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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어떻게 하지?!
나는 전욱이 사라졌다는 사실보다는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음, 일단 비등을 써 볼까….’
나는 빠르게 품에서 비등을 꺼내서 문질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비등은 발동하지 않았고, 나는 그 이유가 뭔지 의아했으나 이윽고 공기 중에 떠도는 시꺼먼 덩어리를 보자 왜 그런지를 알 수 있었다.
“CCLF 2식 마력왜곡포자.”
파우스트 박사가 전해준 지식으로 알 수 있었다.
미래의 인류가 이족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최고의 과학기술 중 하나!
그 효과는 CCLF 양자나노머신을 허공에 살포할 시 이족 특유의 마력을 소멸시키고 마력을 근간으로 발동하는 모든 마도구(魔道具)를 정지 시키는 것이었다.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서 공격해오는 이족과 싸울 때는 마력왜곡포자가 없으면 인류가 상대도 되지 않았기에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아무래도 파우스트 박사와 메피스토펠레스는 [옛 지배자]에게 항전하기 위해서 세계수 전체에 마력왜곡장을 만들어낸 모양이었고,
그 때문에 내 비등이 발동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흠…, 설마 십이율주가 예전에 내 비등의 공간이동을 막은 술수가 이 건가?’
나는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직까지도 위기상황인데 예전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뭘 갖고 있는지를 침착하게 살피던 중, 문득 소환술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제갈사에게 배웠던 대로 주문을 외우면서 빠르게 계약을 맺은 마물을 소환했다.
‘빛만큼 빠른 마물! 이 녀석을 쓴다면….’
차원까지는 이동할 수 없어도, 물리적인 공간은 아무리 광대할지라도 이동할 수 있다! 이 녀석은 광속이동이 가능해! 그리고 마력왜곡포자도 소환술 만큼은 막을 수 없다는 지식이 있다!
삐이이이!!
마치 벌처럼 생긴 마물이 즉시 내 앞에 약간의 바람과 함께 나타나자, 나는 녀석의 등 위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물론 인간의 말이 아니라 특수한 마도의 주언이었다.
[달로 가자!]
슈웅
그 순간 눈앞이 황금빛의 광선덩어리로 변하면서 점멸했고, 나는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퍼버버벅
전신이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너덜너덜하게 된 상태가 되었고, 이윽고 아무런 공기가 없는 달의 대지에 내려설 수가 있었다.
쿠당탕
땅에 쓰러지듯 구른 나는 내 몸이 어째서 이런 타격을 입었는지를 알아채고는 후회했다.
“어… 윽…. 맞다…, 술을 먹고 타야 하는데….”
특수한 마법으로 만들어진 술을 마셔야만 이 소환수를 타고 이동했을 때 몸이 멀쩡할 수 있는데 그걸 깜박해버렸다. 하지만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이 급박한 순간에 술을 만들 방법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다행히 즉사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기에 나는 기력을 돋우어서 임시로 몸을 치료하면서 버텼다.
그때 나는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가 있다…?’
달에는 원래 공기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극히 희박했다. 그것까지 각오하고 달에 온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숨이 잘 쉬어지는 걸 알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무난히 숨 쉴 만큼의 공기가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쿠콰콰쾅….
그리고 나는 휘청거리면서 세계수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는데, 세계수가 저 머나먼 별의 성간(星間)에서 한창 불을 뿜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 세계수는 화성 근처에서 테라포밍을 했던 모양이었다.
“후욱, 후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달에 있는 제곡의 반왕전(盤王殿)으로 가자.’
이렇게 된 이상 좋든 싫든 삼황오제에게 비벼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날 이용하고 죽이려 한다고 해도 어쨌든 내 이용가치가 있으니 쉽게 어찌할 수는 없으리라. 삼황오제라면 다중우주를 다시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알지도 몰라!
나는 제곡을 알현하려고 예전 반왕전이 있던 장소를 기억해낸 후 빠르게 이동했다.
