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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841화 (84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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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남궁명과 남궁환 부자를 때려 죽인 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주요고수를 모두 잃었으니 남궁세가는 멸문한 거나 다름없으리라.

내가 손에 피를 묻힌 채 밖으로 걸어 나오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수백 명의 남궁세가 무사들이 움찔했다. 그들 중 선두에 있던 지공대의 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남궁환 공자는…,  가주님은….”

“둘 다 뒈졌다.”

“…….”

“왜 그러지? 안 덤비나?”

내가 조롱하듯 중얼거렸지만 그들 중 누구도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덤벼봤자 몰살이라는 걸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내가 이런 짓을 왜 하고 있을까? 나는 조롱을 하고도 그다지 재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지루할 뿐이라서, 콧숨을 한 번 쉬고는 지공대주에게 말을 걸었다.

“남궁세가의 금전과 보물을 모두 갖고 와라.”

“뭐… 라고?”

콰과광

나는 손을 내뻗어서 내공을 실은 일 장을 남궁세가 뒷산에 날렸다. 수백 장을 뻗어나간 장력은 대번에 조그마한 동산만한 장인(掌印)을 뒷산에 새겼고 모래폭풍이 잠시 휘날렸다. 현재의 내 내공이라면 이런 짓도 가능한 것이다.

“……!!”

내 무위를 보고 좌중이 얼어붙자 나는 으르렁거렸다.

“잔말 말고 다 가져와. 만족스럽지 못하면 다 죽이겠다.”

“아…알겠습니다.”

“도망친 놈이 있어도 죽인다.”

잠시 후, 그들은 허겁지겁 움직이면서 남궁세가의 금전과 보물을 가져오는 기색이었다. 약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내 앞에 상당한 양의 금은보화가 사람 키만 하게, 2덩이나 쌓였다. 정작 가져온 본인들도 그 재력에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 중 한 주먹만 가져도 한사람이 평생 먹고살만한 금액이란 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재력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금은보화를 보고도 그 다지 끌리는 기분이 들지 않아서 냉막한 인상을 지었다.

슈르륵

나는 남궁세가의 모든 재산을 목갑에 쓸어 담고는, 말없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 여인들을 감옥에서 꺼내서 구출했다. 그리고 상황을 설명한 후 말했다.

“나는 금전을 대가로 무영문에게 당신들의 처우를 의탁할 생각이오. 여기에 동의한다면 나를 따라오면 되오.”

그 말에 모두가 동의했고, 나는 여인들을 목갑에 같이 집어넣고는 비등으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무영문으로 향해서 검마를 만났다.

검마는 내가 다시 찾아오자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흐음… 그리 성급하게 내 앞을 빠져나가고는 이제는 웬 여인들을 한 가득 데려왔단 말인가?”

“이들은 불쌍한 자들입니다.”

내가 검마에게 남궁세가의 횡포와 정황을 이야기하자, 그는 들으면서 놀라워했다. 그리고 나는 남궁세가에서 긁어낸 재화와 보물을 모두 목갑에서 쏟아내며 말했다.

“이 모든 게 남궁세가의 재산입니다. 부디 여인들을 돌보는데 써 주십시오.”

“흠… 사실 전에 데려온 해적포로들만 해도 꽤 번거로운 일이네만…, 본문은 자선사업을 하지도 않고, 이런 일은 사실 천직이 아닐세. 아무리 보물을 준다지만….”

흑요석으로 동료가 된 것도 아니고 내게 자세한 사정을 듣지 않아서일까? 검마는 난처해하면서도 꽤 못 마땅해 하는 기색이었다.

‘지금이라도 검마에게 상황을 설명 할까?’

하지만 다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한다 한들,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검마의 운명을 나락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어쩌면 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암기(暗氣)가 검마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미움받을 각오를 하고는 일단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검마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이 여인들을 돌봐주신다면 절세무공을 알려드리지요. 그 걸로 되겠습니까?”

“절세무공?”

