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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옥황상제의 말에 놈을 노려보았다.
“그런 헛소리로 날 갖고 놀 생각인가?”
[헛소리가 아니다.]
옥황상제가 힐끔 옆에 있던 곤륜십이대선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어좌의 가장 가까이에서 있던 곤륜십이대선 중 구류손대법사가 걸어 나와서 족자를 펼치더니 천천히 낭독했다.
[그대 백웅이여. 위대한 자의 흔적이여! 우리 곤륜십이대선은 마침내 스스로의 본분과 운명을 알게 되었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이에 곤륜십이대선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자의 동의로 그대에게 옥황상제의 제위가 당연함을 인정한다. 또한 속히 천계 지존의 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이다.]
“……!!”
[우리의 뜻을 받아주소서.]
털썩
그리고는 구류손대법사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천계에서도 가장 드높은 대라신선 중 하나이자 천계팔선의 술법스승이기도 한 구류손이 아무런 저항 없이 내게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족자를 바치는 상황이 아연하기 그지없었다. 천계십이대선이 내게 제발 옥황상제가 되어달라고 간청하는 상황이 대체 무엇인 걸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구류손을 쳐다보았는데 순간 그의 표정에서 뭔가를 느꼈다. 그리고 그 위화감을 놓치지 않고 구류손에게 말했다.
“구류손대법사. 본분과 운명을 알게 되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
“대답해주십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절대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구류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법이라 칭하고 있던 모든 것이 천리가 아니었으며, 천리라 말하고 순응했던 것들이 모두 역천의 일부였으며, 우리가 더 이상 천지간의 조정자가 아니라 태호복희의 유물일 뿐이라는 걸 납득하게 되었음이오.]
“……?”
이게 무슨 소리야?
그의 말이 너무 어렵고 꼬아져 있어서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서 ‘공포’의 감정을 화안금정으로 읽어내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곤륜십이대선은 옥황상제와 서왕모, 태허천존에게 힘으로 굴복 당했구나!’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곤륜십이대선이 상명하복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저토록 굴욕적인 태도를 자처하는 것은 소멸의 위기를 앞두었기 때문이다. 천계를 유지해야하는 명분보다 자기 자신들이 당장 죽을 위기이기 때문에 천계가 대혼란에 휩싸이지 않은 것이리라. 나는 복잡한 얼굴로 구류손대법사를 보다가 말했다.
“광성자는 없군. 그는 어딨습니까?”
[그는 본래부터 천계에 거하지 않았소….]
“광성자는 황제의 화신입니까?”
“…….”
구류손대법사는 물론이고 십이대선 모두가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이미 자유의지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옥황상제에게 말했다.
“좋아, 당신이 내게 옥황상제의 자리를 주면 당신은 어떻게 되지? 소멸 되나?”
[후후…, 소멸되겠지…. 적어도 여기에 있는 ‘나’는.]
수상쩍은 미소였다.
‘제기랄. 틀림없이 꿍꿍이가 있군.’
그리고 그 꿍꿍이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마 나를 마음대로 휘두를 자신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는 신급 존재가 셋이나 있는 셈인데 뭔들 못하겠는가? 나는 서왕모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왕모, 아니 여와! 당신은 왜 태허천존과 손을 잡았지?”
[…….]
“저 놈의 정체는 대체 뭐야!”
내가 버럭 외치자 여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지배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그 혼돈은 어둠조차 아니었지. 그리고 이윽고 혼돈 이 수태한 모든 것이 우주가 되었다. 우리 [옛 지배자]는…, 혼돈의 적자(嫡子)이자 이 세계의 장자(長子)이다. 여는 이 땅의 미욱한 자들을 장자의 의무로써 이끌어주고 싶구나.]
“무슨...."
[황제는 삼황오제 모두를 속였다. 그러므로 여 나름대로 종말에 대비 할 뿐….]
그렇게 말한 여와가 천천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생자여, 천계를 주겠다. 그러니 우리 편이 되어라. 옥황상제의 자리는 우리가 그대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호의라고 생각하라.]
“호의라고? 내가 옥황상제가 되어서 너희와 함께 음모를 꾸미라고 하는 말이냐?”
[계속해서 인간의 경지에서 기약도 없이 발버둥 쳐봤자, 그대는 골백번 죽어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대를 돕는다면…, 틀림없이 그대는 세 번 이내에 계시의 주역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전생자의 힘으로 종말에서 모든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음….”
[옥황상제가 되는 순간 그대는 신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팔부신중 정도는 혼자서 제압할 정도의 힘을.]
그 순간, 나는 크게 혹하는 걸 느꼈다.
신의 힘!
지금까지 내 앞길을 무수히 가로막음과 동시에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필멸자들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신의 힘에 당해서 죽는 꼴을 무수히 보아왔다. 또한 우주적인 경지에 도달할 경우 아예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신의 힘이 내 것이 된다면…?
