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
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무사시와 만나기까지 약간 시간이 남은 걸 알고 있었으므로 좀 더 천면공자를 시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철혈문주에게서 빠져 온 후에는 다시 십이율 해동밀천주의 본부로 가 보았다.
위잉 위잉
하지만 들어가는 순간 결계에 들킨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해동밀천의 밀교 술사들이 나타났다.
밀교 술사들은 노호성을 내지르며 나를 공격했다.
“저 자가 얼마 전 천주를 공격한 자다!”
“잡아라!”
콰과광
여기저기에서 밀교 특유의 공격술과 환술이 펼쳐지면서 나를 공격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모든 공격을 유유히 피해냈다. 애초에 음신지력으로 방어막을 치면 저 정도 술법공격은 무효화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느린 공격이었다. 그저 멸혼보만 써도 놈들이 술법을 발사하기 전에 모조리 피해낼 수가 있었다. 이따금 자동추적술법이 날아오면 그제야 음신지력을 돋우어서 무효화시키곤 했다.
나는 기척을 탐지하다가 아주 희미하게 나를 향해 누군가가 살기를 뿜어내는 걸 알아채고, 거기에 해동밀천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파밧
나는 해동밀천주에게 바로 달려들어서 발차기를 날렸으나, 굉장히 단단한 장갑이 그를 막고 있었으므로 일격에 쓰러뜨리지 못했다. 잘 보니 놈은 이미 변신해 있었는데, 마치 고대의 환수(幻獸)처럼, 세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이무기와 같은 형상이었다.
‘밀교의 비술인가?’
해동밀천주가 변신술을 쓴 상태로 포효했다.
[다시 찾아올 줄 알았다! 얼마 전 나를 구타했던 빚을 갚아주마!]
콰르릉
해동밀천주가 이무기의 입에서 안개처럼 보이는 산성독을 뿜어내었다. 그리고 두 개의 다른 머리에서 각각 화염, 뇌전을 뿜어내었는데 실로 엄청난 위력으로 보였다. 변신술이 강력한 술법이긴 하지만, 저 자가 쓰는 밀교비술은 특히 강한 듯 했다. 놈에게 비전술법을 쓸 시간을 준다면 어쩌면 십이율 문주 중에서 최강수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멸혼보를 썼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사이에 호신강기와 음신지력의 방벽을 펼치며 이무기의 아가리에 파고들어서 검뢰를 난무했다. 세 개의 목이 동시에 떨어져 나가면서 등껍질이 같이 깨졌고, 이윽고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놈의 변신술이 풀렸다.
[크아아악!]
해동밀천주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인간으로 되돌아왔는데, 나는 놈에게 다가가서 요혈을 짚어서 제압했다. 해동밀천주가 억울한 눈빛으로 말했다.
“으…으윽…. 대체 나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개새끼….”
나는 눈앞의 밀천주를 앞으로 어떻게 대할지 마음을 정했기에 차분하게 대꾸했다.
“…난 분명 예전에 경고했다. 넌 나를 모욕한 걸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 같은 자를 욕한 적이 없다…. 네가 간 후에 계속 생각해봤는데 그런 적은 없었단 말이다…. 넌 정말 생전 처음 본 자다…. 대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걱정 마라.”
나는 냉엄하게 중얼거리고는 해동밀천주의 가면을 꺼내서 썼다. 사실 원한도 원한이지만, 이 천면공자의 술법을 좀 더 시험해보려고 여기에 온 것이었다.
천면공자 시전.
쉬쉬쉭-
그리고 나는 방금 전처럼 해동밀천주인지 나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다가 겨우 놈으로 감쪽같이 변할 수가 있었다. 내가 해동밀천주의 몸에 적응하고 있을 때 뒤늦게 해동밀천의 수하들이 이쪽으로 오면서 외쳤다.
“천주님!!”
“그 괴한이 이쪽으로 왔는데 괜찮으십니까!”
나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보물고로 가야 하니 결계를 모두 해제해라.”
“네? 갑자기 왜….”
“괴한을 내 변신술로 격퇴했으나 생각보다 강한 놈이라서 최후의 법보를 꺼내야겠다.”
“오오… 알겠습니다.”
쿠구궁
이윽고 밀천의 수하들이 해동밀천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보물고로 향하는 길과 봉인결계를 모두 해제했다. 사실 밀천주 또한 선대로부터 보물고를 물려받아서 관리하는 입장에 가까웠던지라 기본적인 봉인은 부하들에게 맡겨놓고 중심지의 봉인만 자기가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보물고 바로 앞까지 혼자서 온 후, 주변의 이목이 없는 걸 확인하고 해동밀천주의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기억을 떠올렸다.
‘흐음… 이 안에 최초의 밀교에서 전승되는 보패급 피리가 있단 말이군.’
해동밀천주는 유사시에 이걸 꺼내서 십이율주에게 바칠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왜인지 목숨을 거는 행위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거리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철혈문주 때보다 훨씬 유지하기가 쉽고 오래 가는군.’
