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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화신류 호법사자인 한백령이 이 자리에 와 있다니!
나는 순어구를 써서 제갈사에게 몰래 이야기를 걸었다.
[제갈사! 어째서 순어구로 미리 얘기하지 않았어? 예기치 못하게 한백령과 맞닥뜨리는 이런 상황은….]
[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니까.]
[뭐?]
[한백령이 쳐들어온 건 반 시진 전. 호법사자의 힘을 썼다면 내 진법과 이 육체 정도는 애저녁에 찢어 발기거나 생포해갈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녀는 진법만 깨부수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지. 기본적으로 대화하러 왔단 말이다.]
[음….]
[한백령과 싸울지 협상할지는 전적으로 네 선택이다. 지금 한백령 정도에게 발목을 붙잡힐 정도면, 사대신기를 찾거나 무사시와 싸우러 갈 순 없다.]
위기를 알아서 극복하라는 뜻이며 내 선택을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여기서도 제갈사는 내 역량을 알아보고 싶은 건가?
나는 제갈사의 선택을 이해하고는 한백령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로 장령곡에 쳐들어 오셨소?”
“진성이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요즘 세간에서 유명한 대도(大盜) 신투객이며, 우리 화신류의 종묘에서 선조인 옥룡신군 한금월의 영혼을 불러내서 신투지존의 정보를 얻어냈다는 이야기를.”
“…….”
“너는 기이한 보물을 사용해서 순간이동 능력으로 세상 여기저기를 순식간에 돌아다닐 수 있는 것 같더군. 그래서 당초에는 찾아내는 걸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중일에게 꼬리가 잡힌 덕에 네 근원지로 의심되는 장령곡의 위치를 알아 낼 수 있었다.”
“무슨….”
그러자 한백령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황산파 장문인인 용중일은 풍신류의 소종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에게 소매치기를 하러 다가온 소매치기의 존재를 눈치 챘는데도 일부러 그 자리에서는 당해주고, 그 대신에 그에게 흔적을 묻혀서 자기만의 비술(秘術)로 네 행적을 추적했다고 하더군.”
“음…!”
“네가 가장 자주 들렀던 장소는 이 장령곡. 그래서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이 세상이 위기에 처해있다면, 오로지 환생자인 나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여겼소.]
[선우파재의 삶이 끝난 후, 5번째 삶인 몽오심의 생은 도가 고대유파의 무공을 수습하고 술법을 익히며 비밀을 캐는데 집중되었소. 나는 그 때 백련교의 고대서적을 입수했으며 고대 백련교의 제례의식에 대해서도 꽤 공부했었소. 도가와 불가에 숨겨져 있는 고대 이족의 비밀도 계속 캤소.]
용중일이 환생자의 정체가 들켰을 때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 맞아…. 용중일은 무공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야. 놈은 술법에도 능통해!’
용중일로서의 삶은 환생 6번째의 삶이었다. 그 전에 겪었던 5번째 몽오심의 삶에서는 술법이나 마법, 고대비밀을 캐는데 모든 삶을 소비했다고 했으니 그 성취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환생자의 관록에 상응하는 추적술법을 익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역시… 황산파 장로로 위장했을 때 내 정체를 의심했던 건가.’
의심하고도 눈치 채지 못한 척 태연하게 내게 소매치기를 당해주고, 동시에 나를 시인(示認)함으로써 술법의 요소를 갖춰서 추적술을 발동시켰던 것인가.
내가 침묵하자 한백령이 말했다.
“내가 너를 찾아온 용건은, 진의(眞意)를 알고 싶어서이다.”
“진의?”
“진성이의 말로는 네가 백변신투와 공손세가의 비밀을 찾아다녔다고 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근래에 천하의 대문파 장문인의 소매를 훔치고 다니는 이유는?”
“…….”
나는 한백령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했다.
“당신 혼자만 찾아온 것이오?”
“그렇다.”
“믿을 수 없소만.”
“너처럼 신묘한 능력을 쓰는 기인을 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는다. 용중일의 추적술로도 고작해야 네 위치를 흐릿하게 감지할 수 있을 뿐, 원한다면 네가 온 세상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너와 대화할 기회는 아마 오늘 뿐이겠지.”
“…….”
“뭘 하고 싶은 거지? 이야기를 해 준다면 우리 화신류가 네게 협력해 줄 수 있다.”
“협력이라… 그다지 필요 없소만.”
“그렇다면 진성이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은 이유는 뭐지?”
뜻밖의 물음에 나는 한백령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는 적의나 살의 대신에 호기심이 감돌고 있었다.
