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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백변신투의 비급을 거의 다 익힌 상황에서 이제 뭘 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 숨겨진 조건...'
이대로는 그저 이삼류(二三流) 무공 8개를 습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법 서생탈주와 변용술 용백변이 난이도가 있다고 하나 사실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뇌신류 최상승절기나 칠대절학 오의를 터득할 때에 비교하면 새발의 피나 다름없으니, 넉넉하게 잡아도 1년이면 다 성취하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신투지존은 틀림없이 이 무공에 숨겨진 조건을 넣었으리라. 단순히 익히는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이 무공을 익힌 채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만 그의 후인으로써 흔적을 쫓아가는게 가능해질 것이다. 신투지존을 찾으려 해도 어디서 뭐하던 놈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천신경의 술법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위치라도 알아야 천신경의 술수를 쓸 수가 있었다.
' 흠... 숨겨진 조건... 어떻게... 찾지?'
나는 고민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 어? 그러고보니."
정작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숨겨진 조건을 찾으려면 그 점부터 확실히 해야하겠지!
나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어떻게 계책을 실행할지 연구를 해 보고는 곧장 움직였다. 내가 비등을 써서 곧장 날아간 장소는 낙양의 한씨세가였다.
파앗
나는 한씨세가의 담장에 붙은 채 투명술과 은신술을 동시에 써서 완벽하게 내 기척을 숨겼다. 나타날 때의 미세한 기(氣)의 잔향(殘響)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걸 눈치챌 정도의 초절고수는 한씨세가에 한 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의심을 가질 수준은 아니리라.
스스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천천히 투명술을 이용해서 깃털보다 가벼운 신법으로 이동했다. 근처의 시비나 하인들이 지나쳐갔으나 그들은 미풍이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장원 여기저기에 잠복해 있던 한씨세가의 식객들도 전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이 정도면 내 은신술이 경지에 오른 게 아닌가 자부심이 들었지만 사실 투명해지는 술법의 위력이 컸으므로 자만하지 않기로 했다.
슥
내가 도착한 곳은 한씨세가에서도 깊은 곳에 거한 내실(內室)이었다. 이 곳은 한씨세가의 고위층이나 직계자손만이 출입하고 지낼 수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나는 예전 기억을 더듬어서 상대방의 기척이 있는 곳을 감지해서 확실한 위치를 찾아냈다.
' 저기 있군. 무공 수련중인가?'
거리는 약 십여 장. 정면에서 보이지 않지만 좌측으로 깊게 들어간 방에서 인영이 요란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기(氣)가 화려하게 움직이며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걸 보면 아마도 화신류의 절기를 수련하고 있으리라. 나는 가까이 가서 관찰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들킬 게 뻔했기에, 일단 계획했던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앗!
나는 멸혼보를 이용해서 빠르게 파고들며 상대에게 접근해서 곧장 습격했다. 상대방은 뜻밖의 습격에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내 습격에 맞서서 출수했고, 따당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경력이 허공에서 한 차례 충돌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이미 상대방의 뒤로 파고들어서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그의 요혈을 찔렀다.
퓨퓩
요혈이 찍히자마자 상대는 모든 공력이 제압된 채 비틀대다가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
풀썩
" ......!!"
상대방은 내게 아무것도 못 하고 일 초만에 제압당하자 충격받은 표정을 지은 듯 했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상대 또한 뛰어난 고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바로 아혈을 찍은 상태였으므로 그의 등 뒤에 서서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 한진성. 물어볼 게 있소.]
그랬다.
내가 제압한 자는 한씨세가의 소가주인 한진성!
그가 지닌 무공은 절정지경을 지나서 초절정의 초입에 이르러 있었으나 지금의 내가 기습할 경우 일 초만에 제압이 가능한 상대였다. 한진성은 내 얼굴도 못 본 상태에서 제압당하자 힘겹게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움직임이 완전히 봉쇄되어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한진성에게 다시 한 번 전음을 보냈다.
