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830화 (829/1,615)

830====================

진공가향(眞空家鄕)

윤회포가 쏘아진 순간.

후와악

모든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그와 동시에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싸늘하게 굳어서 정지되었으며, 율주와 운사는 물론 사소한 모든 것들이 정지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생각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눈 앞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었다.

' 시간이 멈췄다...?'

시간정지 능력은 이미 본 적이 있다. 궁극의 초상기인이 쓸 수 있는 능력으로써 그 강대함 때문에 몇 번이고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바로 이 자리에 초상기인이 나타났나 싶어서 주위를 살폈는데, 일단 나도 시야가 고정된 채 생각만 할 수 있었기에 뭔가를 알 수는 없었다.

초상기인은 어디 있지?

나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뭔가 나타날 기색은 없었다. 숨을 쉬어도 5천 번은 쉴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화는 없었다. 슬슬 이 상태가 질려가려 했고, 나는 어떻게든 움직여보기 위해서  전신에 힘을 일으켰다. 하지만 기는 움직이지 않았고 의념을 쓰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모든 움직임이 봉인된 게 사실인 듯 했다.

' 어... 이거 초상기인이 한 게 아닌가?'

그럼 율주가 나를 봉인시켰나?

아니...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서 나만 멀쩡하게 생각할 수 있을 리는 없다.

' 설마 율주도 나랑 같은 상태인가...?'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겉으로 봐서는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 해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는 걸 직감했고, 모든 의지력을 쏟아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

까딱

시간은 약 반나절 정도일까? 나는 아주 피나게 노력한 끝에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게 내 노력의 결과인지 아니면 서서히 이 상태가 풀려가는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계속 움직이려고 노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금 하루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가자 나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만 가면 머지않아 전신을 움직일 수 있게 되리라.

아니나 다를까, 이틀 정도가 흐르자 나는 완전히 몸을 움직일 수가 있게 되었다. 아직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었으나 어쨌든 전신이 내 통제하에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율주와 운사를 쳐다보았으나 그들은 역시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즉시 이 틈에 율주를 죽이려고 의념으로 어검술을 시전해 율주에게 날렸다.

토옥

" ......"

율주의 살갗에 닿일 뿐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그에게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 율주가 딱히 방어막을 만들거나 한건 아닌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검강을 일으켜 보기도 했으나 역시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율주 뿐만 아니라 운사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 제길...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천암비서에 태허를 쏘았는데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지?

불행 중 다행인건 일단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상황에서 자살할까 싶기도 했으나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죽어버리면 너무나 손해였기 때문이다. 이왕 여기까지 온거 확실하게 다 챙기고 죽어야 후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삶에 집착하게 되었다.

욱씬

" 으으윽."

나는 갑자기 통증이 밀려오는 걸 느끼자 눈을 부릅떴다. 완만하면서도 찌르는듯한 고통이 어깨죽지와 폐 쪽에서 밀려왔다. 그렇게까지 못 참을 고통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고통이 쉴새없이 연속된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극렬한 고통을 짧게 느끼는 게 낫지 이런 류의 고통은 내가 가장 짜증나게 여기는 것들이었다.

' 시간이 느려져서 고통도 연속으로 느껴지는건가...?'

어쨌든 조금 있으면 나아질 것이다. 나는 고통을 참는 호흡법과 명상법을 하며 몸을 추슬렀다. 나는 하은천에게 피곤죽이 되어 있어서 전신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으나 전신에 기를 북돋으면 생명력을 강화시키며 어느 정도의 부상은 즉시치유가 가능했다. 동시에 몸에 생기를 되돌리는 혈을 누르며 몸을 다듬자 약간 회복이 된 듯 했다.

저벅

나는 얼마 후 내가 걸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직 발에 납덩이를 매단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그 느낌도 점차 가벼워졌다. 마치 무거운 압력 속에서 익숙해지는 듯 했다. 나는 율주의 앞으로 걸어가서 다시 한 번 공격해 보았으나 역시 그를 때릴 수도 건드릴 수도 없었다.

왜 접촉할 수 없지?

