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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825화 (82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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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키기기 -

잠시 후, 운사와 함께 소용돌이치는 듯한 구획을 지나, 마치 땅 밑으로 파고 내려가는 듯한 곳에 도착하자, 이질적인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인공적인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혼돈감염 제어장치 1단계 발동. 대상자의 신체를 검색합니다.]

“누구냐!”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으나 운사가 말했다.

“기계일 뿐이다. 이곳은 혼돈의 침입을 막아야만 하기 때문에 방어 장치가 있다.”

“기계라고?”

“율주께선 인공지능이라고 하시더군…."

타닷

위이잉

우리가 접근하자마자 통로 여기저기가 밀폐되더니 새파란 빛 덩어리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삼보 절기로 피할까 생각했지만 왠지 이 건 공격이 아닌 듯 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자, 빛 덩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을 한 차례 투과했고, 이윽고 밀폐된 구획이 다시 쉬잉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검색완료. 혼돈본체 혹은 혼돈감염자가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다량의 혼돈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잠재 위험이 있습니다. 행동과 언동에 주의 바랍니다.]

“……?”

나는 기계의 말을 들으면서, 방금 지나쳤던 새파란 빛이 내 몸에 있는 혼돈을 검색하는 기술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돈에 감염(感染)…?’

혼돈이 무슨 질병이나 역병 같은 거란 말인가?

나는 운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혼돈에 감염되는 것과 보유하는 건 다른 거란 말인가?”

“당연하다. 그대는 음신지력을 지님으로써 혼돈의 종주로 성장할 기반을 갖춘 셈이지만, 마법이나 마도에 침식된 자들은 마력에 종속된다. 그 차이는 심대하다.”

“흠.”

나는 짧게 탄성을 흘렸다. 그 말대로라면 이 시설은 혼돈을 보유한 존재를 무조건 적대하지는 않는다. 그 건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생각할만한 근거가 조금 부족했다. 내가 생각을 하면서 뛰고 있자, 다시 한 번 기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돈감염 제어장치 2단계 발동. 인류연합(人類聯合) 소속이 아님을 확인. 태양계 내부 인외지적생명체가 아님을 확인. 서은하부족동맹 소속이 아님을 확인. 소속을 증명하는 양자코드를 입력해 주십시오.]

“……?”

[응하지 않으면 인류에 적대적인 외계존재로 간주하고 혼돈분광장치로 침입자를 격퇴합니다.]

뭔 소리야?

인류연합?

“내게 맡겨라.”

그러자 옆에 있던 운사가 내 걸음을 제지하더니 자신의 팔뚝을 하늘 위로 쭉 뻗었다. 그러자 팔뚝에 새겨져 있던 기묘한 숫자들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마치 나선처럼 꼬여서 둥그런 구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구체가 떠오르자, 잠시 후 기계의 음성이 다시 울려 퍼졌다.

[환영합니다, 하은천 님. 귀하는 방주(方舟)의 최고지휘권과 통솔권을 갖고 계십니다.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모든 제어장치를 개방합니다.]

내가 의혹을 담고 운사를 보자, 운사가 내게 전음으로 말했다.

[저 인공지능은 양자암호로 상대를 인식한다. 그래서 주군의 열쇠를 빌려온 것이다.]

[알았소.]

어쨌든 [옛 대륙]에 오기만 하면 된다.

‘봉인된 곳이라면 비등으론 올 수 없겠지…. 어쨌든 와본 자체로 내게는 득이다.’

파아앗!!

잠시 후 나와 운사의 몸이 어디론가 전이되었다.

우리가 나타난 장소는 사방이 공허하게 비어있고 바닥에는 둥그렇고 창백한 접시 같은 것들이 가득 떠있는 곳이었다. 접시 하나하나의 크기는 대략 이 장 정도였고 허공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이동하는 중이었다.

접시 위에 탄 운사가 입을 열었다.

“다중우주(多重宇宙) 관측실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위이잉

이윽고 접시가 천천히 위로 떠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허공을 날며 어디론가 향했다. 자세히 보니 전방에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벽이 있었으며 그 벽에서는 수만 개의 빛이 명멸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사실 하나하나의 방이며 그저 빛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이 자체로 거대한 도시란 말인가?’

벽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크다. 어찌나 큰지, 암천향에서 내가 보았던 천체의 구멍만큼이나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도시가 세상 어딘가에 있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접시는 절벽에 있던 하나의 방 앞에 도착했다. 운사를 따라서 접시에서 내려서 방문 앞에 서자 운사는 이번에는 손을 뻗어서 웬 판때기에 올렸고, 이윽고 판때기 위에서 소리가 울렸다.

