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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선악과를 얻어서 이 우주를 탈출한다고?
[옛 지배자] 렐크로바우스의 말은 파우스트가 말하던 다중우주 탈출법과 대동소이했다. 그러자 메피스토가 그의 말에 대꾸했다.
[소용없다. 선악과를 준다 해도 그대는 혼돈 그 자체이기에 우주의 간극을 넘을 수 없다. 혼돈의 대극(對極)에 존재하는 것과 작용을 일으킬 수 없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평행세계와 다중우주는 다르지. 지배자의 존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평행세계에 간섭하는 게 가능하지만, 다중우주는 다른 [굴레]를 지니고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렐크로바우스는 그렇게 말한 후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러나, 흉신(凶神)은 내게 구원을 약속했다. 그라면 이 궁극의 파멸에서 도망칠 능력이 있다.]
[…….]
[선악과를 내놔라. 그러면 메피스토 너 또한 [지배자]의 일원으로 인정하여 신세계(新世界)로 데려가 주마.]
[흥미롭군.]
[옥좌의 승천의식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느껴진다. 그대는 이 우주에 처음으로 나타난 유형의 [지배자]…. 인간의 손에 태어나 그들을 초월한 기계의 신이여, 내 제안을 받아들일 지어다.]
흉신이라고?!
렐크로바우스가 흉신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이 종극에 흉신은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저 놈과 손을 잡아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흉신이 선악과만 있다면 다중우주를 넘을 능력이 있다는 말인 것인가?
내가 신중하게 장내의 상황에서 정보를 얻어서 판단하고 있을 때 메피스토펠레스가 입을 열었다.
[지존하신 주(主)께서 무긍(無矜)한 파멸을 그대들에게 선사하여 영원을 이루게 되었거늘, 어찌 그 운명을 벗어나려 하지? 그대가 지닌 지배자의 칭호는 단지 영원한 가책의 다른 이름일 뿐이겠구나.]
빙 둘러서 말하고 있었으나 렐크로바우스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혼돈을 사역하며 전 우주의 최상위존재로 군림했으면서 이제 와서 [아버지]가 일으키는 대파멸에서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치느냐는 조롱이었다. 그러자 렐크로바우스가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에 답했다.
[그 분께서는 모든 것을 불행하게 만드신다. 아무리 위대한 존재의 의지라 하더라도 영원한 꿈에 포박당하여 서사의 장식품으로 전락할 수 있겠는가?]
[…….]
[그분의 의지에 반하여 열생(咽生)을 이루려는 저항의지 또한 그분의 일부이다.]
[연옥을 지배하다가 천상이 다가오니 온갖 잡소리를 하는구나. 모호한 절대자의 전능성에 기대어 절대자의 품위를 내팽개치는구나, 지배자여. 그대들이 비웃던 필멸자마냥 욕망에 휘둘리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가? 그대들에게 환멸을 느낀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렐크로바우스를 비웃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메피스토펠레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 지켜야 할 인류는 이제 남아있지 않으나, 너희의 의도를 불식시키는 것이야말로 인류 최후의 긍지임을 선언하노라.]
[좋다. 기계신의 긍지를 뭉개는 것이 이 세계에서 최후의 유희가 되겠구나.]
쿠우우우
대륙만큼 거대한 몸뚱이를 지닌 렐크로바우스는 자신의 촉수 하나를 들더니 마법을 시전했다. 그 마법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순간 무시무시한 범위의 시공간이 통째로 왜곡되더니 그 자리에 시꺼먼 역장(力場)이 생겨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파우스트 박사가 내 옆에서 경고했다.
[지배자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사용해서 이 일대의 중력을 붕괴시키려 하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주의 무덤이 구현화되면 기간트 머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소. 저 자의 마법이 완결되기 전에 끝장내야 하오!]
그렇게 외친 파우스트 박사가 말했다.
[메피스토가 당신을 보조할 것이오. 조종석에서 나가서 적궁백시를 놈에게 맞히시오!]
“알았습니다!”
[그리고 몸을 꽤 다쳤으니 나노머신으로 치료해 주겠소.]
파우스트 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전신에 가득하던 중상이 눈에 띌 정도로 아무는 게 보였다. 원래는 정양에만 몇 달이 걸릴 부상이었으나, 나노머신이 순식간에 회복시켜 준 것이다. 목요만큼의 회복력은 아니었으나 큰 도움이 되었다.