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점차 몸이 가벼워진다는 점에 착안했다. 일단 율주나 운사를 쓰러뜨릴 수 없다면 쓸데없이 공격해봐야 힘만 빠질 뿐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천암비서쪽으로 가서 책을 집었다.

우웅

" ......!!"

천암비서 내부에서 공명(共鳴)이 울려퍼졌다. 그 공명은 마치 무언가를 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천암비서가 무언가를 반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반기고 있어? 뭔가를 환영한다고? 아니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알 수 있지?'

천암비서는 정말 이상한 무언가다. 나는 지금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천암비서가 원인이란 건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암비서가 환영(歡迎)하는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천암비서가 환영하는 존재.

그것은 천암비서가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

" ......"

그 말은, 이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 나 말고도 다른 존재가 움직일 수 있다는 건가...?

왜냐하면 지금 이 공명이 '나'를 환영하는 건 아니라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존재'를 환영한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 제기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우웅!!

그 때, 내 손에 들려있던 천암비서가 무형의 파장을 내뿜었다. 나는 그 파장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심지어 방향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내가 어디에 가야하는지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기 싫다.

이 길의 끝에 대체 뭐가 있길래...

하지만 동시에 천암비서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결코 이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직감할 수 있었다. 이 공간을 만들어낸 건 천암비서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두려운 눈으로 천암비서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 이 놈은 살아있어. 자기 의지가 있다.'

이전까지는 잘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창힐이 잡아먹힌 이후부터는 명확히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생명체와는 다른 사악하고 이질적인 무언가의 의지가 천암비서를 조종하고 있으며, 그 의지는 나아가서 나를 조종하려 든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문득 제갈사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잘 들어. 네가 전생(轉生)했을 때 인과율은 이어질 지언정, 너와 이어진 신격은 어째서 그 관계가 설정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 ... 사실 이게 가능한 시점에서 그건 사상최강의 마도서라고 할 수 있지만.]

23번째 삶, 공공을 해방시키고 제갈사와 함께 작전을 짤 때 그와 함께 천암비서의 위력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 제갈사에게 천암비서가 사상최강의 마도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의문이 생겨서 물어봤었다.

[ 정말로 천암비서만큼 강력한 마도서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냐?]

[ 물론. 그런 마도서는 있을 수 없어.]

[ 너무 단정짓는걸.]

[ 단정짓지 않는다면 마도사라고 할 수 없지. 안 그래? 천암비서의 능력은 내 마도지식과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다. 심지어 신이라고 하더라도 천암비서의 능력을 아는 순간 경외에 휩싸이겠지. 천암비서에 비견할 수 있는 마도서는 전 우주에 존재하지 않아.]

[ 읽는 것만으로 대륙을 파멸시키거나 신의 능력을 손에 얻는 마도서도 존재한다면서. 천암비서는 왜 그런 능력은 안 주냐고...]

내가 툴툴거리자 제갈사가 대꾸했었다.

[ 물론 있지. 전 우주에서 최상위급 마도서라면 일견 보이는 능력으로는 천암비서보다 막대한 권능을 쥐어주는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마도서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뭔줄 알고 있냐?]

[ 뭔데?]

[ 자아(自我)가 존재한다는 거다. 개중에는 원래 [옛 지배자]였던 존재가 봉인되어 마도서가 되어버린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자아가 존재하는 이상 그 마도서들을 제대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고 오로지 사용자에게 파멸만이 닥쳐올 뿐이지. 은하를 누비던 강대한 종족이 마도서 하나 때문에 멸망한 적도 있어.]

[ ......]

[ 이 세계 모든 마도서를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이 천암비서. 그러므로 천암비서에 자아가 존재한다는 건 확실해. 그리고 네가 그 자아와 맞닥뜨렸을 때... 너는 파멸의 종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 제길.]

[ 뭐, 그 때까지만이라도 열심히 해 보자고.]

그래... 제갈사가 내 전생과정을 최대한 단축시키려 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천암비서를 조종하는 모종의 존재, 혹은 천암비서 자체의 자아가 눈을 뜨면 사용자인 내게 크나큰 파멸을 가져다줄 확률이 높기에 속전속결로 끝내려 한 것이다.

