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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이게 뭔 개소리야?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전생능력을 뺏으려는 겁니까?”
율주는 천천히 내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 ‘연구’ 하자는 거야.”
“무슨 말이죠?”
“백웅. 나도 네 흑요석의 기억을 봤어. 그리고 창힐이 네 천암비서에 잡아먹힌 걸 봤는데 그런 생각을 섣불리 할 수 있겠나? 내가 바보도 아니고, 너한테서 ‘강탈’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건 자멸하는 지름길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
“…….”
“애초에 그게 가능했다면 창힐이 너를 50년간 감금했을 때 모든 게 끝났겠지. 그러나 끝났지 않았고, 넌 삼황오제급 신격에게 생포당한 후에도 되려 그들을 역습했다. 천암비서란 건 이론상 무적이고, 힘으로 네 게서 전생능력을 뺏을 순 없다고 봐.”
그렇게 말한 십이율주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이지, 난 네 전생기억을 보면서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지."
“그게 뭐죠?”
“…‘기(氣)’가 고스란히 전생을 통해 계승된다는 거야. 그렇다면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전생능력을 추출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
무슨 말이야?
‘기가 계승된다는 건, 아마 내공이 전승되는 걸 말하는 거겠지.’
물론 내가 전생을 하면서 계승되는 능력치는 기력뿐만이 아니다. 술법의 성취나 음신지력 같은, 다른 계열의 기술이나 초능력 또한 그대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십이율주가 굳이 ‘기’를 예로 들면서 주목한 저의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공이 이어지는 게 왜 전생능력 추출과 관계가 있다는 건가?
내가 아리송한 눈으로 쳐다보자 십이율주가 말했다.
“네 내공이 그대로 차후의 전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네 생각보다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네가 줄 곧 의문으로 여겼던 태허(太虛)로 이어지는 단서일지도 모르고.”
“……!!”
“난 확신할 수 있어. 추출할 수도 있어. 잘만 하면 너와 내가 서로 상생할 수 있다.”
나는 십이율주의 말에 큰 경계심을 품고 그를 노려보았다.
“너무 넘겨짚는데다가 오만하기 그지없군요. 전 아직 당신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뭐야, 자살하게?”
“자살하려 들면 당신이 막을 방법이나 있습니까?”
“없지. 최선을 다하면 봉인 정도는 가능할 테지만 네 미움만 사겠지? 보아하니 요순도 네게 빙의해서 잡아먹으려다 실패한 거 같은데, 내가 전력을 다하면 몰라도 지금은 방법이 없군.”
백기를 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십이율주가 말했다.
“근데 내 얘기 솔깃하지 않아? 내가 이만큼이나 남한테 져준 적은 없는 거 같은데.”
“그런 태도 자체가 오만하다고요.”
“미안하게 됐네. 이래봬도 일족의 왕이라서.”
나는 약간 짜증이 나서 외쳤다.
“대체 당신 정체가 뭡니까? 당신 정체부터 알아야 제안에 응하든 말든 할 겁니다. 정체도 모르는 자와 언제까지 밀고 당기기를 할 순 없습니다. 이런 대화가 대체 몇 번째인지 알고 있어요?”
“좀 말하기가 그런데. 넌 전생자라서 나한테서 정보를 얻어내면 언제든 먹튀를 할 수가 있잖아? 내게 협력하겠다고 진심으로 약속하면 말해 주지.”
“됐습니다. 전 아쉬울 게 없으니까요.”
“…….”
정말 아쉬울 게 없다. 지금까지 동료들을 배려한다고 과격한 방법을 쓰지 못했을 뿐, 뒷감당을 생각지 않는 방법을 쓴다면 십이율주의 배후를 알아내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다. 한 네다섯 번 정도만 전생을 꼴아 박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십이율주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흠, 내가 남한테 갑질을 당하는 건 익숙지 않은데…. 그건 그렇고 너 정말 영웅의 그릇은 아니구나.”
“영웅의 그릇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더 이야기할 게 없으니 이만 물러나 주시죠.”
“이봐. 그런 생각 한 적은 없어?”
“무슨 생각이요?”
“네가 전생자로서 모든 역량을 다해서 내 뒤를 캐서 털어보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 거야. 난 결국 모든 비밀을 빼앗기고 네게 순종하게 되겠지. 그러나 너는 절대 내게서 진심어린 협력은 얻을 수 없을 거고, 이런 방식에 한 번 익숙해지면 다음부터 유화책을 못 쓰는 성격이 되어 버린다고.”
나는 십이율주의 말에 기가 막혀서 반문했다.
“무슨 소립니까? 지금 무슨 되지도 않는 걱정이죠? 모든 걸 숨기고 날 이용해 먹으려고만 하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럼 묻지. 나와 백련교주, 제갈유룡을 힘으로 굴복시키게 되면 바로 모든 상황이 해결되나? 적어도 그 정도 상황을 만들고도 수십 회차를 거듭해야 될까 말까일 텐데, 과연 네게 그런 식으로 무릎 꿇은 놈들이 고분고분할까?”
