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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27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크헉! 컥… 커헉….”
나는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방금 전에 말 그대로 몸이 뻥 터져버렸기 때문에 웬만한 죽음의 고통보다 압도적이었다. 나는 바닥을 대여섯 번 구르다가 겨우 환통이라는 걸 인식 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진정했다.
“…….”
외양간 나무 벽에 등을 기대고 있으니까 좀 낫다. 소똥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그마저도 피폐해진 정신을 가라앉혀줬다. 나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원래라면 생각도 하지 않고 천암비서부터 얻으려 달려 나갔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다. 이전 생에서 나는 말로만 듣던 종말 그 자체를 체험하고 왔을 뿐만 아니라 다중우주를 넘었으며, 내 기억이 천지 세상에 공유될 경우 벌어지는 상황마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삶과는 명백히 다른 점이었으며 심지어 이제부터의 생애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될 정도였다.
옥좌에 도달한 경험.
그 경험은 내 삶의 종착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 기분마저 들었다. 도대체 그 옥좌에 어째서 태허천존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놈의 주변에 있던 인물들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 결국은 그 고차원적인 세계에서 운명이 수렴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거기에서 죽었으나 원래세계인 이 시점에서 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다중우주를 넘는다 하더라도 내 전생능력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리 위안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다중우주를 쉽게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지금으로써는 굳이 건너가야 할 이유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중얼거렸다.
“…일단은 움직일까.”
파앗
나는 이번에는 일일이 뛰어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 바로 소환수를 마법으로 불러냈다.
‘따로 이생에서 계약을 맺지 않아도 되나? 편하네.’
인과율이 전생을 통해 이어지는 효과 덕분인 걸까?
원래는 마도의 소환수와 계약을 맺고 서로 말을 배우고 주문을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런 거 없이 바로 소환하는 게 가능한 듯 했다. 하긴 삼황오제와도 인과율이 전승되는데 일개 소환수와 인과율이 통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리라.
달리 말하자면 앞으로는 한 번 계약만 맺으면 그 중마(衆魔)는 전생을 시작하자마자 소환가능하다는 뜻이겠지.
나는 이전까지는 소환수를 괜히 마법으로 소환했다가 다른 존재들의 눈에 띌까봐 걱정되어서 일부러 발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세상의 파멸을 한 번 보고나니 왠지 허무한 기분이 들어서 이번에는 편하게 다니기로 작정했다.
마도의 유물과 마찬가지로 마법소환수를 좀 써도 삼황오제가 크게 신경 안 쓰리라는 기분이 든 것이다.
끼이이이!
나는 소환수를 써서 바로 천암비서가 있는 동굴로 찾아간 후 천암비서를 챙겼다.
투두둥
“끄으윽."
아이고 아프다!
나는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한 상태에서도 전신이 아리는 걸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원래는 이동시의 충격을 없애기 위해서 특수한 마도의 술을 마셔야 하지만 호신강기를 몸에 둘러서 때우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타격을 완전히 없앨 순 없었고 전신을 흠씬 두들겨 맞은 기분은 들었다.
‘뭐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술 없이도 이동소환술을 무난하게 쓸 수 있겠군….’
그 이상이면 확실히 몸에 실존하는 타격이 올 것이다. 그래도 이걸로 비등이 있는 산동까지 뛰어가는 시간을 아꼈으니 크게 이득이었다. 아무리 경공술이 발달했어도 이 지역에서 산동까지 가는 건 보통 먼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소환수를 부려 곧장 비등이 있는 곳으로 향해서 비등을 입수했다. 그리고 거기서 소환수를 돌려보낸 후 이제 비등으로 교체해서 목갑을 얻으러 갔다. 목갑과 더불어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보물들을 모두 얻고 황연 대장군을 비롯한 포로들을 다 구출한 후에는 황산에 가서 천년설삼, 흑백련, 수요 등의 보물들을 바로 얻었다. 기본적인 과정이 끝나고 나자 나는 제갈사를 찾아갔다.
파앗
나는 제갈사에게 오자마자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일전과는 약간 상황이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음…?”
