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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여와한테서 복희의 가면을 얻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그것보다 여와가 복희의 가면을 가진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엉켰고 당장 뭘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일단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지금은 내가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망량선사의 마을에서 물러나온 후, 먼저 옛 하나라의 수도를 찾아가기로 했다. 여씨춘추의 단서부터 알아내고 난 후 제갈사에게 정보를 몰아서 주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파앗!
‘흠, 여기가….’
나는 하남성(河南城)의 동북쪽 지방에 도착했다. 사실 나는 이곳에 직접 와본 적은 없었으나, 근처에 복양성(濮阳城)이 있으며 복양에는 몇 번 들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등으로 먼저 복양에 간 후에 빠르게 달려서 여기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는 양성(陽城)이라고 불리는 곳의 근처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나는 근처 마을을 통과하며 역한 물고기 비린내와 시장냄새를 맡으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시장상인들에게 수소문했다. 그리고 그 단서를 바탕으로 여불위가 말해줬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에서 약간 떨어진 외성인근의 북쪽 분지이다. 하지만 여불위가 말했던 대로 세 개의 조그마한 산이 요철자 모양으로 조그마한 분지를 감싸고 있었고, 여기저기에 사당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 지형의 가장 안쪽마을 우물 속에 여불위가 비밀공간을 만들어서 마도서를 비장 해놓았다는 사실을 본인에게 직접 들었으므로 찾아가기로 했다.
‘다 왔군.’
하나라는 여러 번 수도를 옮겼다. 하조(夏朝)의 개국자인 우왕이 처음 제위를 얻기 전 은거했던 장소가 바로 양성이었고, 그 양성이 하나라의 첫 도읍이었다. 그리고 2대왕인 하후계(夏后啓)가 천도를 행해서 옮긴 도읍은 낙수(洛水) 북쪽의 분지였으며, 거기서 또다시 제구(帝丘)로 도읍을 옮겼으니 무려 3번이나 도읍을 옮긴 셈이다.
그 중에서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봉인하기로 마음먹은 장소는 바로 고대 양성이 있던 지역, 즉 하나라의 첫 도읍지였다. 물론 첫 도읍지라고 하지만 수천 년 이상 이전 신화시대의 일인지라 정확히 아는 자가 없었다. 여불위는 엄청난 자금력과 정보력을 이용해서 그 위치를 특정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안쪽마을에 들어서서 우물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가자, 우물의 통로가 돌더미로 막혀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공파뢰화의 수법을 사용해서 막힌 우물을 뚫었다.
콰앙
우물 통로는 갈수록 깊어졌고 고대 건축공법으로 지어진 티가 났다. 나는 통로의 벽면을 마감한 소재가 튼튼하며 강한 걸 볼 수 있었고, 수천 년이나 무탈하게 버틸 수 있었던 지지력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긴 여불위가 최고의 마도서를 수집해서 보관하려 했던 장소라면 2천년을 버틴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리라.
나는 통로의 안쪽 통로로 들어가서 여불위에게 들었던 대로 문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벽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벽에 거대한 음각(陰刻)이 새겨져 있으며 그 형태가 마치 술잔처럼 생긴 걸 보고는 중얼거렸다.
“작(爵)이군.”
대륙의 삼대(三代), 즉 하상주(夏商周)의 청동기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작(爵)이었다. 작이란 삼대 시대의 의례에 쓰인 술잔을 일컫는 것으로, 작은 술을 따르는 류(流)와 툭 튀어나온 미(尾)가 있다. 그리고 삼족(三足)이 위의 술잔을 떠받치는 형태였다.
여불위의 말로는 이 벽은 마도의 공양의식을 치러서 만들어낸 강한 수호관문으로써, 은허(殷墟)의 작(爵)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어낸 음각이 바로 열쇠 역할을 한다고 했다. 당연히 이 벽을 열 수 있는 방법은 똑같은 모양의 술잔인 은허의 작을 구해서 이 벽의 구멍에 밀어 넣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봉인이 악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보통 인간이 만일에 이 유적을 발견해서 출토하려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모양의 작을 찾아내려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작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여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나는 여불위에게서 들은 주문을 외웠다.