“네. 남궁명을 쳐 죽일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그거 흥미롭군….”

나는 이윽고 칠대절학의 요결과 수련법을 모두 검마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검마는 크게 놀라워했고,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대체 뭐지? 신이(神異)한 법술과 도구를 다루는 건 물론이고 그 무공이 절세고수인 것으로 보이니…. 그대의 목표는 강호를 제패하는 것인가?”

“강호를 제패하고자 한다면 이런 궂은일을 굳이 사서 하겠습니까? 세력이나 불리고 있겠지요.”

“…….”

“저는 제 일을 할 뿐입니다. 강호에는 별로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 문주님의 조력을 부탁드립니다.”

“음… 알았네.”

“그리고 서문혜 소저를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게.”

나는 검마의 허락을 얻어서 서문혜를 만나러 갔다. 서문혜는 자기 방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서문혜 소저.”

“백웅 님.”

“사실은, 그대에게만 해야 할 말이 있소.”

나는 이윽고 개략적인 전후사정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검마에게는 말해주지 않고 서문혜에게는 말해준 이유 - 그것은 서문혜가 선조회귀(先祖回歸) 현상 때문에 거신족의 피를 직계로 이어받아서 강한 신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로 전해지는 암기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라면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스….

‘역시… 비밀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혼돈이 인간을 타락시킨다.’

나는 화안금정으로, 내가 신화시대의 비밀을 말할 때마다 영문 모를 먹빛 기운이 이 근처에 감돌며 서문혜에게 빨려 들어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말(言)에는 힘(靈)이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흑요석보다 직접적 영향은 덜 할 테지만 신비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었다.

검마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건 잘한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서문혜는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낸 듯 했다. 서문혜는 약 한 시진에 걸친 내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백웅 님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원래 저와 아버님은 백웅 님의 동료였던 거군요.”

“그렇소. 그러나 흑요석은 물론이고, 내 언령까지도 신화의 암흑에 물들어서 더 이상은 그 방법을 쓸 수 없게 되었소. 그래서 복희를 부활시키는 것을 목표로 이번 생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오.”

“…….”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하던 중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장령곡으로 가겠어요.”

“그래주겠소?”

“네. 제갈사의 도움이 되는 게 결국 백웅 님께 은혜를 갚는 일이겠죠. 또한 그 말대로라면 백웅 님에게 흑요석을 받고 버틸 가능성이 있는 건 저 뿐이에요.”

“아니…, 그 말은….”

스윽

서문혜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단호한 결의를 머금은 눈으로 말했다.

“흑요석을 주세요.”

“안 되오. 지금의 흑요석은 너무 흉악한 물건이라 초절정고수조차 그 자리에서 이성을 잃고 자살을 택할 정도요.”

“하지만 전 거신족의 후예이자 염제 신농의 핏줄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

“잘못되더라도 전 백웅 님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고민하다가 서문혜의 눈에 담긴 뜻이 진심이란 걸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커다란 흑요석을 건네며 말했다.

“만일 당신이 잘못된다면 내 죽음으로 사죄하겠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괜찮을 테니까.”

파아앗!!

내가 기억을 전송하자, 그녀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떠는 듯 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스으으으으 -

백발이 더 선명해진다. 피부 또한 완전히 새하얗게 변했다.

게다가 그녀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꿈틀거리면서, 마치 용맥처럼 장중하게 흐르는 게 느껴졌고, 피부에 손을 대자 혈맥이 압착되는 현상이 기경팔맥을 통해서 느껴졌다.

‘신의 힘을 각성하는 현상인가!’

이건 예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그 때는 미호가 요력을 흡수해서 안정시키려 했었지만 실패했었고, 서문혜는 결국 나인교주로 각성해버리고 말았었다. 나는 그 당시 미호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 안에 회오리치는 혼돈의 힘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니라.]

[나는 그 힘을 요력으로 바꾸어서 일부를 내 것으로 만들었지만, 쌓여있는 힘 하나하나가 세상의 목소리를 흘려 넣고 있느니라. 마치… 세계의 어둠과 소통하는 것처럼 엄청난 숫자의 의지가 그녀에게 연결되어 있다.]