“너는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무르다. 진성이를 죽였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그에게 협박도 가하지 않고 풀어 준 이유… 사실 그게 더 궁금하군.”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한백령이 혼자서 나를 만나러 온 게 사실이며, 그 선택에는 내가 한진성을 봐줬던 선택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만일에 내가 그 시점에서 한진성을 이혼대법으로 세뇌하거나 죽였다면, 한백령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날 죽이려고 이 자리에 와 있었으리라.
“그건….”
그 순간 나는 화안금정을 발동하며 월요 중 거울을 꺼내서 나 스스로를 비추어 보았다. 그러자 화안금정의 눈동자에는 내 모습과 함께 내게 이어져있는 실낱같은 주술의 끈이 보였다.
이게 아마 틀림없이 용중일이 내게 걸어놓은 추적술일 것이다.
“당신이 듣고 있는 한 말해줄 수 없소, 용중일.”
스팟
나는 즉시 검을 휘둘러서 음신지력을 담은 후 그 끈을 잘라버렸다. 그러자 완전히 술법이 끊겨나가는 게 느껴졌고, 나는 더 이상 용중일에게 추격당하지 않게 되었다.
‘술법이 파해되었으니 용중일도 꽤 타격을 입었겠지.’
나는 도청의 위험을 물리치고는 한백령에게 말했다.
“한백령. 나는 사정이 있어서 나를 둘러싼 일의 전모를 타인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상태요. 다만 확실 한 건, 당신의 화신류나 사대무류, 백련교에게 타격을 입히고자 행동하는 건 아니오.”
“그럼 뭐가 목적이지?”
“내 목적은 신투지존의 행적을 찾아 세계최고의 도둑이 되는 것이오!”
내 대답에 한백령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공손세가의 행적을 우리 선조에게 물어본 이유는 뭐지?”
“헌원검 때문이오.”
“헌원검?”
“전설상의 황제 공손헌원의 검. 공손세가에 내려온다고 하는 그 신검을 가진다면 최고의 도둑이 되었다고 자평할 수 있으니 말이오. 그러나 소득이 없었지.”
“으음….”
한백령은 크게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용중일은 네가 뇌신류의 고수일 거라고 추정했다. 사실인가?”
“맞소. 나는 뇌신류의 무공을 익히고 있소.”
“스승이 누구지?”
“타 유파인 당신에게 그걸 알릴 이유는 없소.”
“설마 뇌신류의 원한을 품고 암중모색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한백령이 캐어묻는 태도에 약간 짜증이 났다. 그래서 말했다.
“작작 좀 하시오. 나는 당신의 아랫사람이 아니오. 당신네 유파에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약속까지 했는데 이리도 무례하게 구는 게 화신류 종사가 할 짓이오?”
“무례하더라도 난 네 무공을 조금 보고 싶다.”
피이잉
다음 순간 한백령이 손아귀에 있던 동전을 튕겨서 내게 날렸다.
특별한 암기술은 아니었으나 호법사자 특유의 무한의 내공이 담겨있어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구어져 있었다. 이 동전을 잘못 받으면 초절정고수라도 전신이 폭사 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이제 와서 내 실력을 보자고?
건방진 소리!
나는 정면에서 칠대절학 묘의를 쓰며 유(柔)의 공능으로 동전을 맞받았다. 동전은 도중에 엄청난 속도로 가속했으나, 그 가속도조차 내가 감지할 수 있는 범주에 있었다. 그리고 동전을 손에 받은 순간, 찌릿하는 느낌과 함께 절대무비한 내공이 밀려들어왔지만, 나는 마주 내공을 일으키며 태연하게 버텼다.
투웅
내가 손목을 한 차례 유연하게 튕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백령의 동전을 잡아내자, 한백령은 크게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
그녀가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왜냐하면 전혀 봐주지 않고 무한의 내공을 있는 힘껏 실어서 날린 동전이라서 피하는 게 정상이었을 텐데, 정면으로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 말은 한백령이 지닌 무한의 내공의 우위가 내게 거의 통하지 않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흐흠.”
나는 동전을 몇 번 튕기면서 놀다가 도로 한백령에게 다시 돌려보냈다.
피이잉!
한백령은 내가 했던 것처럼 정면에서 동전을 잡아챘다. 그러나 나는 곧이곧대로 주지 않고 칠대절학 진무칠절경의 공파요결을 담아서 동전을 쏘았기에, 한백령은 뜬금없는 힘의 방향에 당황하며 휘청거렸다.