[지문을 인식했습니다. 홍채 확인. 사용자 ‘운사’를 확인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위잉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내부풍경을 보고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건 혼돈의 유적과는 완전히 달라…. 아니, 관련이 없군.’

혼돈의 유적들은 어딘가 음침하고 음험한 광기를 머금고 있으며 강력한 주술의 힘이 느껴졌다. 또한 마치 상징과도 같은 나선의 계단이 있거나 곳곳에 고대의 악의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혼돈의 힘은 커녕, 그 어떠한 초상능력도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텅텅 빈 흰색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음신지력도 주술도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혼돈에 관련된 힘이 묶여버린 기분!

그러나 무공만은 제대로 쓸 수 있다.

작은 계단을 따라 내려간 운사가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전생자여. 곧 율주께서 이곳에 도착하실 것이다. 그 분께서 모든 설명을 해주실 테니 기다려라.”

“날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뭐지?”

“이곳이 [옛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기가?

‘다중우주 관측실이라….’

다중우주가 뭔 말인지는 모르겠다. 망량이나 제갈사에게서 온갖 지식을 배우고 책도 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얘기는 정말 처음 들어본다. 아무튼 이 장소가 가장 중대한 비지(秘地)라면 이곳에 찾아온 보람은 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율주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도 좀 그렇다.

뭔가 정보를 캐야겠다.

나는 운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혹시 정령(精靈)이 아닌가?”

운사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제갈사는 당신의 정체를 신단수(神檀樹)에서 태어난 정령일 거라고 추측했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강력한 술법력, 환생할 수 있는 특수 능력, 그리고 신단수를 유독 지키려고 하는 성질에서 인간이 아닌 정령체일 거라고 생각했지.”

“…….”

환생능력을 인위적으로 갖춘 인간은 없다. 용중일 또한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 뿐, 이 세계는 이미 윤회전생이 끊겨졌다. 그걸 감안해 본다면, 환생이 가능하며 환신 천우진급 술법사인 삼사는 인간이 아닌 정령체일 거라고 제갈사는 추측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사는 신시의 대전(大戰)에서 일부러 신단수의 핵을 터뜨리는 선택을 했다. 당신들처럼 강력한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근간이 되는 신단수가 죽으면 같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 덕에 삼사 당신들은 아무것도 못 하고 퇴장했었지.”

“이상한 기분이군.”

운사는 냉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은 적도 없는데 타인이 내 죽음을 과거형으로 말하는 건.”

“인정하는 건가?”

“그대들이 그리 생각한다면 더 이상 내게 확인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우리 약점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그런 정체가 왜 중요하겠는가, 전생자여.”

“왜 세계수의 정령이 인간인 하은천을 따르는 거지?”

“…그 분께서 우리가 태어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이지.”

“뭐라고?!”

설마 그 말은….

운사는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전생자여. 주군을 너무 증오하지 마라. 그 분께선 그만한 과거를 겪으셨다….”

“그 과거란 게 대체 뭐지? 그걸 알아야 이해를 해주던가 말던가 할 거 아냐.”

“주군께서 도착하셨다.”

파바밧….

파란빛 선이 점멸했다. 수십 개의 선이 공간 위에서 겹치기 시작하더니 무언가 형태를 만들어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선(線)이 말 그대로 툭 튀어나왔다. 현실의 차원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한 선! 그 선은 이윽고 3차원의 질감을 지니게 되었고 서서히 공간에 동화가 되는 듯 했다. 그리고 선이 갑자기 수백수천 개로 불어나더니 인간의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

저건 공간전이술은 아닌 것 같은데?

위잉

“여어. 기다렸나.”

“…….”

나는 난데없이 나타난 십이율주의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또 개탈이냐!!”

그랬다.

저 새끼는 또 다시 개탈을 전신에 쓰고 나온 것이다!!

내가 짜증을 내자 율주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군. 아무튼 얘기나 마저 하자.”

“아수라를 따돌린 건가?”

“아니. 곧 쳐들어올 거야. 잠깐 따돌렸지만 아마 추적해 오겠지.”

“뭣….”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해주지.”

십이율주는 방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허공을 향해 뭔가 손가락으로 누르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빛의 단추가 삑 하는 소리를 냈고, 전방이 광대한 우주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십이율주가 전방에 비치는 푸른 행성을 보더니 말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지구(地球)지. 그리고 점점 넓어지면….”

후우웅!

갑작스럽게 눈앞의 우주가 넓어졌다. 그리고 행성인 지구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윽고 칠요에 속하는 행성들이 하나하나 보였고, 거기에서 더 넓어지자 태양도 눈에 보였다.

“항성계가 되고, 성계를 넘으면 성운(星雲)도 있고….”

