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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24회차 전생에서 신공표 본인이 말했던 정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요 임금은 요순(堯舜)의 화신(化神)이었지. 그러나 인간계를 통치하다보니 지루해져서 갈아탈만한 육체가 새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유는 내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권능과 초능력이 강했기 때문이었지. 당연히 나는 거절했지만 삼황오제의 집요한 요구는 쉽게 거부할 수가 없었고, 죽어서 명계에서 고통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천계에 입문해서 최고위격인 원시천존과 태상노군, 삼청의 보호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타고난 능력이 바로 이거다. 나는 무한에 가까운 정신유지력과, 모든 술법과 보패를 쓸 때 아무런 힘의 소모가 없는 능력을 타고났지. 또한 모든 술법을 보자마자 다 이해하는 능력도.]
중원인들이 태평성대이자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고대의 요순시대 -그건 사실 인신공양(人身供養)이 가장 거부감 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마성(魔性)의 시대였으며, 그 시대를 지배하던 요 임금과 순 임금은 사실 삼황오제 요순이라고 하는 마신(魔神)의 화신체에 불과했다.
그리고 신공표는 그 시대에 가장 강력한 혼돈의 재능을 타고난 인간이었으므로 요순에게 선택받아 화신체가 될 뻔 했으나, 그녀가 천계로 도피하여 삼청의 제자가 되었기에 요순이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제반 상황에 비춰볼 때, 수천 년 만에 그녀의 몸을 차지했으며 그녀를 본 적 있는 신적 존재는 바로 삼황오제 요순밖에 없다!
‘그 말은…, 천계의 지존 옥황상제가 바로 요순이라는 뜻인가….’
나는 머리가 아파짐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천계에 삼황오제가 둘 씩이나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신공표의 몸을 차지한 자는 슬그머니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렇다, 전생자. 내가 바로 *&%&$*@이다.]
자세한 발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듣자마자 저것이 언어도 뭣도 아닌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의 이름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진명(眞名) - 우주적 존재인 ‘지배자’의 증표. 요순이라고 하는 건 인간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 실제로 삼황오제의 진짜 이름은 부르거나 아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광기에 젖게끔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요순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내게 지배자의 진명(眞名)까지 말해주다니 아주 친절하시군.”
제갈사에게 듣기로 지배자급 존재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있다고 해도 대단히 큰 호의를 베풀 때 뿐, 대부분은 역사상 무수한 마도사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마도서에 기록되곤 하는 것이다.
[그대는 특별한 존재니까….]
요순은 신공표의 얼굴로 웃는 듯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다시 한 번 제안하지. 지금이라도 우리와 손을 잡는 게 좋지 않겠는가?]
“무슨 근거로? 난 당신들과 할 얘기가 없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살아있지…? 한 번 여와의 손을 벗어났을 때 즉시 이번 생을 탈출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
[그대는 아직 이 삶에 미련이 있다…. 그렇기에 제천대성을 살리고자 일부러 여의봉에 있던 신공표의 봉인도 푼 거겠지…. 욕망이 있다면 우린 거래를 할 수 있다.]
요순의 말은 꽤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내가 침묵하자 요순이 신공표의 손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마침내 혼돈의 재능을 타고 난 자의 뛰어난 육신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건, 현 시점에서 내가 삼황오제 중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상에 미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건 무슨 소리지?”
[후후…. 이 화신만 있으면 난 어떤 인과율도 두렵지 않다.]
콰악
요순이 빙그레 웃더니 갑자기 손을 움켜쥐었고, 움켜쥔 자세 그대로 방금 전까지 제천대성의 분신들을 베어 넘기던 검이 그의 손에 소환되었다. 나는 저 검을 봤던 것 같지만 잘 기억이 안 나서 머리를 짜내고 있었는데, 요순이 검을 늘어뜨렸다.
[지상의 왕이자 천상의 왕…. 이걸로도 부족한가? 모든 걸 다 주겠다는데 왜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는지 모르겠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지? 너희의 함정에 걸리기 싫다고.”
[좋다…. 우선은 그대가 고분고분 해지도록 하는 게 먼저겠군.]
