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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다음 목표인 십이율 문주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십이율주 하은천 또한 목표로 삼아야하겠지만 그 자에게까지 소매치기를 시도해서 성공할 확률이 너무 희박한데다가 괜한 말썽만 일으킬 듯 했기에 하은천은 포기해도 좋았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창룡문이었다.
창룡문의 성명절기는 거도(巨刀)였으며 전륜도법을 주무기로 하는 문파였다. 과거 십이율을 상대로 비무를 하고 다닐 때 제일 먼저 상대로 삼았던 문파이기도 했다. 나는 창룡문주와 무공을 겨루던 때가 생각나자 문득 추억에 잠겼다.
' 그 때는 화타오금희의 수법을 이용해서 헛점을 유도해서 간신히 이겼지.'
지금 싸운다면 말할 것도 없이 정면에서 그를 일 초만에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절세무공과 기연을 얻은 게 수십 가지가 넘었으며 수양기간도 길었다. 지금의 내게 있어 창룡문주 정도는 운동거리밖에 되지 않았으나 문득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십이율에 비무를 걸고 다니며 애송이 무인의 호승심과 호연지기를 일으키던 그 당시가 그립다.
그 때보다 더욱 아는 게 많아지고 강해졌으나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끝을 보지 못했다.
차라리 그 때 고려의 무공고수로 안주하여 편하게 은거해 사는게 옳은 삶이 아니었을까...?
" ......"
나는 잡념을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런 고민을 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이리라. 특이점, 세계의 멸망, 전생의 수수께끼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10배나 되는 모험과 여정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을 할 시간에 나는 한발짝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뒤를 돌아보기엔 늦었다.
슈슉!
나는 창룡문주를 상대로 손쉽게 소매치기를 성공하고 나서 성과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소매에 묘한 물건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방울?'
여자아이들이 머리에 매다는 조그마한 장식방울인 듯 했다. 그러고보니 창룡문주에게 나이어린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고, 나는 이 방울이 딸에게 주려는 선물이었으리라 짐작했다.
' 돌려줘야겠군.'
나는 창룡문주의 처소에 슬며시 방울을 올려두고 나왔다. 그리고는 연이어서 십이율 문주들에게 소매치기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다음으로는 고려를 지키는 무력단체인 호국동맹(護國同盟)의 맹주인 여명에게 접근해서 소매치기를 했다. 이번의 성과는 지금까지 중 가장 많은 금은보화가 있었기에 나는 내심 놀랐다. 평소에 갖고다니는 돈만 하더라도 보통 사람이 평생 먹고살고도 남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 귀족이라지만 뭐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녀?'
아무튼 잘 쓰기로 마음먹은 후 나는 거련부, 풍원류, 허검류, 비류문, 불종, 북해문을 모조리 털었다. 거침없이 십이율 중 절반 이상을 털어버린 나는 나머지 문파 중 어디를 첫걸음으로 할까 생각하다가 조의선인부터 털러 가기로 했다.
' 해동밀천주 그 놈은 마지막으로 털어야겠다.'
조의선인 문주와 사울아비 문주는 하나같이 강력한 자들이다. 일전의 생에서는 그들의 정확한 무력을 측정한 바 없었으나 확실한 건 중원에서도 찾기 힘든 초절정고수들이라는 점이었다. 십이율 문주중에서도 확실한 상위권으로 취급되는 이상 조심해서 접근해야 했다.
나는 그들에게 변태술을 써서 접근하기 전에 일단 무공부터 관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은신술과 투명술을 써서 조의선인 문주에게서 백여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서 안력을 돋운 채 그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관찰은 약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조의선인 문주는 별다른 무공을 쓰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듯 하다가 문득 휙하고 내가 주시하는 쪽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 뭐지?'
설마 눈치챘다고?
내가 모든 무공과 기척을 감추고 심지어 은신술과 투명술까지 써가면서 백 장 밖에 있는 걸 눈치챘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 건 절대지경의 고수 뿐이다!
나는 소름돋는 기분이 들었으나 상대가 확실히 눈치챈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위화감을 느낀 듯, 조의선인 문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 음... 내가 오랫동안 관찰하다보니 집중력이 흐트러졌나 보군. 그 미묘한 흐름을 읽어낸 건가... 그렇다 해도 대단한 실력이다.'
