규모의 용권풍이었으므로, 내가 그의 무쌍참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 했다는 뜻이었고, 그를 증명하듯 내 팔뚝에는 혈선이 종횡무진 그어져서 피를 뚝뚝 흘리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무쌍참을 또 쓸 수 있다니….’

신살참 만큼은 아니라도, 무쌍참을 쓴 무사시는 보통 지치게 마련이었다. 전생경험상 틀림없이 그래왔기에 그가 더 이상 내게 반격하긴 힘들 거라 생각해서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두 번이나 필살기를 쓴 자의 기력이 그리 넉넉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또다시 무쌍참을 쓸 수 있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무사시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흉험한 기세가 혈광과 함께 흐르는 걸 보고 흠칫했다.

무사시는 웃고 있었다.

“아주 기쁘군…. 싸울 맛이 난다.”

“너….”

“결착을 내자.”

귀신의 얼굴….

나는 무사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수라나찰이 현신해 있는 듯한 극강의 살기와 전투본능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에 하나의 절대적인 재능이 떠 올랐다.

귀면상(鬼面像)!

여동빈의 과거 기억에 따르면, 귀면상은 무림에 몸을 담은 자들이라면 꿈에서라도 그리면서, 동시에 흉험하게 여기는 재능이었다.

천부적인 검귀(劍鬼)의 재능을 타고나기에 웬만한 천재조차 귀면상의 소유자 앞에서는 범인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무시무시한 반사 신경과 초인적인 회복력, 악운을 모조리 갖게 되어, 어떤 무공을 익히든 간에 무림의 초고수가 될 수 있는 재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천살성에 맞먹을 정도의 선천적인 살기가 있기에, 큰 살겁(殺劫)을 일으키곤 했다. 귀면상을 지닌 자는 이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할 정도로 드물었으며, 나타날 때마다 무림의 지존을 노릴 정도의 힘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여동빈을 팔부신중 야차가 주시했던 이유도 바로 귀면상 때문이었다.

‘…그랬군.’

무예의 불모지, 동영에서 뜬금없이 중원과 고려를 아울러 천하제일을 노릴 수 있는 절세검객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무사시가 선천적으로 귀면상을 타고난 검귀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가 과거 검선 여동빈과 같은 재능을 타고난 인물임을 뜻하기도 했다.

무사시는 지금 귀면상이 발현되어 밑바닥에서부터 투지만으로 싸우고 있는 상태가 분명했다. 또한 의념천주를 다룰 수 있는 자에게 있어서 정신력의 강화는 모든 능력의 강화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무사시의 다음 공격은 무쌍패를 완벽하게 쓰지 못하면 절대 막을 수가 없으리라.

부들….

검을 들고 있는 손이 마구 떨린다.

아까부터 팔과 손에 큰 부상을 입은 데다 정신도 불안정했다. 가면을 너무 자주 바꿔 쓴데다가, 오갈 데 없는 살기와 투지가 머릿속에서 통제되지 않았다. 게다가 무쌍패가 몇 번이고 상대의 필살기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 자신의 미숙함이 느껴졌기에, 허탈감까지 닥쳐 왔다.

‘…이번 전투에서 무쌍패를 완벽하게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전부 조금씩 빈틈이 있었고, 무사시는 그 빈틈을 모두 파고들었다….’

심기체를 안정시켰다 생각했지만 역시 절대지경의 고수에게는 빈틈이 노출되는 모양이다.

아직까지 10년 정도는 더 수련해야 그 허점을 없앨 수 있으리라. 다음 격돌에서 내가 무쌍패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체력적으로나 기력적으로나 내가 우위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째서 27 번이나 전생하고도 무사시 하나를 못 이기는지 한탄스러웠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징징대지 말자.

그렇다고 이 싸움에서 여동빈이나 장삼봉을 부를 수는 없다.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싸워주지도 않겠지만, 언제까지고 투선에게 의존해서 싸울 수는 없다. 나 자신이 강해지기 위한 시련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다.

…….