위잉
그 순간, 요순은 한쪽 손에 들려있던 검을 휘둘렀는데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피하거나 막을 새도 없이 그대로 목이 베여나가는 걸 느꼈다. 인과율을 조작해서 내가 무공으로는 대항할 수가 없는 듯 했다.
둥실
내 목의 단면이 눈앞에 비친다!
“……!!”
날 죽이려는 건가?!
아니다!
목은 허공에 둥실 떠서 날아가고 있지만 아프지 않고 의식도 또렷하다!
‘목과 몸뚱이를 분리해서 따로 봉인하려는 거구나!’
보통 인간이라면 극히 당황할 상황이었으나 나는 제갈사에게서 [옛 지배자]들이 시도할 법한 기오막측한 공격법을 이미 배워둔 상태였다. 목과 사지를 공간채로 분리해서 우주 공간에 쏘아 보낸 후 우주멸망까지 방관하는 악취미를 들은 적 있었기에, 나는 이것 또한 그런 유형의 공격이라고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제갈사식 자살법 그 15 번째 수법!
전신 개미폭탄 소환!!!
내가 입을 달싹여서 마도의 주문(呪文)을 중얼거리는 순간, 내 머리통은 물론이고 전신에 조그마한 개미같은 게 잔뜩 소환되어서 달라붙었다. 이것은 머나먼 이계에 살고 있는 지배자에게서 그 권속을 빌려 오는 것으로써, 이 개미들은 하나같이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하하하…, 터져라!]
이계의 [옛 지배자]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꽈과과광
다음 순간, 나는 엄청난 폭발에 휩싸여서 그대로 의식이 끊겼다.
휘리리리리릭!!
그러나 이윽고 시간이 되돌아가는 느낌과 함께 나는 다시 요순과 마주 본 상태가 되었고, 요순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미친 것인가…?]
“미치긴? 지극히 이성적인데.”
아무리 공간을 유리시키는 능력으로 봉인시키려고 해도 이 개미들의 폭발은 특수한 마력을 머금고 있어서 공간계 능력을 모두 무효화시킨다. 아무리 신급 주술이라고 해도 이 개미들 하나하나가 지배자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무효화는 어쩔 수 없었다.
단점은 이 주문을 쓰는 순간 지배자의 악취미가 발동해서 소환사의 전신을 바로 폭발시킨다는 거였는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절대 쓰지 못할 최악의 주문이었다. 개미 한 마리의 폭발력만 해도 사방 오십 장을 날려버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쳤어도 알아서 자살하고 싶은 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제갈사는 도리어 내가 전생자라는 점에 착안해서 이걸 도리어 훌륭한 봉인대비법으로 사용하게끔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어쨌든간에 개미들 덕분에 자살이 가능한 데다, 지금처럼 상대방이 내가 [큰 굴레]의 주축이란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선 내가 죽게 놔둘 수가 없다. 방금 나를 살린 건 바로 요순 본인이었던 것이다. 시간회복과 봉인을 동시에 하는 건 아무리 신이라 해도 모순이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러자 요순이 불쾌한 듯 언령을 내뿜었다.
[네 주문사용을 금(禁)한다.]
파지직
역시 요순은 내가 마법주문을 응용한 자살로 대비하는 게 짜증났는지 주문사용을 금지해버린 듯 했다.
“흐압!”
하지만 나는 이 상황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대로 침을 뽑아서 대라멸진을 사용했다. 요순이 그런 나를 비웃었다.
[신에게 힘으로 덤빌 생각인가?]
“설마! 살찌우기다!”
[……?]
나는 대라멸진을 최대단계 직전까지 올린 후 품속에 있던 수요를 뽑아들고 외쳤다.
“우오오오!! 내 생명력과 기력을 제물로 받아라! 북방의 존재여!!”
[……?!]
“나는 당장 죽어도 되니까, 수요를 해방 시켜줘!!! 강림하셔도 됩니다!”
파앗 -
그 순간 수요가 해방되었고 내 몸에 북방의 사자가 싸늘한 기운과 함께 강림했다. 놈은 수요의 계약에 묶인 [옛 지배자]였는데 마치 예전에 천계에서 깽판을 칠 때처럼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타난 듯 했다. 놈은 상황을 잘 모르는 듯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크흐흐…, 천계에서 재밌게 놀 수 있겠….]
