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838화 (83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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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흑요석을 동료들에게 전해주지 말라고?!

나는 순간 제갈사에게 뭔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왜…?’

흑요석의 술법은 굉장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기억을 전송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무예나 술법의 성취도 상대에게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연 그 자체를 전송할 수 있기 때문에 쉽사리 동료를 늘려서 내 운신할 폭을 늘린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해주는 건 당연하다시피 한 일이었는데, 그걸 포기해야 한다니?

내가 의혹어린 눈으로 제갈사를 쳐다보자 그가 힐끔 안쪽을 쳐다보았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

나는 제갈사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갈사가 차를 따라주며 내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네가 만일 현이를 찾아가서 지금까지처럼 흑요석을 전해준다고 치자. 너는 흑요석에 어느 정도의 기억을 담을 거냐?”

“그야 최대한 모든 걸 담겠지.”

제갈사가 순간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 해 봐.”

“뭐?”

“해 보라고. 흑요석이 어떻게 되는 지.”

“……?”

나는 제갈사에 의혹을 느끼면서도 비등을 써서 동영에 갔다. 그리고 약 50근 정도의 흑요석을 채취한 후, 한 덩이를 떼서 거기에 흑요석의 술법을 써서 기억을 저장시켰다.

일련의 작업을 마치고 다시 제갈사 앞으로 비등을 써서 되돌아오자, 제갈사가 말했다.

“흑요석을 탁자 위에 올려 봐.”

“올렸어.”

“화안금정을 써서 흑요석을 자세히 관찰해 봐라.”

스으으으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화안금정을 써서 흑요석에 집중했다. 그러자 잠시 후 흑요석의 물리적 형체 대신에 영기(靈氣)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영기는 현묘한 빛을 띠면서 마치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증기의 색깔이 짙은 먹빛을 띄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음….’

내가 관찰한 결과를 제갈사에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 먹빛 기운은 마력(魔力)이자 암기(暗氣)다.”

“암기?”

“네 기억이 어두운 세계의 비밀을 머금고 있는 농도만큼, 시꺼멓게 변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농도는 광기(狂氣)와 직결되어 있지.”

“…….”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라고 할까? 특히 26번째 삶에서 얻어낸 정보는 치명적이야. 그 흑요석의 암기가 어느 정도의 농도를 머금고 있다고 생각 하냐?”

“잘 모르겠어.”

“그럼 시험해 보자고.”

“어떻게?”

털썩

그 때 바깥에서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갈사는 그 소리를 듣자 빙긋 웃었다.

“저 녀석한테.”

“…….”

나는 제갈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장령곡의 입구에 엎어져 있는 게 바로 아까 보았던 조희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듯 앞을 허우적대고 있었고 손발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했다.

제갈사는 소매에서 방울 같은 걸 꺼내더니 딸랑딸랑 흔들었고, 잠시 후 조희태는 정신을 차린 듯 했다.

“…헉… 헉….”

“충복령(蟲伏玲)으로 고(蠱)의 발작을 진정시켜서 네 오감을 잠시 회복시켰다, 조희태.”

“제…제갈사 교주. 제발…, 제발 살려주시오.”

쿵! 쿵!

조희태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돌바닥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며 울부짖었다. 자신이 제갈사의 손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음을 이미 직감한 듯 절망에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말했다.

“천하의 형산파 절정고수가 왜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지? 형산파 장문인 팔비검선(八臂劍仙) 조진웅의 의형제가 되어 조씨 성까지 받아서 결코 형산파를 배신할 수 없다는 건 바로 네가 네 입으로 한 말이었잖아? 장령곡에 자신만만하게 쳐들어 와서 내 시종들을 죽이면서 아주 호탕한 의기를 내뿜더군?”

“…….”

“뭐, 네 동료인 강호의 의협들은 다 내 진법의 밥이 되었지만 말이다.”