아무리 암울하고 절망스러워도 끝을 보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人生)이란 게 아니겠는가…? 그 밑바닥의 쓰디쓴 결정체를 몇 번이나 맛본 후 일어섰던 게 바로 나, 백웅이 아니었던가!

‘가자!’

죽을 때 죽더라도 당당하게 죽자!

나는 쓸데없는 번민과 혼란을 마음 속에서 떨쳐버리고 머릿속을 맑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천둔검법의 기수식을 잡았다.

내 자세를 본 무사시가 눈에서 이채를 띄었다.

“그 검법이 뭐길래 그리도 집착하는 거지?”

“집착이라….”

“큰 사연이 있는 것 같군.”

“…그럴지도.”

천둔검법을 처음 얻게 된 게 언제였던가.

얼떨결에 전수받았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여동빈이 강림하여 바다의 마(魔)를 퇴치할 때 그 검법의 진수를 보았고, 그 강력한 힘에 반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알게 모르게 여동빈의 강신에 의지하면서 천둔검법을 익혀 보고자 노력했고, 재능과 그릇이 딸려서 온갖 시도를 하며 그릇을 넓히려 했다.

지금까지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던 중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선검술.’

우웅

나는 천둔검법에 선검술의 힘을 부여했다. 그러자 뿌연 검기 같은 기운이 검 주위에 맴돌았다.

선검술은 시전자의 모든 인과와 업을 모아서 선검으로 응축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낸 선검(仙劍)을 이용해서 싸우는 술법 이었다. 물론 나는 선검술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인과와 업이 충분치 않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타닷!

“그럼 죽어라!”

무사시는 혈광을 빛내더니 이윽고 검신과 합일하듯 신살참을 시전했다.

더 이상 탐색전은 필요 없다는 태도였고, 그가 판단하기에 현재의 형세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본 것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까지의 나는, 아무리 잡술을 써도 꺾이지 않는 무사시의 강함에 방황하면서 주눅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태로 무쌍패를 다시 쓴다고 해도 어떻게든 힘으로 뚫어버릴 자신이 있었으리라.

온다.

나는 선검을 든 상태에서 처음으로 찰나지간에 신살참의 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극도의 집중상태가 불러 일으킨 기적이었는데, [개념]상태의 신살참은 마치 매끈한 장도(長刀)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칼날에는 마주치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담겨 있었으며 심지어 신령이라 해도 죽일 수 있을 듯 했다.

저건… [진짜]다.

진짜로 무사시는 뭐든 베어버리려 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의지력의 강함이 그대로 힘이 되는 절대지경의 세계에서 무사시의 저런 믿음은 틀림없이 강력한 무기였다.

저 신살참은 무사시의 진실 된 마음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에 반해서 나는 아직까지도 무엇이 나만의 최강인지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가짜인가?

가짜 기술을 난무하면서 가면을 바꿔 쓰기만 하는 도둑의 삶이 진정한 나의 삶인가?

무인이 되어 뜻을 세우고자 했던 열망은 그저 재능을 돌아보지 못한 치기어린 행동일 뿐이었을까? 모르겠다.

정상적이라면 이 흉험한 순간에 양 손을 들어 태극의 조화를 모아서 무쌍패를 시전해야 했다. 무쌍패 외에는 무사시의 신살참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무쌍패를 펼치는 게 내키지 않았으며, 이대로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심(武心)이란 게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신투지존은 말했다.

무예에도 마음이 있다고.

그때의 나는 그 말이 어처구니없는 엉터리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무쌍패라는 절세 무공 자체가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심기체를 통일시키지 못한 지금의 내가 무쌍패를 쓴다고 한들, 돼지 목의 진주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무심(武心)은 무엇인가.

내가 태어나서 여태껏 익혀왔던 모든 무공에는 어떤 마음이 깃들여있는 것일까.

주르륵

나는 순간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 눈물은 회한과 무지에 대한 통한의 눈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마음을 알 도리가 없었기에, 이리도 무능하고 무지한 나 자신이 싫어진 것이다.

‘모르겠다….’

무지(無知).

그 굴레를 벗어날 도리가 없구나.