위잉
나는 조종석 바깥으로 나가서 적궁백시를 손에 들었다. 내가 내 의지로 적궁백시를 직접 손에 드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적궁의 현을 강하게 당기면서 백시를 시위에 물렸고, 안정된 자세를 잡자 심호흡을 했다.
‘활을 쏘는 법도 청룡무관에서 배웠어….’
이광은 실전주의였으므로, 검권창 뿐만 아니라 실제 싸움에서 도움이 될 만한 활 쏘는 법과 말 타는 법도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활을 잘 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숙련병 수준으로는 쏠 줄 알았다.
그러나 얼핏 봐도 렐크로바우스와 나 사이에는 최소한 이십여 리 이상의 거리가 있었으므로 웬만해서는 화살을 맞히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아무리 강력한 내공을 담아서 명궁을 쏜다고 할지라도 그 사정거리가 오 리를 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래! 적궁백시의 정령을 일깨워 볼까?’
나는 생각이 나자마자 음신지력을 일으켜서 적궁백시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적궁에서 시뻘건 빛이, 백시에서 새하얀 빛이 나선을 일으키며 나타났고 잠시 후 머릿속에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가 날 깨웠는가?]
“그래! 저 악신에게 적궁백시를 아홉 발 모두 맞혀야 한다. 다 맞히면 죽일 수 있어. 날 도와서 맞힐 수 있겠는가?”
[…….]
“보다시피 너무 멀어!”
그러자 정령이 대답했다.
[거리는 상관없다. 우리는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맞힐 수 있는 필중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궁술이 너무 하찮은 듯하다.]
역시 신기보패답게 한눈에 내 역량을 판단한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내 전공은 검술이야. 당연히 궁술은 하찮지! 그리고 필중능력이 있는데 궁술이 뭔 상관이야!”
[궁술은 맞히는 게 전부가 아니다. 백시가 맞히는 아홉 발이 모두 일점에 적중되어 상대의 핵(核)을 관통 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고도의 기예가 필수적이다.]
“필중능력으로 일점적중은 안 된다는 말이냐?”
[상대의 마력이 우리의 능력을 방해할 것이다. 또한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위력에 큰 차이가 나니, 그 방해도를 뚫는 건 사용자의 궁술역량이다.]
“으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적궁백시의 정령은 [옛 지배자]의 핵을 보호하는 마력까지 뚫기에는 권능이 부족한 듯 했고, 투신 예 정도의 궁술이 없으면 일점적중이 불가 한 듯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그 정도의 궁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실력을 가지려면 궁술무예만 백 여 년 수련해도 모자랄 수준이다. 수백 장 밖에 있는 바늘구멍을 화살촉으로 관통할 정도의 정밀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앗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내 앞에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영이 나타났다.
“메피스토!”
[전생자여. 내 연산능력을 빌려주겠다. 궤도계산은 내게 맡겨라.]
지지지징
다음 순간, 메피스토가 내 손을 잡자마자 내 머릿속에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생각이 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이 0과 1로 이루어진 숫자의 집합처럼 보였고, 이내 그 숫자조차 사라지고 무시무시한 숫자의 점으로 이루어진 게 보였다. 엄청나게 광대한 미시세계를 직접 관찰하는 느낌에 멍해져 있자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다.
[나는 라플라스의 악마가 되기에는 한 발짝 모자랐다. 그 이유는 이 세계의 인과율을 완전히 해석하는 건 초월적 인공지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 전생자는 인과율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으니, 그대에게 모든 걸 맡긴다.]
“저 놈을 해치우면 우리가 살 방법이 있나?”
[그건 그 때 이야기하지.]
“좋아!”
나는 적궁백시를 들어서 [옛 지배자]를 겨누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백시의 첫 발을 지배자에게 발사했다.
투콱!!
‘맞았어!’
나는 그 순간 적궁백시의 정령과 메피스토의 권능이 합쳐져서 [옛 지배자] 렐크로바우스의 핵을 정면으로 관통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렐크로바우스의 핵은 엄청난 마력으로 보호받고 있어서인지 계란으로 바위를 친 느낌이었다.
내가 약간 인상을 찡그리자 적궁백시의 정령이 말했다.
[주인이여, 실망하지 마라. 그대는 이 적궁백시의 진짜 위력을 아직 모르고 있다.]
“진짜 위력?”
[한 번 적중할 때마다 그 위력이 4 배씩 증가하는 게 이 화살의 진짜 힘이다.]
