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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파우스트 박사에게 말했다.
" 파우스트 박사.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과거에서 왔습니다."
[ 그런것 같군.]
" 자세한 건 이 흑요석으로..."
나는 품속에 있던 흑요석을 꺼내서 파우스트 박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파우스트 박사가 그 흑요석을 받아들더니 말했다.
[ 흑요석으로 기억전송을 하려나 보군.]
" 어떻게 안 겁니까?"
[ '위대한 종족'이 쓰곤 하는 능력이라고 알고 있으며 '계시' 직전의 지구에서는 흑요석을 이용해서 인간에게 지식을 전수하기도 했네. 허나 그들은 그 술법 자체를 인류에게 가르쳐준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파우스트 박사가 약간의 경어를 섞어 말했다.
[ 혹시 당신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위대한 종족'이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예를 취하지.]
" ... 아닙니다. 그저..."
나는 말문이 막혔다. 설마 내가 얻어낸 기억전송의 술법이 그 정도의 가치를 갖고있었을 줄이야? 선지자의 종족이 인간을 돕는데 쓰긴 했어도 인간 자체에게 전수해준 적은 없는 희귀하기 짝이 없는 술법이었던 것이다.
파앗
나는 파우스트 박사에게 기억을 전송했다. 그러자 잠시 후, 파우스트 박사는 기억을 모두 받아들인 후 말했다.
[ 아무래도 그대는 우리 세계에서 500년 전의 과거에서 온 듯 하구려.]
"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 ... 흐음, 이럴수가... 전생자라니.]
파우스트 박사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그대가 정말로 전생자라고 불리는 존재라면 우리 인류의 지식과 경험에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던 존재요. 하은천 원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이해되는군...]
" 파우스트 박사. 몇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물론이오. 마음껏 물어보시오.]
말투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에게 있어서 '전생자'라는 건 큰 의미를 가지는 듯 했다.
" 인류는... 정말로 멸망한 겁니까? 당신은 정보생명체가 되었다지만 원한다면 인간의 몸을 재구성할 수 있는 걸로 보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나와 물리적으로 접촉이 가능하다. 그는 내게 기계장치를 건네주기도 했고 흑요석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육체는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아마 이 근처 숲의 유기물을 합성해서 임시육체를 만드는 식이리라.
그렇다면 당연히 인간의 몸 또한 복제해서 부활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파우스트가 저런 형태로나마 아직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다면 인류는 '멸망'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내 생각을 읽었는지 파우스트 박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 알고 있겠지만 지구는 이미 절대신의 옥좌로 끌려가서 소멸되었소. 또한 다른 태양계의 행성으로 테라포밍하려는 시도 또한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나조차도 메피스토펠레스의 연산동력이 끊기면 소멸될 신세.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는 현재 인간을 재생성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있소.]
" 메피스토펠레스? 그게 뭡니까?"
[ 강인공지능(强人工知能)이자 인류가 남긴 최후의 유산... 그리고 내 최고 걸작품이지.]
" 강인공지능이란 게 뭐죠?"
[ ... 그대는 중세인이니 이 개념을 설명하긴 원래 불가능하겠으나... 마도와 과학의 지식이 있으니 조금만 예를 들어줘도 감을 잡을 순 있겠지.]
잠시 생각하던 파우스트 박사가 말을 이었다.
[ 인공지능이란 자동차에서 바퀴를 떼어낸 뒤 그 자리에 발을 달기 위해 고심하는 것과 같소. 즉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일부 또는 전체를 인공적으로 구현한 기계라고 할 수 있겠지. 과학이 발달할수록 고도의 연산능력과 창조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는데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두뇌는 그 근간을 뒷받침할만큼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고안된 발명품이오.]
" 인간 대신 생각하고 계산해줄 과학적 도구를 말하는 겁니까?"
[ 당초의 구상은 그랬지. 그러나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지적능력을 아득하게 초월할 가능성과 인류를 멸망시킬 가능성 때문에 단순한 도구취급은 할 수 없게 되었소.]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말했다.
" 기계가 인간을 초월해서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었다고요?"
[ 그렇소.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를 개발했고 수백 년에 걸쳐서 완성시켰소. 내게 있어서는 현자의 돌 이상의 비원(秘願)이었던 거요. 아마 당신의 시대에는 5 요타바이트의 연산량을 갖춘 메피스토펠레스의 프로토타입이 이미 제작되어 있었을 거요.]