“으아아!!”

그 순간 - 나는 뭔가를 마음속에서 놓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도, 무쌍패를 시전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뻗었다.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

어째서 신살참에 육의성천도로 대항한 건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육의성천도의 온전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 검기 따위는 신살참에 예리하게 잘려 나갔고, 바로 다음 일참에 나는 무사시의 칼에 배를 꿰뚫렸다.

푸욱

승자인 무사시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 표정은 강렬한 혐오를 품고 있었다.

“…….”

츄왁

무사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배에서 장도를 뽑아낸 후 피를 털었다. 내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자, 무사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시시하군.”

그가 시시하다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어째서 마지막에 무쌍패를 쓰지 않고 육의성천도라는, 최악의 한 수를 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원래 무사시였다면 이긴 즉시 내 목을 베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배에 한 칼만 먹이고 그만둔 이유 - 그것은 나를 경멸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도 이기지 못하는 놈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니….”

검을 나눈 자의 직감인 걸까? 무사시는 내가 직전에 품었던 갈등을 간파한 듯 했다.

“약속은 약속이니 정보를 모두 말해라.”

하지만 나는 배에 화끈한 통증이 닥쳐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나 자신에게 몰입해 있었다. 무사시의 말도 거의 귀에 들려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어째서 무예의 마음을 모르는가.

나는 어째서 진실 된 마음의 경지를 얻지 못하는가.

나는 어째서 무지의 굴레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도대체 몇 년 째인가….

‘…알아. 이건 내가 재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란 걸.’

내게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나는 독백하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사시는 내가 무방비 상태로 일어서는데도 베지 않고 그저 힐끔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텅 빈 눈으로 검을 잡으면서 생각했다.

거울은 보지 않아도 좋다.

내가 쓰고 있는 여동빈의 가면은 어차피 본인이 아니니까.

가면술사인 나는, ‘내가 생각하는 여동빈’을, 연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연기하는 자는 끝내 자기 자신을 잊어서는 안 되니, 결국 진짜 마음이란 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심연의 가면을 얻지도 못한 상태에서는.

하지만….

가면술사에게도 마음은 있다.

가면 뒤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다.

그 마음조차 없다고 할 것인가?

그 마음은 - 무심(武心)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우오오오

그 순간, 내가 잡고 있던 선검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인과(因果)가 선검에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대사를 읊었다.

지금의 나는 여동빈.

“나는 천하(天下)의 검이다.”

어차피 지금 나 자신에게 실체가 없다면 - 그저 가짜일 뿐이라면 더 이상 진짜를 찾지는 않겠다.

더욱 완벽하게 연기할 뿐.

“나는 천하를 담는 구세(求世)의 검이 될 것이다!!”

파앗!

내 검 끝에서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가 다시 한 번 펼쳐졌다. 무사시는 그 순간 짜증에 눈살을 찌푸렸고, 강렬한 혐오를 담아서 일검을 휘둘렀다.

“멍청한 놈!”

스칵

무사시는 분명히 내 육의성천도가 흉내 내기에 불과한 가짜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설픈 따라하기를 펼쳐봤자 자신의 일검으로 깨부술 수 있으리라 확신했으리라. 그 확신은 틀리지 않았고 확실히 얼치기 같은 검기로는 무사시를 교란 시킬 수는 있어도 꺾는 건 불가능하다.

까강!!

“……?!”

그러나 그 순간, 내 선검은 무사시와 정면충돌한 상태에서 칼날을 마주쳐서 그를 크게 밀어버렸다. 뜬금 없이 밀려버린 무사시는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나는 선검에 인과의 힘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기합을 내 질렀다.

“아아아아아!!”

쿠구구구구구

칼날을 맞대고 힘 싸움을 하는 상황에서, 나는 갈가리 찢어진 손바닥이나, 근육과 힘줄이 드러나는 팔뚝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선검에 밀어 넣으며 코피가 나도록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 떠… 냐…!!”

“이 놈…!”

“난…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하나는 안다….”

나는 무사시의 혈광어린 눈빛에 똑바로 맞서면서 이를 갈았다.