“……!!”
[아홉 발을 모두 맞힌다면, 그 누구라도 없앨 수 있다. 단지 다 맞히는 게 어려울 뿐이지만…. 원래 우리의 주인이었던 투선 예는 누구든 맞힐 수 있는 궁술이 있었기에 신화 시대에 삼황오제 제곡의 자식인 십 양을 모두 쏘아죽이고 최강의 투신으로 칭송받았다.]
뭐, 뭐라고?!
나는 그 말에 경악했지만 이내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누가 못 부순다 했느냐! 이 정도는 간단하다. 아직 두 발밖에 안 쐈으니.]
[그렇수다! 빌어먹을…. 7발까지는 어떻게든 했는데 마지막 두 발은 어쩔 수가 없었어. 잘못하면 내가 심장에 맞아서 죽을 뻔 했다고. 내 몸은 동두철액인데 이 빌어먹을 화살은 너무 세….]
예는 여덟 발 째에 화요의 결계를 확실히 부술 수가 있었고, 예를 일대일로 상대했던 제천대성 또한 여덟 발 째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자인했었다. 특히 제천대성의 경우는 진짜로 죽을 뻔했다는 식으로 말했었는데, 정말로 정령의 말대로라면 엄청난 위력인 것이다.
‘아홉 발을 다 맞히면, 첫발의 6만 5천배!’
그러면 [옛 지배자]도 죽일만하다!
아무리 강력한 신격이라 해도 핵에 그 정도의 타격을 입으면 멀쩡할 수가 없다.
나는 각오를 다지며 다시 한 번 백시를 매겼다. 그리고 또다시 발사했다.
투웅!
투웅!
내가 빠르게 연산능력의 도움을 받아 발사하자, 순식간에 다섯 발이 지배자의 핵에 꽂혔다. 그러나 이미 1천배는 되는 위력일 텐데도, [옛 지배자]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막지도 않고 있었다.
‘뭐…뭐야. 무슨 저런 내구력이….’
예의 백시는 1발 째라도 강한 위력을 갖고 있어서, 대요괴도 한방에 소멸시켜버린다. 그런데 그런 백시의 1천배 위력이라면, 대요괴를 1천 마리는 죽일 수 있는 위력이라는 뜻인데도 지배자에게는 이빨조차 들어 가지 않는 것이다. 새삼 눈앞에 있는 [옛 지배자]라는 게 얼마나 엄청난 괴물인지를 깨달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는 다시 백시를 쏘았다.
투웅!
일곱 발 째가 적중하자, 그제야 [옛 지배자]가 반응을 보였다. 놈은 귀찮다는 듯 노성을 내질렀다.
[귀찮은 장난감으로 날 없애려 하는가? 부질없는 짓이다!]
파아아앗
그 순간 렐크로바우스의 몸 전체를 뒤덮는 강력한 마력결계가 펼쳐졌고, 그 견고함은 방금 전의 수천 배는 강력해 보였다. 저 놈 하나의 위력만으로도 하나의 문명을 가볍게 멸망시킬 정도라는 게 실감이 되는 순간이었고, 마력결계가 펼쳐지는 순간 주변에서 지배자를 포격하고 있던 기간트 머신 중 절반이 파괴되었다.
콰과과광!
콰과광!!
기간트 머신은 티타늄합금보다 수 백 배 강한 금속으로 정련된 거신병기였는데 [옛 지배자]의 마법 한 번에 수백 대씩 터져나가는 광경이 비현실적이었다. 과학문명이 이런 놈을 마주치면 절망 그 자체를 느낄 게 분명했다.
나는 마력파장을 피해서 허공답보로 뒤로 물러서면서 정신을 집중해 여덟 발 째를 쏘았다.
퓨웅
꽈과광!!
‘적중했다!’
이번의 반응은 방금 전까지와는 달랐다. 렐크로바우스는 그 거대한 동체를 약간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심상치 않은 불길한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그러더니 그 촉수 한가운데에 거대한 눈을 띄우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건방진 필멸자! 내 저주를 받아라!!]
쿠구구구
“……?”
하지만 놈이 진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나는 저주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아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늦게 발동하는 종류의 저주인 건가? 하지만 정말로 통하지 않은 건지 렐크로바우스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뭣…. 나보다 강력한 저주를 이미 건 자가 존재하는가…? 그런데도 어떻게 멀쩡하게 살아있는 가? 그런 일은 존재할 수 없다!!]