[ 용문석굴 빈양남동에 있는 보물들... 그건 어떤 경과로 습득한 것들이오?]
" ......"
[ 난 이걸 묻기 위해 찾아왔소. 내 의문에 협조해줄 생각이 든다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으시오.]
한진성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는 아혈을 풀어서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어깨 위의 움직임을 허락했다. 한진성은 뒤를 돌아보며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 당신은 누구요? 반로환동한 고수요?"
한진성은 아혈을 풀어줬는데도 소리치거나 발악하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쓸데없는 저항을 해봐야 자기 목숨만 달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앞으로 걸어가서 마주보며 그의 말에 담담하게 대꾸했다.
"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원하는 의문에 답을 해준다면 아무 해도 끼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나 주겠소. 그러나 거짓일 경우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소."
거짓을 고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자, 한진성은 천천히 말했다.
" 빈양남동의 보물들은 우리 한씨세가가 대륙에 상회(商會)를 출범시켜서 얻어냈던 보물들 중에서 꽤 가치있고 귀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오. 정확히는 그 중에서 가주께서 내게 하사하신 분량이라고 할 수 있소."
" 가주라면 화신류의 종사 한백령을 말하는 거군."
" ... 그렇소. 당신은 우리에 대해 알고 찾아왔군."
" 난 화신류의 적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백련교의 다른 종파나 방회도 아니며 백련교주와도 무관하오."
" ......"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말을 이었다.
" 한진성, 미안하지만 빈양남동의 보물은 내가 다 가져갔소. 그러나 그 중 백변신투의 비급에 대해서 큰 의문이 생겨서 찾아온 것이오."
" 음..."
" 당신이 화신류의 보물을 가주로부터 이어받았다면 당연히 빈양남동에 봉인하기 전에 한번 다 훑어보았을 것이오. 그런데 백변신투의 비급은 아무리 보아도 삼류무공의 집합소, 화신류의 후계자가 가치있게 여길만한 게 아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보관해둔 이유가 따로 있소?"
이게 제일 궁금했던 것이다.
한진성은 화신류 가주인 한백령으로부터 빈양남동의 보물을 물려받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백금, 청룡언월도 등과 같은 강력한 보물들과 함께 백변신투의 비급을 굳이 같이 보관한 것일까? 가치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게 쓰레기라는 사실은 대번에 알 수 있을 텐데 한진성이 그걸 같이 보관한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러자 한진성이 기가 막힌 듯 말했다.
" 이... 이런 적반하장이. 내 보물을 다 훔쳐가 놓고 어째서 쓰레기가 섞여있는지 따지러 온 것이오?"
맞는 말이다. 나는 옆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 나는 사리사욕때문에 그 보물을 훔쳐간 게 아니오. 청룡언월도도 백금도 모두 대의(大義)를 위해 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소. 허나 백변신투의 비급에는 무언가 심오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에 염치를 무릅쓰고 원소유자인 그대에게 물어보러 온 것이오."
" 뻔뻔하군."
" 부탁하겠소."
한진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나 또한 그 점을 의문스럽게 여겼으나 백변신투의 비급은 옥룡신군(玉龍神君) 한금월(韓錦月)님께서 신투지존(神偸至尊)이라는 대당시대 최고의 괴도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하오. 그래서 나는 한씨세가의 자손으로써 그걸 버리지 못하고 함께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오."
" ... 한금월?"
" 그렇소. 당나라 측천무후 시절 한씨세가의 가주셨던 분이오."
그 순간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옥룡신군 한금월!
그는 분명히 여동빈의 회상에 출연했던 인물이 아닌가?!
[ 검선이여. 사정이 그러하다면 지금 측천무후를 직접 치는 일은 안 될 말이오.]
[ 측천무후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후 신변의 위협을 경계해서 강호의 최고수들을 불러 모아 육걸(六傑)을 결성했소. 육걸은 모두가 현 무림의 십대고수이며 나도 한때 거기에 속해있었소. 허나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소.]
