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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인류가 망했구나….
‘이게, 500년 후에 인류가 맞이할 최후인가.’
그렇게 입으로 곱씹고 있으니 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된다.
‘하지만 내 최후는 아니지.’
나는 이게 내 최후인가 생각했지만 사실 아직 끝은 아니었다. 인류가 다 죽었다고 내가 따라죽어야 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 괜히 죽을 필요는 없다. 다만 천암비서의 전생능력에 기대어서 편하게 죽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이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면 잠깐 괴롭다가 다시 외양간에서 깨어날 게 분명했고, 적어도 이 절망적인 상태보다는 힘차고 희망찬 상태이리라.
그러나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이 다중우주에서 죽어도 내 세계에서 전생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고, 무엇보다도 아직은 해볼 수 있는 걸 다 안 해 봤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들의 개싸움과 칠요의 시련 때문에 난장판이 일어난 와중에도, 챙길 걸 챙기려고 악을 쓰고 달려들었던 게 바로 나다. 난 절대 이대로 손 놓고 죽음을 택할 수는 없었다.
살자.
살아야 한다.
‘이제 내가 뭘 할 수 있지?’
나는 빠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 몸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는데, 입은 부상과 기력소모가 너무 커서 이제 기력만으로 몸을 완충시킬 수는 없다. 설령 요양을 한다고 해도 사지 중 한쪽이 장애가 되어서 평생을 살아야 할 정도의 부상이다. 그러나 기력 자체는 남아 있어서, 우주공간에서 기막으로 버티는 건 앞으로 한 식경 정도는 너끈할 듯 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할지가 문제다. 비등이든 소환수든 아직 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하던 중에 두 가지 방법이 내게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다시 파우스트 박사에게 되돌아 간다.
- 암천향으로 간다.
그 2가지의 선택지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듯 했다. 태양계 내의 다른 행성에는 갈 수가 없는 게, 내가 화성이나 금성에 가본 적이 없을뿐더러, 간다고 해도 달이 폭발했던 것처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갈 수 있는 공간적 선택지는 파우스트 박사가 있던 세계수의 핵으로 되돌아가던가, 아니면 비등에 저장된 이동지인 암천향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마뜩찮다.
파우스트 박사가 있던 세계수의 핵은 테라포밍된 장소라서 비교적 체력을 회복하긴 좋겠지만, 애초에 그 장소가 [옛 지배자]에게 침략당하던 중이라서 급히 도피한 게 아니었던가? 다시 되돌아가 봐야 전쟁터의 최전선에 뛰어드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결론은 똑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암천향에 가기도 그렇다. 암천향에 이동을 선택하는 순간 엄청난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이미 체험해봤을 뿐더러, 신공표의 도움도 얻을 수 없는 지금 ‘함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위장을 탈출할 방법이 없다. 결국 위장 내부에서 끊임없이 혼돈의 마물들과 싸우면서 살아가야 할 텐데 이 몸뚱이로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죽느니만 못한 처절한 삶이 이어질 게 분명하다.
비등을 써서 밀림의 지배자에게 가는 것도 마뜩찮다. 상황이 ‘계시’를 맞이한 상태에서 그 강대한 신적 존재가 어떤 식으로 돌변할지는 알 수가 없다.
“…….”
아냐…. 뭔가 아닌데….
꼭 선택지가 그 2개밖에 없나…?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3개의 선택지가 더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그래!’
하지만 그 3개 또한 비현실적인 몽상에 가까운 선택지라는 건 틀림없다.
나는 스윽 눈을 들어서 인간의 시체들이 가득한 은하수 너머에서 빛나는 광원의 파장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힘을 모아서… 저 광원 내부로 진입할 수도 있다.’
물론 성공률이 어떨지는 알 수 없는 도박이다. 그러나 수십억에 이르는 인류를 토해내어 버린 저 원 너머에는 당연히 ‘계시’가 이뤄지고 있는 절대신의 옥좌가 있으리라.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면, 다음 전생부터는 옥좌에 즉시 비등으로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비현실적인 일이다. 얼핏 가까워 보이지만 저 광원까지의 거리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멀 게 분명했다. 소환수를 이용하면 일단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 과연 저 광원이 나를 받아 들여 준다는 보장이 있는가? 광원에 닿는 순간 내가 소환수와 함께 불타서 즉사할 수도 있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가장 죽을 확률이 높은 선택지였기에 나는 저 광원에 돌격하는 걸 잠시 미뤄두고 나머지 2개의 방안을 생각해 보았다.