[방금 전에 본녀가 조금만 실수했으면 어둠의 힘에 먹혀서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미호는 서문혜가 지닌 잠재력이 혼돈의 힘과 연관이 있다고 단언했었다. 그리고 미호는 서문혜의 힘을 약간 흡수한 것만으로도 크게 역량이 향상되었다.

즉 - 서문혜의 현재 상태는 바로 가공할만한 혼돈이 몸속을 맴돌고 있다는 뜻이었다.

‘흉신의 후예는 이 힘과 육체를 손에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위이족이 서문혜의 힘을 얻을 경우 나인교주가 되어서 신적인 힘을 휘두르는 것인가….’

설마 흑요석에 담긴 암기가 그녀의 각성을 촉발시킨 것인가?!

하긴 그 당시에도 흉신이 천지의 음양을 반전시킴으로써 음기가 천하에 강대했던 상황이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어둠이 균형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는 그때와 지금이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푸욱

나는 그대로 이혼대법의 절기를 응용해서 그녀의 심장에 내 손을 부드럽게 꽂아 넣었다.

이것은 실제로 물질을 관통하는 게 아니라 심령수술(心靈手術)의 일종으로써, 내 손을 영체화시켜서 혼백을 직접 만질 수 있게끔 변화시키는 수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심장을 영수(靈手)로 움켜잡자마자 그녀의 혼돈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으…!!

‘컥…!’

엄청난 기운!

그와 동시에, 미호가 말했던 대로 무려 수만 개나 되는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통해서 내 귓전을 때리는 게 느껴졌다. 그 목소리 하나하나는 미약했지만 수만 개씩 울려대니 종잡을 수가 없었고 귀가 너무 아팠다.

‘제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그 목소리의 진정한 실체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려 했다. 미세한 목소리가 중첩되어 있어서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을 집중하다보니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중원어가 아니지만 어쨌든 인간의 언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들은 이족이 아니라 인간인 건가?

나는 그 목소리를 하나하나 들어서 기억하려고 애썼다. 뇌정경까지 동원하며 발음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내가 아는 언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인간의 말이라면 누군가가 해석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내 몸에 격렬하게 흘러들어오던 어둠이 갑자기 내 음신지력과 크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어둠의 힘은 음신지력과 뒤섞이더니 이윽고 마치 기름방울이 엉키듯이 융화되지 않고 내 체내에 쌓였다. 마치 과식을 한 듯한 느낌이라서 불쾌감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서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스으으

서문혜는 이윽고 머리카락이 희고 투명한 백발로 변했다. 차라리 은발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그 머리카락이 흩날리더니 서문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정말 개운해요.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혹시 정신적으로 괴롭거나 사악한 기억이 덮쳐 오진 않소?”

서문혜는 그 자리에서 잠시 명상을 하며 생각했으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옥좌의 기억을 받았잖소?”

“그저 소름끼치는 기억이라는 인상 밖에 들지 않아요.”

역시.

마도사인 제갈사나 신의 혈족인 서문혜 정도라면 흑요석의 암기가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녀의 정신저항력은 인간보다 훨씬 높은 것이리라.

나는 불행 중 다행인 상황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억을 봤으면 알겠지만 당신은 아마 천하무적의 힘을 지금 손에 넣었을 것이오. 단순한 육체의 힘만으로는 전성기의 나인교주와 대등한 수준의….”

“그렇겠군요.”

“하지만 이 세상의 어둠은 두렵기 짝이 없소. 부디 몸조심하시오.”

“알겠어요.”

나는 검마에게 설명을 한 후, 서문혜를 데리고 비등을 써서 장령곡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갈사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 제갈사가 힐끔 서문혜를 보더니 말했다.