제갈사는 안쪽에 있는지 안 보였고, 장령곡의 대청에 누군가가 꿇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이 가려진 채 부들부들 떨면서 공포에 질려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는 근육의 발달정도나 기력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무림인인 듯 했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내 기척을 느꼈는지 앉은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광서생(狂書生)의 시종이냐?”
광서생은 제갈사의 별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렇습니다만 귀하께선 무슨 일로 여기서 이러고 있으신지….”
“괘…괜찮다면 등 뒤의 진법… 아니, 나무와 계단이 어떻게 늘어서 있는지 알려줄 수 있겠느냐? 제발 부탁이다…. 가르쳐주면 금화를 주마.”
그는 간절한 기색이었다.
이전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나는 전생하는 동안 없었던 사건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으나, 바로 그 때였다.
“넌 누구지?”
제갈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안쪽에서 제갈사가 걸어 나왔다. 나는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말했다.
“나는 백웅. 당신과 이 무림인은 무슨 관계요?”
“내기를 하는 관계지.”
“내기?”
“그래. 그 놈이 눈을 감고 내 진법을 파해할 수 있으면 한 번 배신을 용서해주기로 했거든. 시시한 내기야.”
“…….”
설마….
나는 머릿속에 22회차 초반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때 제갈사가 검으로 누군가의 목을 베고 있었다. 막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있었지….’
그 당시에는 그저 제갈사가 잔인하다고 생각했을 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약간 신경 쓰여서 그 시점을 피해서 제갈사를 찾아갔으므로 잔인한 살육장면은 그리 보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22회차 초반에 제갈사가 베어버렸던 놈이 바로 이 무림인이 아닌가?
머리통의 용모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십중팔구는 그럴 것이다!
나는 상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산동으로 뛰어가는 시간마저 단축시키고 역대 최단시간으로 제갈사를 찾아왔어. 그래서 제갈사가 ‘내기’가 시작되기 전에 온 거야. 이후 제갈사가 저 놈을 처형하기 전에 살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거로군.’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이놈은 매번 시작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던 것이리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눈을 가린 무림인에게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요?”
“…형산파(衡山派)의 조희태(曹犧態)다.”
잘 모르겠다. 형산파 출신이라면 고수반열에 들어있을 가능성은 높지만 아무튼 내가 기억할 정도의 놈은 아닌 것이리라.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거 어쩌지….’
조희태를 살려주는 건 간단하다. 일단 이 내기를 멈추고 제갈사에게 흑요석을 준 후 그에게 조희태를 죽이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매 전생마다 조희태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들어 갈 것이므로 꽤 귀찮을 것 같았다.
과연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의(義)와는 관계없이 수고를 무릅쓸 필요가 있는 걸까? 그저 생명을 존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럴 수 있나?
그건 망량에게서 배운 의리와는 뭔가 다른 것 같았다.
뭣보다 나는 조희태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생각을 거듭하다가 제갈사에게 말했다.
“제갈사. 당신들 사이의 내기를 내가 대신 해도 되겠소?”
“니가 뭔데?”
“난 백웅이오. 만일 내가 진다면, 이 수요와 천년설삼을 당신이 가지시오.”
휙
나는 수요와 천년설삼을 제갈사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제갈사는 그걸 허공에서 무공으로 낚아챈 후 찬찬히 들여다보았는데, 이내 진품이란 걸 알았는지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칠요를 갖고 있으며 그 가치를 아는 것 같은데 내게 내기 때문에 던져준다라…. 넌 대체 뭐지? 반로환동한 기인 같은 건가?”
“아니오. 지금은 내기에만 집중합시다.”
“그러지. 네 조건은?”
“내가 이기면 당신은 내 흑요석의 술법으로 내 모든 기억을 받아들여야 하오.”
제갈사는 내 손에 들려있는 흑요석을 힐끔 보자 말했다.
“재밌겠군. 배신자 조희태와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렇게까지 살리려 하는 거지?”
“사실 별 상관없소. 오늘 처음 본 사이요.”
“…….”
“재밌어보여서 살려볼 뿐….”
제갈사가 킬킬거렸다.
“처음 본 사이인데 수요와 천년설삼을 내놓는단 말이냐? 크크크크크…. 나만큼 미친놈이 또 있었군.”
“어쩌겠소?”