“그건… 아니죠.”
“결론은 비슷해보여도 다르잖아. 낭비야. 굳이 그런 식으로 원한을 사면서 몇 번씩이나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며 고생하기보다, 지금부터 상생하는 관계를 쌓는 게 더 빠른 것 같지 않나? 나 사실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닐 건데. 신뢰하는 동료까진 될 수 없어도 협력 좀 해보자고.”
“…….”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그들을 복종시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와중에 상당한 원한이 쌓이는 건 피할 수 없다. 차라리 저 자가 구밀복검 하게끔 놔두더라도 일단 상생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도모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알아서 도와준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볼 가치는 있나….’
율주의 태도가 지금까지의 전생과는 좀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떻게 추출할 생각입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네 전생능력의 근간은 그 천암비서가 틀림없겠지. 그러나 창힐은 50년간 너를 유폐시키고도 천암비서를 읽기는커녕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게다가 책을 읽음으로써 죽기도 했으니, ‘독서’는 그저 행위에 불과할 뿐, 전생능력은 네 영혼에 녹아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나?”
“그래서요?”
“하지만…, 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 그래서 네 전생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고 새로운 전생능력만 추출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이 쪽’ 의 기술력으로.”
“…뭐라고?!”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고?!
나는 깜짝 놀라서 율주를 쳐다봤다. 율주가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본 적 있다구.”
“어떤 걸 봤다는 겁니까?”
“…….”
순간, 나는 십이율주 하은천의 탈 뒤편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쏟아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에게서 원념(怨念), 분노, 절망 따위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버무려져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회백색의 망령이 떠도는 듯한 공기가 숨을 답답하게끔 만들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둠을 토해내는 듯 그는 잠시 꿈틀거렸다. 마치 자기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뒤틀리는 듯 했다. 나는 그의 망집을 엿본 듯해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그는 감정을 추스르더니 말했다.
“아무튼 내 이름과 존재를 걸고 약속할 수 있어. 비슷한 걸 봤다는 건 사실이고, 네 전생능력을 연구해서 그 정수(精髓)만 추출할 생각이다. 네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우리 공통의 목적이 이뤄질 거다.”
“흠. 어떻게 도와달란 거죠?”
“야차는 생포할 테니 내 연구시설로 따라와라. 거기서 실험할 거다.”
“실험?”
“인체실험은 아니다. 이것도 약속하지.”
세게 나오는군.
이름과 존재를 걸겠다는 건 거짓말을 했을 때 제약이 걸리는 약속마저도 하겠다는 뜻이다. 저 정도의 약속을 한다면 신뢰할 만 했다.
내가 조금씩 마음이 움직일 때 십이율주가 말했다.
“지금은 내가 이해 안 되겠지. 네 입장에서는 수상쩍고 매번 뒤통수만 치는 음흉한 놈으로 보일 테지만, 내게는 나의 목적과 이유가 있다. 너와 마찬가지로 내 목숨 하나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거대한 대의(大義)도….”
“그걸 밝힌다면 믿어주겠다는 겁니다.”
이어진 십이율주의 말은 뜻밖이었다.
“아니, 그건 내가 못 믿어.”
“무슨 말이죠?”
내가 불쾌해서 대꾸하자 그가 나직이 말했다.
“흑요석의 기억을 읽고, 네가 너무 불안정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넌 절대 영웅도 구원자도 아냐. 그런 네게는 섣불리 신뢰를 줄 수 없어. 적어도 나와 같은 배를 타 줘야 ‘거래자’로써 내 비밀을 알려줄 수 있다.”
“정말 욕심쟁이군. 하나도 양보하지 않은 거 아닙니까? 그리고 난 지금까지 어떤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신을 쓰러뜨리겠다는 뜻을 관철해 왔으니,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넌 인지부조화로군. 난 절대 널 주군으로는 인정 못 해.”
“…….”
너무 단호하다.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타협지점 같군…. 전생자 백웅, 네게 모든 선택을 맡기겠다. 만일 네가 날 믿어 준다면, 난 너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 되어주겠다.”
십이율주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을 생각인 듯 했다. 그가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섰고 삼사는 땅에 누워 있는 야차에게 무언가 술법으로 봉인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생각한다.
‘진심인 거 같은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십이율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단번에는 무리라도 그를 흑요석 동료 중 한 명으로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십이율주가 동료가 된다면 앞으로 내 여정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질 것이다. 삼대세력의 수장 중 하나가 내 손에 들어오는데다가 그가 지닌 비밀의 수준에 따라서 갑작스럽게 전력이 증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 만일 그가 결국 내 뒤통수를 치는 거라면?
내 전생능력을 뺏기는 건 둘째 치고, 난 창힐 때처럼 수십 년간 죽지도 못하고 고문만 당할 수도 있다. 아무리 천암비서의 위력이 막강하다 해도 섣불리 상대에게 내 거취를 맡기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순어구로 몰래 제갈사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제갈사에게 간략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뭘 고민하나? 잘 됐으니까 받아들여. 자살법도 잔뜩 익혀놓고 뭐가 걱정이냐? 네 전생능력을 막을 건 이 우주에 없다고 본다.]