이윽고 그가 누군가를 만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조의선인 문주와 상대방의 입술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창문너머의 그림자를 읽으며 독순술(讀脣術)으로 그들의 대화를 해석했다.
[ 먼 길 오셨구려.]
[ 조의선인 문주를 뵙습니다.]
[ 크게 예의차릴 필요 없소. 그대는 단의 일족이니 내 상전이 아니겠소.]
흠칫
단의 일족이라고?!
' 들킬지도 모르지만 자세히 보자!'
나는 이번에는 화안금정을 발동시켜서 투시의 공능까지 발동시키며 실내의 벽을 뚫고 그 자의 얼굴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실내에 있는 단의 일족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 누구지? 처음보는 얼굴이다. 홍길동이 아닌데...'
중인가?
가사를 입고 있는 걸 보면 틀림없는 승려다.
단의 일족, 만하령문 대장로이자 절대고수인 율도국왕 홍길동이 온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그 놈은 아닌 듯 했다. 그러자 그 승려는 손사래를 치며 조의선인의 말에 대꾸했다.
[ 별 말씀을. 이 혜초(慧超)는 옛시대의 인간이니... 단의 일족이 된 지금에 와서는 그저 망령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구려 시대부터 민족을 지켜온 조의선인의 수장께 비할 바가 되지 못하지요.]
[ 혜초대사. 서로 겸양을 나누는 건 여기까지 합시다. 내게 중대한 할 말이 있다고?]
[ 그렇습니다.]
[ 설마 근자에 떠도는 신투(神偸)의 경고를 하러 찾아오셨소?]
조의선인 문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으나 단의 일족, 혜초가 그 말에 고개를 젓는 듯 했다.
[ 신투는 그저 소매를 털어갈 뿐 그 이상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하더군요. 그 자의 가진바 무공이 매우 고명한 듯 하니 공연히 시비를 가리기보다 그냥 털려주는 게 옳다고 율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흥... 고명하다고. 나보다 강하단 말인가?]
[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정체불명의 초고수와 은원도 없이 다툴 필요는 없지요. 상대의 목적은 금전보다는 명예인 듯 하니.]
[ ... 우리 십이율 문주들의 명예는? 율주께서는 세상에 십이율을 드러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여기시나 보구려.]
얌전히 털려주라고 하는 혜초의 말에 조의선인 문주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혜초대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율주께서 말씀하시길 곧 기회가 올거라 하셨습니다. 큰 기회를 잡기 전 소악당 때문에 근심불안을 키우는 건 해선 안될 일이지요.]
[ 기회?]
[ 그대는 믿을 수 있는 자이니 언질해두라 말씀하셨습니다. 천계에서 강력한 존재가 갑자기 소멸되었고 얼마 전부터 선계(仙界) 전체가 동결되어 버렸으니... 머지않아 천계에서 지상에 대한 영향력을 거두려 할거라고 예측하셨습니다.]
[ 천계 측에서 지상에 대한 영향력을 거둔다라... 대외활동에 신경쓸 틈이 없을 정도로 큰 일이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뜻이겠구려.]
[ 그렇습니다. 그리고 천계의 감시와 견제가 줄어들게 된다면... 해신(海神)을 잡으려 하십니다.]
[ 해신이라는 존재는 말밖에 못 들었는데 그렇게 강력하오? 그리고 그걸 잡을 수 있겠소?]
[ 정확히는 직접 싸워서 잡는 게 아니라 육망성의 봉인지를 제압해서 마력을 약화시키려 하시는 겁니다. 대전(大戰)이 될테니 마음의 준비를...]
그렇군.
나는 혜초대사의 말에서 현재 하은천의 심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천계에서 뭐때문에 이상이 발생했는지는 모르지만 옥황상제가 부재한 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서왕모가 천계 신선들의 영향력을 거두고 방어태세에 들어갈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천계 때문에 신경쓰여서 하지 못하고 있었던 해신토벌을 위한 첫 발자국으로 예전에 내가 겪었던 것처럼 육망성의 봉인지를 제압하려는 듯 했다.
' 월요의 수호자는 어떻게든 제압했겠군.'