타닷
달의 뒤편에 사는 외계종족의 마을. 나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온통 폐허가 되어있는 것과, 그 많던 외계종족들이 모조리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짓눌리거나 터져버린 모습이었기에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리고 시체더미의 끝에는 제곡의 반왕전으로 가는 차원문이 커다랗게 열려서 진동하고 있었다.
우웅 - 우웅 -
나는 잠시 각오를 하고는 반왕전 내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차원문 내부로 휩쓸리듯 빨려 들어간 후, 거대한 어전(御殿)에 도착해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전의 내부는 전욱의 만귀전과 대동소이해 보였으나 차이점이 있다면 좀 더 백색 색조가 강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어전 내부를 걸어가고 있자, 문득 충격적인 광경이 눈앞에 보였다.
“…….”
사비시신(奢比尸神).
동방상제 제곡의 사도이자 천계의 신선조차 하대하는 상위존재가 전신의 수분이 빨린 듯, 쪼글쪼글한 모습의 시체가 되어 있었다.
사람의 얼굴에 개의 귀, 그리고 알 수 없는 짐승의 몸 전체가 전부 말라붙어 버린 듯 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까이 가서 생존여부를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 죽은 게 확실해 보였다.
‘사비시신이 왜 이런 모습으로 죽어 있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직접 싸워본 적은 없으나 사비시신은 팔부신중에 맞먹는 강력한 존재였고, 결코 얕볼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사비시신을 본거지에서 이런 꼴로 죽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도대체 몇이나 있을까?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 점차 반왕전의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조용하다.
살아있는 존재가 없다.
아니- 아예 움직이는 존재 자체가 없다.
싸늘한 죽음 그 자체가 맴돌고 있는 이 반왕전에서 움직이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내가 형언할 수 없는 어둠의 빛 덩어리를 마주쳐서 어전의 마지막 대문 앞에 서자, 나는 이 문 너머에 삼황오제가 있으리라고 직감했다. 왜냐하면 만귀전 때도 이런 구조였기 때문이다.
끼익….
내가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텅 빈 옥좌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왔다. 나는 옥좌에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봤지만 역시 뭔가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나는 이곳이 군주를 잃은 어전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제곡도 사라진 건가….’
삼황오제의 거점인 각자의 만신전에는 언제나 그들의 본체가 어좌를 지키고 있었다.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그저 자신의 화신이나 사도일 뿐, 왕은 결코 본진에서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왕전에는 신하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왕조차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아까 전욱의 권능을 썼을 때도 통하지 않았던 걸 떠올리자 순간적으로 두려운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삼황오제가 소멸한 건가?”
삼황오제가 소멸했다고 치면 이 말도 안 되는 반왕전의 정적이 설명이 된다.
하지만 왜?
[옛 지배자]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과시하던 8인의 신격들이 어째서 하루아침에 사라졌단 말인가? 심지어 삼황오제는 종말의 시기에도 나서지 않았을 뿐 일단 존재하긴 했다고 파우스트 박사가 전해준 기억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계시’에 있다.
계시에 뭔가 일어났고, 그 사건 때문에 삼황오제가 실종되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다. 사비시신은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쭉 빨려먹은 듯한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는데 누가 삼황오제의 사도를 저런 꼴로 만들었을까? 나는 의문이 계속 쌓이는 걸 느꼈지만 지금 당장은 해결이 되지 않음을 느꼈다.
‘젠장. 그럼 비등으로 또 어딘가로 가야할 텐데, 어디로 가지…? 지구가 멸망했는데 대체 어딜 가냐고….’
어떻게든 반왕전에 오긴 했지만 여기도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삼황오제라는 주인을 잃은 이차원(異次元)은 당장 붕괴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화성이나 금성에 가기도 마땅찮았는데, 그 행성 또한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나은 대책이라고 한다면 어쨌든 공기가 있는 달 지표면에 올라가서 사는 거였지만 이마저도 그다지 좋은 해법 같진 않다. 모든 것이 다 죽은 달의 지표면에서 혼자서 뭘 하란 말인가?