“서문혜. 운이 좋아서 당신을 동료로 얻었지만 아마 더 이상은 전생동료를 만들 수 없을 것 같군. 당신처럼 선조회귀로 신의 힘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이 시대에 동서양을 통틀어서 더 이상 없다고 봐도 무방해. 그러므로 당신은 이번 생 백웅의 무력(武力)이 되어줘야 한다.”

“알고 있어요.”

“장소는 내가 마련해 줄 테니 오늘 부터 칠대절학을 포함한 백웅의 무공을 모두 수련하도록. 당신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더 강해질 것이다.”

나는 제갈사에게 말했다.

“제갈사. 이제 해야 할 일은 대충 다 한 것 같은데 뭘 하면 되지?”

“다 하다니? 아직 할 일은 한참 남았어.”

제갈사는 퉁명스럽게 대꾸한 후 말했다.

“곧장 아라사 제국으로 가서 얼음에 갇힌 마룡과 손을 잡아라.”

“뭐?!”

“깜박했냐? 이전회차에서는 그 마룡과 서방대마법사 멀린 중에 멀린의 편을 들었지. 이번에는 그 마룡의 편을 들어보라는 소리다.”

“……!!”

마룡!

그것은 벨로프를 위시한 서방정교회 세력들이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이반 4세를 쓰러뜨리기 위해 데려온 신적 존재였다.

수백 년간 얼음 속에 갇혀있었다는 그 용의 봉인은 내 음신지력으로 충분히 깰 수가 있었는데, 그 때 멀린의 도움을 받아서 봉인을 유지할지 아니면 용의 유혹을 받아들여 봉인을 깰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때 멀린의 도움을 받기로 했었고 브리타니아 콘월까지 가서 멀린에게 보수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마룡의 도움을 받는다면 무고한 인간들이 죽게 된다. 틀림없이 놈은 사도급 재앙이기 때문에 큰 피해가 발생하리라.

“말도 안 돼. 그건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냥 해 봐. 대신, 용과 제대로 교섭을 할 수 있는 비책을 알려 주지. 희생자 없이 마룡을 제어하는 것 따위 간단한 일이지.”

그런 게 있단 말이야?

나는 제갈사의 계책을 듣고 난 후 벨로프 수도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용이 갇힌 얼음이 있는 동굴로 들어가서는 얼음에 손을 대고는 음신지력을 불어넣었다.

쿠구구

얼음이 음신지력에 반응해서 깨지려고 하는 기색이 보인다. 그러자 예전처럼 머릿속에 두 종류의 음성이 동시에 메아리쳤다.

[그만두게! 세상에 재앙을 풀어놓지 말게!]

[흐으… 흐으… 나를 풀어주려는 건가?]

전자는 멀린이고 후자는 마룡이다.

[그대가 필요한 게 무엇인가? 무엇이든 간에 나, 왕의 마법사이자 성검의 안식자, 성배의 수탐자가 원하는 보물을 주리라! 봉인의 해제를 멈춰라.]

[계속 하라…. 날 풀어준다면…, 나는 네 적수를 핏빛 말뚝에 꿰어죽이리라.]

이윽고 그들이 저마다 나를 설득하는 상황이 되자, 나는 멀린을 무시하고는 마룡에게 말했다.

[용이여. 널 풀어주는 대신에 나는 너와 계약을 맺으려 한다. 동의하는 가?]

[뭐라고…? 계약이라고?]

마룡은 불쾌한 듯 으르렁거렸다.

[건방진 놈…! 이미 봉인은 반쯤 풀렸다. 널 이대로 나가서 해치우는 것도 여반장이다…!]

[그래?]

쿠구궁

내가 음신지력을 거꾸로 사역하자 봉인이 다시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마룡은 주춤거렸고 이내 앓는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좋다…, 계약을 하지…. 어떤 계약을 하려는 것인가?]

[너는 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대신 3회로 한정해 주지. 그 이후에는 자유일 터, 어떤가?]

[흐음… 나 자신을 자해하라는 명령 따위는 받아들일 수 없다.]

[걱정 마라. 그런 건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걸로 제약은 끝인 걸로….]