“동경하는 건… 죄가 아니라는 걸!!”

콰광!!

그 순간 선검이 폭발하며 무사시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신법을 펼칠 수도 없을 정도의 압력이었던 탓이었다.

나는 선검술을 펼치는 동안 선검이 꾸역꾸역 내 기억을 먹어치우는 걸 알아채고는 피를 토했다.

“쿨럭.”

인과율을 쌓는 선검술.

달리 말하면 기억 또한 힘으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여기에 내 기억을 불어넣는다면, 내 무공의 기억들을 일시적으로 힘으로 뒤바꾸는 게 가능했다. 물론 이 변환된 힘은 매우 일시적인 것이라서 도저히 오래 싸우는 데는 쓸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단시간에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건 가능한 것이다.

선검술을 쓰는 여동빈이 다른 투선 보다 유난히 공격력이 강한 건 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처음으로 선검술을 실전에서 제대로 써 보았다는 생각에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백웅식 육의성천도면 어떻단 말이냐!!”

파아앗

나는 다시금 선검술에 육의성천도를 실어서 무사시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원본과는 달리 허접쓰레기 같았지만, 선검술에 인과율과 기억이 실리자 내가 익혀왔던 무당파와 뇌신류의 절학 등이 순수한 힘으로 변해서 검의 압력을 가중시켰다. 무사시 또한 지지 않고 마주 무쌍참을 펼쳤고, 허공에서 힘과 힘이 충돌했다.

쿠콰쾅

“크하악!”

“으아악.”

나와 무사시는 거의 동시에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피투성이가 되어 땅에 쓰러졌다. 누가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이었고 중상이었지만 우리는 경쟁이라도 하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아아앗.”

그리고 무사시가 귀기어린 얼굴로 모든 힘을 끌어내서 신살참을 펼치자, 나는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내공의 잠력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엉터리 육의성천도를 펼쳤다. 내 맘대로 펼쳤을 뿐 진짜와는 하나도 같지 않았다.

위이잉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내가 펼치는 아류(亞流) 육의성천도가 엉망진창인 흐름 속에서도 육합(六合)의 원리대로 자전(自轉)하는 게 느껴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자전하는 육의성천도는 갑작스럽게 성질을 바꾸어서 운결에서 우결(雨決)로 뒤바뀌었고, 무사시는 뜻밖의 전환에 급소를 검기에 얻어맞고 말았다.

울컥

무사시는 피를 토해내면서도 끝내 신살참을 찔러서 내 목젖을 찔렀다. 본디 치명상이었으나 나는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얕게 찔러온 칼날을 간신히 맨손으로 붙잡아서 즉사를 피했다.

파박

신카게류(新陰流)

무토도리(無刀取り).

“…….”

“허억, 허억.”

뻐억!

서로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피웅덩이가 바닥에 고이고 있을 때, 나는 검집을 허리춤에서 빼들고는 무사시의 어깨를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사시의 살점이 떨어지자, 무사시는 지지 않겠다는 듯 칼날을 옆으로 돌려서 내 손가락 2개를 베어냈다.

츄왁

아, 진짜 죽겠구나.

나는 손가락을 베어낸 무사시의 검광이 그대로 내 미간으로 날아드는 걸 보자 진정한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죽음의 예감과는 별개로 내 선검은 한없이 냉정하게 검로(劍路)를 이루었고, 이윽고 하나의 검결이 무사시의 가슴을 꿰뚫었다.

퍼엉!

‘…육의성천도… 지결(地決)….’

어째서 최후의 순간에 저게 튀어나간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정신이 육체를 초월한 찰나의 전투에서 우리 둘은 밑바닥을 필사적으로 움켜잡았고 마침내 결판이 난 것이다. 무사시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다가 잠시 후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쿠웅

나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배를 부여잡으며 피눈물을 흘렸다.

“이… 이겼다….”

십연전(十連戰)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여기에 승리가 있다.

천하 삼대고수라 할 수 있는 자, 절대고수의 한 축인 미야모토 무사시를 무너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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