조희태는 움찔했지만 이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제발… 내 몸의 고를 제거해 주시오…”

“사실 난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원래는 죽기 전에 너나 간자들을 이용해서 구파일방을 가지고 놀아볼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 흥미도 없단 말이지. 자기 손으로 자기 가죽을 벗기며 죽어가게 만들어 줄까?”

“흐으으윽… 제발….”

“난 사실 너희한테 별 관심이 없었는데 구파일방에 심어둔 배교의 다른 간자를 먼저 제거하기 시작한건 네놈이었다, 조희태. 결국은 구파일방 내에서 네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위협요소를 제거한 것뿐이지. 쓰레기 같은 놈.”

경멸하듯 중얼거린 제갈사가 문득 아까 내가 만들어 낸 흑요석을 손에 들더니 말을 이었다.

“이걸 받는다면 네게 걸린 이혼대법과 고의 속박을 풀어 주마.”

“지…진짜겠지.”

“배교 교주의 명예를 걸고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멀쩡할지 어떨지는 네게 달린 문제지만.”

“알았소! 어서 주시오!!”

조희태는 다급한 기색이었다. 흑요석이 아무리 흉험한 물건이라도 이혼대법과 고독보다 무섭진 않으리라고 생각한 듯 했다. 제갈사가 힐끔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눈빛이 기억전송을 하라는 뜻인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조희태의 손 위에 흑요석이 올라간 순간, 나는 기억전송술을 시전했다.

파아앗

조희태는 기억을 모두 전송받자 비틀거리는 듯 했다. 그리고는 나를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전생자?! 이럴 수가…!! 세상에 수십 번이나 다시 삶을 반복하는 인간이 있을 줄은….”

“그래. 이놈은 전생자다. 그 외에는 감상이 없나?”

“자, 잠깐…, 잠깐만….”

조희태는 말을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정리하는 듯 했다. 잠시 후 그는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전생자…, 삼황오제…, 이족…, 촉수…, 미래…, 팔부신중…, 사후세계…, 암천향…, 멸망…, 악신…, 세계의 끝…, 조…종말….”

“…….”

“허, 허헉…. 으윽…. 뭐야…, 이건….”

덥썩

조희태가 갑자기 내 멱살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피를 토하듯 외쳤다.

“너, 넌 대체 뭐야! 넌 뭐냐고!! 이런 걸… 이런 걸 보고 어떻게 그런… 그런 태연한 표정으로… 있을 수 있어어어어!!”

“……?!”

“그, 그만둬…. 내 머릿속을… 그만… 그만 봐…. 으허어어억.”

조희태가 갑자기 기나긴 비명소리를 마치 숨 끊어지듯 내뿜었다. 그는 뒤로 자빠지더니 마치 새우가 팔딱거리듯 몸을 튕겼다. 그 모습은 명백히 기괴했고, 조희태는 바닥을 구르면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미친 듯이 긁었다. 그는 굴러다니면서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그만둬 그만둬 그만둬 그만둬 그만 그만 그만…….”

“이봐 괜찮아?”

나는 급히 조희태에게 다가가서 내공을 불어넣어서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몸의 기운은 안정되었음에도 조희태는 눈깔이 뒤집어진 채 마치 정신병 환자처럼 간헐적으로 발작하면서 헛소리를 내뱉었다.

“아어어어어… 우으으… 날, 먹어!! 내 머리, 뜯어!! 아으아아아아아!! 눈이, 눈이 나를 보고 있어어어어!!”

그는 잠시 후 팔을 툭하고 떨어뜨렸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버둥거리지도 않았다. 정적이 흐르는 동안 나는 조희태의 심맥을 붙잡고 계속 그를 살리려 노력했지만 조희태는 정신 자체가 죽었는지 더 이상 삶의 맥이 반응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탕약과 외과수술을 사용하면 연명시킬 순 있겠지만 이미 식물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이제 알겠냐?”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충격을 받아서 조희태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자 제갈사가 말했다.