그녀는 이내 중심을 잡았으나 추태를 보였기에 얼굴이 빨갛게 물든 듯 했다.
“네놈…!”
“왜 그러시지? 동전놀이나 하자는 줄 알았소.”
내가 이죽거리자 한백령이 천천히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쌍검으로 손을 뻗었다. 저게 한백령이 진심으로 싸워보자는 준비란 걸 알고 있던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월요 천총운검을 뽑았다.
승산은 충분하다.
하지만 대결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한백령은 자신의 손을 늘어뜨렸다.
그녀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만두지.”
“…….”
“무례를 사과하마. 그러나 근 반백 년 간 너만큼 강한 뇌신류의 고수가 출현한 적은 없었기에 알아보고 싶었다.”
“분탕질은 그만 치고 이만 가주시오. 나는 더 이상 당신네 백련교와 얽히기 싫소.”
“그건 모를 일이지.”
휘잉
한백령은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는, 화영미리보를 써서 장령곡에서 떠나갔다. 나는 일련의 소동이 마무리되자 한숨을 쉬었다.
“휴우….”
도둑질이 신나서 방심했던 것일까? 용중일의 추적술에 덜미를 잡혔다니 큰 실책이었다.
물론 화안금정과 음신지력을 써서 끊어내긴 했지만, 화신류와 풍신류에게 주목당한다는 건 그리 유쾌한 결과가 아니었다.
나는 제갈사가 나를 타박할까봐 걱정되었으나, 제갈사는 그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백웅. 방금 전 호법사자 한백령과 진심으로 싸우려 했나?”
“…응.”
“싸워서 이긴 다음엔 어쩔 생각이었지?”
“그야… 그녀를 제압해서 가둔 후 황제를 도둑질하러 갔겠지.”
그러자 제갈사가 끌끌 웃었다.
“정말이지 왜 이리 무른 건지…. 쓰러진 그녀를 이혼대법으로 조종해서 화신류 전체를 손에 넣는다는 발상은 하지 않는 거냐?”
“이혼대법은 많이 쓰고 싶지 않아.”
“이혼대법을 쓴 상대와는 다음 생에서 동료가 될 가능성이 없어질까봐 그런 거군. 또한 네가 이혼대법을 자주 쓴 모습이 흑요석에 노출될 경우, 다른 동료들이 네 이혼대법을 경계해서 너를 신뢰하기 힘들어질까 봐 그런 거지?”
“…….”
정곡을 찔린 것 같다.
“이봐, 그건 양심이 아니야. 양심이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지.”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뒷짐을 지며 천천히 걸었다.
“백웅. 그래도 상관없어. 이미 모은 인재만으로도 잘 운용하면 충분하다구. 그러니까 이혼대법 정도는 맘대로 써. 누가 뭐라고 하냐?”
“동료를 더 만들기 힘들어져.”
“나참. 어차피 동료는 선별해야 해. 지금까지 전생하며 만났던 모든 인간들과 하하호호 웃으면서 손에 손잡고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인류의 멸망이라는 대위기를 앞에 두고 모두가 단합이 될 것 같나?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안 해보면 모를 일이야.”
“왜 몰라? 이미 결과를 봤잖아?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멸망할 거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고 자기들까지 싸우다가 분열해 있었어. 인간처럼 어리석은 종족에게 선순환과 단합이 가능 할 리가 없지. 가능하다 해도 안 할 걸.”
그렇게 말한 제갈사는 앉아서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황제한테서 훔치는 단계만 남았는데, 황제의 소매를 훔치는 건 쪼잔 한 데다 너무 쉬운 일이니, 좀 더 난이도를 올려서 도전해 봐라.”
“어떻게?”
“옥새.”
“전국옥새는 이미….”
“전국옥새 말고, 현재 대명제국의 황제가 늘 소중하게 갖고 있는 옥새를 훔쳐라. 그 정도는 되어야 현재의 네게 수련이 되겠지.”
파밧
나는 제갈사의 주문대로 하기로 했다.
‘옥새라….’
가치로 따지면 그 옥새보다는 전국옥새 쪽이 훨씬 압도적으로 높다. 전국시대부터 시대를 초월해서 내려져 오는데다 삼황오제가 제작에 관여한 강대한 보패급 유물과, 일개 옥새도장이 어찌 비교가 될까? 그렇기에 나는 여태까지 그걸 훔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이 대륙을 다스리는 제왕의 인장이기에 현 시대에서의 가치는 인정할만했다.
제갈사가 내게 옥새를 훔치라는 주문을 한 이유는, 아무래도 황궁의 정세를 좀 더 긴밀하게 살피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간과했던 ‘황제’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하라는 의미로 보였다.