그리고 내게 강림한 북방의 사자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잠시 굳어버렸다.
하늘 저편에서는 본체의 힘이나 다름없는 구천현녀와 서왕모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천궁 바로 위, 거대한 공간의 균열 너머에서는 전욱과 흉신이 싸우고 있었다.
또한 강림자인 내 바로 앞에는 신공표를 먹어치우고 전례 없이 강력한 화신체를 갖게 된 삼황오제 요순이 서 있는 상황이었다.
[…….]
북방의 사자가 멍하니 서 있자, 요순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왜 왔느냐? 평소라면 네가 뭔 짓을 하든 상관치 않았겠지만 지금은 네가 설칠 때가 아니다.]
[아니…, 잠깐만…. 무슨 상황인가.]
[너 따위가 알 거 없다. 우리의 휴전조약은 아직 깨지지 않았으니 이만 물러가라.]
그들은 구면인 듯 했다.
[요순이여!! 네가 내 상위존재라도 되는 양 말하지 말라!]
[그럼 싸워볼 테냐? 다른 곳도 아니고 천계에서 나를 상대로 싸우겠다니, 정말 용감하구나.]
스스스
요순의 눈이 황광(黃光)을 일으켰고 그 손에 들려있던 검이 거대한 광채를 내뿜었다. 그 위세가 엄청난 지라 아무리 해방수요를 손에 쥐고 있는 북방의 사자라고 해도 상당한 압박감을 받는 듯 했다. 그러나 북방의 사자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끝까지 내 몸에서 물러나지 않고 싸울 준비를 했다.
[잘난 체 하지 마라, 삼황오제!! 너흰 계시 이후엔 아무것도 아니다!]
후오오오
수요천빙 (水曜天氷)!!
그와 동시에 북방의 사자가 뿜어낸 거대한 절대영도의 한기와 폭풍이 천지에 몰아쳤다. 대라멸진을 극치로 올린 내 잠재력과 해방수요의 힘을 사용하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자 요순은 즉시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푸콱!!
북방의 사자가 강신해 있는 내 몸뚱이에서 오른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북방의 사자 또한 신격체라서인지 그 정도쯤은 바로 권능으로 즉시 회복해버린 후 마주 수요를 찔러서 신공표의 어깻죽지를 공격했다.
쉬아악
그 순간 경악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요순이 재차 검을 휘둘러 수요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듯하더니, 아까 신공표의 몸을 차지할 때처럼 희멀겋고 꿀렁거리는 액체가 내 전신으로 덮쳐왔다. 순식간에 백탁액을 뒤집어 쓴 북방의 사자는 잠시 발버둥 치더니 외쳤다.
[감히 나와 주도권을 겨루려 하다니…,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주도권?
그 말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몸을 뺏긴 채 주위상황을 관조하고 있는 내 정신세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힐은 이 상태에서 그대를 강제로 먹어치우려다가 변을 당했지, 전생자.]
우우우웅
내 눈 앞에는 황색과 백색이 뒤엉켜 있는 혼돈이자 부정형(不精形)의 괴이한 무언가가 나타나 있었다. 정신세계에 구현화된 저것이야말로 바로 삼황오제 요순의 본체가 가진 진짜 형태일 것이다! 요순은 내 정신 세계에서 나를 마주 본 상태에서 말했다.
[하지만…, 난 다르다. 이건 ‘나’이지만 ‘나’의 일부에 불과한 것.]
“무슨....”
나는 문득 바깥상황을 살펴보았다. 북방의 사자는 백탁액을 한번 뒤집어쓴 상태에서도 계속 수요천빙과 권능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는 중이었고, 신공표의 몸을 차지한 요순 또한 계속 검을 휘둘러 시공간을 끊어내고 있었다.
요순이 내 정신세계로 들어왔다면 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거지?
“…서, 설마.”
내가 아연해서 요순을 쳐다보자, 그는 자신의 몸을 잠시 꿈틀거리다가 말했다.
[나는 스스로를 분리해서 타인을 ‘나’로 만들 수 있다. 그것도 무한히…. 다만 힘의 집중은 필요하니까 쓸데없는 ‘나’는 없애버리고 정리할 때도 있지.]
“…….”