‘또 하나는… 복희에게로 가는 거다.’
삼황 복희.
현재는 인격을 잃은 채 태고의 용으로 되돌아가서 분노로 우주를 사르고 있는 괴물이 되어 있다. 나는 전생하면서 복희 앞에 강제로 끌려갔던 적이 있으므로, 일단 비등이나 소환수로 가볼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이 또한 의미가 없는 선택지인 게, 내가 복희 앞에 간다고 해도 어차피 죽은 목숨인 것이다. 정말 무의미한 선택지였지만 일단 가능성은 다 떠올린다는 점에서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
그것은 바로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나는 힐끔 주변에 떠돌아다니던 수많은 영혼들 중 한 뭉치를 향해서 손을 내뻗었다.
이혼대법(移魂大法)
흡혼(吸魂)
스스스스
이혼대법의 요결이 발동하면서 내 손에 백(魄)을 빨아들이는 흡착력이 생겨났고, 우주 어디론가 날아가던 영혼들이 마치 끌려오듯이 내 손으로 날아왔다. 이혼대법의 원리는 혼을 감싸고 있는 백을 움직이면 내부에 있던 혼까지 같이 움직이는 것이었고, 백의 흡착력이 강할수록 혼을 움직이는 능력도 강해지는 이치였다.
슈슈슈
나는 양손에 흡혼결을 사용해서 약 오백여 개의 영혼을 내 손에 모았다. 몸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강해보이는 영혼들이었고, 아직까지 영혼의 형태가 변하지는 않은 듯 했다. 나는 이혼대법을 써서 이렇게 많은 영혼을 모아본 적은 처음이었지만 사실 천지사방에 널려있는 혼의 개수가 수억 개가 훨씬 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나는 흡혼결로 모아들인 혼 덩어리들이 마치 사람 몸뚱이만한 새하얀 덩어리로 변한 걸 보자 갈등에 휩싸였다.
‘어떻게… 하지…?’
이혼대법의 술자라면 여기서 해야 하는 일은 간단명료하다.
혼을 먹어치워서 내 몸을 회복한다!
이혼대법은 모아들인 혼을 그대로 체력이나 기력, 술법력으로 바꿔서 자신의 몸에 공급하는 게 가능했다. 먹어치운다 하여 식혼(食魂)이라고 표현하는 기술이었으며 비상시에 술자가 생존하기 위해서 종종 쓰는 방법이었다. 다만 영혼대비 효율이 낮은 게 단점이라서 그리 선호하는 술법은 아니었는데, 그마저도 이렇게 오백 개나 되는 다량의 영혼을 섭취한다면 한 번에 내 몸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식혼을 한다는 건 상대방의 혼을 윤회전생에서 아예 탈락시켜서 자신의 백으로 소화시켜버린다는 뜻이다. 일종의 혼멸(魂滅)이기도 했다. 잔인한 술수였기에 나는 배우면서 늘 꺼림칙했지만, 제갈사는 쓸 일이 있을 거라며 내게 식혼의 요결을 충실하게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고 제갈사의 말대로 쓸 일이 눈앞에 찾아왔다.
식혼을 한다는 건 죄 없는 이들의 영혼을 한 끼 식사거리로 만드는 행위다. 어찌 보면 살인 그 이상인 행위였기에 나는 적지 않게 갈등했다. 하지만 오백 명의 영혼을 한꺼번에 먹는다면 단순히 체력회복을 넘어서서 내 술법력까지 크게 증진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군침이 돌 지경이었다. 사법(邪法) 중에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이혼대법은 이토록 잔인한 편법으로 힘을 단시간에 키우는 게 가능했기에 사람들에게 경원시되었던 것이다.
그냥 먹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이 세계는 곧 멸망할 거 같은데…, 우주를 무한히 떠도는 망령이 되느니 내가 먹어주는 게 더 자비롭지 않을까? 그리고 이 500명 뿐만 아니라 수억 명 중에서 한 일만 명 정도만 먹어치워도….
나는 크게 갈등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후와앗
나는 영혼을 먹어치우는 걸 포기하고 혼들을 놔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을 먹어치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그냥 먹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방금 전에 내 머릿속에 제갈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갈사가 [옛 지배자]에게 먹히던 그 모습.