그는 팔선에게 도움을 주고 있던 인간동료이자 대당시대에 천하 십대고수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검선 여동빈이 낙양의 측천무후를 조사하고자 할때 함께 황궁에 잠입했으며, 혈사자라는 사파 십대고수에게 낭패를 당해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천둔검법(天遁劍法) 구극패왕참(求極覇王斬)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분명히 그는 그 당시에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 후 백련교와 손을 잡고 한씨세가 전체를 그들에게 의탁하기로 했다. 그리고 백련교 화신류(火神流)에 투신하여 그 이후 천여 년동안 한씨세가를 백련교의 명문세가로 발돋움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옥룡신군 한금월이 신투지존에게 백변신투를 받았다니?!
나는 뜻밖의 이야기에 한진성에게 말했다.
" 한진성! 그게 무슨 말이오. 혹시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소?"
" 미안하지만 나도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소."
" 가주 한백령이라면 알고 있겠소?"
" 내가 그걸 어찌 안단 말이오? 제발 부탁이니 더 이상 우리 한씨세가를 괴롭히지 말고 떠나 주시오. 그대의 고명한 실력은 알았으니 보물을 훔치고 본가에 침투한 일에 원한을 갖지 않겠소."
한진성이 간곡히 부탁하는 말에 나는 움찔했다. 그의 말대로 더 이상 캐묻는 건 도리가 아니었으나, 동시에 나는 마음속에서 탁하고 어두운 선택지가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걸 느꼈다.
... 한진성에게 이혼대법을 건다.
그리고 완전히 정보를 토해내게 한 후, 한진성을 이혼대법으로 조종해서 한백령에게 틈을 만들어 제압한다.
그리고 한백령에게도 이혼대법을 걸어버리고...
그 다음은 그녀를 이용해서 백련교주를...
' ... 으으, 안돼!!'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혼대법을 이용해서 마치 고리를 잇듯이 조종에 조종을 거듭하는 방식을 쓴다면 틀림없이 나는 극악한 악인이 되고 말 것이다.
대신에 나는 타협책을 찾아내고는 한진성에게 말했다.
" 좋소. 그렇다면 한금월의 무덤은 어디 있소?"
" 뭐... 뭐라고. 설마 당신은 우리 선조의 무덤을 팔 생각이란 말이오?"
" 아니오. 그의 영(靈)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이오. 나는 영을 초혼(招魂)하는 능력이 있소."
" 미친 소리."
" 정 의심스럽다면 당신을 직접 데려가서 보여주지."
" 내가 무덤의 위치를 말하지 않겠다면..."
나는 위협하듯 말했다.
" 한씨세가의 식객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한백령을 없애겠소. 말해두지만 내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오."
물론 진심은 아니다.
" ......!!"
" 서로 좋게 좋게 갑시다."
한진성이 움찔했다. 그는 이윽고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힘없이 입을 열었다.
" ... 백련교 본단 근처에 있는 화신류의 종묘가 있소. 거기의 상단에 모셔져 있소."
" 좋소. 갑시다."
내게 호의를 베풀어줬던 한진성에게 이런 협박을 하는 게 그리 내키진 않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중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에게 보답해야겠다. 협박이긴 해도 이게 이혼대법을 걸고 인형처럼 혼을 갖고노는 것보다는 예의있는 행동이다.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한진성을 데리고 백련교 인근으로 이동한 후 빠르게 화신류의 종묘로 뛰어갔다. 그리고 종묘에 도착해서 산의 계단을 모두 오르자, 한진성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 순간이동이라니 믿기지 않는군... 당신은 대체 어떤 자요?"
" 위패가 많군. 이 중에서 한금월의 위패가 어디 있소?"