설마 벌써 천암비서의 자아와 마주치는 날이 온 건가.

" 제기랄..."

하지만 나는 욕을 내뱉으면서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어차피 살면서 거지같은 일은 넘쳐났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은 천하에 널려 있다. 그때마다 일일이 불평하고 괴로움에 몸을 뒤틀면 버틸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건 하고 못 하는 건 못 하는 것 뿐이다. 끝까지 가서 파멸할지라도 지금은 일단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긴장하면서 파장이 이끄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약 오십여 장의 거리를 걸어갔을 때, [옛 대륙]의 내부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신비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벽이 사방에 가득했고 벽 너머에는 알 수 없는 기계들이 가득했다. 시간이 멈춰있어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말해서 현 시대의 기술력은 아닌 듯 했다.

' 저것들은 미래의 기술이겠지.'

일단 어떻게 생겼는지만이라도 봐 두자.

나는 벽 너머를 힐끔거리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약 백여 장을 더 걸었을 때였다.

저건 누구지?

수정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공동의 맞은 편 문,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 자는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키는 딱 나와 비슷한 정도였고 허리춤에 기다란 장도(長刀)를 빗겨차고 있었다. 그리고 베로 짠 듯한 허름한 장포를 전신에 두르고 있었으며 붉은 빛의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설마 파장이 이끈 게 저 놈에게로 향하게 한 것인가?

나는 놈이 꼼짝도 하지 않자 이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는건지 없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 공격해 보자.'

그래서 일단 시험삼아 수요로 어검술을 시전해서 놈의 목을 쳤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어검이 검뢰를 머금고 상대의 목을 베려 하는 순간이었다.

" ......"

순간 삿갓의 괴인의 눈이 번뜩인 것 같은 건 착각이었을까?

참(斬)

그와 동시에 내 눈에는 삭월(朔月)의 환영이 아로새겨졌다.

' 피할만 해...'

아예 못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상대는 그렇게 엄청난 고수는 아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삼보절기로 그 공격을 회피하면서 상대의 검기에 수요로 맞섰다.

쩌엉....

그리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삭월의 환영이 스치고 지나간 순간, 수요(水曜)가 반토막 나 버린 것이다. 너무 깔끔하게 잘려나가서 단면이 투명하게 비칠 정도였다.

어?

치, 칠요가 두동강 났다고?

말도 안 돼!

세상에 이런 일이...

지금까지 아무리 강한 적과 싸우더라도 사용자가 죽을 지언정 칠요가 파괴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설령 삼황오제와 싸워도 마찬가지였다. 칠요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으며 부러뜨리거나 자르는 건 불가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쉬이이익

나는 수요가 파괴됨과 동시에 최초의 문자가 허공으로 증발하고, 동시에 수요와 연결된 인과율의 끈이 올올이 끊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단지 무기의 파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인과율조차 베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저 놈은 대체 뭐지?!

잠시 후 일어난 일은 더욱 기가 막혔다. 삿갓의 괴인은 자신의 장도(長刀)를 가로로 치켜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놈의 팔에서 피분수가 솟아오르더니 팔뚝 전체가 수백 개의 열상(列傷)때문에 터져나간 것이다!

푸콱!

잠시 후 괴인의 한쪽팔이 터져나가더니 데굴거리며 땅을 굴러다녔다.

뭐지?! 자기 무공에 자기가 상처를 입은 형상이었기에 나는 황당한 눈으로 놈을 쳐다보았는데, 놈은 자기 어깨를 부여잡더니 멀쩡한 팔으로 다시 한 번 칼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투명한 균열이 일어났고, 나는 지금까지 내 전신을 짓누르던 강대한 시공간의 압력이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는 걸 알아챘다.

쿠구구구

쿠구구구구!!

시공간이 마구 들끓어오른다. 차원의 왜곡이 여기저기서 일그러졌다. 나는 그 혼돈 속에서 마치 먹물이 공간을 점하듯 삿갓의 괴인을 둘러싸고 그의 몸이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삿갓의 괴인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멀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삿갓 너머로 놈의 안광(眼光)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흡사 짐승의 살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놈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시간이 다시 움직이는 걸 알아채고는 전율했다. 마치 엉킨 실이 풀리는 것 같았다.