[봉인되거나 고문당하면….]
[당하는 거지. 지금까지 네놈이 거쳐 온 간난신고를 생각하면 네 정신력은 절대 평범하지 않으니까 이상한데서 겁먹지 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한 8번째 삶에서 미쳤어야 정상이다.]
[그런가.]
[고통은 그저 뇌의 신호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두려워할 것도 아니다.]
[…….]
[잡소리 말고 빨리 받아들여라. 네 말대로라면 거긴 시간도 여유도 없는 상황이다. 어서 놈과 손을 잡고 안전지대로 대피해.]
[알았어.]
나는 제갈사의 조언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무르기 없지?”
“네.”
“그럼.”
위잉
그 순간 율주의 어깨 위에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둥근 면을 가지고 기이한 주술문양을 몸체에 새긴 채 떠다니는 주술도구 같았는데, 율주가 그걸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령 확보로 약속도 다 증거했다. 넌 이제 자살 못해.”
“……?!”
나는 뭔가 아찔한 느낌이 들었고 현기증이 났다. 나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재빨리 자살법 중 개미소환을 시전하려 했는데, 주문이 써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라멸진을 시도하려 했지만 몸이 안 움직여졌다. 이도저도 되지 않아 혈맥을 폭파시키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나는 경악해서 외쳤다.
“큭, 속박주문을….”
“그런 거 안 했는데? 너 움직일 수 있어.”
그 말 대로였다. 몸 자체는 멀쩡히 움직여지자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때 율주가 웃듯이 말했다.
“크크, 약속을 지키려면 계약 상대자가 죽어선 안 되지. 그건 계약에 딱히 명시되지 않아도 기본이잖아? 그래서 넌 다른 건 다 할 수 있으나 [자살]만은 못 하도록 제약된 거다. 네게 딱히 살의를 품은 것도 아니니까 천암비서가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걸? 게다가 자살금지는 되려 그 서(書)가 원하는 걸지도.”
젠장, 함정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 대비한 자살법이 있어.’
다행히도 외통수로 몰린 건 아니다. 이런 경우까지 고려해서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였으므로 나는 침착함을 되찾고는 물었다.
“거기 어깨에 떠 있는 건 뭐죠?”
“약속을 증거하고 공증하는 인공보패지. 후대에 만들어질 인공의식(人工意識)을 심었으니 보통 보패랑은 좀 달라. 이게 존재하는 한, 넌 자살을 못 해.”
“…….”
“멋대로 자살하면 곤란하니 이 정도는 이해해줘.”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습….”
쿠콰쾅
그 때였다. 하늘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흑옥(黑玉) 덩어리가 무려 열 개나 지표면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마력이 응축된 것인지라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일 듯 했다.
“제기랄! 설득 때문에 너무 시간을 낭비했….”
신경질 내던 율주는 그 순간 봉황을 소환해서 흑옥을 향해서 돌격했다.
끼오오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봉황의 입에서 내뿜어진 광채와 흑옥이 충돌하더니, 대지가 통째로 뭉개지는 듯 했다. 동시에 폭발음으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광대한 힘의 충격이 지표면에 흙의 파도를 만들어냈고, 근처에 있던 설산(雪山)이 통째로 붕괴해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후두두둑!!
나는 폭발의 위력 때문에 뒤로 미친 듯이 날아가다가, 삼사 중 운사 (雲師)가 내 목덜미를 잡아채는 걸 느꼈다.
운사가 나직이 말했다.
“아수라가 쫓아오려는 것 같다. 일단 주군의 명대로 널 데리고 대피하겠다.”
“율주는….”
파앗!
다음 순간, 나는 운사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어딘가로 이동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운사는 내 목덜미를 놓으며 말했다.
“우사, 풍백.”
쉬쉭
두 명의 삼사가 호칭을 듣자마자 공간전이술로 그 자리에 나타났다. 운사는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말했다.
“나는 이 자를 [옛 대륙]으로 호위 하겠다. 만일 아수라가 주군을 죽이고 온다면 그를 막아다오.”
“그렇게 하라.”
“목숨 걸고 이 자리를 사수하지.”
두 삼사의 말에 운사는 잠시 침묵했다.
“…부탁한다.”
타다닷
나는 운사의 인도에 따라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회랑을 달렸다. 나는 앞서가고 있던 운사에게 질문했다.
“지금 아수라가 날 노리고 쫓아오는 상황인건가?! 여긴 어디지?”
“전생자여. 이곳은 [옛 대륙]으로 향하는 중간 통로다. 날 따라오면 목표한 곳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공간전이술을 쓸 수 있을 텐데 어째서 한 번에 가지 않고 중간통로에….”
“[옛 대륙]은 봉인되어 있다.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바로 들어갈 순 없다. 정해진 절차와 자격을 증명해야만 갈 수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운사가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