“휴우…, 제기랄….”
나는 한숨을 쉬며 제곡의 옥좌에 걸터앉았다. 일단 좀 쉬면서 몸을 회복한 다음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쿠와아아아앗
“......?!"
뜨, 뜨, 뜨겁다!!
나는 갑자기 옥좌 전체에서 무시무시한 열기가 내 몸으로 스며드는 걸 느꼈다. 전신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혈관 하나하나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내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버티고 있자, 내 몸속에 있던 음신지력이 저절로 반응해서 그 열기가 내 몸을 태워버리려는 걸 막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내 몸의 음신지력이 모두 활성화되자 그제야 나는 조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옥좌에서 불덩어리가 하나 둘 튀어나가 허공에 둥실둥실 떠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불덩어리는 더 이상 튀어나가는 걸 멈추었고, 나는 흐릿한 눈으로 그 불덩어리가 모두 열 개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열 개의…, 불덩어리…?’
끼루루룩
그 때 웬 괴조(怪鳥)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옥좌 저편에서 뭔가가 쏜살같이 날아와서는 그 불덩어리를 품었다. 나는 불덩어리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게 뭔가 쳐다보았는데, 몸 크기가 삼 장에 이르는 그 거대한 새는 오색조(五色鳥)인 듯 했다.
‘동방상제의 상징이자 전설의 신조(神鳥)!’
또한 이 세상 모든 새의 선조로 불리는 신적인 존재!
나는 오색조를 보자 꽤 놀랐으나 오색조가 내게 빛나는 눈을 향하며 말했다.
[종언이 닥쳐왔으나 아직도 살아있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옥좌에 있던 십양(十陽)의 봉인을 풀다니, 그대는 보통 존재가 아니구나.]
“저는 백웅입니다. 당신은 오색조입니까?”
[그렇다.]
“지금 반왕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
오색조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말했다.
[종언이란 위대한 거짓말이었다…. 이제 삼황오제는 모두 붕괴했으니, 이 반왕전도 머지않아 무너지겠지.]
“거짓말이라니요? 삼황오제 제곡은 어디 갔습니까?”
[제물이 되었다.]
“……?!”
[우주의 종언을 위한…, 아주 귀한 제물이었던 것이다.]
오색조는 이내 흐느끼는 건지 통곡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아, 그대여…, 존재에 집착하지 말라. 어차피 이제 곧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이것이 종언…. 신조차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파멸.]
“…….”
[나는 내 자식들과 함께 여기서 죽으리라. 그대도 최후를 맞을 장소를 스스로 선택할지어다.]
“최후라니….”
왠지 오색조는 저 십양의 부모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오색조와 제곡, 십양이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지금 확실한 것은 제곡이 소멸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색조여. 전 아직 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주인 잃은 궁전이라면, 저는 이곳의 보물과 술법을 얻고 싶습니다.”
[…….]
“보물창고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죽을 때 죽더라도 보물은 얻고 죽어야지!
[부질없는 짓을….]
오색조가 잠시 침묵하다가 거대한 날개를 뻗어서 우측을 가리키며 말했다.
[푸른빛이 세 번 교차한 장소에서 노란빛을 따라가라. 그 곳에 제곡이 모았던 모든 보물이 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종언 앞에서도 물욕을 추구하다니 어리석구나….]
오색조는 그 말을 남기고는 고개를 숙이고 열 개의 불덩어리를 끌어안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삶을 체념한 모습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오색조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가 말한 대로 보물창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타다닷
나는 보물창고가 있는 궁궐의 안쪽 방에 도착해서 문을 벌컥 열었다. 제곡이 소멸해서인지 아무런 봉인도 제약도 없었기에 수월하게 열렸다.