[아니. 인간을 함부로 살상하면 안 된다.]

[귀찮은 조건을 붙이는군….]

[잠깐만, 기왕 하는 거 상세하게 얘기해보자구….]

나는 이윽고 용과 계약조건에 대해서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 토론모습을 옆에서 영체로 보고 있던 멀린이 황당한 듯 내게 소리를 질렀다.

[동방의 기인이여! 저 용은 억제할 수 없다. 섣부른 자만심으로 재앙을 불러일으키지 말라.]

나는 멀린을 또 무시하고는 마룡과 이야기를 마쳤다.

[…계약을 할 테냐?]

[좋다. 할 테니 꺼내다오.]

[알았다….]

콰칭!!

잠시 후 음신지력을 강하게 불어넣자 마룡이 갇혀있던 얼음이 깨졌다.

쿠구구궁….

마룡은 깨어나자마자 세상을 향해 포효하더니 검은 눈을 번득이며 내게 말했다.

[애송이 놈. 나는 드라큘라 대공(大公), 인간을 초월한 자!! 계약조건에 널 해하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다는 걸 기억하느냐?]

쿠콰콰쾅

마룡이 곧장 내게 용의 입김을 쏘아내자 동굴이 통째로 무너지면서 전방의 산이 다섯 개나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사도급 존재라고 할만한 위력이었으나 나는 드라큘라 대공을 보며 씨익 웃었다.

“기억하고말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후우우우

용의 입김을 피한 상태에서 나는 양손에 백을 끌어당기는 요결을 시전했다. 그러자 허공으로 활강하려던 마룡 드라큘라가 멈칫거리더니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었고, 그가 포효하며 분노했다.

[이 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음신지력으로 얼음을 깨면서 동시에 이혼대법으로 당신의 백을 다 긁어왔지. 이렇게 깨어난 상태에서는 안 될 일이겠지만 봉인된 상태에서는 아주 쉬운 일.”

나는 양팔을 크게 벌려 태극을 그리며 말했다.

“혼을 내놔라!”

이혼대법 (移魂大法)

탈혼(奪魂)!!

잠시 후 드라큘라의 영체가 크게 요동치더니 육신과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혼이 백의 흡인력 때문에 끌려 들어오는 중인 것이다. 나는 용의 혼이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버티자 살가죽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느꼈으나, 줄다리기는 확실히 내게 유리하다는 게 느껴졌다.

‘음신지력 덕분에 흡인력이 훨씬 강해졌다!’

드라큘라가 외쳤다.

[크악… 아아악…! 나…나는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사악한 술법으로 용화(龍化)한 이유…. 언젠가 [옛 지배자]가 되어 내 조국의 백성만큼은… 구원하려 했건만…!]

슈아악!!

약 반 시진에 걸친 혈투 끝에, 나는 줄다리기에서 이겨서 용의 영혼을 가질 수가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제, 제기랄…. 엄청 힘드네.

용의 영혼을 이혼대법으로 얻으려 하면 이렇게 힘든 건가?

‘백을 다 긁어 와서 이긴 싸움이나 다름없었는데, 혼 자체의 힘이 이렇게 강력하다니….’

두 번 하라면 도저히 못 할 것 같다….

나는 체력과 기력이 거의 다 떨어져서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으나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손 위에 떠올라 있는 용의 혼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이 용의 혼은 강력한 마도구의 재료로 쓸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그냥 흡수해서 내 마력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 마법사나 마도사들이 꿈에서도 그리는 최고의 재료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잘 됐어. 이걸로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인간의 도리도 잃어버리지 않고, 주변피해도 무마시키지 않았는가?

잘 된 것이다!

내가 미소 지으며 용의 혼을 바라보고 있을 때, 머릿속에 멀린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럴 수가…!! 거악이 소악(小惡)을 잡아먹었구나…! 그대…, 사악한 자여. 나는 그대의 행적을 주시하겠노라….]

파앗

멀린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 말에 껄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

“…….”

내가 거악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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