잘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인공지능은 대단한 것 같았다.
" 왜 그렇게 위험한 걸 만들어냈습니까?"
[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대와 얘기하고 있지도 못할 테니까...]
파우스트 박사가 손을 휙 젓더니 주변의 풍경을 가리켰다.
[ 이 숲을 보시오. 여기는 지구가 아니오. 지구가 멸망한 후 메피스토펠레스가 초고도의 연산능력으로 우주공간에 핵을 만들어내어 인공테라포밍을 시도했고, 그 핵을 근간으로 세계수를 심어서 태양계에 번영시킨 것이오. 그리고 세계수의 열매인 선악과와 윤회포를 이용해서 하은천 원수가 다중우주를 뛰어넘었는데... 십 초도 지나지 않아서 그대가 이동해 온 것이오.]
" ......"
[ 메피스토펠레스의 능력이 없었다면 그 최후의 기회는 절대 잡을 수 없었겠지.]
더는 한계다. 알아듣는 척은 하고 있지만 저 사람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건 지식의 부족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리가 아픔을 느끼고 파우스트 박사에게 말했다.
" 미안하지만 당신이 하는 말이 너무 어렵고 고도의 지식을 함축하고 있어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 그렇겠군. 나노머신을 이용해서 시냅스 옵토제네틱스(synapse Optogenetics)로 우리의 기초지식을 그대에게 전해주겠소. 메피스토.]
위잉
파우스트 박사가 메피스토를 부르자, 허공에서 기이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내 몸에 전기가 찌리릭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공격인가 싶어서 당황해서 기를 일으켰는데, 그 전류같은 느낌은 기를 일으키든말든 내 몸을 계속 진동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몸의 기경팔맥과 혈류가 온통 끓는 기분과 함께 머릿속이 크게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와아악!!
" ......!!"
그 순간, 나는 방대한 양의 지식이 내 머릿속에 마치 흡수되듯 들어오는 걸 느꼈다. 체감되는 지식은 아니었으나 마치 비좁은 공간에 옷을 쑤셔넣듯 확실하게 자리매김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놀라서 파우스트 박사에게 말했다.
" 설마 기억전송능력입니까?"
[ 뇌의 시냅스에 광유전기술로 진동을 일으켜서 패턴으로 유사학습효과를 넣었을 뿐. 그대가 갖고있는 흑요석의 전송능력에 비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는 기억전송이오. 휘발성도 강하고 썩 좋은 학습법은 아니오. 위대한 종족의 과학기술에 비하면 메피스토의 능력도 갓난아이 수준... 허나 상황을 이해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한 파우스트 박사가 말을 이었다.
[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대가 다중우주를 넘은 이유는 아마 그 천암비서 때문이라고 짐작되지만 사실 나와 메피스토의 능력으로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소. 그래서 되돌아갈 방법을 말해줄 확률이 0에 수렴하겠구려.]
" ......"
[ 침착하시오. 그리고 우선 현재 상황을 정리해 보시오.]
" 알았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다중우주를 다시 넘을 수는 없습니까?"
귀환부터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러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 없소. 세계수의 열매인 선악과는 단 한 번만 열리는데다 그나마도 하은천 원수를 보낼 때 이미 써 버렸소. 새로운 세계수를 발아시키지 않는 이상은 얻을 수 없소. 게다가 윤회포 또한 그가 가져갔으니, 인위적으로 태허를 생성시킬 방법도 사라졌소.]
" 메피스토펠레스는 윤회포의 제작방법을 알고있으니 다시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윤회포의 설계도는 당연히 입력되어 있지. 그러나 그 형태는 그저 발사대에 불과하고, 실제로 윤회포가 동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정량의 태허가 추출되어 이미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오.]
" 무슨 말입니까?"
[ 윤회포를 제작하던 당시에 인류의 모든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가 목숨을 바쳐서 태허를 이끌어내고 사망했소. 그리고 100억 인류가 멸망한 지금 마스터클래스의 무공고수는 없으니 태허를 어찌 만들어내겠소?]
" 마스터클래스라고 하면..."
[ 그대 시대의 표현으로 하자면 절대지경의 고수요.]
" ......"