‘가능성… 있군.’
여와가 하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신의 힘을 세 번만 손에 넣어도 나는 [옛 지배자]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와가 지배자 중에서도 상위급의 존재라는 걸 감안하면 그녀가 날 도와주는 건 천군만마를 얻는 것 이상이었다.
성큼 지름길이 내 앞에 제시되자 나는 크게 망설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제안에서 이상함을 깨달았다.
'태허천존…, 아무 말도 하지 않네?’
지금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옥황상제와 서왕모 뿐이었고, 태허천존은 조용히 나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너무나 무감정했고 차라리 동물의 눈을 연상시 킬 정도였다. 심유하다기 보다는 말그대로 텅 빈 듯, 내면에서 억제할 수 없는 혼돈 그 자체가 구현화되어 있었다.
평소와는 너무나 달랐다. 조금은 얼빠진 듯 내 말에 쩔쩔매던 그 태허천존이 아니다. 무기질적인 무언가가 이 공간에 붕 떠서 세계를 관조하는 느낌이었다.
혼돈이 날 보고 있다.
마치 시험하듯이….
나는 왠지 이 상황에서 섣불리 택하면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의 힘을 즉시 얻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유혹이었다.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여와에게 물었다.
“신의 힘을 얻는다면 삼황오제도 죽일 수 있나?”
[충분히 가능한 일…. 허나 신격의 싸움을 그대 필멸자에게 형용할 수 없으니 자세한건 말할 수 없다.]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지? 종말이 닥쳐오는 날에 뭘 하기를 원하는 거냐고.”
[그걸 알아내는 것까지가 그대의 일이 될 것이다….]
애매모호한 말이었으나 나는 그 순간 통찰력과 전생자의 직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와 저거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종말에 대해 뭔가 정확한 걸 알고 있다면 저런 말을 할 리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옥황상제와 여와는 내게 종말에 대해 조사 할 것을 원하게 될 텐데, 그게 과연 내 여정이 단축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냐! 이제 확실해졌어!’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모두 안녕! 다음에 보자고!!”
자살하자!
푸욱!
나는 검을 미간에 찔러 자살했다. 그러나 내가 검을 뇌 사이에 쑤셔 박은 순간, 갑자기 시공간이 뒤틀리더니 내 모습이 과거의 시간대로 되돌아왔다. 나는 검을 뽑지도 못한 상태였다.
서왕모이자 여와인 존재가 차갑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신 앞에서 자살할 수 있을 것 같나…? 우리 제안을 거절했으니 지금부터는 그대에게 영겁의 고문이 가해질 것이다.]
역시 신이니까 시간을 되돌려버릴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예상했던 바였다. 왜냐하면 제갈사는 자살법을 고안할 때 이런 상황까지 다 생각해 뒀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와의 말에 도리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신가? 이런 건 어때?”
휘리리릭 휘리릭!
“되돌아가라!!”
그와 동시에 나는 음신지력을 끌어 올린 후 전욱의 사도로써 얻었던 권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작은 굴레] 가 돌아가기 시작하며 내 움직임이 빠르게 뒤로 감기기 시작했고, 여와는 시간이 되돌아가는 와중에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짓을….]
쿠르르릉!!
주변의 풍경이 그저 무지갯빛 실선으로만 비치는 시공의 왜곡 속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장엄한 목소리가 내 귀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네가 전생자였다니!! 본좌가 사도를 따로 임명하지 않았는데도 사도의 권능을 쓸 수 있는 이유를 바로 이해했다.]
“전욱.”
그리고 내 눈 앞에는 시꺼먼 흑염을 둘러싼 거인이 제관을 쓴 채 모습을 드러냈다. 삼황오제 전욱은 시공의 왜곡에서 껄껄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 여와 패거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내 권능을 썼다는 건 내 편이 될 각오가 섰다는 거겠지…. 아주 환영한다, 전생자 백웅.]
“……”
[너를 내 정식사도로 임명하고 강대한 힘을 주겠다. 모든 칠요를 얻어서 세계의 왕이 되고 나아가서 시련을 완벽하게 통과하도록 하라!!]
나는 전욱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말했다.
“전욱, 시시하군.”
그 말에 전욱이 웃음을 멈추고 날 쳐다보았다. 나는 되려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황제 뒤꽁무니나 따라다닐 생각이지? 칠요의 시련 따윈 아무것도 아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흉신의 주문을 외워서 내 자신의 몸에 끌어올렸다. 예전에 자멸하기 직전에 썼던 흉신소환법이었다.
쿠오오오 -
[으윽…! 이…이건…!]
전욱은 시공의 왜곡 속에서 나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내 몸을 완전히 흉신의 기운이 뒤덮자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내 전신에 가득 찬 흉신의 기운 속에서 흉신의 [부름]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메아리치는 걸 느꼈다.
