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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태허천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놈의 외모는 예전에 봤던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내가 경악해서 싸우려는 준비를 했으나, 이 공간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몸이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한 발짝도 내딛을 수가 없었다. 그저 말을 하는 것만이 허용된 듯 했다.
그러자 태허천존이 흠, 하고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태허천존? 예전에 쓰던 이름이군. 최근에는 다른 이름을 썼지.”
“뭐라고?!”
“시대가 달라졌잖은가."
나는 그 말에 놈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놈의 얼굴은 태허천존이지만 입고 있는 옷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미래시대의 과학자와 같은 흰색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묘하게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태허천존이 말했다.
“재밌는 일이군. 종막의 끝에,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이 왔는데 하필 전생자일 줄이야…. 아니, 그것도 내가 의도한 일인가?”
“뭐?”
“너는 내가 원해서 이곳에 왔을지도 모르지.”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니가 한 일인데 니가 모를 수 있다는 거냐? 미친 소리!”
그 말에 태허천존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물질이 있어 혼성하여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有物混成先天地生). 대저 대우주란 [굴레]를 넘어서면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불확실해지는 법이지. ‘그 쪽’이든 이 쪽이든 그저 내 유희(遊戱)의 연속일 뿐이고, ‘나’는 어디에서나 놀고 싶어 한다.”
“…….”
“전지(全知)에 모순은 없어. 동시에 모순을 바라는 게 ‘나’이지만.”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놈의 개소리를 억지로 이해하려 해봤자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놈의 말을 해석하는 건 다음생의 책사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대신에 현실을 직시하고는 태허천존을 노려보며 말했다.
“태허천존!”
“그 이름 아니야. 천계도 망했는데 왜 그래? 뭐,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라, 전생자.”
“네놈의 정체는 뭐지?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그리고 이 옥좌에 있는 이유도 이야기해!!”
“이것 참….”
태허천존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래. 막이 오른 상태에서는 네게 아무 말도 할 수 없겠지만, 이제 무대의 막이 내렸으니, 어느 정도는 얘기해 줄까.”
“……!!”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해 주지. 내 정체는 위대한 신(神)이다. 이름이야 말해봤자 네가 듣지도 못 할 테니 넘어가지. 서열로 치면 전 우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말해 둘까?”
“신이라고…?”
태허천존이 천천히 뒷짐을 지며 내 주변을 걸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나는 놀고 싶다. 이미 놀고 있지만, 더더욱 격렬하고 즐겁게 놀고 싶다. 그게 내 목표다.”
“…….”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여긴 원래 내 자리야.”
“뭐…? 네 자리라고?”
나는 태허천존의 얼굴을 꿈벅거리며 쳐다보다가 외쳤다.
“설마 이 옥좌가 네놈의 만신전이라는 말이냐?!”
“삼황오제 시대의 중세 무림인 아니랄까봐 꼭 놈들 기준에 맞춰서 생각하는군. 만신전이라니 촌스럽기 그지없어.”
약간 혐오하는 표정을 짓던 태허천존이 말했다.
“만신전은 아니다. 여긴 내 일터지.”
“일터? 너는 전능한 신이라면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냐? 신이 무슨 일을….”
태허천존이 싱긋 웃었다.
“비서 일이 얼마나 즐거운데! 일을 해야 살 맛 나지 않겠어? 물론 내 경우는 노는 게 일이긴 하지.”
“…….”
“아주 즐거운 직장이야.”
그런 게 어딨어.
노는 게 일인 놈이 어딨냐고!
슈욱
내가 내심 황당해하자 태허천존이 갑자기 모습을 바꾸었다. 그 모습은 놀랍게도 나 자신의 모습이었고, 마치 거울을 눈앞에 둔 것 같았다. 놈은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후 껄껄 웃었다.
“자 다음 질문! 인과율을 읽어 보니 네가 몇 개의 질문을 더 하고 싶어 하겠군.”
“왜 내 모습으로 변한 거지?”
그는 자신의 눈 밑을 손가락으로 당기며 혀를 내밀었다.
“가끔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니가 생각해도 인간 기준에서 좀 못 생겼지?”
“…….”
저 새끼, 날 놀리는군….
나는 놈이 생각이상으로 내게 호의적이랄까, 거부감을 지니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놈이 날 죽이려 하면 여반장일 텐데도 순순히 이것저것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저 말 자체가 거짓이고 기만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기에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제길…, 뭘 물어봐야 하지?’
겉으로는 아주 중대한 질문에 답해 준 것 같지만 사실 놈은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놈의 정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가 없다. 나는 질문을 신중하게 고르다가 말했다.