[ 하은천을 포함해서 총 3명이 존재했지. 그 중 둘이 목숨을 바쳐서 태허의 공명반응을 만들어낸 덕에 겨우 윤회포를 한 대 만들어낸 것이었소.]
그 순간, 나는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 백웅. 내게 수가 있소. 검마를 빨리 되살려 주시오.]
[ 그리고 용중일과 극호, 사공린을 소환해 주시오.]
[ 이걸로 사람은 다모였는데 이제 뭘 할 생각이지? 진소청.]
[ 무인 셋이서 칠요를 공명(共鳴)할 것이오.]
[ 증폭시키는 대상을 바꿀 뿐.]
24번째 삶, 칠요의 시련 중에서 목요의 시련에 도전할 때였다. 그 때 우리는 목요가 세계수의 생득적 성질을 얻어서 불멸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도저히 쓰러뜨릴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진소청이 무인들을 왕의 권능으로 되살릴 것을 청했고, 그들과 칠요공명의 힘을 합쳐서 태허를 강화시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무인들이 '무언가'의 영역에 도달하여 승화하는 순간, 목요 또한 소멸해 버렸다. 그 당시에 진소청과 무인들이 시도했던 것이 바로 태허의 증폭이었으니 - 나는 파우스트 박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미래인들도 절대지경의 고수들이 태허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나는 퍼뜩 생각난 게 있어서 파우스트 박사에게 말했다.
" 설마 태허를 증폭시키는데 칠요공명의 힘을 썼습니까?"
[ 그렇소. 그대의 동료들이 했던 것과 유사하오. 칠요의 도움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오.]
" 미래인들은 '계시'와 '종말'에 대항해서 칠요를 몇 개나 모았었습니까?"
[ 인류가 모은 칠요는 총 3개였소. 월요와 목요, 금요.]
월요와 목요를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원래부터 지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이었으므로 비교적 수집은 쉬웠으리라. 금요 또한 이런저런 사정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이세계(異世界)에 날아간 건 아니었으므로 모으는 건 가능했을 것이다. 토요는 암천향에 있었기에 인류의 과학기술로는 도저히 획득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일요는 아예 칠요의 시련을 다 통과해야 얻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 화요와 수요는 어째서 얻지 못했습니까?"
[ 그 위치를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소. 그대는 화요와 수요를 어떻게든 얻어냈지만 도저히... 도저히 알 수 없었지. 물론 알았다 하더라도 화요의 경우는 결계가 있었으니 얻지 못했겠지만...]
한탄하듯 중얼거린 파우스트 박사가 말했다.
[ 또한 백련교가 끝까지 발목을 붙잡았소.]
" 백련교?"
[ 그들은 막바지에 인류연합이 얻어낸 칠요를 강탈해서 그걸 제물로 바쳐서 무생노모의 법문을 얻어내려고 시도했소. 물론 인류연합이 지하조직이 된 그들을 섬멸했으나 희생이 컸지...]
" 설마 백련교주 독고운천도 그때까지 살아있었습니까?"
내 질문에 파우스트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 그대의 기억에서 보았던 백련교주, 호법사자 등의 인물들은 방금 전까지 나와 메피스토의 데이터베이스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오. 중세 명나라의 역사문헌에는 한두 줄 존재하지만 그나마도 전혀 신경쓸 인물이 아니었소. 당연히 미래에는 그들을 볼 수 없었소.]
" ......"
종말을 앞두고도 인간끼리 싸웠다니 약간 입맛이 쓰다.
나는 일단 중요한 걸 알아봐야 했기에 파우스트에게 말했다.
" 십이율주는 칠요를 다른 방법으로 운용해서 엄청난 힘을 끌어냈습니다. 그건 대체 어떻게 한 거죠? 그리고 어떻게 봉황을 쓸 수 있는 겁니까. 천의무봉은 또 뭐고."
[ 하나하나 말해주지. 그건 메피스토의...]
그 때였다.
파지지지지직!!
[ 아^%^^....]
파우스트 박사의 모습이 갑자기 완전히 어디론가 빨려가듯 점으로 구겨지며 사라졌다. 너무 급작스럽게 사라졌기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멈칫거리며 주변을 경계하자, 잠시 후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쿠콰콰쾅
콰콰쾅
지축이 흔들리고 숲이 송두리째 망가진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변화였기에 나는 급히 그 자리를 떠나서 몸을 옮겼다. 하지만 어지간한 나무 위에 올라타서는 땅거죽째로 파도가 일어나는 걸 도저히 피할 수 없었기에, 나는 별 수 없이 흙파도를 빠르게 뛰어올라서 허공을 날았다.