우우웅
파칭!!
주문이 외워지자 마치 없던 자리가 채워지는 것처럼 무형의 무언가가 음각모양을 채웠다. 그리고 채워지는 순간 음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그 자리는 도로 벽으로 채워졌고, 이윽고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올라갔다.
그렇다. 처음부터 해방주문을 아는 자가 주문을 외워야 통과할 수 있는 구조. 애시 당초 여불위는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보물을 넘겨 줄 마음이 없었기에 풀 수 있는 수수께끼 따위는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어설프게 도굴꾼이나 발굴자가 본을 떠서 작 모양의 구멍을 눌러봤자 근처의 악랄한 살인함정만 발동할 뿐 절대 열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
마도사가 본다면 눈치 챌지도 모르지만, 술법이 발달한 중원 세상에 마도사라는 건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다.
‘여불위가 내게 거짓말한 건 아닌 것 같군.’
사실 충분히 거짓말하고도 남을 상황이겠지만 2천여 년 동안의 불사감금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라서일까? 여불위는 여씨춘추는 그냥 내게 주고 내 조력을 받으려는 전략을 택한 듯 했고, 그건 결국 맞는 선택이었다.
저벅
나는 안에 들어가서 마침내 마도서 여씨춘추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는 본래 마도서가 펼쳐져 있어야 할 장소에, 책 대신에 거대한 깃발이 꽂혀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깃발에서 심상치 않은 영력이 흘러나오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리며 화안금정으로 영력의 성질을 탐색했다.
우우우
‘굉장해…. 보패에 준하는 영기를 지니고 있다. 보패는 아닌 것 같지만 고명한 법술사의 퇴마법구…인가.’
보패와는 만들어진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약간 아래 단계라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구조상의 저열함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영기를 품고 있는 법구였다. 그 말은 이 법구를 원래 사용하던 존재가 그 만큼 강대한 영력을 다루던 퇴마사라는 뜻이었고 그 실력이 굉장함을 의미했다.
나는 가까이 가자 벽기둥에 글자가 크게 음각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마도서를 찾아 온 자여, 포기하라!]
“…….”
이 글자 자체도 쓰인지 수백여 년은 되었는지 흐릿하기 그지없었고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2천여 년의 세월은 만만치 않았는지, 그 사이에 누군가 강력한 퇴마사가 이 유적을 찾아와서 마도서 여씨춘추를 직접 가져간 듯 했다. 보통이라면 황당할만한 상황이겠지만 사실 2천 년이나 되는 시간을 생각하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쑤욱
나는 힘들이지 않고 깃발을 뽑았다. 깃발의 전면에는 파사(破邪)라고 적혀 있었고, 내가 힘을 주입해서 휘둘러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법구는 힘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라 정확한 방식과 주문을 써야 발동하는 종류인 듯 했다.
‘흠…, 파사기(破邪旗)라고 부를까? 아무튼 어떻게 해야 여씨춘추의 행방을 찾을 수 있지…?’
나는 여기서 더 고민해도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곧바로 비등을 사용해서 제갈사가 있는 장령곡으로 향했다.
파앗
내가 그동안의 기억을 제갈사에게 보여주자,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이 재밌게 되었군.”
“제갈사. 여와가 복희의 가면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가면을 얻을 수 있지?”
“…두 가지 방법이 있지. 하나는 그녀에게서 양도받는 것, 또 하나는 직접 여와를 때려잡고 받는 것. 물론 후자는 안 된다는 걸 알지?”
“그래. 하지만 애초에 복희의 가면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
“간단하지. 여와도 복희를 봉인시키는 행위에 동참한 거다. 그리고 혹여 복희가 깨어나지 못하도록 그 가면을 엄중히 보관하기로 한 거고.”
“…….”
나는 한탄하듯 말했다.
“제길! 그러면 절대 내려주진 않는단 소리 아냐! 삼황을 다시 깨우게 해줄 리가….”
“아니, 방법이 있다.”