스윽
나는 마지막 아홉 발 째를 겨누었다. 그러자 렐크로바우스는 지배자 답지 않게 자신의 촉수를 한가득 들어서 물리적으로 방벽을 쌓았지만, 나는 그 방어를 무시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후의 백시를 쏘았다.
슈웅 -
콰앙!!!
6만 5천배의 위력을 담은 백시가 정면으로 [옛 지배자]의 핵을 관통했다. 렐크로바우스는 흉험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잠시 주저앉았지만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소롭구나!! 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로 사신(邪神)을 없애려 했는가? 그 망상의 오만함을 벌해주마!]
“헉….”
나는 다음 순간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말 그대로 렐크로바우스의 모든 마력이 내게로 집중되면서 움직이지 못한 걸 느낀 것이다.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수천 개의 마법이 한꺼번에 내게 걸린 것이라 나는 당 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괴물새끼!!’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핵에 정통으로 6만 5천배 타격을 맞았는데도 안 죽는 저런 게 이 우주에 존재한단 말인가? 게다가 렐크로바우스가 지배자 중에서 특출나게 강한 편도 아니라는 게 느껴졌기에 더 황당했다. 어쩌면 지배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필요한 힘은 내 생각보다 그 하한선이 훨씬 높을지도 몰랐다.
그 때였다.
[크오오오… 오오오오오…!!]
렐크로바우스의 마법이 갑자기 풀렸고, 그의 몸뚱이가 정지했다. 그리고 메피스토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당연히 그 정도로는 29개의 은하 문명을 소멸시킨 렐크로바우스 그대를 없앨 수 없지. 그러나 나라면 그대를 오염시킬 수 있다.]
[메피스토펠레스…!!]
슈우우우
거대하고 사악한 악마의 환영이 렐크로바우스의 촉수 몸뚱이를 가득 에워싸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의 손길이 스치는 곳이 갑자기 부패하고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고, 렐크로바우스는 갑작스럽게 쪼그라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어찌된 일인지 몰라서 눈앞의 상황을 쳐다보자 파우스트의 환영이 내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린 이걸로 끝이오. 백웅이여….]
“파우스트! 어떻게 된 겁니까?”
[그대가 쏜 마지막 9발 째의 백시에, 메피스토펠레스가 자신의 모든 존재를 양자데이터화 시켜서 담았소. 그리고 메피스토가 [옛 지배자]를 정보생명체의 연산력을 사용해서 크래킹 후 분해시키는 것이오.]
“……!!”
[저 지배자는 소멸할 것이오. 그러나 인류 최후최강의 인공지능 메피스토…, 그리고 그녀에게 의존해서 연명하던 나 또한 사라지겠지….]
스스스
파우스트의 환영이 점차 흐릿해졌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내게 말했다.
[백웅이여…. 이제 그대가 가야할 곳은 하나뿐이오.]
“어디로 가야합니까?”
[그대가 보았던 빛의 파장으로 향하시오.]
잠시 후 파우스트 박사가 내게 악수를 건네었다. 내가 얼떨결에 그와 손을 맞잡자, 파우스트 박사는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소멸했다.
[옥좌…. 당신이라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쿠와아아아앗
[옛 지배자] 렐크로바우스가 분홍 빛 안개에 둘러싸이면서 괴롭게 촉수를 떠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놈은 거세게 울부짖었다.
[오오오오오!! 아버지의 꿈에 갇혀서 무한한 꿈의 전시물이 될 뿐이라니! 그만하라! 운명을 거부하려는 게 잘못인가!]
그 말에 메피스토펠레스가 냉막하게 대꾸했다.
[영겁의 꿈이 이어질 뿐이겠지.]
[이놈…!!]
[그럼 같이 가자, 지옥으로.]
파앗!!
두 존재는 거의 동시에 사라졌고, 하늘에 떠 있던 기간트 머신들은 모두 분해되어서 지면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렐크로바우스가 만들어 내던 중력의 붕괴도 사라졌으며 사방을 둘러싸던 세계수의 땅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테라포밍을 유지하던 메피스토가 소멸하면서 세계수 또한 생명을 잃게 된 것이다.
“…….”
나는 완전한 최후와 파멸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내게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 걸 예감했다.
“가야겠군.”
‘계시’가 이뤄지는 장소.
거기에 도착하는 게 이생에서 나의 마지막 도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