아까보다 거부반응이 덜하다.
연습하면 할수록 무난하게 쓸 수 있는 듯 했다.
나는 해동밀천주의 지식으로 주문을 외워서 보물고를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신묘한 기운을 내뿜는 피리를 볼 수 있었다.
처억
내가 피리를 움켜잡아서 내 쪽으로 잡아당기자 피리가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해동밀천주입니다.]
[나, 만파식적(萬波息笛)… 동해용왕과 문무왕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최후의 보물! 고작해야 인간 놈의 봉인해제에는 호응하지 않겠다! 네 깟 술법사가 사리사욕으로 나를 꺼내려 하다니 그 건방짐을 죽음으로 사죄하라!]
응?!
파지지직!!
“크으으으윽!!”
나는 그 순간 만파식적에서 어마어마한 정신파동이 날아와서 머릿속을 태우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잡고 있는 피리에서 뇌전이 치솟아 오르면서 내 몸을 물리적으로 굽기 시작했다. 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만파식적을 끝내 놓지 않자 이윽고 만파식적이 흠칫하며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그대는 심연의 가면을 쓰고 있단 말인가? 인간의 본질 너머에 대체 무엇이…. 아아!! 신적인 존재였구나!]
파직
뇌전이 내 몸을 휩쓰는 것과 동시에 가면이 벗겨지면서 가면화되어 있던 해동밀천주가 기절해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내 본체가 드러나자, 나는 만파식적에 음신지력을 불어넣으며 놈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크아앗…! 역시 이건 신의 힘….]
만파식적 또한 강력한 보패이지만 내 음신지력에 저항할 정도는 아닌 듯 했다. 제압당한 만파식적의 뇌전이 점차 사그라들자, 나는 만파식적에게 말을 걸었다.
“만파식적이여. 나는 백웅이다. 너는 심연의 가면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오오… 가면을 썼다면 그대는 위대한 신의 후예인 게 틀림없소…. 그대라면 나를 쓸 자격이 있소.]
“신의 후예? 가면과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나를 제작한 동해용왕의 기억에 따르면, 선사시대에 신의 직계후예들은 심연의 가면을 써서 뭇 존재들과 같은 눈높이를 가지거나 조롱하기를 일삼았다고 하오…. 더욱이 이 힘은 삼황오제의 힘….]
“…….”
[나는 창조주의 의지에 따라 나 자신의 긍지를 지켰을 뿐이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나를 소멸시키지 마시오.]
신의 후예들이 심연의 가면을 썼다고?
‘역시 이 천면공자는 신대(神代)의 술법과 연관이 있는 건가….’
신투지존 또한 이 천면공자가 삼황 오제 시대부터 전해져 온다 했으니 앞뒤가 맞는다. 나는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생각하며 만파식적에게 말했다.
“만파식적이여. 너는 혹시 다른 보패의 봉인을 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그런 능력은 없소. 그러나 동영에서 넘어오는 마(魔)를 제압하고 만물을 치유하며 대지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소. 저주 또한 치유할 수 있소.]
“동영의 마를 제압한다고? 너 또한 월요 삼신기와 같은 역할을 한단 말인가?”
[감히 나 따위가 전설의 칠요인 삼신기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 문무왕의 의지를 담아 경주와 남해 일대를 사악한 마기에서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소. 또한 동영의 타락한 음양사들이 쓰는 술법을 차단할 수 있소.]
그랬던 거군.
나는 괜찮은 보패를 주웠다 생각하며 만파식적에게 말했다.
“동해용왕과 신라 문무왕이 너를 만들었다 했지. 동해용왕은 사대용왕이지만 문무왕은 인간 왕이었을진대 어떻게 널 만들었지?”
[문무왕이 동해용왕에게 스스로를 공양한 후 신적인 존재인 용(龍)으로 신화(神化)하기를 허락받았소. 그 직후에 두 존재의 신력을 담아서 내가 만들어졌소.]
“그들은 지금도 존재하는가?”
[애석하게도 동해용왕은 이계에서 온 사악한 존재에 의해 사망하셨고 문무왕은 지금도 고향의 바다를 지키고 있소.]
“그렇군….”
아무래도 만파식적이 제작된 건 약 일천 년 전, 종말의 거룡과 여동빈의 결전이 일어나기 전의 일인 듯 했다. 그 때 동해용왕 광덕왕 오광에게 신라의 왕인 문무왕이 스스로를 공양해서 용신이 되었고, 그 소원을 이루어 고국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으며 만파식적을 만든 듯 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무색하게도 동해용왕은 종말의 거룡에게 한 번의 숨결을 맞아서 그대로 즉사해버렸으니 이제는 문무왕밖에 남지 않았으리라.
나는 만파식적에게 말했다.
“만파식적. 너는 아무래도 전투용 보패는 아닌 듯하군. 혹시 강력한 보패나 보물, 영약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가?”
[잘 모르겠소.]