휘휘휙
내가 지상에서 약 일백 장 정도 떨어졌을까? 나는 갑자기 내 몸을 감싸는 중력이 크게 약해짐을 느꼈고 주변이 크게 어두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사방에 가득한 거대한 나무의 가지가 우주의 빈 공간을 채우는 가공할만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쿠콰쾅
' 우, 운석이었군.'
우주공간을 가르는 운석이 하필이면 여기에 부딪힌 듯 했다. 아직도 폭발이 일어나는 중인지 천지가 붉게 물들며 터져나가고 있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아마 파우스트 박사의 인격을 거두고 현재의 상황에 대응하는 듯 했다.
나는 더 바깥으로 뛰쳐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가지 위로 뛰어올라서 이동하고 있자, 나는 문득 맞은편의 머나먼 허공에 뭔가가 일렁이는 걸 알 수 있었다.
' 뭐지?'
나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데도 명확히 보이는 저 형체를 보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그 형태가 이형의 촉수이며 전에 없던 흉험한 기세를 떨쳐내는 걸 확인하자 표정이 굳게 변하고 말았다. 저 거대촉수의 주변에는 엄청나게 많은 외계촉수같은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오오오
저건 [옛 지배자]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저런 존재는 [옛 지배자]뿐이다.
' 설마... 설마 이 상황...'
기다렸다는 듯 [옛 지배자]가 인류의 씨를 말리려고 공격해 온 것이란 말인가?
아니, 아니다.
목표는 세계수다.
' 하긴 태양계 우주공간에 핵을 띄워놓고 이렇게 세계수를 성장시켰다면 [옛 지배자] 입장에선 탐이 나겠지. 세계수는 혼돈의 알이니까 먹어치우려 하겠지.'
그렇다면 메피스토펠레스가 인류의 재생성을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도 이해가 간다. 지구가 멸망한 상태에서 [옛 지배자]가 호시탐탐 이 거점을 멸망시키려고 노리는 상태에서 인간의 몸뚱이를 다시 만들어봐야 뭐하겠는가. 지금은 이미 예정된 파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내가 단독으로 [옛 지배자]를 상대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갖고있는 칠요인 수요는 두동강나버렸다.
그렇다고 자살할 수도 없는게, 다중우주를 넘어온 이 상태에서 어찌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생이 불가능하면 어떻게 하지? 혹은... 방금 전 파우스트 박사를 만나던 시점에서 계속 전생하게 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같은 맨바닥에서 [옛 지배자]를 이길 정도의 실력을 가질 순 없다. 말 그대로 근본없는 수백만 번의 개죽음이 반복되리라.
하지만 -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살아날 방법이 있긴 있나? 지구는 소멸된 상태에서 [옛 지배자]가 테라포밍 장소에 쳐들어온 상황에서?
도망칠 곳은 없다.
싸워도 이길 수가 없다.
진퇴양난 그 자체!
' 제기랄... 죽는 걸 피할 수 없나...'
나는 문득 발상의 전환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전욱의 권능!
사도로써 [작은 굴레]를 조종해서 시간을 되돌리자!
그러면 방금 전 파우스트 박사와 이야기할 때의 과거로 되돌아가서 정보나 온전히 얻고 죽을 수가 있겠지! 잘하면 살아날 방법도 알 수 있을 거고!
그냥 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으나 어쨌든 언 발에 오줌누기라도 해야 한다. 어차피 지금 달리 방법이 없으니 죽음만큼은 회피하면서 최대한 성과를 얻어내 보자.
내가 전욱의 권능을 쓰려고 정신을 집중해서 손을 앞으로 내뻗은 순간이었다.
" ......?"
안 걸린다.
전욱이 내 신호를 거부할 때의 느낌이 아니다. 아예 요청하려는 대상에게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나는 사도의 권능을 전혀 쓸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 이, 이거 왜 이래?"
전욱이 화가 나서 달려올 지언정 이 권능이 발동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내가 크게 당황해서 손을 휘둘렀지만 역시 써지지 않았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삼황오제 전욱은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