[조만간 ‘옥황상제’는 정리하고 ‘백웅’에 집중해야겠지. 어차피 천계 운영 따위 관심도 없어서 심심할 때만 꺼냈던 화신이었다.]
무한분열과 정신지배와 기생!!
나는 이런 유형의 [옛 지배자]는 처음 보는지라 황당해졌다. 지금까지 지배자라고 하면 그저 크고 강력한 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다른 존재를 정신적으로 먹어치우는 게 주능력인 놈이 있었다니?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런 놈이야말로 우주적인 공포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놈의 정신지배는 심지어 혼돈의 재능을 지닌 신공표조차도 저항불가능이기 때문이다.
요순이 웃었다.
[정신세계 바깥의 전투는 그저 덤이지…. 이제 그대의 정신에 들어왔으니 천천히 그대를 잠식해주겠다.]
“웃기지 마. 대라멸진을 괜히 일으킨 줄 알아? 지금의 강신이 끝나면 난 죽을 거고, 더 이상 네 능력으로는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리 그래도 북방의 사자를 피해 없이 이길 순 없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크크…. 하지만 나는 창힐처럼 서두르지 않을 거다….]
이어진 요순의 말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대의 전생에 깊숙이 묻어 갈 것이다…. 그리고 적의(敵意)를 발휘하지 않고 매번 지켜봐 주지…. 그대의 서(書)는 강렬한 적의에 반응하는 게 분명하니까. 또한 지금은 그 책도 펼치지 않았잖은가?]
“지켜본다고?”
[전생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는 계속 [큰 굴레]를 넘은 효과로 강해 지지 않겠나…?]
“……!!”
[수백 번이든 수천 번이든…, 마음 대로 해라…. 하하하. 그대가 책을 펼치는 앞에 일부러 나타나지 않는 한…, 나는 상관없다.]
뭐, 뭐라고!!
‘이 새끼…, 창힐하고 비슷하지만 더 악랄한 방법으로 묻어가려고 하는 거구나…!!’
정말로 요순이 자기 말대로 한다면 나는 끝장이다!
창힐만 하더라도 섣불리 1회차만에 나를 잡아먹으려 들지 않고 몇 회차를 더 반복했다면 절대 감당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삼황오제 요순은 그 점에 주목해서 내게 일단 잠입해서 끈질기게 기다리려 하는 게 분명했다.
신의 인내심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요순이라면 수천 년이고 수만 년이고 내게 잠복할 수도 있으리라.
“윽…, 네 뜻대론 안 될 거다!”
[하하…, 정신세계에서 어떻게 책을 펼칠 생각이지?]
“…….”
[창힐처럼 멍청하게 그 책을 읽는 짓은 안 할 것이다…. 애초에 마주 치지도 않겠지!]
눈앞이 캄캄하다.
도대체 왜 신이란 것들은 나한테 자꾸 기생하려고 하는 거지?!
벌레 같은 놈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후와아아악
[크아악…! 잠깐만…, 어떻게 정신 세계에…. 이건 설마….]
갑자기 어디선가 천암비서가 나타나더니 흑암의 바람을 내뿜으며 요순을 빨아들였다. 요순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힘없이 빨려 들어갔다.
[태허천존…. 날…, 속였….]
요순은 비명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내 정신세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천암비서 또한 잠시 꿈틀거리다가 사라졌다.
“…….”
나는 바깥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털썩
그리고 잠시 후, 신공표의 몸으로 한창 싸우고 있던 요순이 갑자기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또한 그 앞에 서 있던 북방의 사자는 승리를 얻었음에도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고는 황급히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난 아무것도 안 했다!]
누구보고 하는 말인가?
“쿨럭….”
나는 의식이 정신세계에서 현실로 되돌아오며 선혈을 토해내었다. 언제 치명상을 입었는지 가슴에 구멍이 세 개나 뚫려 있었고 전신이 만신창이였다. 북방의 사자가 회복을 안 시켜주고 실종되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안 해도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식이 엄엄한 상태에서 나는 흐릿한 눈빛으로 땅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고 싶으면 죽을 때가 되는 거지….’
이걸로 이번 삶도 끝인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는데, 그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여기 있었군. 같이 가줘야겠다.”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