“알았다.”
나는 약간 실망했지만 어차피 무사시를 쓰러뜨리는데 보패의 힘을 빌릴 생각은 아니었다. 만파식적 또한 뜻밖의 이득이었을 뿐이었으므로 나는 만파식적을 곧장 목갑 안에 집어 넣었다.
파앗!
그리고는 해동밀천주를 놔두고 이번에는 사천당문으로 향했다.
사천당문으로 간 나는 곧장 당산을 찾아내었고, 당산과 그의 어머니를 사천당문에서 구출한 후 근처의 객잔에서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당산은 만두를 먹으면서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당산에게 말했다.
“당산.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으나 나는 네 재능이 필요해서 너를 당문에서 구출했다.”
“재능?”
“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재능을 내가 빌리고 싶군.”
“나를 제자로 거둔다는 말이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그대로 재능을 빌리는 거다.”
나는 당산에게 신투지존의 절학인 천면공자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다. 이야기를 듣던 당산은 점점 놀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뭐가 궁금하지?”
“당신이 천면공자를 써서 ‘가면’으로 만들었던 자는 이후에 그 재능과 기억을 당신에게 뺏기는 것이오?”
“그렇진 않다.”
“그럼 당신은 내 천부적 재능을 빌려서 무공수련을 하겠다는 말이군.”
“그래. 그것까지만 검증하고 생사결을 해 보고 싶다. 그리고 너와 네 어머니가 살아갈 만큼의 충분한 돈을 주고 가마. 손해되는 얘기는 아니지?”
무사시와 싸워서 죽을 수도 있었기에 적어도 여기까지는 천면공자를 검증해보고 싶었다.
‘만일 천재의 재능 자체를 빌려올 수 있다면 절대지경에 훨씬 빨리 이를지도 몰라.’
당산이 천재답게 내 말을 단숨에 다 알아듣자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당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당신이 내게 말한 대로라면 뭔가 이상한 게 있는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당신이 말한 대로라면, 천면공자는 ‘도둑질’이 아니오. 그저 ‘대여’에 지나지 않지. 인격을 훔친다고는 해도 일정시간이 지나면 도로 주인을 토해내어서 되돌려주잖소. 누구도 뭔가를 잃지 않소.”
“…….”
“아무리 그래도 그게 천하제일도둑의 절기라면 뭔가를 ‘훔쳐’오는 게 아니겠소? 빈자리가 생기지 않는 도둑질이란 건 소꿉장난에 불과하지 않겠소.”
“으음.”
“당신은 정말로 그 절기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게 맞소?”
생각지도 못했던 점이었다.
나는 당산의 지적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침묵하자 당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거절하겠소. 때려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대단한 배짱과 강단이었다. 무력으로 치면 아예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 텐데도, 어차피 결과가 같을 테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밀고나가는 것이다. 당산 또한 걸물이자 간웅의 재목이란 걸 알 수 있었기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나는 당산에게 큰돈을 주고, 영약과 간단한 무공을 몇 개 가르쳐준 뒤 떠났다.
나는 당산의 말을 듣자 생각했다.
‘역시 위험하겠군….’
당산의 말대로다. 지금까지 철혈문주와 해동밀천주 두 명에게 써 봤는데, 사실은 그 둘에게 이후에 일어난 변화까지 살펴보진 않았다. 신투지존은 굳이 부작용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그가 내게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렇다면 천면공자로 심연의 가면까지 뺏는 것은 좀 더 충분한 연습과 검증이 필요했다. 자칫했다가는 크나큰 부작용을 만들 수도 있다.
나는 천면공자의 연습은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그리고 계속 명상을 하며 나 자신의 마음을 다듬다가, 무사시와 대결하는 시간에 맞춰서 용운궁으로 향했다.
스스스
용운궁에 도착하니 피 냄새가 났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 풍신류의 시체가 쌓여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용운궁의 정문을 지나서 내부 궐의 장원에 도착하자, 목 하나가 굴러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
“…….”
마도팔마의 한 사람인 수라문주 투마다.
용인이 되어서 죽어 있다.
나는 투마의 머리통을 발로 차버린 후 약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인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거리가 칠 장 정도 되었을 때 그를 불렀다.
“일찍 왔군, 무사시.”
“여기에 잠복해있던 놈들은 마(魔) 에 잠식되어 있더군. 내가 놈들을 대신 청소해주길 원한 건가?”
“글쎄….”
그런 생각도 없었던 건 아니다. 사실은 용운궁에 잠복해 있는 수라문도들과 용인들이 무사시의 체력을 좀 깎아줬으면 했던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사시에게 손톱만한 상처도 내지 못했고, 심지어 수라문주 투마는 용인으로 변신했음에도 사망한 듯 했다.
물론 아직 전생초기라서 황실의 마도연구가 진전된 예전보다는 약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팔마 중 하나이자 용인을 일격에 베어 죽였다는 건 무사시가 괴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는 무사시에게 말했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