“방법?”
“흑요석이지.”
제갈사는 눈을 번뜩였다.
“여와에게 흑요석을 줘서 네 모든 기억을 그녀에게 주는 거다.”
“……!!”
“그렇게 하면 여와는 너를 도울 수 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너는 종말의 기억을 보았고, 종말에서 모든 신이 [아버지]에게 배신당하여 멸망하게 된다는 이야기의 반전을 본 셈이기 때문이다. 여와가 원하는 것이 삼황오제의 존속이라고 가정한다면 여와는 너를 도울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그렇구나!
나는 제갈사의 말에 감탄했다. 그런 방법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좋아! 그럼 공양의식을 마련해서 서왕모를 불러낸 다음에 그녀에게 흑요석만 주면 되겠군!”
“그런데 기다려 봐. 이 방법은 위험하다.”
“응?”
“이 방법은 쉽고 간단하지만…, 우리는 아직 여와의 진의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사후세계의 진실은 완전히 밝혀냈다고 할 수 없고, 그녀가 천계의 어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지는 알고 있다 할 수 없지. 그렇지 않나?”
“하지만 만신(萬神)이 멸망하는 파멸을 알게 되면….”
“그렇다 해도 우리와 협력한다는 보장은 없는 거다. 여와와 직접 교섭하기에는 지금 네 힘이 너무 약해. 십이율주의 경우를 보지 못했나?”
“놈보다 더할 수도 있어. 특히 삼황쯤 되면 우주적인 위력을 지닌 비술(秘術)로 너를 극악하게 봉인하려 들 수도 있지.”
“음….”
“여와의 힘으로도 천암비서를 봉인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시간을 아껴서 움직여야 할 때 난데없이 수백 년씩 여와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힌다고 생각하면 선택하기 힘든 계책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제갈사는 차를 한 잔 마시더니 대답했다.
“여와와 교섭하려면 재료가 좀 더 필요해. 정보라는 재료 말이지. 최소한 복희가 ‘왜 봉인 당했는지’ 정도는 알아야 여와를 상대로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전생하며 보아왔던 여와의 특성상 몇 마디 꺼내기도 전에 맞아 죽을 수도 있어.”
“음… 그렇겠지.”
여와는 다른 [옛 지배자]가 소환되었는데도 전혀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신으로서 지니고 있는 권능의 크기를 아주 잘 알고 활용할 줄 알았다. 상대가 자기 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때려잡을 준비가 되어있는 존재였다. 필멸자를 갖고 놀기를 그리 즐기지 않으며, 폭력을 거리끼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복희는 왜 봉인당한 거지?”
“글세…. 여와가 그의 봉인에 참여했다는 입장에서 보면 천계에서 독재(獨裁)를 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군.”
“왜?”
“천계도 사실 삼황오제의 놀이터이자 중간관리자에 불과해. 그런 곳에서 여와가 권력을 홀로 휘두르고 싶어서 쌍둥이 신이자 동등한 힘을 지닌 복희를 암습해서 봉인한다는 건 무리수나 다름없지. 어린애들 병정놀이에서 대장하고 싶어서 형제를 칼로 찌른 셈이니까.”
“…….”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적어도 신선수준에서 논할 수 없는 신격들 만의 문제겠지.”
“흠… 그걸 어떻게 해야 밝혀낼 수 있을까?”
내 질문에 제갈사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선은 탐색기간이 필요하다. 천계의 상황을 살피고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알아낸 후에 움직여야 해.”
“으음.”
“그리고 여불위는 내가 꺼내주겠다. 너는 월요를 얻어.”
“…응?”
“월요를 얻고 나서는 황궁의 보물을 다 얻어내라. 그리고 남궁세가를 몰살시켜라.”
“월요를 얻으라고?”
다른 건 다 그러려니 했지만 월요는 예상치 못했다. 내가 눈을 꿈벅거리자 제갈사가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못 얻을 이유 같은 게 있나?”
“알았어."