후우웅!!

“성운 너머로 성단(星團), 그리고 성단이 뭉쳐서 은하(銀河)…. 은하를 넘으면 그 때부터는, 어둠뿐이지. 어둠의 끝에는 혼돈의 절대옥좌가 있다고 하고.”

파앗

엄청나게 광대한 우주를 한 번 보여준 십이율주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넌 제갈사에게 마도를 배웠으니 이 정도 기본지식은 있을 거야, 그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라 함은 단순히 마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마법을 사역하는 존재들이 우주를 누비면서 얻게 된 지식까지 같이 익히는 것을 뜻했다. 마법을 부리는 외계인들은 기본적으로 행성 사이를 돌아다니곤 했다. 십이율주가 설명한 성단이나 은하 따위를 몰라서는 마도를 공부했다고 할 수 없다.

십이율주가 입을 열었다.

“24번째 죽음이었나? 네 기억 속에서 염제 신농이 네게 제안했지. 파멸을 피해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가면 되지 않냐고.”

“그랬었죠.”

“괜찮은 방법이야. 그 방법도 시도 할 뻔 했었지. 문제는, 우리 인류가 '파멸’ 그 자체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점이었지만….”

쓸쓸하게 말하던 십이율주가 말했다.

“백웅. 그런데 말이야, 지금 네가 이 관측실에서 보고 있는 이 우주의 모습은 지금 이 우주의 모습이 아니야.”

“…무슨 말입니까?”

“가짜…랄까? 가짜라기보다는 옛 모습이겠지. 이건 우리 쪽의 기록에 불과해. [옛 대륙]에 남아있는 기록 일 뿐이지. 실제 이 우주의 형태는 아직 관측하지 못했어.”

“……?”

“백웅…, 이 [옛 대륙]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나는 기억을 되살리며 말했다.

“[옛 대륙]이란 건 지금의 세계가 성립하기 전,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고대의 대륙을 의미하죠. 그 때의 문명은 지금 보다 훨씬 뛰어났고 강력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명은 하루아침에 유실되었고, 그게 무려 일만 년 전의 일이었다고….”

“그렇구만. 그럼 백웅 네가 보기엔 이게 대륙으로 보이나?”

“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대륙이냐고?

통로 쪽에서 들어올 때는 그저 엄청나게 거대한 절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절벽에 수천수만 개의 ‘방 (房)’이 있었지만 이걸 대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절벽의 제일 위쪽까지 올라가면 커다란 평야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대륙의 육지가 이렇게 까마득하게 높은 건 본 적이 없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십이율주가 말했다.

“안심해. 널 속인 건 아냐. 이곳은 틀림없는 [옛 대륙]이다.”

“[옛 대륙]은 예전에 [옛 지배자]때문에 물에 잠겨서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곳이 예전에 [옛 지배자] 에게 재액을 입었습니까?”

“조금 복잡한 얘기긴 한데, 흠…, 말하자면 이곳은 ‘겹쳐진’ 장소야.”

“네?”

“이 절벽의 높이를 봐. 보통 마도사들은 [옛 대륙]이 바다 어딘가에 묻혀있다고 생각하던데,  지구상의 바다에 그럴만한 장소가 있을까?”

“…없을 것 같군요.”

그럴 순 없을 것 같다. 이 절벽은 얼핏 봐도 최소한 백 리가 넘는다. 지구의 수심이 깊어봤자 이십 리 수준이란 걸 생각하면 이렇게 거대하고 높은 대륙이 바다에 있을 순 없을 것 같다.

“마도사들이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찾아서 바다를 뒤져봤자 허사야. 왜냐하면 [옛 대륙]은 지배자의 변덕에 가라앉은 대지지만, 동시에 ‘우리’가 다중우주를 넘어와서 양자차원을 겹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야. [옛 지배자]가 가장 찾지 못할 장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장소를 봉인해서 겹친 공간으로 만들었지. 외적으로는 동적 평형을 유지하게끔 조정해뒀고.”

그렇게 말한 십이율주가 말을 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옛 대륙]에 방주를 덧씌워서 테라포밍을 시도했지.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나는 내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어….”

“…….”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하긴 너무 내가 할 말만 한 느낌이야.”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알아야겠습니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의 정체는 뭡니까? 왜 인간을 구하려 하는 거죠?”

“허참, 인간을 구하려는 게 인간밖에 더 있겠어?”

“말 돌리지 마십시오. 단순한 인간은 그런 권능을 쓸 수 없습니다.”

“말 돌리는 거 아냐. 진짜로 나는 인간이야.”

십이율주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단지…, 좀 미래(未來)의 인간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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