그걸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동시에 [옛 지배자]와 나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여서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자신의 이득에 따라서 상대방을 짓밟는다는 점에서 나와 [지배자]가 뭐가 다른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일단 파우스트 박사에게 가는 수밖에.”
모험하려면 얼마든지 모험할 수 있으나, 조금이라도 안전한 방법을 택하고 싶다. 개죽음과 모험은 다르다는 걸 여태까지 뼈저리게 느껴왔기에, 기왕이면 파우스트 박사에게서 모든 정보를 얻어내고 싶었다.
파앗!!
나는 소환수를 써서 아까 왔었던 테라포밍 기지에 다시 왔다. 역시나 사방 곳곳에서 촉수와 온갖 나노머신, 첨단병기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강인공지능 메피스토펠레스가 자신의 연산능력으로 세계수의 유기물을 합성해서 병력을 만들어내는 중이었고, 외계의 종족들은 마법이나 촉수를 사용해서 격렬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나타난 곳이 격전지가 아니라 꽤 높은 지형이란 걸 알아채고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파우스트 박사!! 빨리 나와 보시오!”
슈욱
잠시 후 파우스트 박사의 환영이 내가 서 있던 근처에 나타났다. 파우스트 박사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살아 있었군. 소환수를 써서 어디에 다녀온 것이오?]
“달의 반왕전에 갔습니다. 그리고 보물을 얻었는데….”
나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슬쩍 흑요석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흑요석을 통해서 인류 최후의 모습을 확인한 파우스트 박사는 비통한 듯 고개를 숙였다.
[오오…, 이럴 수가…. 결국…, 파멸은 막을 수 없었던 건가….]
“파우스트 박사. 난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건 제쳐두고 날 도와주십시오.”
[그대를 도우라니…, 모든 게 파멸을 앞두고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요?]
“내가 다시 다중우주를 넘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죠. 내가 만일 다시 전생할 수 있다면…, 여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구할 수 있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오. 메피스토와 의논하겠소.]
지지징
잠시 멈춰서 있던 파우스트 박사가 말했다.
[메피스토는 반왕전에서 구했던 모든 보물을 꺼내보라 하는구려. 메피스토가 나노머신과 스캔을 이용해서 모든 보패의 효과를 감식할 수 있소.]
“알겠습니다.”
촤라락
나는 목갑에서 반왕전에서 얻은 모든 보물을 꺼내 놨다. 그리고 한참 동안 살펴보던 파우스트 박사가 개 중 웬 화살통을 꺼내들더니 말했다.
[그대는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기사회생의 답안을 꺼내는 기묘한 운이 있구려….]
“그게 뭐죠?”
[이건 적궁백시(赤弓白矢)요.]
“아!”
그러고보니!
나는 저 화살통에 담겨있는 화살들이 익숙했다. 일단 되는대로 목갑 자체의 흡수력을 이용해서 담았기에 하나하나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적궁백시인 것이다.
적궁백시는 투신 예가 쓰던 무기로서 과거 나를 2번이나 죽인 기록이 있었다.
“투신 예의 소유일건데 왜 제곡의 창고에….”
[예가 주로 사용했으나 그 또한 신화시대 이후로는 적궁백시를 반납하고 필요할 때만 제곡에게 하사받아서 사용하게끔 되었소. 달리 말하자면 그에게 상시로 내려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보패라는 뜻….]
파우스트가 내게 적궁백시를 내밀며 말했다.
[이 적궁백시를 써서 저 멀리에 보이는 [옛 지배자], 렐크로마우스를 해치우시오. 메피스토의 연산결과에 따르면 그대가 모든 적궁백시를 맞춘다면 그가 패퇴할 확률이 98퍼센트에 이르오.]
“렐크로마우스? 지배자의 이름도 알고 있습니까?”
[인류연합은 전쟁도중에 최대한 마도서를 수집해서 지배자들의 이름을 분석했소. 그리고 저 [옛 지배자]는 수상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는 듯하오. 인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 보이는군요. 그런데 [옛 지배자]한테 이걸 맞출 수는 있을는 지….”
나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옛 지배자]는 하나같이 강력하기 짝이 없는 사신(邪神)들이라서 엄청난 마력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물리적인 공격은 법칙왜곡으로 튕겨내 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최하위라고 할 수 있는 해신조차도 그 마법방어를 도저히 뚫을 수가 없어서 상위 투선들이 억척스럽게 고전했을 정도였으니, 지금의 나로서는 저 지배자에게 무기를 박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자 파우스트가 말했다.