이것이 바로 제갈사의 자살법임과 동시에 신격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빠져나가는 방법!
신격들이 사망금지나 시간 되돌리기를 걸 경우에는 일단 전욱의 사도 권능으로 빠져나간 후, 전욱이 간섭해오면 흉신의 주문을 내 몸에 덧씌워서 전욱의 방해조차 물리친다! 흉신을 불러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었으나 나는 아직도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머릿속에서 흉신의 말이 들려왔다.
[전생자…. 네가 이 주문을 써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뜻…, 잘 알아들었다….]
나는 짜증이 나서 으르렁거렸다.
“개나 소나 지랄이군…. 자꾸 그러면 아무 놈한테나 내 영혼을 바쳐버린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예전의 경험으로 봤을 때 즉시 세계는 멸망한다. 이것 또한 제갈사의 자살법에 들어가 있는 요령이었다. 결국 내가 순서만 잘 맞추면 그 어떤 신적 존재도 나를 강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흉신의 대답은 없었다. 놈 또한 내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느릿하게 의지를 전달해 왔다.
[이해할 수 없군…. 여와든 전욱이든 나든…, 누구와 손을 잡든 그대의 전생은 그 순간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천지아래 가장 강력한 혼돈의 존재들…, [옛 지배자]가 호의를 보내는데도…, 그대는 무엇을 고집하여 고난을 자처하는가.]
“고난을 자처하는 게 아냐. 함정을 피하는 거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네놈들 힘을 빌려서 우주적 존재가 된다 한들 결국 네놈들을 절대 넘을 순 없겠지. 신이 된다 해도 위에는 또 위가 있을 거야. 끝도 안 보이는 희망에 고문당하는 게 진짜 두렵단 말이다.”
[…….]
“난, 절대 포기 안 해. 그게 아무리 희박한 확률이라고 해도…, 눈앞의 편리함에 타협해서 모든 인의(仁義)를 저버리는 길은 가지 않겠다!”
이것은 수차례에 걸친 전생자의 맹서(盟誓)다.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죽었던 망량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모든 걸 바치고 내 길을 열어줬던 제갈사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서 나를 기다리며 무신의 단서를 줬던 진소청에 대한 책임감….
모든 동료들의 죽음과 과거가 내 삶에 적층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써 살았고 인간으로써 죽었다. 그들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걸 어찌 흉신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우주에서 먼지와도 같은 존재인 인간으로써의 오기라는 걸 어찌 이해시킬 수 있을까?
[…희망이 있소?]
현천도인의 말이 떠오른다. 혼돈에 지배당하고 능욕당하여 한 줌의 희망조차 남지 않은 이 현실 속에서, 가날픈 풀뿌리처럼 흩날리는 인간은 하찮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현천도인에게 그 때의 대답을 하고 싶었다.
“희망은 있어!”
파아앗!!
그와 동시에 나는 섬광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예전에 흉신이 소환되어 전욱과 싸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배자들끼리의 격돌이 시작되자 그 충격 때문에 강신자만이 튕겨나가는 현상이었다.
쿠구궁
나는 바위산에 부딪혀서 몇 번이나 구르다가 바닥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는 일어섰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여긴 아직 천궁이 있는 천계 인 듯 했다.
“콜록.”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아직 자살 할 여유는 있으니, 나는 계속 살아 갈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자살할지를 결정 내려야 한다. 정작 중요한 옥황상제의 정체나 지배자들의 진의를 알지 못했으니 아직 죽기는 아까운 것이다.
'…아직이다. 아직 아냐….’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의 서쪽에서 난데없이 서왕모의 변신형태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더니 길게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에 맞서서 구천현녀 또한 오색구름이 둥실거리는 형상으로 변신해서 싸우는 게 눈에 보였다.
쿠구구구…!!
‘구천현녀가 서왕모를 찾아내서 싸우기 시작했구나.’
본래라면 서왕모가 이기는 싸움이겠으나 구천현녀는 내 기억을 받았기에 본질을 각성해서 몇 배나 강력해졌다. 저건 [옛 지배자]의 싸움이나 다름없었으니 누가 이길지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제천대성의 무수한 분신들이 허공에 구현화되더니 천계의 대라신선들과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래 저거야!
나는 천계 대라신선들에게 합공을 받는 제천대성에게 재빨리 뛰어갔다. 그리고는 허공에 천상제 경공으로 뛰어오르며 외쳤다.
“대성!! 잠깐 여의봉 좀 줘보십쇼!!”
“…야, 책임 못 지는 거 알어?! 그 새끼 성질 더러운 거….”
“압니다!”
“그래 알겠지! 그럼 봉인 풀어봐라!!”