파앗
나는 곧장 월요의 봉인지로 가서 월요만 꺼내고 도망쳤다. 등 뒤에서 거대한 마력이 소용돌이치면서 수호자가 깨어나려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수호자를 잡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도 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괜히 세상일을 뒤틀기 싫어서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십이율주놈….’
또한 십이율주에게 이전 생에서 된통 당했던 기억 때문에 놈에게 한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월요를 얻고 난 후에는 황궁으로 가서 수정석비와 초상기인 등을 얻어낸 후 심처에 있는 전국옥새 봉인지로 갔다. 원래라면 이곳의 결계는 천우진이 없으면 뚫을 수 없을 테지만, 나는 월요에 음신지력을 불어넣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내리쳤다.
쩌정!!
‘음, 금이 가는군!!’
음신지력의 성취가 꽤 진전해서일까? 칠요에 음신지력을 담아서 때리자, 신화적 결계라지만 금이 쩍쩍 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대여섯 번을 공격했는데 그러자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계속 전국옥새의 결계를 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네놈은 뭐냐?!”
파앗
어느 새 등 뒤에 제갈부와 천문관들, 그리고 연금술사가 와 있었다. 천문관들은 하나같이 술법에 능통한 자들이었기에 이미 술법을 써서 나를 포박하려 하는 중이었다.
제갈부가 선제공격으로 내게 낙혼별부 결계를 날리는 순간, 나는 도리어 앞으로 뛰어들어서 제갈부의 목을 그었다.
콰아아앙
“크헉…!!”
제갈부는 급히 순간이동과 방어막을 써서 내 공격을 어떻게든 무마한 듯 했으나, 타격은 어쩔 수 없었는지 굉음과 함께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제갈부가 일격에 패퇴하자 나머지 천문관들이 깜짝 놀랐으나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검뢰를 써서 연금술사를 공격해 들어갔다.
푸콱
“끄어어억….”
연금술사는 월요 천총운검에 심장이 꿰뚫린 채 몸을 부들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나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대로 검을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가짜육체군.”
찔러보면 바로 감이 왔다. 아무래도 연금술사 놈은 의심을 하고는 이 자리에 본체가 아닌 가짜육체를 보내서 조종한 듯 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싸워봐야 허사였으므로, 나는 천문관들의 술법이 펼쳐지자마자 월요 중 거울을 머리 위로 들었다.
번쩍!
“흐아악.”
“아닛, 반사라고…?!”
거울이 번뜩인 순간 천문관들이 전개한 술법이 고스란히 반사당해서 본인들에게 되돌아갔다. 칠요의 시련 때 이 반사 능력을 질리게 느꼈기 때문에, 월요를 얻자마자 반사 능력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술법과 마술을 반사하는 월요의 거울은, 잘만 쓰면 그 어떤 보패보다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천문관들을 무력화시키자마자 어검술을 펼쳐서 천총운검을 전방의 균열로 쏘아 보냈다.
콰칭!!
‘깨졌군!’
나는 전국옥새의 봉인지 결계가 박살나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전국옥새를 손에 얻자마자 비등을 써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 자리에서 제갈부나 천문관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황궁세력도 자기 나름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고, 그들을 다 죽이면 제갈유룡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갈부와 벌써 2번의 삶이나 같이 일했으니 흑요석을 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기에는 꺼림칙하기도 했다.
나는 그 직후에 남궁세가의 대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가주, 검왕(劍王) 남궁명이 대청에 나와 있지 않고, 남궁팔검과 잡졸들만 나와 있는 것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흐음….”
남궁팔검 중 하나가 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놈!! 네놈은 어떤 사술을 쓰는 놈이냐!”
“…….”
“천공대! 저 침입자를 포박….”
퍼벅!!
‘시끄러워!’
나는 곧장 달려들어서 그 놈의 머리통을 일격에 날려버렸다. 삽시간에 이빨 밑동을 남기고 머리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주위 사람들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듯 했다.
나는 월요 천총운검을 뽑아서 거침 없이 남궁팔검 중 여섯 명을 3초식 만에 베어버렸고, 검뢰가 난무할 때마다 피분수가 치솟자, 주위 인간들이 그제서야 경악에 빠졌다.