“좋아. 칠요씩이나 내놓는다는데 내가 무슨 반박을 하겠나? 대신 내기의 내용은 내가 다시 정하겠다.”
“그러시오.”
제갈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조희태를 등에 업고 눈을 가려라. 그 상태로 내 진법을 파해한다면 이긴 걸로 해 주지.”
“음…….”
나도 잠시 생각했다. 조희태를 등에 업고 눈을 가린 채 제갈사의 진법을 통과하라고? 못할만한 건 아니지만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윽고 나는 조희태를 등에 업은 채 등 뒤에 있던 진법으로 진입했다. 그리고는 곧장 모든 내공을 실어서 한 걸음을 내딛으며 음신지력을 뿜어내어 질주했다.
콰과과광!!
후두둑….
깼다!!
“…….”
제갈사는 내가 힘으로 순식간에 진법을 깨 버렸는데도 크게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마치 그 정도는 될 거라고 미리 예상한 듯 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흠, 배교의 배신자를 놓아주게 될 줄이야….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내가 이긴 게 맞소?”
“응, 맞아. 그러니까 흑요석이란 거 줘봐.”
편안한 목소리였다.
‘이제 보니 내기 같은 건 별로 안중에도 없었군.’
제갈사 본인도 큰 호기심이 생겨서 내 기억을 받아보고 싶었던 듯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사에게 다가가서 흑요석을 주었고, 이내 제갈사의 머릿속에 기억이 전송되었다.
스으으으!
기억을 모두 받아들인 제갈사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했다. 그리고는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말했다.
“…말아먹을 대로 말아먹었지만 그 것 또한 진행했다는 건가.”
“제갈사. 이제 날 알아보겠어?”
“크크. 뭐 하러 번거롭게 힘자랑을 하나? 네가 흑요석을 주지 않았다면 네 녀석을 신비한 무림의 기인 정도로 간주할 뻔 했잖나.”
“저 조희태란 놈이 뭔지 궁금해서 말이지….”
그 말에 제갈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냐. 말 그대로 배교의 배신자지.”
“배신자? 무슨 말이냐.”
“배교 본단에서 구파일방 각파에 어렸을 때 침투시킨 간자(間者)들이 총 스무 명 정도 있지. 그 놈들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써먹을 수 있어. 그런데 이놈은 배교의 명을 듣기 싫다면서 되려 다른 간자들을 죽이고 다녔거든?”
“…….”
“그래서 내가 손수 잡아와서 죽이려던 중이었다.”
아마 내기는 핑계에 가깝고 결국 제갈사는 배교의 교주로써 조희태의 목을 베어서 죽인 것이리라. 내가 22회차에서 봤던 제갈사의 잔혹한 살인행위는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희태를 힐끔 보다가 제갈사에게 말했다.
“놓아주면… 안 되려나.”
“뭐 기왕 약속한 거 안 될 게 있겠나? 놔주지.”
제갈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뒤편의 진법이 해제되었고 조희태는 쏜살같이 달아나며 악을 내질렀다.
“배교교주 제갈사!! 두고 봐라!! 구파일방을 규합하여 네놈의 사악한 장령곡을 치러 올 것이다!!”
조희태가 도망치는데도 제갈사는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제갈사에게 미안해서 말했다.
“미안. 나 때문에 배신자를 놓쳤군….”
“신경 안 써도 돼. 저 놈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뭐?”
“놈은 고(蠱)에 잠식당했다. 앞으로 일천 오백여 보(步)만 더 걸어가면 시각이 끊어질 것이고, 다시 오백 보 후에 청각이 사라질 것이다. 장령곡 중추에 있는 고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놈은 죽어가게 되겠지."
“…….”
“병신이 되어서 다시 돌아오면 그 땐 편하게 죽여줄 생각이다.”
어차피 조희태는 죽은 목숨이었다는 건가….
‘흠… 살려주긴 너무 껄끄러운 놈인데. 나중에 써먹을 순 없으려나? 아무튼 살리든 죽이든 다음 생에나 보자….’
내가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제갈사가 말했다.
“그런데 저딴 놈이 문제가 아니야. 정말 큰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지….”
“응?”
“백웅. 후우….”
제갈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다가 말했다.
“이제부터 다른 동료들에게 흑요석을 전해주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