“네가 모든 기억을 여과 없이 담은 흑요석은 그 자체로 흉기(凶氣)를 머금은 마도구에 가깝다는 소리다. 옥좌에 대한 기억, 삼황오제의 진실, 사후세계의 진실, 미래의 멸망과 같은 기억 일체가 하나같이 보통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지. 하물며 그걸 생생하게 오감으로 체현해왔던 기억이 인간의 뇌수를 뒤덮는 거다. 그 과정에서 흑요석이 기억 째로 머금은 사악한 기운이 인간의 정신을 박살내겠지."

“……!!”

“옥좌가 너무 고차원적인 기억이라서 그런 건가? 재수가 없으면 [옛 지배자]의 시선까지도 기억 속에서 공유되나 보군. 지배자는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이니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연결될 수 있는 것…. 종말의 기억은 정신파괴력이 굉장해 보여.”

나는 제갈사의 말에 이를 악물고 외쳤다.

“하지만, 25번째 삶…, 아니 26번 째 삶의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망량이나 다른 동료들은 별 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그래서?”

“옥좌에 대한 기억 때문이야. 그 기억만 편집해서 삭제해서 넘겨주면 다른 동료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어!”

내가 항변하자 제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이번에는 네 말대로 해 보자고.”

“뭐?”

“26회차 종반의 기억을 없앤 흑요석을 제작해 봐. 다른 결과가 나오는지 실험해 보지.”

“조희태는 죽었어. 더 이상은 실험 할 놈이 없….”

저벅

저벅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령곡의 깊은 건물에서 누군가가 비척거리며 걸어 나왔다. 완전한 실혼인(失魂人)처럼 보이는 그 자는 오십 대 정도의 사내로 보였는데 강호무림인인 듯 했다. 제갈사는 그 자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혹시 양심의 가책을 느낄까봐 말해 두지. 저 놈은 양주 일대에서 수 백 명을 살상하고 무고한 아녀자를 겁탈한 사파의 초절정고수, 광마존자(狂魔尊者) 구양황(歐陽荒)이다. 양심의 가책 안 가져도 돼.”

“거짓말 아니지? …왜 잡은 거야? 나쁜 놈을 벌하려고…?”

“그럴 리가 있나. 사라져도 뒤탈 없고 무공이 높은 놈을 잡아서 인체 실험에 쓰려 한 것뿐이야. 저놈은 소속문파가 없어서 딱이었지.”

“그렇군. 그런데 초절정고수를 어떻게 붙잡은 거야?”

내가 질문하자 제갈사가 피식 웃었다.

“꼭 무림인을 무공으로 붙잡아야 하나? 그리고 내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백련교주도 무사할 수 없다.”

“…그렇군.”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듯 했다. 제갈사 본신의 무공이나 무력은 그리 높지 않으나, 그는 이혼대법과 마법, 고독술의 달인이었다. 또한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재이자 책사였다. 그런 제갈사가 수단방법을 안 가린다면 백련교주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전생과정에서 증명된 것이다. 아무리 강호의 초절정고수라도 제갈사가 생포하려 하면 일도 아닐 것이다.

‘음. 옥좌의 기억…, 안 좋은 기억은 다 편집하자.’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이번에 26 번째 삶의 안 좋은 기억만을 제거해서 편집했다. 그리고 다 만들어진 흑요석을 실혼인 상태의 구양황에게 건넸다. 제갈사는 이혼대법으로 그의 정신을 백치상태로 만들고 있었는데 잠시 제압상태를 풀었다.

구양황은 이성을 되찾자 비틀거리더니 두려운 눈으로 제갈사를 쳐다보았다.

“…제, 제갈사 교주. 내게 또 뭘 할 생각이오? 제발… 이번에는 제발 그런 짓만큼은 하지 마시오…. 사람 대접을 해 주시오!! 그대의 발을 핥으라면 핥겠소….”

대체 뭔 짓을 한 걸까.

초절정의 사파고수면 천하에서도 손가락에 드는 놈인데, 제갈사를 상대로 공격하거나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는 듯 했다.