휘익
제천대성이 내게 여의봉을 던지자, 나는 예전보다 훨씬 발전한 음신지력을 팔에 모아서 집중시켰다. 그러자 이전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여의봉의 봉인이 풀리는 게 느껴졌고, 나는 마지막 봉인부분에서 크게 힘을 모아서 단숨에 풀어버렸다.
후우웅!!
심상치 않은 푸른 바람과 함께 그 자리에 신공표가 나타났다.
[아닛…? 무슨 일이냐!]
신공표는 잠시 현재의 상황을 이해 하지 못하는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는데 나는 신공표에게 외쳤다.
“신공표!! 내가 당신 봉인을 풀어 줬으니 이거 받으시오!”
내가 흑요석을 신공표에게 휙 하고 던지자, 신공표는 짜증내듯 염동력을 써서 흑요석을 터뜨려버렸다. 내가 주춤거리자 신공표가 성내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수작이냐!]
“아 제기랄! 모르겠고 제천대성이 나 좀 도와주쇼!”
[뭐냐고 네놈!! 상황설명 좀 해라!]
“…해 주려고 했는데 흑요석을 당신이 깼잖아!”
퍼버벙
그 때 곤륜십이대선 중 적정자가 음양경 보패를 써서 신공표와 나를 동시에 공격해왔는데, 신공표는 손 쉽게 그 보패공격을 방어막으로 막아내었다. 그리고는 슬며시 적정자에게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적정자가 벼락 맞은 듯 굳어버렸다.
[시…신공표!]
[뭐라고?!]
[절교교주 신공표라고?! 어떻게?!]
웅성거리며 모든 대라신선들이 당혹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에 절교의 교주로써 최대의 적수였던 자가 난데없이 전장에 나타나있으니! 신공표는 싸늘한 눈으로 천계십이대선을 노려보더니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상황설명 같은 건 필요 없겠군. 원숭아, 네놈을 도와서 저 빌어먹을 놈들을 회쳐버리겠다.]
“거 참 단순해서 좋겠다〜 힘내자구.”
제천대성은 투덜거렸으나 이윽고 제천대성과 신공표가 나란히 서자 천계측은 일방적인 공세를 멈추고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 같았다. 아무리 이 자리에 모든 천계 신선들이 모여 있어도, 저 둘을 상대로 덤비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좋아…, 이 틈에.’
나는 제천대성에게 힘을 보태주었으니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때였다.
[신공표…. 과연…, 전생자의 인과 능력은 대단하군…. 널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신공표가 영언이 들린 허공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 곳에는 아까 모습을 감추었던 옥황상제가 다시 나타나 있었는데, 그의 몸 전체에서 황색 후광이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나는 그 말에서 신공표 또한 옥황상제를 아는 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어진 신공표의 말은 그렇지 않았다.
[넌 누군데 날 아는 척 하느냐? 본 적도 없는 놈이 용포를 입고 거만을 떠는구나!]
본 적이 없다고?!
그러고 보니 옥황상제의 등장은 고대 천계전쟁이 일어난 후였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절교교주 신공표가 옥황상제를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정작 옥황상제는 신공표를 아는 척 한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하하하하하하….]
옥황상제는 낮은 웃음을 흘리더니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잡혔는데, 왠지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거 같아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옥황상제가 그 검을 신공표에게 겨누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너를 내 것으로 할 수 있겠구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옥황상제의 몸이 갑자기 인간의 형상을 잃고 후두둑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진 형상 속에서 희멀건 빛이 마치 백탁의 수액처럼 변모하더니 일렁였고, 그 기이한 형체가 갑작스럽게 신공표에게 날아들었다.
[크윽!]
신공표는 술수를 써서 그 형체를 한번 튕겨냈으나, 그 돌진을 튕겨낸 것만으로도 그녀는 힘에 부치는지 비틀거렸다. 신공표의 능력이 천계 최강을 다툰다는 걸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신공표는 이윽고 뭔가를 깨달은 듯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넌… 설마….]
휘리리릭
제천대성이 신공표를 도우려고 달려들었으나 아까 소환되었던 검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제천대성을 노리며 끼어들지 못하게끔 했다. 제천대성의 분신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시공간 째로 베어버리는 파괴력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또 다시 희멀건 백탁 수액이 신공표에게 달려들었고, 신공표가 공간이동으로 피했으나 그마저도 적이 따라붙고 말았다.
꿀렁 꿀렁
미끄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신공표의 몸을 에워싼 백탁액이 그녀의 몸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신공표는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아아악!!]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신공표의 무한의 술법력으로도 저항할 수 없는 빙의술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내가 혼란스러워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 잠시 후 신공표의 발악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차지한 옥황상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수천 년 전에 점찍었던 몸을 이제야 얻게 되었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갖고 있던 정보를 유추해서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요순(堯舜).”