나는 문을 열자 산더미 같은 금은 보화가 쌓여있고 온갖 보물이 넘쳐 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크기는 무려 지평선을 이룰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음, 전시안!’
나는 전시안을 발동해서 그 중에서 특히 마력과 영력을 강하게 보유한 물건을 빠르게 감별했다. 그리고 비교적 상등품을 재빨리 목갑 안에 집어넣었다. 하는 김에 금은보화도 있는 대로 안에 쓸어 넣었다.
얼추 정리가 되었다 싶어서 나는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오색조를 놔두고 차원문을 빠져나왔는데, 갑자기 달의 지표면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쿠구구구구구…!!
땅이 쩌적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지표면을 크게 뛰어올랐는데, 이 균열의 규모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표면에서 약 십여 리 정도의 상공에 왔을 때, 달이 통째로 조각나는 중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다…달이 폭발한다…!!’
칠요의 시련에서도 행성이 부서지는 건 보았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파멸을 눈앞에 마주하게 되자 압박감이 남달랐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이번에는 비등을 써서 이동하려고 했다.
“…….”
비등으로 어디 가지?
지구도, 달도, 테라포밍한 핵도 이제 곧 망할 텐데, 어디로 가야하는 거지…?
비등으로는 가본 적 있는 곳밖에 갈 수 없었으므로 내가 더 이상 가볼만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소환수를 이용해서 혈계나 환계 같은 근접한 이차원에 갈 수 있겠지만, 종언이 닥쳐온 이상 그 세계 또한 멀쩡하지 못하다. 인계가 무너져 내리면 인접차원 또한 박살나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이 우주에 내 한 몸 갈 장소가 없다.
이대로라면 우주의 미아가 되어서 떠돌 처지였다.
쿠구구구
"아…."
쿠콰쾅
내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바로 눈앞에서 달이 산산조각 났고, 그 내부에서 엄청난 열기와 폭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충격파에 쓸려가면서, ‘죽음’이라고 하는 두 글자를 선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으아아아악!!”
나는 엄청난 속도로 뒤로 밀려나면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는 걸 느꼈다. 더 이상은 회복할 가망도 없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아무리 기력으로 몸을 회복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은천의 목요 같은 능력이 없으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죽을 게 틀림없다.
…….
얼마나 우주공간을 떠돌았을까?
기막(氣膜)을 펼쳐서 어떻게든 몸을 우주공간의 위해에서 보호하고는 있지만 점차 몸이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두운 공간을 둥둥 떠다니면서, 무량한 이 세계에서 이름 없는 최후를 맞이할 게 분명했다.
체력도 기력도 다 떨어졌다.
내가 몽롱한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빛이 떨어져 내린다.
백 겹의 광원(光圓)이 빛을 발하면서 소용돌이 쳤고, 타원형으로 일정하게 맴도는 게 멀리에서 보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때, 내 옆으로 웬 인간의 시체가 차갑게 식어서 지나치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시체를 힐끔 쳐다본 후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보니 시체는 한 구가 아니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슬며시 우주공간을 유영하고 있는 인간의 시체가 늘어나고 있었고, 그 모든 시체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절망과 공포를 겪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저 빛이 인간의 시체를 뿜어내는, 일종의 배설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스스스스스
남녀노소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시체는 한도 끝도 없이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이윽고 그 숫자가 일만에서 십만, 나중에는 그 수천 배 이상이 되어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우우웅
빛의 겹은 갈수록 두터워졌고, 죽은 인간들의 시체에서 혼령이 빠져 나와서, 말없이 별똥별처럼 우주의 방랑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마치 윤회의 흐름이 깨진 고리 속에서 인류 그 자체가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억 개의 혼령이 마치 은하수처럼 시꺼먼 우주를 장식했다.
틀림없다.
저들은 불청객으로 간주되어 옥좌에서 쫓겨난 것이리라.
‘계시’
우주 최대의 행사에 참여했던 수십 억 명의 인간들이 맞이한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