제갈사는 피식 웃더니 구양황에게 말했다.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송할 거다. 네가 멀쩡하다면 바로 강호로 놓아 주마. 이혼대법과 고도 제거해 주지.”

“오오! 당장 해 주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기억을 전송했다.

우웅

구양황은 기억을 전수받자 잠시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더니 나를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생자!! 굉장하군….”

“구양황. 어지럽거나 괴롭진 않나?”

“물론이오. 흐흐… 칠대절학과 강력한 무공의 기억이라니, 이것 참 잘됐군.”

구양황은 되려 흉소를 흘리며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여과 없이 최대한 기억을 집어넣었기 때문인지, 칠대절학 요결과 무쌍패 등도 전승된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놈을 쳐다보았지만 구양황은 날 공격하지 않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 나도 그 전생동료란 걸로 만들어 주시오. 절대복종하겠소. 전생자를 따라서 온힘을 다해 일하겠….”

그 순간이었다. 구양황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으, 으웨엑.”

쿨럭 쿨럭

구양황은 먹은 걸 다 쏟아내는 듯 했다. 나는 왜 저러나 싶어서 쳐다보았는데, 이윽고 구양황이 혼미한 눈빛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으하악…. 으악…. 아, 아냐…. 내 삶의 의미는…. 아니…, 난 원하는 대로 살고 있어…. 구원 같은 건 바란 적도…. 하, 하지만….”

“…….”

“이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삶도…, 행복도…, 존재도…, 죽어서도 계속 고통 받을 뿐이라면, 나는 대체…, 뭐지…? 난 벌레인가…?”

구양황은 텅 빈 눈빛이 되어서 꿇어 엎드렸다. 순식간에 그는 십 년은 늙은 듯 기력이 다 쇠해 있었고 정신력이 고갈된 듯 했다. 아까 조희태의 경우보다는 훨씬 양호했으나 재기불능의 상태라는 건 마찬가지로 보였다.

제갈사가 구양황에게 말을 걸었다.

“이혼대법과 고를 풀어주지.”

“…….”

“전생동료가 되든 강호로 나가든 네 맘대로 해라.”

투둑

제갈사가 대법과 고술을 해제한 후 구양황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공허한 눈으로 나와 제갈사를 한 번씩 쳐다보다가 갑자기 한 손을 쭉 뻗어서 손날을 만들었다.

“난 차라리 죽겠다!!"

퍼억!!

후두둑….

구양황은 내공을 담은 수도(手刀)로 자기 자신의 관자놀이를 관통시켰다. 그는 순식간에 즉사했고, 아까와는 달리 식물인간으로 살릴 여지도 없었다.

아닛?! 왜 죽어!!

지체 없이 자살해버린 모습을 보고 내가 황당해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이제 알겠냐, 백웅? 저 놈도 이승을 탈출해버렸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쁜 기억은 다 제거했단 말이다.”

내가 당황해서 중얼거리자 제갈사가 씁쓸하게 말했다.

“기억이란 건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게 아니다. 네 기억에 따르면, 미래 기술 중에서 시냅스(synapse)라는 방식으로 물리생체적인 연결이 이뤄져 있고, 거기에 인과율이 살처럼 붙어서 이어지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옥좌와 종말을 체험했던 네 기억이 통째로 혼돈의 인과율에 오염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편집한다고 한들 이제 네 기억을 담은 흑요석의 암기는 사라지지 않아. 약화될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일반인은 당장 자살을 선택할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 그럼 너는 어떻게 멀쩡한 거야.”

내가 제갈사를 쳐다보자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난 원래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었고, 이 거지같은 세상의 절망을 10년도 전부터 계속 느끼고 살았어. 그래서 네가 전해준 절망과 암흑이 딱히 새삼스럽진 않다. 하지만… 나 이외의 인간은 좀 다르겠지.”

“…….”

“현이의 정신력이라면 견딜지도 몰라. 하지만 타락의 싹이 안에서 싹터서 그를 잠식할거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타락한 현이는 더 이상 예전의 녀석이 아니겠지. 그리고 그건 진소청이나 다른 동료들에게도 적용 된다. 예외가 있다면 환신 천우진 정도일건데, 이 녀석의 경우는 불쾌감을 느끼고 널 당장 없애버리겠지.”