원래라면 그냥 이 종묘에 도착한 순간 강력한 영을 찾아서 소환해도 되었을 테지만, 이 곳은 천여 년 역사를 지닌 화신류의 종묘이므로 한금월만큼 강력한 영이 많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분간하기 힘들지도 몰랐으므로 위패를 정확히 찾아내는 게 필요했다.
" 저기 있소."
" 흠."
나는 한진성이 지목한 위패를 집어든 후 그대로 천신경의 술수를 발동했다.
우웅!
잠시 후 십지의 불꽃 중 하나가 꺼뜨려졌고 눈 앞에 옥룡신군 한금월의 혼이 나타났다. 천신경으로 인해 일반인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구현화되자 한진성은 크게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고, 옥룡신군 한금월의 혼은 내게 말했다.
[ 무엇을 원하여 나를 불렀소...?]
" 옥룡신군 한금월.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신투지존과 백변신투에 대해 알고있는 모든 정보요. 내 질문에 모두 대답하시오."
움찔하고 한금월의 영이 동요했다.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 당신은 어떤 연유로 백변신투의 비급을 받게 된 것이오?"
[ 으음... 어째서 그걸 알고 싶은 것이오.]
" 시간낭비하지 맙시다. 어차피 당신은 내 소원을 들어줘야만 극락으로 승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오?"
[ 그렇긴 하지... 허나 그건 신투지존과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는데.]
" 이미 죽었잖소? 살았을 때의 약속은 더 이상 신경쓰지 마시오."
[ 흠 그러지 뭐.]
한금월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 나는 한씨세가를 이끌고 화신류로 투신한 후 열심히 그들의 무공을 연마하여 15년만에 화신류의 장로가 되는데 성공했소. 사실 강호십대고수의 명성이 있었기에 좀 더 빨리 될 줄 알았는데 화신류엔 정말 초절정고수가 많더군... 아무튼 내가 가문을 반석에 올리려고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을 때 그 자가 나를 찾아왔소.]
" 신투지존 말이오?"
[ 그렇소.]
" 당신은 신투지존과 어떤 관계기에 그의 방문을 받은 것이오."
[ 그는 정사양도가 없는 괴인이면서도 나름대로 의리있는 자였기에, 내 술친구였소. 지음(知音)까지는 아니라도 지기(知己)였지.]
나는 머리를 굴렸다.
' 그 말대로라면 신투지존은 여동빈과 거룡의 결전이 치뤄지고 15년 후에 옥룡신군을 찾아갔다는 말이군...'
신투지존은 15년동안 뭘 한 것일까?
내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금월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 신투지존은 전세계를 다 돌아다닌 결과 마침내 자기가 원하는 걸 찾았다고 했소. 그리고는 내게 백변신투의 비급을 주면서, 이걸 본가에서 보관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동시에 이걸 익혀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소.]
" 원하는 걸 찾았다고? 그게 뭐요."
[ 음... 그게 분명히...]
한금월이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 헌원검의 진본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는 말이었소.]
" ......!!"
[ 다만 그 장소가 극히 위험하므로 가기 전에 자신의 후인을 남기고 싶으니 내게 백변신투의 비급을 맡긴 거였지...]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진본을 찾았다고?'
신투지존은 당대 공손세가 가주였던 공손벽에게서 그럴듯한 정보만 받았고 실상 공손벽이 갖고있는 헌원검도 진짜가 아니라 복제품에 불과했다. 심지어 지금까지 헌원검을 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며 그 선지자조차 헌원검이 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신투지존은 헌원검의 진본을 찾아냈다는 말인가?!
나는 황당해서 물었다.
" 그, 그 장소가 어디요?"
[ 그건 내게 말하지 않았소. 다만 내게 단서는 남겼지.]
" 단서?"
한금월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 백변신투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혀 천하제일의 신투가 된 자는 저절로 자신의 행적을 알 수 있으리라고 말했소.]
" 천하제일...?"
나는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정보를 유추할 수 있었다.
틀림없다.
[숨겨진 조건]은 백변신투의 무공을 익혀서 천하제일의 신투가 되는 것!