“…논다는 게 무슨 뜻이지? 이런 식으로 세계가 계시와 종말을 맞이해서 멸망하게 만드는 게 네놈의 유희인가? 넌 이런 결과를 보기 위해서 흑막에서 세계를 조종한 거냔 말이다!!”
내가 버럭 외치자 놈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군. 그건 노는 게 아니지.”
“뭐? 그럼….”
“세상을 멸망시키는 게 뭐 대단한 일인가? 신으로서 위광과 개념만을 갖고 노는 건 수천억 번도 넘게 해서 질렸어. 종말과 유사하게 세상을 파멸로 몰아간 적도 꽤 많이 있지. 그런 내가 원했던 건 말이지….”
꾸욱
놈은 천천히 검지를 뻗어서 내 이마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네가, 와있다는 거…. 이게 아주 즐거워.”
“뭐가… 즐겁다는 거냐.”
“정해진 자리에 정해진 게 원하는 대로 존재해 있다는 건, 즉 인과율의 구현이지. 내 지혜를 동원해서 [아버지]의 섭리를 완전히 계측하고 싶은 게 내 깊은 소망이라고 할까? 물론 내 힘으로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계~속 놀고 있을 수밖에 없지만.”
“…….”
“인간의 형태로 이렇게까지 내 속내를 털어놓은 적은 달리 없다구. 영광으로 여겨라.”
“영광은 개뿔….”
이마를 누르던 검지를 땐 놈이 말을 이었다.
“네 지능을 보아하니 두세 번 정도 또 엉뚱한 질문을 하겠군. 지루할 뿐이니까 핵심적인 정보를 내가 먼저 알려주마.”
스윽
놈은 전방에 있던 2명의 인간에게로 갔다. 그는 앞에 있던 회색 옷의 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이 제일 짜증나. 모든 문제의 시초거든! 그렇지만 사랑스러워. 재밌는 놀잇감을 만들어 줬으니까.”
그리고는 옆에 있던 마도사 복장의 인간을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은 정말 똑똑했지. 인간치고는 역대 최고의 왕이었어. 내 사도로 삼을까 진지하게 생각했을 정도야. 물론 이 놈도 원하는 바를 못 이뤘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이를 악물다가 2명에게 크게 외쳤다.
“이봐!! 앞만 보지 말고 이쪽 좀 돌아봐!! 내 말 안 들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놈은 다시 태허천존의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 녀석들의 본질은 이 [옥좌]에 귀속되어 있다. 네가 말을 걸어봤자 들리지 않는 이유가 뭔지 가르쳐 줄까?”
“뭔데!!”
“녀석들의 귀에는 이제 [아버지]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승천한 자에게 어울리는 위대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을 돌아보게 하려면 그 목소리를 지울 수 있는, 더 큰 목소리가 필요할 테지만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걸.”
뭐라고?!
내가 좋지 않은 눈으로 그들의 뒷 모습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 인간들이 이 옥좌에 와 있는 이유는 뭐지?”
“소원을 빌러 왔지.”
“소원?”
태허천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은 나랑 놀고 있었어. 아주…, 아주 긴 시간동안 말이야. 하지만 결국 한계를 느끼고는 최후의 수단으로 편법을 쓰러 온 거지. 나와의 정면승부를 포기했다고 할까?”
“널 이기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빈 건가?”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그게 안 된다는 걸 알고는 다른 소원을 빌었어.”
“왜 안 됐지?”
“왜일 것 같나? 하하하….”
태허천존은 마치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조만간 직접 느낄 수 있을 거야.”
“…….”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기색이지만 저 한 마디에서는 절대자 특유의 기품과 확신이 느껴졌다. 마치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이 즉시 들어버린 것이다. 보통 인간이라면 놈의 본질을 읽고는 공포에 휩싸일 테지만, 나는 아직도 저 놈이 재수 없는 새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저들이 빈 소원은 뭐지?”
“글쎄?”
“글쎄라니…, 지금까지 실컷 약올려놓고 장난 하냐!”
“미안하지만 아직 그쪽의 놀이는 진행 중이라서 말이야.”
태허천존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쪽의 일에 내가 너무 끼어드는 건 규칙위반이야. 알고 싶으면 스스로 알아보라고.”
“…제길!!”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결국 날 갖고 놀려는 거였어!
나는 분통이 터졌지만 이내 침착하게 놈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천암비서!!!”
“…….”
처음으로 태허천존의 안색이 달라졌다. 나는 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걸 느끼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천암비서의 정체를 말해!! 그건 대체 뭐길래 전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건지!!”