“으아아악.”
“괴…괴물…!”
천공대의 무인들이 경악하면서도 훈련받은 대로 꾸역꾸역 달려들자, 나는 삼보절기로 그들 사이를 파고 들면서 일수점혈을 가했다. 누구도 내 앞에서 일 초식 이상 버티지 못했으며 수십 명의 고수들이 마치 허수아비처럼 여기저기서 고꾸라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남궁팔검의 목을 붙잡으며 으르렁거렸다.
“남궁명은 어딨나?”
“가…가주님은… 휴식… 하시러….”
“무슨 휴식?”
“여…여자들을….”
“…후우.”
퍼억
나는 놈의 머리통을 쥐어서 사과처럼 터뜨린 후 비등을 써서 여인들이 잡힌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인들을 겁탈하고 있는 남궁명에게 말했다.
“남궁명, 일어나서 검을 잡아라.”
“읏, 너는 누구냐!”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빨리 잡아!! 가죽을 벗겨버리기 전에!!”
남궁명이 주춤거리며 바지춤을 추스르고 검을 잡자, 나는 놈을 노려 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전력을 다해! 이건 그냥 기분풀이일 뿐이니까, 너는 최대한 내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
“무슨 개소리냐!!”
“간다!”
슈칵!
검뢰를 이용해서 일 초식을 펼쳤고 남궁명의 검과 처음으로 충돌했다. 하지만 남궁명의 검은 내 내공과 음신지력이 합쳐진 어마어마한 위력의 검뢰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칼날 째로 썰려나가고 말았고, 나는 남궁명의 검이 반 토막 나자마자 놈의 오른쪽 팔뚝을 베어 날렸다.
“크윽!”
슈칵!
근성 있게 검을 든 남궁명과 또 한 번의 충돌이 이어졌고, 이번에는 놈의 왼쪽 다리를 베어버렸다.
삽시간에 사지 중 두 쪽을 잃어버린 남궁명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놈은 마음만 먹으면 내가 일 초식 만에 끝낼 수 있었다는 걸 깨달은 듯 충격을 받고 벌벌 떨며 외쳤다.
“처…천외천(天外天)…!! 고인이시여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넌 내가 고인으로 보이나? 천외천으로 보이나?”
“그렇습니다! 제발 목숨만….”
“말했잖아, 이건 기분풀이라고.”
나는 천천히 발을 들고는 염증 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어 봐. 어서.”
우두두둑
“으악… 아아아악…!”
“더 소리 질러 봐.”
“제발… 제발…!!”
나는 천천히 남궁명의 목을 밟았다.
“끄아아아악!!”
남궁명은 핏대를 세우며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남궁명의 비명이 잦아들어갈 때 쯤, 나는 놈의 관자놀이 위에 발을 올렸고, 이내 두부를 밟듯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푸콱
남궁명의 뇌가 터지자, 나는 냉막 한 눈으로 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
기분이 풀리질 않아.
순어구를 얻는 김에 남궁세가의 악행을 벌하고 나쁜 놈을 쳐 죽였는데, 왜 기분이 상쾌하지 않지?
이런 일은 처음이다.
‘진소청이랑 같이 쓸어버릴 때는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데….’
심지어 폭탄을 써서 남궁세가를 쓸어버렸을 때도 기분은 상쾌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런 상쾌함이 느껴지지 않고 그저 찝찝할 뿐이지?
…이 기분은 뭐지?
생소한 느낌이다. 찜찜하면서도 뭔가 청소를 하는 기분….
그래서인지 나는 순어구를 바로 얻으러 갈 수 있음에도 주춤거리고 있었다.
“아, 아버님!!”
창천검룡 남궁환의 목소리다. 놈의 경악한 목소리에 내가 힐끔 시선을 돌리자 남궁환이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버님의 원수를 갚겠….”
“죽어라.”
콰직
나는 그대로 달려들어서 남궁환의 머리통을 한 주먹에 터뜨렸다. 그리고 나는 남궁환을 쳐 죽이는 순간, 내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