나는 황궁 내부에 은신술을 써서 숨어들어가면서 옥새의 위치에 대해서 며칠 동안 탐색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이야기를 들은 결과, 현 황제의 옥새는 아무래도 천문관들이 관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천문관의 수장이 따로 옥새를 보관하는 특실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며 그걸 관리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보를 알아내고는 내심 생각했다.
‘제갈부가 알고 있다는 소리군….’
동시에 천문관 일족의 황실에 대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옥새란 황제의 권위 그 자체일진대, 아무리 신뢰할만하더라도 다른 일족에게 옥새의 방을 관리하는 열쇠를 맡기다니!
나는 섣불리 정보를 캐려고 내부의 천문관이나 관리를 제압하려 들 경우 위화감이 들통 나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의심이 가는 장소가 떠올랐다.
‘흠… 그러고 보니 황궁 173궁 중에서 유독 따로 떨어진 곳이 있지 않았던가?’
나는 예전에 망량에게서 황궁 내궁의 지도를 받아서 달달 외웠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십 번의 전생을 거듭하면서 황궁도 제 집처럼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궁궐의 위치를 다 외우고 있었다.
그런 내게 있어서 평소에 위화감이 느껴지던 시꺼먼 먹빛의 궁궐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이 문득 의심이 간 것이다.
파앗
나는 검은 궁궐 근처로 잠입해서 근처를 살폈다. 금의위 두 명이 순찰을 도는 중이었고, 일반 병정이 열 명 정도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경계를 잘 살피다가 화안금정을 이용해서 내부풍경을 투시했다.
궁 치고는 좁다.
‘사람 네댓 명이 딱 누울 정도의 공간…. 궁궐 내부에 뭔가가 잔뜩 쑤셔 박혀 있군.’
그리고 안력을 더욱 집중하자, 제일 안쪽에 다소곳이 커다란 상자 하나가 올려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저 상자가 크게 의심되었기에 저것부터 훔치는 게 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계가 덜해지는 밤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재빨리 변태술로 몸을 작은 체형으로 만든 후, 좁은 공간에 쑤셔지듯이 침입했다.
우드드득
6세 아이가 들어가기도 버거울법한 공간이었으나, 변태술은 축골공의 능력이 있었으므로 간신히 그 이하로 줄일 수가 있었다.
나는 내부에 잠입한 후 목표로 했던 상자를 손에 집어서 바로 열어버렸다.
“……!!”
옥새다!
나는 옥새를 처음 보았기에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확실히 전국시대의 고유한 문양이 새겨진 전국옥새와는 달리, 용머리가 새겨져 있었으며 실제로 문서에 찍는데 사용하곤 했던 흔적이 있었다.
나는 옥새를 손에 얻자마자 비등을 써서 탈출했다.
내가 장령곡에 돌아와서 옥새를 제갈사에게 보여주자, 제갈사는 옥새를 조금 살피다가 시시하다는 듯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말했다.
“너무 쉬울 거 같아서 조금이나마 어렵게 했는데, 의미 없군.”
“뭔 소리야. 실패했으면 그 나름 귀찮았을 텐데.”
“네가 대명제국 황제의 옥새까지 훔쳤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냐?”
“무슨 뜻인데?”
제갈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축하한다. 네가 이제 대륙 제일의 대도(大盜)다. 끝!”
“…….”
“도둑업계의 신이 된 느낌은 어때?”
그다지 칭찬하는 게 아니라 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역시 무의미했나? 이런다고 신투지존의 단서가 나오지는 않는 건가.”
“글쎄다. 뭐 도둑질재주가 늘었다는 거에는 의미를 둬야겠지. 넌 전생자니까 이런 사소한 경험도 다 의미가 있어.”
“그런가?”
그러나 바로 그 때였다.
스아앗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는 느낌이 들더니, 나는 웬 허무의 공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허무의 공간에는, 마치 소용돌이 같은 게 무한대로 펼쳐져 있었으며 소스라칠 정도로 넓은 장소였다.
어?!
뭐지?!
‘아니 그것보다 여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여기 분명히 본 적 있어!
근데 어디서 봤더라?
무한의 소용돌이…. 어디서 봤는데.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바로 내 후배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웬 경박해 보이는, 삿갓을 쓴 중년사내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 있는 게 보였다.
턱수염을 마치 산적처럼 기르고 있던 그 자는, 나를 한참이나 응시하더니 삿갓을 올렸다.
“세계 최고의 도둑, 신투지존(神偸之尊) 등장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