그렇지 않다면 단의 일족이 형편좋게 여기까지 와서 차후의 계획을 논하고 있을 리 없다. 나는 뜻밖의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일단 혜초대사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파앗
나는 손쉽게 변태술로 조의선인 문주의 근처에 접근해서 뇌명소매치기를 성공했고, 이어서 사울아비 문주를 상대로도 손쉬웠다. 뇌명은 본디 시각적으로 큰 효과를 발생시키지만 내공이 극치에 이른 지금 극도로 조용하고 은밀하게 시전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 혜초대사가 한마디 한 결과가 크군...'
두 문주가 어떻게든 날 잡아서 족치려고 모든 감각을 강화하여 경계했다면 아무리 나라도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혜초대사가 일부러 털려주라고 언질하고 간 덕에 그들의 평상시 경계 정도는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큰 난관 2개를 극복하자, 나는 마지막 대상인 해동밀천주의 해동밀천 본부로 향했다.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 후후... 복수의 시간이다.'
이 놈에겐 구원(舊怨)이 있다. 해동밀천주에게 언제고 갚아주기로 마음먹었기에 나는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변태술을 써서 밀천주의 측근으로 변한 후 밀천주의 소매부터 털었다.
파밧
원래라면 소매치기를 성공한 순간 그냥 떠나는 게 정상이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 망량이 신열때문에 죽을위기를 헤매는데 아무 도움도 안주고 도리어 내가 못생겼다면서 조롱했었지, 이 개새끼!'
얌전한 도둑이 강도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마!
나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해동밀천주의 뒤통수를 때렸다.
뻐억!
" 커헉!!"
부지불식간에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해동밀천주는 그대로 기절했다. 나는 놈의 뒷덜미를 잡고 비등을 써서 이동했고, 한적한 탐라도의 외진 산골에 도착해서는 놈의 뺨을 때려서 깨웠다.
철썩 철썩
" 으... 으윽. 넌 누구냐."
나는 면구를 쓴 채로 얼굴을 가리고는 성대를 변조해서 말했다.
" 너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
" 뭣...!!"
" 일전에 나를 조롱한 원한,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러자 해동밀천주가 당황해서 말했다.
"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이름만 가르쳐다오."
" ......"
참 꼴리는대로 사는 놈이군...
동시에 나는 내가 바보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 이전 회차의 일이니까 지금 이 놈이 알 리가 없잖아...'
그럼 지금이라도 복수를 포기하고 가야 하나?
설마 이거 엄한 놈 잡는 건가?
" 에라이!"
하지만 나는 못생긴 놈이라고 놀림받은 원한이 다시 북받쳐 올라서 발을 들어서 해동밀천주의 갈비뼈를 차기 시작했다. 이대로 잊어버리면 나만 억울하기 때문이었다.
퍽! 퍽!
" 으아악. 왜 이러는거냐."
" 아 닥치고 좀 맞아!"
퍽 퍽
나는 내공을 싣지 않고 대충 해동밀천주를 구타하자 약간 속이 풀리는 걸 느꼈다. 해동밀천주도 얻어맞아서 신음성을 흘리긴 했지만 중상은 아니었고 경상이었기에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슥슥
나는 손에 침을 퉤 뱉은 후 놈의 이마에 문지르면서 말했다.
" 음... 앞으로는 착하게 살아라."
" ......"
" 딱히 뭐... 원한은 아니고 충고야."
해동밀천주는 욕하고싶지만 욕했다가는 살아나가지 못할것 같아서 억지로 욕을 참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제야 완전히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면서 해동밀천주를 원래 자리에 요혈을 찍어서 던져놓고 나왔다.
이걸로 십이율 문주한테서 다 소매를 훔쳤다!
남은 건 황제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제갈사에게 돌아갔을 때였다.
" 백웅."
제갈사는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 청하지 않은 손님이 한 놈 와 있어. 보이지?"
" ......"
" 혼자서 내 진법을 다 때려부수고는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더군.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묻지는 마라. 내 힘으로는 힘든 일이니까."
그제서야 제갈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흑단같은 머릿결의 아름다운 소녀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 반갑군, 신투객(神偸客)."
나는 믿겨지지 않는 눈으로 놈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한백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