“으음.”

“인정해라. 현 시점에서 흑요석으로 동료를 만드는 길은 막혔다.”

“제길….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냐.”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안 그래도 진도가 나아가지 않는데 설마 이제 제갈사 이외의 동료에게는 흑요석을 전해줄 수 없다는 제약이 생기다니! 이래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그러자 제갈사가 말했다.

“나는 되려 묻고 싶군. 지금 굳이 흑요석으로 동료를 늘릴 필요가 있나?”

“뭐?”

“지금은 동료들을 동반 성장시켜서 삼황오제 토벌이나 칠요탐색 따윌 노릴 때가 아니야. 네가 종말의 끝에서 보았던 궁극의 절망, 그리고 세계의 멸망 그 자체를 막을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지. 동료들의 재(才)가 아무리 뛰어나도 지금은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백웅. 네게 책사로서 진언하지. 이번 삶의 숙제는 두 가지가 있다.”

“뭐지?”

“하나는 절대지경에 오르는 것이다. 절대지경에 올라야 뭐든 진행이 될 것이다. 그 방법은 이미 이전 생에 십연전을 통해서 제시되었고. 아무튼 넌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절대지경을 성취해.”

“…으음. 또 하나는?”

“태호 복희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삼황, 태호 복희를 말하는 거냐? 대체 그를 왜….”

삼황 복희!!

그 존재는 전설상의 삼황오제였으며 동시에 천계의 창립자인 태상노군과 원시천존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리고 ‘술법’이라는 체계를 인간에게 내려줘서 마법으로 인한 타락을 막은 자이기도 했다.

“현 시점에서 삼황 복희는 어둠의 존재에게 습격당해서 [가면]이 벗겨진 채, 우주공간 어딘가에서 거룡(巨龍)의 본체로 되돌아가서 이성을 잃은 상태다. 너도 그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래. 복희한테 죽은 적이 있어.”

“복희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왜 찾아야 하는 거야?”

내가 반문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24번째 죽음이 생각나나?”

“…응.”

칠요를 다 모았지만 허망하게 지구가 불타면서 화염에 사망했다.

그 개죽음은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껄끄러운 안색으로 대꾸하자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염제 신농의 말을 기억해 봐라.”

“응?”

“염제는 종말과 계시를 멈출 수도 없고 유예할 수도 없다고 말했었지. 삼황오제가 모두 건재한 때라면 가능했겠지만, 복희가 없다면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다고 했었다.”

“아….”

그런 말을 했었지. 내가 기억을 더듬자 제갈사가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복희가 존재하고 삼황이 모두 모인 상태라면 종말과 계시를 멈추거나 유예할 방법이 존재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

“백웅. 네 정신력과 기억은 혼돈의 근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네가 천암비서에게 모종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종말을 향한 네 기억의 방향성 자체가 거대한 판을 조종하는 거야. 그렇다면 네 정신기억에 뿌리 깊게 박혀버린 암기를 없앨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제갈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희망을 찾는 것이지. 네가 복희를 찾아내서 그에게 가면을 다시 씌우고 종말을 유예하거나 멈출 방법을 찾는다면, 그 때는 희망이 기억 속에 깃들어서 흑요석의 성질을 크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가능할까.”

“이번 생 안에 가능해. 네가 전생자로서 쌓은 자산은 만만치 않으니, 잘만 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말한 제갈사가 눈을 번득였다.

“나머지 동료는 내가 배교의 힘을 동원해서 관리하겠다. 유사시에는 네 힘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관리해 주지.”

“고마워.”

“너는 대신에 내게 한 가지를 약속해 줘야겠어.”

“뭔데?”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나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 생에 한해서 네 모든 도덕률을 버려라. 그렇다면 내 이름을 걸고 네가 지금까지보다 10배 이상 강해지게 만들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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