“흐음…. 네 녀석…, 설마 이 시점에서….”
“빨리 말해!!”
태허천존은 진심으로 곤란해 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놈이 왜 곤란해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스윽
아주 미세한 움직임으로 눈앞의 두 사람이 내 쪽으로 뒤돌아보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태허천존이 다시 손을 뻗어서 그들의 고개를 앞으로 고정시켰다.
틀림없다.
저 둘은 ‘천암비서’라는 단어에 크게 반응한 것이다.
태허천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하하하하하!!”
갑자기 그가 광소를 터뜨렸다.
“설마 종막의 뒤편에서 깽판을 치다니, 참 그쪽 전생자는 재밌어 보이는군. ‘나’는 정말로 재밌게 놀고 있을 것 같아서 부러워.”
“깽판이라니?”
“이런 일은 원래 존재할 수 없어….”
우웅
그 순간이었다. 회색 옷을 입은 자가 갑자기 허공에 손을 들었고, 그와 동시에 은하(銀河)가 그의 손 위에 떠올랐다. 은하의 덩어리는 뭉치더니 검(劍)의 형태를 만들었고, 이윽고 그 검이 시공간을 꿰뚫고는 태허천존의 목을 꿰뚫었다.
신역절기(神域絶技)
초시공(超時空)
은하단(銀河斷)
푸콱!!!
“……!!”
후우우웅
태허천존의 목이 잘려서 튕겨나감과 동시에 그의 목 밑동에서 거대한 혼돈이 치솟아 오르더니 마치 마귀같은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 마귀의 형상은 실로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예전에 봤던 삼황오제의 마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혼돈을 구현화시킨 그 존재는 자신의 목을 꿰뚫고 있는 은하단의 검기를 붙잡더니 마치 가시를 빼듯 잡아 뺐다.
신역절기(神域絶技)
무한일수유(無限一須臾)
절대적인 일격.
시간이 느려졌고, 공간과 함께 천천히 쪼개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회색옷의 사내가 일 참을 휘두르자, 시간의 틈새로 태허천존의 혼돈이 빨려가기 시작했고, 태허천존은 신성(神聖)을 내뿜으며 태극을 호흡하여 무한일수유를 무마했다. 태허천존이 우주의 기운을 호흡하는 순간 은하의 중심에서 빛이 뻗어 나오는 듯한 환영이 눈을 아른거리게 했다.
콰과광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세로 회색 옷을 입은 사내와 태허천존이 격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시각각 은하 단위의 힘을 뽑아내서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몰라서 어리벙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말 한 마디에 저 회색 옷의 사내가 갑자기 각성했고, 태허천존에 대한 무시무시한 분노와 적의를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저 자의 무위는 가히 생전 처음 보는 것으로써, 마치 진소청이 쓰던 신역절기 은하섬 같은 초월기를 써서 태허천존의 신성을 벨 수 있는 듯 했다.
슈칵 -
이윽고 회색 옷 사내의 검기(劍技)가 태허천존의 몸에 흩뿌려져 있던 16개의 신성 중 하나를 베어 갈랐다. 그러나 그 베어진 신성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둘로 쪼개진 후 마치 기름방울처럼 하나로 변했다.
태허천존은 혼돈으로 변한 상태에서 웃었다.
[넌 날 죽일 수 없다…. 이 무한의 싸움을 또다시 해보자는 것인가…. 하하하….]
회색 옷의 사내가 멈칫했다. 그 틈을 타서 태허천존은 자신의 혼돈의 팔을 내뻗었고, 그 팔이 회색 옷의 사내를 움켜잡자 그는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마치 아까처럼 아무것도 반응하지 못하는 듯 했다.
푸콱!!
그리고, 나는 가슴팍에서 피분수가 솟구쳐 오르며 입가에서 피를 뿜어내었다. 내가 부들거리며 그 자리에서 있자, 내 가슴을 꿰뚫은 태허천존의 팔이 서서히 들려 올려졌다. 점차 의식이 아득해져가는 사이에 태허천존의 영언이 들려 왔다.
[재미있었다. 전생자여.]
의식이 사라지는 사이에, 나는 얼핏 마도사 복장의 사내가 내 쪽을 곁눈질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사내는 입을 살짝 옴작거렸는데,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머릿속에 지식처럼 파고드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저 자도 회색 옷 사내처럼 의식을 차렸는데 숨기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서 정체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끄으…, 으으으….”
내가 가슴을 관통당한 채 발버둥치자, 태허천존이 실쭉 웃는 게 보였다.
[각별하군.]
퍼억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전신이 터졌다.
그것이 나의 26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