그래야 백변신투를 진짜로 대성해서 신투지존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했다.
" 그런 게 어딨소? 그런 삼류무공으로 어찌 천하제일의 신투가 될 수 있으며, 천하제일로 인정받은 것만으로 어떻게 신투지존의 행적을 알 수 있단 말이오."
[ 음... 그러고보니...]
" 그러고보니?"
[ 천하제일의 신투란 본디 훔칠 수 없는 걸 훔칠 수 있는 경지라 했었소. 그게 아마 단서였던 것 같소.]
" ......"
훔칠 수 없는 걸 훔친다?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이지?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이 말장난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대도가 내놓은 선문답이며 천 년에 걸친 보물찾기의 시작인 것이다. 나는 한금월에게 말했다.
" 좋소. 그럼 한금월, 공손세가의 후예에 대해서 그가 뭔가 얘기하진 않았소?"
[ 그 얘기도 했었소. 공손벽의 장남인 공손중과 차남 공손석을 찾아냈으나 그들은 이름모를 살수들에게 척살당해 있었다 하오. 다만 막내딸인 공손혜란의 행적은 정말로 묘연해져서, 그녀가 공손가의 피를 이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었소.]
" ......"
강호공적으로 지정된 공손세가의 후예들은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으나 삼남매 중 두 오빠가 모두 살해된 모양이었다. 나는 씁쓸함을 느끼며 말했다.
" 알았소. 돌아가시오."
나는 한금월을 돌려보낸 후 한진성에게 말했다.
" 무례를 용서하시오. 보다시피 나는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 했을 뿐이고 그대 가문에 피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소."
" 정말 당신은 어떤 존재요? 설마 천 년 전 사조의 영혼을 소환할 수 있다니... 그런 술법은 들어본 적도 없소."
한진성은 놀라워하더니 말했다.
" 기인이여. 혹여 우리 한씨세가와 손잡을 생각은 없소? 그대가 사악한 자가 아닌 듯 하니 본가의 역량을 다해서 그대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소."
" ... 그럴 생각은 없소. 오늘 본 건 잊어주시오."
나는 한진성을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고는 한씨세가를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한씨세가의 조력을 얻는다 했겠지만, 지금 나는 모든 계책과 조직운영을 제갈사에게만 맡겨두고 있다. 그런 제갈사에게 말도 하지 않고 엉뚱하게 손을 잡은 세력을 늘리는 건 민폐밖에 되지 않았다. 필요하면 제갈사가 나중에 다시 요청할 테니 그때 한씨세가와 연수해도 될 것이다.
나는 제갈사에게 돌아와서 이번에 얻은 정보를 넘겼다.
그러자 제갈사는 말했다.
" 이런 정보는 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해. 요점은 네가 무사시를 확실히 제압할만한 승산이 보이느냐지. 그래서 백변신투의 무공으로 변수를 만들 길이 보이나? 너무 길을 돌아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군."
" ......"
"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 음... 수련을 해야할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군."
" 큭큭큭... 무사시를 때려눕히는 것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정말로 귀찮구만. 정 그렇다면 내가 과제를 내 주지."
제갈사가 입을 열었다.
" 구파일방 장문인, 십이율 문주, 그리고 현 대륙황제에게 일수탈금 수법을 써서 소지품을 훔쳐라. 이걸 해낸다면 천하제일의 대도라고 칭해도 좋겠지."
" ......"
" 아, 참고로 은신술은 써도 되지만 투명술은 쓰면 안돼. 그리고 한 달 내에 못해내면 그냥 무사시나 쓰러뜨리러 가라. 더 이상 시간낭비는 좀 그렇군."
나는 멍해졌다.
한 달 내에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에게서 모두 소매치기를 성공하라고?
그게 가능할까?
" 쳇...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나는 이윽고 이를 악물었다.
27회차 전생자의 의지를 걸고 해내고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