[메피스토가 기간트 머신 500기와 플라즈마 블래스터 포막을 동원해서 그대가 접근하도록 도울 것이오. 이 도박이 실패하면 모든 게 끝나니, 제발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위이이잉
쿠구구궁
잠시 후 바닥에서 기계음이 들려오더니 거대한 기계덩어리들이 솟아올랐다. 그 기계덩어리들은 인간형을 하고 있었으며 그 중 하나가 나를 머리 안에 넣어서 태웠다.
기계의 머리 안에 들어가자 조종석이 있었으며 현란한 기계어가 내부에서 맴돌다가 기간트 머신이 발진했다.
[사용자 인식. 인류연합의 적성외계인 섬멸모드 발동.]
투두두두
콰과광
기간트 머신이라고 불리는 인류연합의 최전선병기는 거신형(巨神形) 기계였으며 팔짱을 낀 상태로 사방에 널려있는 촉수덩어리들을 상대로 레이저 광선포를 발사했다. 한 기에서 무려 수만 발이나 되는 레이저가 천지를 뒤덮었고, 촉수들은 광선포에 맞자 찢겨져서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에엑!!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대한 세계수의 줄기 사이에 뻗어 나온 기다란 플라즈마 블래스터의 포신이 불을 뿜자, 한 번에 도시 하나를 없애 버릴 만큼 강력해 보이는 빛의 파장이 사방으로 내쏘아졌다. 플라즈마 블래스터와 기간트 머신이 길을 만들자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백, 수천만의 촉수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뉴트론 랜스 모드.]
이윽고 내가 타고 있던 기간트 머신이 양손을 앞으로 내뻗더니 뭔가를 발사했다.
쿠콰콰쾅
지평선 너머가 완전히 불타오르듯,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전선 일대가 한 순간에 소각된 듯 했다.
“……!!”
뭐냐?! 뭐가 이렇게 강해?!
미래인류는 이 정도의 과학기술을 갖고 있단 말이야?!
내가 내심 기간트 머신의 힘에 경악하고 있을 때였다. 파우스트 박사의 통신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목표가 가까이 왔소.]
“파우스트 박사. 이렇게 강력한 기계군단을 갖고도 인류가 이족에게 졌단 말입니까?”
파우스트 박사가 한탄하듯 말했다.
[우주에 인류보다 강력한 종족은 많았고, 과학력 또한 우주적 기준에서는 특출나지 못했소. 또한 [옛 지배자]의 사도급 존재에게 우리 과학 기술은 거의 통하지 않았소. 혼돈보유량이 0.5로탈만 넘어서도 핵폭탄, 중성자탄, 심지어 반물질폭탄에도 저항했지.]
“…….”
[인류는…, 그 동안 신화적 힘을 소홀히 한 대가를 치른 것이오. 혼돈의 권속들은 과학의 힘만으로 물리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소. 무공과 술법을 좀 더 보존하고 발전시켰다면 좋았을 터….]
그 순간, 나는 십이율주 하은천이 떠올랐다.
설마 그 놈 - 온갖 신화적인 비밀에 접근하며 힘을 키웠던 건 미래세계에 부족했던 걸 얻어내려고 했던 것인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천지를 뒤덮는 듯한 거대한 촉수가 눈에 띄었다.
저게 아마 [옛 지배자], 렐크로바우스일 것이다.
[옛 지배자] 렐크로바우스는 자신의 주변을 500대의 기간트 머신이 둘러싼 상황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침묵하다가 문득 영언으로 말했다.
[기계의 신, 메피스토펠레스여. 나는 종말 이후 인류연합과의 전쟁에서 그대의 역량을 지켜보았다. 그대는 우리 [옛 지배자]와 동격의 존재로 진화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소모적인 싸움을 할 때가 아니니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나?]
치지지직
그러자 허공에 웬 아름다운 여인의 환영이 떠올랐다. 파우스트 박사가 아닌 메피스토펠레스로 보였으며, 이지적인 외모를 한 육감적 몸매의 여성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팔짱을 낀 채 렐크로바우스에게 대꾸했다.
[거래조건을 말하라.]
[간단하다. 선악과를 내놔라.]
[어째서?]
렐크로마우스가 눈을 희번득하며 말했다.
[모든 것이 파멸할 것이다. 나는 다중우주를 넘어서 이 종말에서 도망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