" ......"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순간, 내 왼쪽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내 눈알이 왼쪽으로 돌아가자, 그 곳에서 파멸(破滅) 그 자체가 어느 새 모든 걸 집어삼키는 광경이 눈에 보였다. 나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설마 천암비서와 태허가 만난 파장이 이제서야 터진 건가?!

' 큭! 방금 전은 말 그대로 잠시동안의 여유...'

나는 급격히 몸을 움직여서 그 열기를 피했는데, 순식간에 파멸이 내가 서 있던 공간을 먹어치우는 게 느껴졌다.

' 죽나?!'

파앙!!

그리고 내 몸을 파멸의 열기가 휩씀과 동시에 나는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죽음은 다가오지 않았고 시야가 오색현란한 빛에 물들었고, 나는 [옛 대륙]의 전경이 모두 소멸되고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윽고 나는 완전한 혼돈의 바다 속으로 헤엄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암천향에서 보았던 우주공간과 닮아 있었지만, 이 곳에는 일체의 물리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듯 몸에 숨쉬는 문제는 걱정 없었다. 그저 마치 부드럽고 따뜻한 물 속을 누비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오오오오

그리고 머나먼 우주 속에서 희끄무레하고 어두운 잔영들이 춤추고 노래부르며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떠도는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거대한 좌(座)가

보였다. 그 좌 근처에 하나의 인영이 서 있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고 있을 때, 나는 어둡게 굽어진 시공간의 굴곡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실로 무량(無量)하다.

' 으아아앗...'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의 억만배를 억만배만큼 뛰어넘는 공간 - 그렇게 표현해도 모자랄 정도의 왜곡 속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슈우우욱!!

쿠웅

나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리에서 튕겨나듯 일어섰다. 그리고 주변환경을 급히 살폈는데, 이 곳은 웬 울창한 숲속인 듯 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 곳에는 한 서양인 장년사내가 서 있었는데 그 자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마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서양인 사내는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내게 자신의 말이 안 통하는 걸 깨달은 듯 했다. 그리고 내게 조그마한 기계장치를 건네주었는데, 나는 그 기계장치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 맞아. 이건...'

과거 기억 속에서 무사시가 하은천에게 받았다고 얘기했던 귀에 꽂는 통역장치다.

내가 통역장치를 귀에 꽂자 이야기가 잠시 후 들려왔다.

" 자넨 누구지? 하은천 원수(元帥)가 다중우주의 벽을 통과한지 십 초 만에 무슨 일이..."

생전 처음 듣는 이국(異國)의 말이지만 내게는 똑바로 의미가 전달되었다. 자동통역이 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 ......"

나는 그 자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옛 대륙]에서 하은천이 내게 직접 알려줬던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파우스트 박사?"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 맞네. 자네는 동양계 인간 같은데 하은천 원수가 다시 다중우주의 벽을 넘게 한 건가? 그와 무슨 관계지?"

" ......"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설마 지금 [종말]이 닥쳐왔습니까?"

" 왜 남의 얘기 하듯 말하지? 이미 인류는 멸망한지 오래일세."

" 당신이 살아있잖습니까."

" 이게 살아있는 것 같은가?"

치지직

파우스트 박사의 모습이 치직거리며 일렁였다. 자세히 보니 정교하게 만들어진 환영같은 것으로써 그는 실체가 없는 듯 했다. 파우스트 박사가 말을 이었다.

" 보다시피 육체는 이미 [옛 지배자]에게 당해서 죽었지만 강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의식을 재구성했을 뿐이네."

" ......"

" 정말 수상하군. 자네는 대체 뭐하는 자인가? 어째서 중세 중국어를 구사하지?"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 내가 다중우주를... 넘은 건가.'

틀림없다.

어찌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하은천이 넘어왔던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 - 인류의 종언(終焉)이 이뤄진 후의 세계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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